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빅터 J. 스텐저 지음, 김미선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도킨스의 책(빌려본 책이라 지금 그 내용에 대해 뭐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후 '우주에는 신이 없다'는 책에서 확실한 실망을 한 뒤에 정말 마지막으로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직 ‘존재하는 신’이나 ‘신의 언어’같은 기독교 변호 서적들은 읽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물론 물리학에 대한 전문성 덕분에 '우주에는 신이 없다'에 비해 읽을거리가 훨씬 많지만 그 핵심 내용에서는 큰 차이 없었다.

 

 

서문에서 그는

'신이 우주의 움직임과 인간의 삶에서 그토록 중추적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면, 단순히 그 사실 덕분에 그는 과학적 수단에 의해서 탐지 되어야 하는 것이다.'(22p)

 

라고 말하는데 이건 ‘허수아비 논증’과 비슷하다. 이미 기독교 등의 신은 세계를 창조한 ‘주체’로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이다. 게다가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의 신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해야 한다’며 탐지 되어야 하는 ‘제한된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자기 범위 밖에 있는 대상을 자기 영역에서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서론에도 할 말이 많지만 책 내용이 많기 때문에 생략한다.

 

 

1장은 ‘신을 검증할 수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기 위해 ‘데이비드 흄’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흄이 과학법칙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잘 알 사람이 이렇게 시작하다니…….)

그는 신을 물질계로 끌어 내리기 위해 “세상창조 때부터 그분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께서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다.”(책 내용과 달리 성구는 바른 성경에서 인용)라고 말하는 로마서 1장 20절을 이용해 “우리는 신의 증거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데 해당 성구 문맥을 보면 신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에게 영광 돌리지 않는 자들(21절) 등을 비판하는 구절이다.”

 

저자는 ‘철학적 이론이나 형이상학, 또는 순수한 존재 명제는 논박이 불가능하다’는 포퍼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기독교 등의 신은 "모든 곳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찾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기독교의 신과는 다른 허수아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인용하는 내용들도 ‘어떤 존재가 완벽하다면 그가 창조하는 것은 무엇이든 완벽해야 한다.’면서 독립적인 신이 아니라 어떤 것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 를 허수아비로 세우려는 내용들이다.

(완전한 존재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만들 완전한 자유가 있다.)

 

48p에 있는 전능의 역설’만 봐도 “신은 그가 들 수 없는 돌을 창조 할 수 없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바꿔보자.

전능한 신은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들 수 없는 돌을 창조 할 수 있다면 전능하지 않은 건가? 아니다! 들 수 없는 돌을 만든 그 순간부터 전능하지 않다. 즉 그 질문은 전능한 존재가 전능함을 포기하는 행위를 내포하며,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53p에서 “감각 너머의 세계에 종류를 불문하고 신이나 영령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대해 “태양이 신의 전차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말 돌리기로 보인다.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서로 입 다물면 된다.

(물론 저자는 “과학을 하나의 문화적 설화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 우월한 능력, 효용, 보편성 때문에 다른 문화적 설화와는 다르다.”고 한다.) 

저자가 들고 있는 과학적인 신 모형에서도 그는 7,8번을 통해 “신은 모든 역사에서 직접 전달하는 방법으로 진실을 계시해왔다”거나 “신은 증거가 있다면 그를 받아들일 인간에게서 고의로 숨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도행전만 봐도 직접 받은 사람은 바울을 포함해 극소수이다. 

저자는 ‘숨지 않는다.’는 말을 “감각 기관으로 관측할 수 있다.”로 재정의하고 신이라는 존재를 나타나야만 하는 속박된 존재로 그리고 있다.

 

 

3장에서도 기도 등이 효험이 없다고 말하는데 (제목은 ‘물질 너머의 세계를 찾아서’지만 내용들은 기도가 효과가 없다거나 비물질 적인 영혼을 관측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도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게 느껴진다. 

기독교에서 ‘기도’라는 게 효험이 없다는 내용이나, 영혼을 관측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신이 없다는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다. 게다가 기도는 기본적으로 ‘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일’이기에 그것을 이루는 건 신의 자유다. 

성경에도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똑같이 잡힌 상황에서 야고보 사도는 순교했고(그의 죽음에는 어던 기적도 나오지 않고 2절 한절 만으로 "죽였다"고 말한다. 그 직후 같은 장 3절~19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천사가 와서 기적적으로 풀려난다. 

초대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만 기도하고 야고보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기적은 정형화된 법칙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건 기도하는 사람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여기에 대해 말 할 수 없다.

그리고 영혼의 측정 문제도 그렇다. 영혼이 물질적이거나, 측정 가능한 어떤 에너지가 아니라면 그것의 존재는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측정할 수 없었다.”고 결론 내린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게 없다는 증거인가? 있다는 증거가 없는 건 사실이다. 없다는 증거는 다른 문제다.

과학 등 학문에서는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가 기본 아닌가? 

 

 

4장과 5장은 저자의 전공 분야라서 그런지 얻을 정보도 많았다. 하지만 이 내용들로 신을 부정할 수 있을까? 

우주의 엔트로피와 최대 엔트로피 사이에서 질서를 위한 공간을 찾는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저자는 여기서 플랑크 시간을 통해 우주가 무한하며, “‘무’란 불안정하기 때문에 무언가 있는 것”이라 하는데, 무신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째서 무란 불안정해야 하는가?”부터 해서 ‘그 우주가 저절로 탄생하는 원리는 어디서 왔는가?’까지, 소위 말하는 ‘과학적 무신론’에 필요한 핵심 주제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전혀 답하고 있지 않았다.

(말돌리기로 보이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논증들이 근원까지 올라가면 순환논증이 되기 때문에 논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들이 여기에 해당하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공간의 낭비나 ‘천지창조 6일’ 등은 창조기사의 기록 목적 등조차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창조기사 기록 목적에 대해서는 롱맨이 쓴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등의 작은 책들에도 잘 나와 있다. 아마 저자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이런 거 다 무시하는 ‘창조OO회’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그렇겠지만, 그 사람들이 증명도 부정도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우겨서 오류라면, 이 책은 반대로 그 존재를 관찰 안 되니 없다고 우겨서 문제다.) 

<XX회 라고 하니 일부러 숨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들을 '과학'이라고 불러줌으로  "과학이 아닌 주제"를 다루면서 '과학'이라 말하는 그들의 주장을 과학으로 인정하는 듯한 찝찝함이 남아 'OO회' 라고 칭한다. ^^;;>

 

따라서 이 전에 읽은 ‘우주에는 신이 없다’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은 좋은 책이지만, 핵심 오류는 마찬가지다.

 

가장 흥미로운 단원이었던 ‘실패한 계시’는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자유다. 비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성취가 아니라고 보는 게 당연할 테니까. 그러나 그걸로 기독교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 구절들을 성취로 믿기 때문에 신자가 된 것이고 이건 전제가 된다.

 

(그리고 오역인지 유대만을 대상으로 한 인구조사가 6~7세기에 있었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6~7CE로 되어 있다. 이건 6~7세기가 아니라 공통시대 6~7년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주후 6~7년으로 통일한다.) 


예수님 탄생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다ㄹ뤄보자면주전 4년에 헤롯이 죽었으니 주후6~7년 호구조사랑은 상관없다는 주장은 수십 년 지난 자료이다. 당시의 교통수단을 보면 칼리굴라 황제 당시 유대 동상 건립을 제고해 달라는 총독의 상소문에 대한 답장, 편지 한 통이 로마에서 유대까지 가는데 3개월이나 걸렸다. [이 편지보다 나중에 출발한 '황제의 사망을 알리는 편지'는 앞선 편지보다 27일이나 먼저 도착했다. 웃어야 할까? ^^;;]

 

호구조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Gaul"지역에서 행해진 호구조사는 끝내는데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A.D 6,7년에 행해진 호구조사는 앞선 자료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으며,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정치구조'가 아니라 '예수의 탄생 자체'다. 그러므로 누가의 자료는 예수님이 B.C 5년 경에 태어났다는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물론 언제 태어나셨는지 구체적인 날이나 연도는 알 수 없다.) -John Drane 저 Jesus and the four Gospels- 참고

* 일반적으로는 B.C 5년 보다는 B.C 3년 정도로 보는 편이 많으나 어차피 호구조사 기간을 알 수 없으니 그냥 넓은 범위로 5년 경을 주장하는 입장을 인용한다.  

 

 

십자가 부활 등에 대한 공격 역시 인신공격에 가깝다. 그는 십자가 고난에 대한 자료가 없다고 말하는데, 기독교를 부패한 사교라 하는 타키투스도 이 사교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타키투스 역시 후대의 인물이라 믿을 수 없다면, 세상에 인용 가능한 역사 기록이 얼마나 될까? 

사기의 은나라 가록은 발생과 저술시기가 900년에 가까운 격차를 가진다. (가까운 우리나라 예시를 들어보면 백제 무왕이 누구의 아들인가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가 있고 우리나라의 자료들 대부분은 그 시대보다 수십에서 수백 년 뒤에 지어진 문헌들이다. 김부식만해도 삼국시대가 아닌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

 그래서 역사를 다루는 사람 중에는 부활 등 기적은 안 믿어도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예수의 실존까지는 문제 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자료들은 빼는 게 좋지 않았을까? 


구약의 실패한 예언 성취도 장르별 특징이나 문학적 표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모스서에서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 심판하실 것’이라 할 때 그게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의 존재를 입증하라면서 요구하는 유골 등은 오히려 부활 기록과는 어긋난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무덤을 찾는 방송에 나온 야고보 유골함이 거짓이라고 말해준 점은 고맙다. 그게 진실이었다면 성경이 거짓이 될 뻔 했으니.)

 여리고 정도만 흥미롭고, 나머지는 별로랄까? (그러나 여리고에 대한 이견들은 롱맨의 How To Read Exodus 등에도 나와 있다.)


 텔단 기념비는 인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일부 학자들이 위조라 주장하지만 아직 결론은 모른다. '에릭 클라인의 성서고고학'에 따르면 텔 단 비분을 위조라고 주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묵살되었다'고까지 이야기 하여 학계 주류는 텔 단 비문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으로 본다고 한다.  (참고로 메사비문에도 다윗의 집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메사비문 내용은 빠져있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이 증거들이 대제국을 입증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윗 왕조'자체에 대한 증거로는 가치가 있다.


더 설명하자면 성경 어디에도 다윗 왕국을 '대제국'이라 하지 않는다. <참고로 다윗 솔로몬 왕국의 국력과 비등할 것으로 보는 시대가 분열왕국 시대에 아모스 선지자가 "칼을 보내어 심판할 것"이라 저주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이다. 북왕국 하나 국력이 통일시대인 다윗과 비등, 혹은 그 이상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마 오므리와 시기는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저자의 관점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지 않고 폭력이 넘치던  오므리나 아합 시대, 

혹은 부강했으나 약자에 대한 핍박이 넘치던 여로보암 시대 등은 '악한 시대'일 뿐이다. 이게 일반 역사가와 성경 저자의 관점 차이다.>  


게다가  "성서 원본이 그 속에 묘사된 여러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문서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신뢰할 만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이다." 정도가 기독교인들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전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가치가 신에게서 올까’ 와 ‘왜 악이 존재하는가?’ 단원은 날카롭지만 새롭진 않다. “인간 가치는 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해왔던 이야기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고. 특정 종교인들이 남들보다 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점에 대한 비난은 사도 바울도 했던 이야기다.


(재미있는 건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도덕성이 차이가 없다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3대 종교 모두 범죄율이 비 종교인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종교끼리 비교하면 신교와 불교는 대충 큰 차이가 없지만 비 종교인의 절반 수준이고  천주교는 그 종교인들의 절반 수준이다. 좀 더 정리하면 기독교와 불교는 같거나 오차 범위 안에서 기독교가 조금 낮다.<범죄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이를 무신론 논증에 사용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을까?

<위의 도덕성이나 범죄율은 무신론, 유신론 둘 다 입증하지 못한다.>

 

 

악의 문제야 중세 철학자들이 오랜시간 토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걸 공격하는 건 뭐든지 공격하고 보자는 생각으로밖에 안 보인다. 악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견들만 봐도 그렇다. 이 문제는 신을 보는 날 해결 될 것이다. (아니면 그의 말처럼 죽은 뒤 ‘무’가 되어 보지 않는다 해도 해결된다.)

 

9장에서도 데이터와 일치하는 신의 모습 등을 만들어 놓고 공격하며, 데이터에 일치하지 않는 신, 아무런 관찰 불가능한 신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한다. 결국 개인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건 자유지만 그의 주장이 기독교를 없앨 수는 없다.

(그가 했던 철학적, 신학적 반론들은 이미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이고 해결할 수 없었던 질문들이지만[악의 문제 등] 그것이 무신론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종교인들이 신을 믿는 게 비합리적인 걸 몰라서 믿는 건 아닌 것처럼 신앙이 흔들릴 것도 없지만, 젊은 지구론을 믿거나 과학 질서가 신을 증명한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신앙이 흔들릴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방식의 신 증명이 잘못된 것임은 칸트도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책을 통해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가 종교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새로운 점을 알게 되지도 않았다.

 

 (이미 과학으로는 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철학이나 신학 공통의 입장이고<물론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신자들이나 학자들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오류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진 않는다.]>, 여리고 문제 등 그가 말하는 성서의 문제들은 구약학 등 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른 책에서 접할 수 있는 사항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뭔가 아쉽다.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책들은 세권 정도 있지만 선입관을 가질까봐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두 번째로 읽은 이 책에서도[도킨스는 빌려서 대충 봤으니 안 읽은 걸로 보고 뺏다.] 별다른 회의가 들지 않는 걸 보니 선입관은 안심해도 되겠다. (이미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입관을 바꾸는 게 이런 책의 목적이니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신자들의 삶이 특별하지 않다거나, 젊은 지구론 주장자들이 이 정도까지 이상한 말을 많이 한다는 사실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리고 이번 독서에서 얻은 건 이 이상은 아니었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조리 2019-07-1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는 대충 봤으니 뺏다‘가 좀 석연치 않다

마루와다솜 2023-11-11 19:20   좋아요 0 | URL
여기서 ‘대충봤다‘는 말은 곁에 두고 여러번 참고하거나, 여러번 읽거나, 서평을 써서 정리하거나 하지 못한 경우 입니다. 이 책만 해도 이미 구매해서 여러번 읽었고(알라딘에상품 페이지 서평에서 ‘구매자‘로 나오는 거 확인 하실 수 있죠? ^^;;)

서평에서 보시는 것처럼 독서 중 뭔가 이상해서(위에 오역 지적 한 부분에 해당하는데, 데이비드 밀스 등 다른 무신론자도 예수님의 탄생 시기 불일치에 관해 ‘5세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원서를 구해 ‘공통시대(common era)‘를 잘못 번역한 것임까지 확인 했습니다. <원서 구매 확인 원하신다면 알라딘에서 구입했으니 100자평 써서 구매자 확인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킨스 책은 그렇지 못해 제가 확인 하거나 어떤 내용이 있었다고 말 할 수도 없고(지금 책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해서 ˝대충 본 도킨스 책은 뺀다˝고 한겁니다. 넣으면 이 책은 두 번째로 읽은 책이 아니라 세 번째로 읽은 책이 되는 겁니다.

도킨스 책에 대해 기억 나는 내용이 없어 이 책을 ‘세 번째로 읽은 무신론 책‘이라 하지 않고 ‘두번째로 읽은 무신론 책‘이라 한 건데 어떤 점에서 석연치 않으신가요? ^^;;;;

다시 정리해드리면 분명히 서평을 쓸 때 무신론 책은 도킨스 책 포함 3권 정도 보았지만, 도킨스 책은 아직 안 본 걸로 치고(기억이 안 나니까요), 이 책은 ‘우주에는 신이 없다‘ 다음으로 읽은 ‘두 번째로 읽은 책‘이 됩니다.

아~! 그리고 처음으로 읽은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서평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 생기면 좀 더 진지하게 다시 서평을 쓸 생각도 있습니다. 일단 처음으로 구입하는 무신론 책이라 기대 했는데 너무 크게 실망했거든요. (제가 도서 정가제 기간에 구입했는데 얼마 안 가 반값 할인까지 해서 더 억울했는지도 모르죠.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