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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우주
빅터 J. 스텐저 지음, 김미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전작인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와 완전히 같은 책입니다. 출판사만 바뀌었으니 다시 구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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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논 2024-11-05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이 계통의 모든 책을 다 구입해서 비교하는데요.
데이비드 밀즈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란 책과 혼돈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 때문에 중복 구입하셨다면 제가 비슷한 다른 책을 선물해 드리고 싶네요.
 
신 없는 우주
빅터 J. 스텐저 지음, 김미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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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00자평을 남기신 어떤 분이


라고 남기셔서 원서 확인 안 하고 구입했다가 뒤통수 맞아버린 책이다. ㅠㅠ


두 책은 완전히 같은 책으로, 품절 되어버린 책, 다시 말해, 이전 책인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완전히 같은 책이라 다시 글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돈 날린 김에 그냥 두기 아까우니 이전 서평 복사/붙여 넣기 하고 사진이나 자료만 조금 보충하자.. ㅠㅠ


(사실 구입한지 몇 년이 지났는지도 기억 안 날 정도로 오래되었는데, 돈 날렸다는 사실에 대해 속상해서 잊고 있다가 '우주에는 신이 없다'를 다시 읽고 정리하며 이 책도 정리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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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그는

'신이 우주의 움직임과 인간의 삶에서 그토록 중추적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면, 단순히 그 사실 덕분에 그는 과학적 수단에 의해서 탐지 되어야 하는 것이다.'(22p => 심지어 전작이라는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와 마찬가지로 22쪽이다. ㅠㅠ)

 

라고 말하는데 이건 ‘허수아비 논증’과 비슷하다. 이미 기독교 등의 신은 세계를 창조한 ‘주체’로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이다. 게다가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의 신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해야 한다’며 탐지 되어야 하는 ‘제한된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자기 범위 밖에 있는 대상을 자기 영역에서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서론에도 할 말이 많지만 책 내용이 많기 때문에 생략한다.

 

 

1장은 ‘신을 검증할 수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기 위해 ‘데이비드 흄’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흄이 과학법칙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잘 알 사람이 이렇게 시작하다니…….)


그는 신을 물질계로 끌어 내리기 위해 “세상창조 때부터 그분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께서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다.”(책 내용과 달리 성구는 바른 성경에서 인용)

라고 말하는 로마서 1장 20절을 이용해 “우리는 신의 증거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데 해당 성구 문맥을 보면 신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에게 영광 돌리지 않는 자들(21절) 등을 비판하는 구절이다.”

 

저자는 ‘철학적 이론이나 형이상학, 또는 순수한 존재 명제는 논박이 불가능하다’는 포퍼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기독교 등의 신은 "모든 곳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찾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공격하기 편한 다른 허수아비를 만들어 공격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용하는 내용들도 ‘어떤 존재가 완벽하다면 그가 창조하는 것은 무엇이든 완벽해야 한다.’면서 신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것에 ‘속박되어 있는 것’으로 바꾸어 제시하며, 이 불완전한 존재를 '신' 대신 허수아비로 세우려는 내용들이다.

(완전한 존재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만들 완전한 자유가 있다.)

 

48p에 있는 전능의 역설’만 봐도 “신은 그가 들 수 없는 돌을 창조 할 수 없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바꿔보자.

전능한 신은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만들 수 있다. 그러면 

들 수 없는 돌을 창조 할 수 있다면 전능하지 않은 건가? 아니다! 

들 수 없는 돌을 만든 그 순간부터 전능하지 않다


즉 그 질문은 전능한 존재가 전능함을 포기하는 행위를 내포하며,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1)분명히 전능한자(=모든 것을 할 수 있는자)를 가정하고는 

2)들 수 없는 돌이라면서 '모든 것'의 예외를 만들어버렸다. 

이건 질문 자체가 (중학교 집합론을 예로들면) A와 A의 여집합의 공집합이 아닌 교집합을 만족시키라는 말도 안 되는 명제를 <불능이다> 들어 놓고 불가능하니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기초 논리학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53p에서 “감각 너머의 세계에 종류를 불문하고 신이나 영령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대해 “태양이 신의 전차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말 돌리기로 보인다.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서로 입 다물면 된다.

(물론 저자는 “과학을 하나의 문화적 설화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 우월한 능력, 효용, 보편성 때문에 다른 문화적 설화와는 다르다.”고 한다.) 

저자가 들고 있는 과학적인 신 모형에서도 그는 7,8번을 통해 “신은 모든 역사에서 직접 전달하는 방법으로 진실을 계시해왔다”거나 “신은 증거가 있다면 그를 받아들일 인간에게서 고의로 숨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도행전만 봐도 직접 받은 사람은 바울을 포함해 극소수이다. 


저자는 ‘숨지 않는다.’는 말을 “감각 기관으로 관측할 수 있다.”로 재정의하고, 신이라는 존재를 나타나야만 하는, 속박된 존재로 그리고 있다.

 

 

3장에서도 기도 등이 효험이 없다고 말하는데 (제목은 ‘물질 너머의 세계를 찾아서’지만 내용들은 기도가 효과가 없다거나 비물질 적인 영혼을 관측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도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게 느껴진다. 

기독교에서 ‘기도’라는 게 효험이 없다는 내용이나, 영혼을 관측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신이 없다는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다. 게다가 기도는 기본적으로 ‘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일’이기에 그것을 이루는 건 신의 자유다. 

성경에도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똑같이 잡힌 상황에서 야고보 사도는 순교했고(그의 죽음에는 그 어떤 기적도 나오지 않고 2절 한절 만으로 "죽였다"고 말한다

그 직후 같은 장 3절~19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천사가 와서 기적적으로 풀려난다. 

초대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만 기도하고 야고보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기적은 정형화된 법칙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건 기도하는 사람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여기에 대해 말 할 수 없다.


 영혼의 측정 문제도 그렇다. 영혼이 물질적이거나, 측정 가능한 어떤 에너지가 아니라면 그것의 존재는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측정할 수 없었다.”고 결론 내린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게 없다는 증거인가? 있다는 증거가 없는 건 사실이다. 없다는 증거는 다른 문제다.


과학 등 학문에서는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가 기본 아닌가? 

 

 

4장과 5장은 저자의 전공 분야라서 그런지 얻을 정보도 많았다. 하지만 이 내용들로 신을 부정할 수 있을까? 

우주의 엔트로피와 최대 엔트로피 사이에서 질서를 위한 공간을 찾는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저자는 여기서 플랑크 시간을 통해 우주가 무한하며, “‘무’란 불안정하기 때문에 무언가 있는 것”이라 하는데, 무신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째서 무란 불안정해야 하는가?”부터 해서 ‘그 우주가 저절로 탄생하는 원리는 어디서 왔는가?’까지, 소위 말하는 ‘과학적 무신론’에 필요한 핵심 주제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전혀 답하고 있지 않았다.

(말 돌리기로 보이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논증들이 근원까지 올라가면 순환 논증이 되기 때문에 논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들이 여기에 해당하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공간의 낭비나 ‘천지창조 6일’ 등은 창조기사의 기록 목적 등조차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창조기사 기록 목적에 대해서는 롱맨이 쓴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등의 작은 책들에도 잘 나와 있다. 아마 저자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이런 거 다 무시하는 ‘창조OO회’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그렇겠지만, 그 사람들이 증명도 부정도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우겨서 오류라면, 이 책은 반대로 그 존재를 관찰 안 되니 없다고 우겨서 문제다.) 

<XX회 라고 하니 일부러 숨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들을 '과학'이라고 불러줌으로  "과학이 아닌 주제"를 다루면서 '과학'이라 말하는 그들의 주장을 과학으로 인정하는 듯한 찝찝함이 남아 'OO회' 라고 칭한다. ^^;;>

 

따라서 이 전에 읽은 ‘우주에는 신이 없다’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은 좋은 책이지만, 핵심 오류는 마찬가지다.

 

가장 흥미로운 단원이었던 ‘실패한 계시’는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자유다. 비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성취가 아니라고 보는 게 당연할 테니까. 그러나 그걸로 기독교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 구절들을 성취로 믿기 때문에 신자가 된 것이고 이건 전제가 된다.

 

(그리고 오역인지 유대만을 대상으로 한 인구조사가 6~7세기에 있었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6~7CE로 되어 있다. 이건 6~7세기가 아니라 공통시대 6~7년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주후 6~7년으로 통일한다.)  => 사진자료 참고


예수님 탄생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다뤄보자면 주전 4년에 헤롯이 죽었으니 주후6~7년 호구조사랑은 상관없다는 주장은 수십 년 전에나 나왔던  주장이고, 이미 20~30년도 더 이전에 출간된 책들이 답변 잘 끝낸 내용이다. 


예를들어 답하자면, 당시의 교통수단을 보면 칼리굴라 황제 당시 유대 동상 건립을 제고해 달라는 총독의 상소문에 대한 답장, 즉 편지 한 통이 로마에서 유대까지 가는데 3개월이나 걸렸다. [이 편지보다 나중에 출발한 '황제의 사망을 알리는 편지'는 앞선 편지보다 27일이나 먼저 도착했다. 웃어야 할까? ^^;;]

 

호구조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Gaul"지역에서 행해진 호구조사는 끝내는데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A.D 6,7년에 행해진 호구조사는 앞선 자료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으며,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정치구조'가 아니라 '예수의 탄생 자체' 이기에 누가의 자료는 예수님이 B.C 5년 경에 태어났다는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물론 언제 태어나셨는지 구체적인 날이나 연도는 알 수 없다.) 

-John Drane 저 Jesus and the four Gospels- 참고

* 일반적으로는 B.C 5년 보다는 B.C 3년 정도로 보는 편이 많으나 어차피 호구조사 기간을 알 수 없으니 그냥 넓은 범위로 5년 경을 주장하는 입장을 인용한다.  

 

 

십자가 부활 등에 대한 공격 역시 인신공격에 가깝다. 그는 십자가 고난에 대한 자료가 없다고 말하는데, 기독교를 부패한 사교라 하는 타키투스도 이 사교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타키투스 역시 후대의 인물이라 믿을 수 없다면, 세상에 인용 가능한 역사 기록이 얼마나 될까? 


사기의 은나라 기록은 발생과 저술 시기가 900년에 가까운 격차를 가진다. 

(가까운 우리나라 예시를 들어보면 백제 무왕이 누구의 아들인가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가 있고 우리나라의 자료들 대부분은 그 시대보다 수십에서 수백 년 뒤에 지어진 문헌들이다. 가장 오래된 자료라는 삼국사기의 김부식만 해도 그가 삼국시대 인물이 아닌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



우주에는 신이 없다 서평에 썼던 예시 가져오면


1) (플루타르크가 기록한) 솔론 :주전 600~500년대의 사람,<=> 플루타르크(플루타르코스)는 주후 46년 출생


2) 알렉산더: 주전 300년도 더 전의 인물인 알렉산더에 대한 그의 기록 역시 전혀 믿을 수 없게 된다.


3) 주전 484년 헤로도토스 출생<=> 그의 저술에 나오는 주전 600년대 키루스 왕 등의 기록

4) 주전86년에 태어나 주전 100년보다 조금 더 이전의 유구르타 전쟁을 기록한 가이우스의 저술


이들의 기록은 예수님의 활동시기와 성서 사본, 또는 후대 역사가의 저술 시기의 차이랑 유사 하다, 이 기록들을 전부 버려야 할까?


 

그래서 역사를 다루는 사람 중에는 부활 등 기적은 안 믿어도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예수의 실존까지는 문제 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자료들은 빼는 게 좋지 않았을까? 


구약의 실패한 예언 성취도 장르별 특징이나 문학적 표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모스서에서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 심판하실 것’이라 할 때 그게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의 존재를 입증하라면서 요구하는 유골 등은 오히려 부활 기록과는 어긋난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무덤을 찾는 방송에 나온 야고보 유골함이 거짓이라고 말해준 점은 고맙다. 그게 진실이었다면 성경이 거짓이 될 뻔 했으니.)

 여리고 정도만 흥미롭고, 나머지는 별로랄까? (그러나 여리고에 대한 이견들은 롱맨의 How To Read Exodus 등에도 나와 있다.)


 텔단 기념비는 인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일부 학자들이 위조라 주장하지만 이건 저자에게 불리한 자료다. 


'에릭 클라인의 성서고고학'에 따르면 텔 단 비분을 위조라고 주하는 학자들의 주장은 '묵살되었다'고까지 이야기 하여 학계 주류는 텔 단 비문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으로 본다. 


텔 단 비문의 발견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뉴욕타임스와 타임지의 제1면에 실렸다. 그리고 코펜하겐 학파의 일원으로 알려진 닐스 페테르 렘케가 이 비문은 아브라함 비란(Avraham Biran)이 심어놓은 위조물이라는 주장을 함으로 인해서 텔 단 비문에 관한 기사는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중략)

텔 단 비문이 위조라는 가설이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1996년 닐스 페테르 렘케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7km 쩔어진 곳에 위치한 텔 미크네(Tel Miqne) 유적에서 나온 비문 역시 위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렘케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이른바 텔 미크네/에글론 비문은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성서 고고학계의 또 다른 중요한 발전으로 여기게 되었다.


에릭H. 클라인, 성서고고학, 류광현역, ((사)기독교 문서선교회. 2013), 94-99.p 참고


(메사비문에도 다윗의 집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메사비문 내용은 빠져있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이 증거들이 대제국을 입증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윗 왕조'자체에 대한 증거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해당 사료가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고만 말하여 결국 객관적으로 자료를 인용하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자료를 감추고 있다.


더 설명하자면 위 자료들이 "대제국을 증거하진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과 달리, 신학자들도 이스라엘/유다 왕국을 대제국이라 하지 않으며, 성경 어디에도 다윗 왕국을 '대제국'이라 하지 않는다.  저자는 무엇을 공격하려는 것일까?


참고로 <다윗 솔로몬 통일왕국의 국력과 비등할 것으로 보는 시대가 분열 왕국 시대에 아모스 선지자가 "칼을 보내어 심판할 것"이라 저주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이다. 북왕국 하나 국력이 통일 시대인 다윗과 비등, 혹은 그 이상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마 오므리왕 시기는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 저자의 관점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지 않고 폭력이 넘치던  오므리나 아합 시대/  

혹은 부강했으나 약자에 대한 핍박이 넘치던 여로보암 시대 등은 '악한 시대'일 뿐이다. 이게 일반 역사가와 성경 저자의 관점 차이다.>  


게다가  "성서 원본이 그 속에 묘사된 여러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문서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신뢰할 만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이다." 정도가 기독교인들의 입장이기 때문에, 성서의 내용을 전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가치가 신에게서 올까’ 와 ‘왜 악이 존재하는가?’ 단원은 날카롭지만 새롭진 않다. “인간 가치는 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해왔던 이야기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고. 특정 종교인들이 남들보다 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점에 대한 비난은 사도 바울도 했던 이야기다.


(재미있는 건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도덕성이 차이가 없다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3대 종교 모두 범죄율이 비 종교인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종교끼리 비교하면 신교와 불교는 대충 큰 차이가 없지만 비 종교인의 절반 수준이고  천주교는 그 종교인들의 절반 수준이다. 좀 더 정리하면 기독교와 불교는 같거나 오차 범위 안에서 기독교가 조금 낮다.<범죄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이를 무신론 논증에 사용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을까?

<위의 도덕성이나 범죄율은 무신론, 유신론 둘 다 입증하지 못한다.>

 

 

악의 문제야 중세 철학자들이 오랜시간 토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걸 공격하는 건 뭐든지 공격하고 보자는 생각으로밖에 안 보인다. 악이 무엇인지,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견들만 봐도 그렇다. 이 문제는 신을 보는 날 해결 될 것이다. (아니면 그의 말처럼 죽은 뒤 ‘무’가 되어 보지 않는다 해도 해결된다.)

 

9장에서도 데이터와 일치하는 신의 모습 등을 만들어 놓고 공격하며, 데이터에 일치하지 않는 신, 아무런 관찰 불가능한 신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한다. 결국 개인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건 자유지만 그의 주장이 기독교를 없앨 수는 없다.

(그가 했던 철학적, 신학적 반론들은 이미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이고 해결할 수 없었던 질문들이지만[악의 문제 등] 그것이 무신론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종교인들이 신을 믿는 게 비합리적인 걸 몰라서 믿는 건 아닌 것처럼 신앙이 흔들릴 것도 없지만, 젊은 지구론을 믿거나 과학 질서가 신을 증명한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신앙이 흔들릴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방식의 신 증명이 잘못된 것임은 칸트도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책을 통해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가 종교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새로운 점을 알게 되지도 않았다.

 

 (이미 과학으로는 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철학이나 신학 공통의 입장이고<물론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신자들이나 학자들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오류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진 않는다.]>, 여리고 문제 등 그가 말하는 성서의 문제들은 구약학 등 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른 책에서 접할 수 있는 사항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뭔가 아쉽다.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책들은 세권 정도 있지만 선입관을 가질까,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두 번째로 읽은 이 책에서도[도킨스는 빌려서 대충 봤으니 안 읽은 걸로 보고 뺏다.] 별다른 회의가 들지 않는 걸 보니 선입관은 안심해도 되겠다. (이미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입관을 바꾸는 게 이런 책의 목적이니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신자들의 삶이 특별하지 않다거나, 젊은 지구론 주장자들이 이 정도까지 이상한 말을 많이 한다는 사실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리고 이번 독서에서 얻은 건 이 이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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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앞에서 지적한 오역 부분 자료]

일단 난 번역본 2개+ 원서까지 사서 읽었으니, 안 읽은 분들은 좀 읽고 공격 해주시길.


100자평 쓰신 분은 두 책 어디에서 다른 점이나 더 나은 점을 찾았기에 "더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라 평하셨는지 모르겠다.. ㅠㅠ



물라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오역부분 : 인구조사가 6~7세기?


신 없는 우주에도 6~7세기라면서 똑같이 번역했다. (이건 이전 책보다 나은 작품도, 개정판도 아니다. ㅠㅠ)


원서에는 분명히 이 인구조사가 6~7CE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저건6~7세기가 아니라 6~7년이다. CE는 AD, BCE는 BC에 해당하는 표현이라 저렇게 번역하면 거의 600~700년의 오차가 생긴다. )


덴 바커나 데이비드 밀스 등 이 내용으로 공격하던 모든 사람들도 "호구조사는 주후 6~7년에 이루어졌는데 헤롯은 주전 4년에 사망했다."고 공격했는데, (당시 교통/통신의 한계로 인한 것임은 위에서 설명했음) 


이 책만 6~7세기라면서 500년 이상을 건너 뛰어 이상하다고 생각해 원서까지 구했다. 

그리고 개정했다며 나온 이 '신 없는 우주'는 다른 내용을 가진 책도 아니며, 오역 수정도,

개정해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출판사만 바뀌었을 뿐.... 

(그냥 나만 100자평에 낚인 거다.. 그거다.. ㅠㅠ)

그래서 오래되었지만 그냥 두고 있기 뭐해서 서평이라도 다시 올린다. 


(그러니 이전 책에 서평은 별 3개였지만, 완전히 같은 책이면서, 돈만 더 쓰게 만들었기에 별 하나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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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삶
박진성 지음 / B612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일단 저자에 대한 사건이나 논란을 모르고 읽으면, 시집을 읽는 기분이기도 하고, 에세이집을 읽는 느낌도 있고, 좋은 책이다.

게다가 작가의 다른 책인 ‘김소월을 몰라도 현대시작법’의 내용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는 극한 상황에서 그 조언을 적용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된다. ‘대상이 먼저’라는 이야기가 시작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역시 간접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여러 아름다운 감상, 의지, 그리고 타인이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은 항상 무언가를 남겨준다.


그러나 이 후의 삶

그러나 이후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이후의 삶’과 ‘이전의 글’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이에 대해선 여러 관점이 있으나, 일단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나 김동인의 광염소나타처럼 ‘추악하지만 아름다운 예술’을 긍정할 수 있으니 글은 따로 두고 본다면 좋은 작품이며, 좋은 글들이다.



그러나 역시 이후의 삶이 문제다. 결국 어려운 건 이후의 삶이다. 뭔가 아름다운 것을 남기기에는 삶이 너무나 짧지만,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남기에는 삶이 너무나 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좋은 글들을, 좋은 문장들을 만났으니 만족하며 덮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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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사회 - 순 자산 10억이 목표가 된 사회는 어떻게 붕괴되는가
임의진 지음 / 웨일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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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 핵심만을 이야기 하면 결국 한국의 평균 올려치기 문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출산 등 한국의 많은 문제가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나는 남들과 다른 차별적 존재지만, 평균 미달은 아니다.”는 사회 전반의 인식이며, 이 때문에 모든 면에서 중간 이상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리라.



날카로운 지적

저자가 지적하는 평균 올려치기 현상은 날카롭다.

간단히 말해 재산의 소유 정도가 딱 중간 정도 되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OECD 분류법에 의하면 중위소득 75~200퍼센트까지의 소득을 가진 집단을 의미2하는데, 2022년 우리나라 4인 가구 중위소득인 월 512만 원3에 이 기준을 적용하면 중산층의 소득 범위는 월 385만~1020만 원으로 나온다. 월 소득 686만 원 미만 가구 중 상당수(385~685만 원)도 중산층에 포함된다는 뜻이니 설문 결과가 보여주는 시각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의 〈2022 중산층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4인 가구 기준 월 소득이 686만 원은 되어야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응답자들은 4인 가구 기준 중산층의 월 소비 규모는 427만 원, 순 자산은 9억 4000만 원 수준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월 소득은 한국 전체 가구 중 소득 상위 24퍼센트 수준이며, 월 소비 규모는 상위 9.4퍼센트, 순 자산은 상위 11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정도면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고, 특히 소비와 자산 규모 측면에서는 상류층이라고 해야 알맞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 정도를 ‘중산층’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참고로 2024 대한민국 상위층과 서민을 가르는 기준인 중위소득 200%는 1인 가구 기준 4,456,890원이다.>

사실 블라인드 등 직장인들이 모인 곳을 들어가보면, 초봉 기본급이 2024년 기준 연 5300 이 넘어서, 1인가구 중산층 마지막 선인 월4,456,890(중위소득200%)원을 가볍게 압도하는 삼성전자나, 역시 초봉 기본급 5000이상으로 성과, 상여 포함시, 서민은커녕 도저히 중산층조차 될 수 없는 현대차 등 고소득층들이 “정부는 서민을 지원해야 한다.” “중산층을 수탈한다.” 고 말하는 게 현실이다. 그만큼 평균 올려치기가 심하다.


[물론 자녀가 둘 이상외벌이 가구일 수 있으나, 만약 대기업 직원 전부 자녀가 둘 이상이라면 저출산 문제가 이리 심각하진 않을 것이다. ^^;;;]



모호할 수밖에 없는 대안

저자가 지적하는 이런 올려치기 관련 문제점들이 결국, 각종 격차나 부동산, 저출산 문제 등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바람직한 사회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잘릴 걱정 없이 직장에 다니고, 일을 하며 얻는 대가가 자신의 노력에 맞게 주어지며, 먹고사니즘에 매여 인생을 낭비하기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략)...

그렇지 않더라도 내 가족의 보금자리 정도는 있었으면 한다. 다음에는 또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하나, 이번 계약은 연장이 될까, 전세금은 얼마나 올려줘야 하나 같은 걱정 좀 덜 하고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양질의 일자리, 공정한 보상, 소득 불평등 완화와 주거 안정이라는 딱딱한 단어에 숨겨진 진짜 모습이자 사람들의 진정한 욕구이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 2장 중 어쨋든 공정하면 된 거 아냐? 단원에서 발췌- 

결국 저자는 성공의 다각화를 해결책으로 이야기 하는데, 좀 추상적이다.


비교는 주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나 처지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 본서 다양성의 싹을 자르다 단원-

SNS의 비교는 해외 유명인까지 연결되니 이 문장도 SNS의 발전으로 더 이상 옳지 않다. 


 (SNS로 연결된 처음보는 외국인이 알고보니 연소득만 수억씩 되는 인물이거나 해외 유명대학 교수급 석학인 경우가 적지 않다. 즉 SNS는 나의 계층과 상관없이, 저~ 위의 다른세계 사람의 모습까지도 (상당부분 포장하여) 보여준다. ^^;;)




3장에 이르러 저자는 이런 현대 한국인의 비교문화의 근원을 조선시대 농업사회에서 찾는다. 


불안의 핵심은 예측불가능성에 있다는 저자의 말은 앞서 말한,


대부분의 사람은 잘릴 걱정 없이 직장에 다니고, 일을 하며 얻는 대가가 자신의 노력에 맞게 주어지며, 먹고사니즘에 매여 인생을 낭비하기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와 연결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 사회라 말하는 느낌이다.


서열화, 계급화와 부동산시장 우상향에 대한 믿음, 이런 특징을 지적하며 나온 해결책은 결국 그 너머에 있는 불안, 결혼을 하면, 아이를 가지면 현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당장 떠오르는 건 역시 북유럽 복지 국가이다.


저자의 최종적 해결 방법은 전통 공동체도, 서양의 시민사회도 아닌 “현대 한국만의 공동체 정립”과 “시험-합격-자산소유-소득창출의 선을 끊는 것인데, 만족메커니즘을 변화시키기 위해 간판 취득을 쉽게, 유지는 어렵게 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7급이나 9급 출신도 능력을 증명한다면 빠른 승진을 통해 장관도 될 수 있다면 어떨까?” 라고 하는데, 이미 장·차관은 임명직으로, 비공무원도 역임하는 자리이다. 


그 아래? 아주 드물지만(한 명 있었나?) 이미 7~9급으로 시작해 1~3급인 고위공무원단으로 퇴임한 사례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 제도 그대로인데?


게다가 7,9급의 업무에 ‘능력을 증명하라’말한다면,

“그 공무의 성과지표는 무엇이 되는가?”

를 정의해야 하는데, 이거 수많은 행정학 전문가들이(해외 석학)도전했으나, 결국 행정학 교과서들은 ‘행정의 성과평가는 어렵다’로 끝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예를들면 공무원의 친절 평가는 준법 여부와 상반된다. 법대로만 하면 도장 없는 서류 반려로 불친절 민원 접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약간 눈감아 주면 친절 공무원 / 


개다가 예산 절감 대 주민 복지 증가 등 양립하기 어려운 면이 많아 지금보다 더 나은 성과 기준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ㅠ_ㅠ]


차라리 “팀/과장 이상 자리의 사람에게도 실무를 하도록 하자!”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저자는

“더 얻고 싶은 사람은 많이 노력해서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 두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역시 각자 원하는 만큼 노력하고 추구해도 바라는 삶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고 하지만, 결국 스웨덴 같은 모습으로 귀결될 것 같아 수긍하기 어렵다.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대다수 국민이 평등한 대신 최상위층은 대대로 부를 물려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참고]

(스웨덴은 OECD에 따르면 조세에 대한 스웨덴의 국민 부담률은 40%대이며 소득세 최저세율은 32% (한국 6.6%).

연봉 6800만원은 스웨덴 근로자 평균 연봉의 1.5배 기준선이나 소득세 최고세율(평균 52%)로 진입하는 기준 연봉이다. 적용 대상은 전일제 근로자 3명 중 1명꼴이다.

근로자 중 세금을 내지 않는 비율은 6.6%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산이 있는 곳에는 세금이 없을 수도 있다. 스웨덴 총 조세액 중 재산 관련 세금인 부동산 보유세와 취득세, 상속·증여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2%에 그친다. 한국은 12%다. 스웨덴은 2004년 상속세 및 증여세 폐지를 선언했다. 가족 기업이 많은데 높은 상속세 때문에 기업들의 해외 이전 러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2008년엔 자산 총액이 2억원을 넘을 경우 기준액 초과분에 1.5%만큼 부과되던 부유세마저 폐지됐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재산을 은닉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 10억달러 이상 자산을 가진 스웨덴 부자들 중 상속받아 부를 축적한 비율은 63.2%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2/01/15/Q2LZ4SQY7NB7HIHDEIM5A4K6AY/




[그리고 스웨덴도 정규직의 보호는 강하지만 비정규직의 보호는 한국보다 약하다. ]

행복한 나라의 불행한 사람들 P. 54

스웨덴 근로자들이 이처럼 별도의 고용보험까지 가입하는 이유는 스웨덴의 고용시장이 유연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체제라 알려진 스웨덴에서 노동자 해고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선입견에 가깝다. OECD에서 발표하는 고용보호지수에 따르면 스웨덴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고용보호지수는 2.45로 OECD 평균(2.06)보다 조금 높다. 지수가 높을수록 노동자 보호가 강하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0.09)보다는 훨씬 높고 네덜란드(3.61)보다는 낮으며 한국(2.42)과 비슷한 수준이다. 반면 스웨덴의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고용보호지수는 0.81로 OECD 평균인 1.74와 한국의 2.13을 크게 하회한다.



그렇다면 결국 현제 나와 있는 대안들은 둘 중 하나가 된다.


미국처럼 ‘완전 경쟁 + 비보호’로 가느냐, 


경쟁을 멈추고 공존하는 사회로 가되, 완전 최상위 계층과의 격차는 인정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며 그 자본과 회사가 해외로 빠지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다시 말해 기업의 대표급 되는 사람들은 자손대대로 잘 살 수 있도록 기득권을 보호하는 대신, 그 아래로는 아주 평등한. 즉 의사, 변호사, 직장인 모두 평등한 사회. 



이 대안들을 말하는 건지 궁금하다.

물론 이 책이 말하는 해결 방안은, 둘 다 아니며, 또 다른 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이 둘의 장점만을 모호하게 제시하는데 그쳐 정책적 대안은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돈보다 나은 가치란 무엇인가? 그 나은 가치를 추구하도록 할 수 있는 정책은 무엇인가?

결국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단 공동의 장소를 만들어 만남을 시작하게 하는 건 건축가 유현준님의 말처럼 공원부터 시작 할 수 있을 거고

https://www.youtube.com/watch?v=m1WUJETaI2U


나머진 더 고민해봐야 하리라.



숫자로 표현 가능한 것에만 집착하는 현 시대에 대한 비판에 너무 집착해서인지,

통계 적용 등에선 아쉬움이 많다.



소득과 행복도 자료를 예로 들면, 


 저자는 소득 75000달러까지는 소득과 행복도가 비례하지만, 그 이후에는 함께 증가하지 않는다는 카너먼과 티턴의 2010년 연구를 인용하고 있는데, (물가 고려, 2023년 연봉 1억 정도까지만 비례)

이미 과거 자료가 되어 버린 내용을 인용해 버렸다... ㅠㅠ 최근 연구를 보면 


이후 매튜 킬링스워스 박사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썼고,  다니엘 카너먼과 매튜킬링스워스 박사는 2023년, 공동 연구를 통해 이전 연구를 수정한다.

그리고 수정된 내용에 따르면 연소득 50만 달러(한화 약5억~6억5천만)까지는 소득과 행복도가 비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재산이 아니라 연소득이 50만 달러..  )

<우와~! 난 평생 행복해질 수 있는 건가? ^_^ b>



물론 저자가 이 연구를 인용한 이유는, 우리나라 평균 연봉이 2000~3000만 원 대이니 물가 등을 고려하면 연소득 7000로 조정 가능한 행복 상한선에 미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소득 이외의 다른 것을 봐야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니 저자 논지의 핵심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돈’이라는 건, 저자의 생각보다는 더 큰 문제일 수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조금 박하게 말한 것 같은데, 그래도 숫자 이면의 모습을 다룬 책으로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었던 책이다.

그래도 일단 숫자에서 벗어난 만남의 장소는 필요하며, 사람간의 교류는 필요하다. 그게 어떤 사회이든지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서로의 목표가 존중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아무래도 (교육 영상 플랫폼 등을 통한)계층별 문화에 대한 교육에 대한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내 생각에, 해외는 상류층에 대해 그냥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이 계층 구분이 아직 공고화 되지 않아, 더 큰 박탈감을 느끼는 면도 있다고 본다. 차라리 계층이 고착화 되어 이동이 어려워지면 갈등이 덜 할지도 ? ]


뭐든지 역시 하나씩 해야 할 것이다.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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