-
-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품에 대해>
일단 이 책은 ‘기독교 소설’ 임을 분명히 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낮은 평점 대부분이 ‘무신론자라면~’이라는말이 들어가거나, ‘왜 용서를 강요하느냐?’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 소설의 장르를 너무 넓게 잡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강요하는 듯한 하나님’이나 ‘독립성’을 죄로 보는 것은 다
“독자가 기독교인이라는 가정”하에 이야기 하는 것이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이야기나 “죄의 근원이 잘못된 독립성으로 인함이다.”는 내용은 사실 기독교 교리 등에서 기본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번 서평은 위 내용들에 대해 이야기 하며 아쉬운 점과 좋은 점을 조금 더 살펴보려 한다.
1.용서에 대한 강요?
위에 이야기한 내용만 다루자면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용서 받은 경우’는 제대로 된 기독교에서는 허용 되지 않는다. 성경은 "내가 기도중이거나 예물을 드리던 중이라도 누군가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거나 다투었다면 그 예물은 내려놓고 가서 화해하거나 용서를 받은 뒤에 다시 와서 드려라. 그래야 그 예물을 받으실 것이다.“ 고 가르친다.
그러니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그 사람에게 용서 받지 못했다면 아직 용서 받지 못한 것이다.
덧붙이면 지금 한국교회가 너무 ‘하나님께 받는 용서’만 강조하고 사람과의 화목은 강조하지 않아서 문제이다. 그래서 ‘밀양’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이고 이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참고로 밀양 원작인 ‘벌레이야기’의 작가 이청준 선생님의 의도는 5.18 범죄자 사면에 대해 다루려 하셨다는데, 이청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을 봐도 이 해석이 자연스럽긴 하다. 그러나 작품 해석은 독자의 몫이니 이 부분은 넘어가야겠다. ]
그러니 일단 믿는 사람은 나에게 큰 악을 행한 사람이라도 용서하거나 나아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게 하나님의 뜻일 것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소설이라 그런지 하나님께서 용서를 강요하는 듯 한 모습으로 그려진 건 이 작품에서 좀 아쉬운 부분이긴 한데,
이상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은 ‘손양원’ 목사님 같은 용서일 것이고, 주인공이 자기 딸을 살해한 자를 용서하는 과정과,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양자 삼으려 한 손양원 목사님의 모습은 닮아있다. 그러니까 "그런 용서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이야기는 이미 기독교인이라면 강요 되는 게 아니라 추구해야할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용서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한 평범한 기독교인이 그러한 용서에 이르는 과정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강요이야기가 나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2.죄의 문제
독립성 같은 경우도 기독교의 기본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 자체를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기독교의 기본 가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비 기독교인이라면 처음부터 이 소설 자체가 큰 의미 없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죄의 문제 등을] 니체처럼 '초인'을 가정하여 해결하려 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일단 이 작품은 일단 '기독교 소설'이다. 그래서 기독교 적인 방법으로 용서를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도 '기독교 소설'이라는 장르를 고려해 평가해야 한다.
3.신선함
너무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형식을 다루다 보니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었지만 신선한 부분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라시아 펑크와 블루스를 좋아하시는 하나님’ 이라거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클래식 같은 장르만 좋아하신다는 내용은 없다.)
여인 모습으로도 나타나시는 하나님(성경에 분명히 남성형으로 나오지만 흰 수염에 하얀 옷을 입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 같은 모습은 분명히 화가들의 상상이다.)은 신선하다.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더라도 상관이 없으시다. 성령만 해도 여기서는 여인으로 나오지만 성경에는 비둘기처럼 나오기도 했고, 불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어쨌든 하나님과의 대화를 어느 한쪽만 강조하거나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로 그려나가는 것은 신선하다.
3.아쉬운 부분, 또는 부족한 곳
다만 하나님과 예수님 입을 빌어서 이야기하지만 분명히 ‘작가’라는 한 개인의 생각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부분이나 대충 넘어가는 대목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제도와 종교를 싫어하신다.“는 이야기 (290~297쪽 참고)를 보면, 십계명 같이 분명히 제도이지만 성경에서 핵심적인 부분들이나, 성경에서도 분명히 나오는 제도들(그중 일부가 신약 시대에 변했지만), 혹은 (다스리는 자들에게 복종하라거나 세금에 대한 성경 이야기 등에서 보이는) 일반은총으로써 질서를 위한 제도를 긍정하는 성경 구절들과는 대치되는 듯 보여 아쉽다.
게다가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도 신학계 내에 여러 이견들이 있으며 아직 명확하게 결론 나지 않은 부분이라 그런지 모호하게 넘어가는 면이 없지 않은데, ‘신학’에서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은 부분에서 멈추고 더 이상 나가지 않아야하기에 모호하게 넘어가도 좋지만,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 하면서 모호하게 그린다면’ 오히려 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악의 문제, 하나님의 존재 증명 등은 신학에서도, 철학에서도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
1>성경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단지 선포 할 뿐(혹은 믿으라 할 뿐),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고,
2>‘무엇이 악인가’에 대해 철학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논쟁과 이견들만 봐도 이 점을 알 수 있다.(성경의 악은 일단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으로써의 성경권위를 인정해야 죄란 무엇인지 이야기 할 수 있기에 신학에서 말하는 악이나 선의 문제는 모두 1>번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저자가 그리는 악의 문제는 기독교적으로 상당히 건전하고 바르게 그리고 있지다. 하지만 신학계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 가운데 일부일 뿐이라 조금 아쉽기도 하다.>
[악의 기원에 대한 신학계의 여러 이야기들을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ㅜㅜ]
나가면서
조금 박하게 평가 했는데, 너무 일방적인 듯 그려지는 부분들을 제외하면 그리 나쁜 ‘기독교 소설’은 아니다.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나 실망에서 생긴, 혹은 비극으로 생긴 ‘오두막’이 있을 것이고, 그 각자의 오두막 속에서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런 모습을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나간 ‘기독교 문학’작품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을 조금 더 가깝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이번 독서에서 얻을 건 다 얻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