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도 학교에서 그런 것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조회를 하는 풍습이 있었고 그러한 성가신 절차의 가장 앞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등의 '국민의례'가 있었다. 심지어는 학급회의 같은 것을 할 때에도 항상 앞에 애국가 제창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항상 6월쯤이 되면 호국, 반공 글짓기 대회 따위를 했고, 일종의 반공교육 같은 것도 이루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우리는 철저한 우파적 국가관을 갖도록 교육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이러한 국가관에 나는 일종의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유교적 가치관에도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고, 사실 모든 개인은 국가를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소속된 국가에 해가 되는 일만 안 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 특별히 목숨 바쳐서 충성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다. 더욱이 안보 혹은 애국을 빌미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타인을 억압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 왔기에 애국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일종의 거부감이 느껴질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가 출간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국가관이 지극히 희박한 나로서는, 국가에 대한 담론 자체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무조건적인 애국심 불어넣기 같은 내용은 아니리라 생각했고, 과연 그는 국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졌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결국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로크, 홉스,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애덤 스미스, 칼 포퍼, 하이에크 등의 사상을 소개하며 다양한 국가론의 기원과 이념적 갈래에 대해 면밀히 고찰하고, 이러한 분석들을 토대로 한국의 국가론을 조명하며 나아가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국가의 본질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철학과 이론은 몇 가지 큰 흐름으로 갈래를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홉스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국가주의 국가론적인 입장이다. 이런 이론이 득세하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인 공포감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정치활동의 자유, 평등과 노동법 등은 법질서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통치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노동자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했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국가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장 작은 자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기강과 엄한 규율을 중시한다.
두번째는 자유주의 국가관으로,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 하이에크 등의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이론을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의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보수적 국가론이다. 국가의 역할은 될 수 있는 한 최소화되어야 하고, 되도록 많은 것들을 시장과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편이 좋다고 보기 때문에 민영화, 자유화, 개방화에 호의적이다. 자유주의 국가론은 국가주의 국가론이 위축되면서 생기는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담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국가주의 국가관이 이념형 보수라면 자유주의 국가관은 시장형 보수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국가주의 국가관보다는 나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심각한 양극화와 워킹푸어 현상, 청년실업 등의 배경에 깔려 있는 신자유주의를 결코 좋게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세번째는 마르크스주의 국가관으로, 국가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국가론을 제시했다. 국가가 만인을 위한 공동 사회가 아니라 계급지배의 착취도구에 불과하다면, 국가에 대한 귀속감이나 국가에 헌신하고 봉사하려는 애국심은 적어도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헛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는 왜 이렇게 와닿는 것일까. 한때 지구 표면의 절반을 점령했던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구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중국 역시 경제적으로는 미국이나 유럽과 다름없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다룬 후, 그러면 '누가 다스려야 되는가'에 대해서 저자는 플라톤과 맹자, 트라시마코스의 이론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적 정치제도에 대해 언급한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더라도 악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칼 포퍼는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제도화된 권력분산과 상호견제 장치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핵심이 된 것은 모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라는 부분은 참으로 속이 시원했는데,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를 사랑하는 것 역시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애국심에 대한 톨스토이의 비판적인 생각에 그저 후련할 지경이었다. 인류가 겪는 병폐 가운데 많은 것들이 애국심에서 비롯되었고,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반면 그와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피히테와 같은 전체주의자를 보면, 애국심과 국가주의, 애국주의와 전체주의는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국가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방법인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선에 대해서도 어떤 것이 효과적이고 옳은 것인지, 여러 철학자들의 논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억압과 불평등, 불공정과 사회악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혁명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혁명은 때가 되어 조건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첫 번째 조건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민중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 조건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적 공학인 사회혁명은 사회 전체의 근본적 재구성을 추구하지만 경험과 지식의 제약 때문에 더 큰 악을 불러들일 수 있으므로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가장 긴급하고 구체적인 악과 싸우는 점진적 공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혁은 이분법,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점진적 개혁의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곳에서만 사회혁명이 길을 연다고 저자는 말한다. 칼 마르크스가 폭력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이어서 저자는 진보정치와 국가의 도덕적 이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선 진보라는 스펙트럼에 대해서, 김상봉 교수의 견해는 진보의 울타리를 좁게 설정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진보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국가는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 자체가 아니라 그 최상층부인 재벌의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가 되었고, 한국의 자칭 진보정당들은 자본주의 극복도 재벌 해체도 포기했으니 진보정당이라 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반면 이남곡 선생의 견해는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고,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 있어야 하며, 인간의 의식을 변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요즘 진보정치의 화두로 떠오른 복지국가론 역시 진보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적 위험에서 시민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 채택하고 실현해야 할 '제도와 정책의 조합'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을 진보자유주의자로 정의하며,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정의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정치인으로써의 유시민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진보 쪽에 가까운데 FTA에는 찬성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참 신경이 쓰였다. 결코 공평하지 못한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협상을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어떻게 찬성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어쩌면 그는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인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마지막 장의 연합정치에 대한 부분은 저자의 정치적 의도가 너무 드러난다는 느낌이다. 당신이 진보주의자라면, 선택지는 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앞의 그 모든 내용들이, 마지막 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굳이 김상봉 교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현실성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는 가장 작은 자들의 편에 서는 정치인이 될 것인가, 지금으로써는 약간 회의적이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나는 꽤 래디컬한 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