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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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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학교에서 그런 것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조회를 하는 풍습이 있었고 그러한 성가신 절차의 가장 앞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등의 '국민의례'가 있었다. 심지어는 학급회의 같은 것을 할 때에도 항상 앞에 애국가 제창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항상 6월쯤이 되면 호국, 반공 글짓기 대회 따위를 했고, 일종의 반공교육 같은 것도 이루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우리는 철저한 우파적 국가관을 갖도록 교육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이러한 국가관에 나는 일종의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유교적 가치관에도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고, 사실 모든 개인은 국가를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소속된 국가에 해가 되는 일만 안 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 특별히 목숨 바쳐서 충성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다. 더욱이 안보 혹은 애국을 빌미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타인을 억압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 왔기에 애국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일종의 거부감이 느껴질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가 출간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국가관이 지극히 희박한 나로서는, 국가에 대한 담론 자체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무조건적인 애국심 불어넣기 같은 내용은 아니리라 생각했고, 과연 그는 국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졌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결국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로크, 홉스,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애덤 스미스, 칼 포퍼, 하이에크 등의 사상을 소개하며 다양한 국가론의 기원과 이념적 갈래에 대해 면밀히 고찰하고, 이러한 분석들을 토대로 한국의 국가론을 조명하며 나아가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국가의 본질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철학과 이론은 몇 가지 큰 흐름으로 갈래를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홉스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국가주의 국가론적인 입장이다. 이런 이론이 득세하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인 공포감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정치활동의 자유, 평등과 노동법 등은 법질서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통치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노동자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했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국가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장 작은 자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기강과 엄한 규율을 중시한다.  

두번째는 자유주의 국가관으로,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 하이에크 등의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이론을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의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보수적 국가론이다. 국가의 역할은 될 수 있는 한 최소화되어야 하고, 되도록 많은 것들을 시장과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편이 좋다고 보기 때문에 민영화, 자유화, 개방화에 호의적이다. 자유주의 국가론은 국가주의 국가론이 위축되면서 생기는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담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국가주의 국가관이 이념형 보수라면 자유주의 국가관은 시장형 보수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국가주의 국가관보다는 나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심각한 양극화와 워킹푸어 현상, 청년실업 등의 배경에 깔려 있는 신자유주의를 결코 좋게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세번째는 마르크스주의 국가관으로, 국가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국가론을 제시했다. 국가가 만인을 위한 공동 사회가 아니라 계급지배의 착취도구에 불과하다면, 국가에 대한 귀속감이나 국가에 헌신하고 봉사하려는 애국심은 적어도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헛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는 왜 이렇게 와닿는 것일까. 한때 지구 표면의 절반을 점령했던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구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중국 역시 경제적으로는 미국이나 유럽과 다름없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다룬 후, 그러면 '누가 다스려야 되는가'에 대해서 저자는 플라톤과 맹자, 트라시마코스의 이론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적 정치제도에 대해 언급한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더라도 악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칼 포퍼는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제도화된 권력분산과 상호견제 장치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핵심이 된 것은 모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라는 부분은 참으로 속이 시원했는데,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를 사랑하는 것 역시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애국심에 대한 톨스토이의 비판적인 생각에 그저 후련할 지경이었다. 인류가 겪는 병폐 가운데 많은 것들이 애국심에서 비롯되었고,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반면 그와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피히테와 같은 전체주의자를 보면, 애국심과 국가주의, 애국주의와 전체주의는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국가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방법인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선에 대해서도 어떤 것이 효과적이고 옳은 것인지, 여러 철학자들의 논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억압과 불평등, 불공정과 사회악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혁명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혁명은 때가 되어 조건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첫 번째 조건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민중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 조건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적 공학인 사회혁명은 사회 전체의 근본적 재구성을 추구하지만 경험과 지식의 제약 때문에 더 큰 악을 불러들일 수 있으므로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가장 긴급하고 구체적인 악과 싸우는 점진적 공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혁은 이분법,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점진적 개혁의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곳에서만 사회혁명이 길을 연다고 저자는 말한다. 칼 마르크스가 폭력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이어서 저자는 진보정치와 국가의 도덕적 이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선 진보라는 스펙트럼에 대해서, 김상봉 교수의 견해는 진보의 울타리를 좁게 설정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진보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국가는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 자체가 아니라 그 최상층부인 재벌의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가 되었고, 한국의 자칭 진보정당들은 자본주의 극복도 재벌 해체도 포기했으니 진보정당이라 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반면 이남곡 선생의 견해는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고,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 있어야 하며, 인간의 의식을 변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요즘 진보정치의 화두로 떠오른 복지국가론 역시 진보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적 위험에서 시민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 채택하고 실현해야 할 '제도와 정책의 조합'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을 진보자유주의자로 정의하며,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정의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정치인으로써의 유시민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진보 쪽에 가까운데 FTA에는 찬성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참 신경이 쓰였다. 결코 공평하지 못한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협상을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어떻게 찬성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어쩌면 그는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인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마지막 장의 연합정치에 대한 부분은 저자의 정치적 의도가 너무 드러난다는 느낌이다. 당신이 진보주의자라면, 선택지는 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앞의 그 모든 내용들이, 마지막 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굳이 김상봉 교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현실성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는 가장 작은 자들의 편에 서는 정치인이 될 것인가, 지금으로써는 약간 회의적이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나는 꽤 래디컬한 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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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17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솜씨가 없고 투박하다고 하시지만, 전 이 리뷰를 읽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네요. ^^ 사람마다 자신의 대화법이 다르듯이 잘 쓴다, 못 쓴다는 상대적 평가는 필요 없고,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이 제일 잘 쓰는 글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쿄코쿠도님의 리뷰를 보며 느껴요. 흠..쓴 내용만 보니까 좋아하는 사상가도 많이 나오고 전 좀 개인적으로 사상가들이 이렇게 복합적으로 나오는 책이 좀 확 댕기더라구요. 유시민이란 정치민은 둘째치고 말이에요. ㅋ
사람의 실체를 알기란 참으로 힘든 것 같아요. 그렇게 같이 사는 가족인데도 색다른 모습에 가끔 놀라기도 하고 대화하다 보면 뭐 이런 과격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란 생각도 하니까요.
아! <우부메의 여름>을 구입했어요. 쿄코쿠도가 뭘 뜻하는지 알았어요. 헌책방 주인이더군요. ㅋ 약간은 비뚤어진 ^^ 근데 천주교 신자이신 쿄코쿠도님이 일본의 어찌보면 잡신을 소재로 하는 소설을 좋아하시다니 의외더라구요. ㅋ

교고쿠 2011-06-17 01:09   좋아요 0 | URL
오, 저의 보잘것 없는 리뷰를 읽고 이 책이 읽고 싶어지셨다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실 이 리뷰를 쓸 때 수면리듬이 뒤집혀서 눈은 아프고 머릿속은 멍하고, 상태가 좀 안좋았어요. 그래서 글도 횡설수설...

일본의 요괴 이야기들은 민속학의 범주에 속하는, 꽤 흥미로운 내용들입니다. 음, 저는 신앙이 부족한 편이라 세속 재미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네요, 으핫. 교고쿠도 시리즈는 강력추천합니다.

루쉰P 2011-06-18 02:47   좋아요 0 | URL
헤헤 그래서 구입을 해서 보고 있죠. 처음 들어 몇 장을 보면 그 책이 끌리는 가 안 끌리는 가를 감정적으로 느낍니다. 근데 <우부메의 여름>은 끌려요. ^^

횡설수설의 글이 이 정도라고 하시면 진짜 맘 먹고 쓰시면 큰일날 듯..크흑

신앙과 재미는 별개이지 않난 생각을 합니다. 교조주의자는 전 별로에요. 편협한 사람말이죠. 종교를 믿음으로 더 개방성이 있고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이 돼야 되지 않나란 생각을 해요. 암튼 요괴 이야기는 끌리는 뭔가가 있어요. 저도 좋아하거든요. ^^

교고쿠 2011-06-18 03:43   좋아요 0 | URL
교고쿠도 시리즈에 꼭 등장하는, 교고쿠도의 해박한 장광설이 참 매력적입니다. 정말 박식하기 짝이 없는 교고쿠도...(저 말구요. ㅋ)

저도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별로 안 거룩한 주제에 타인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으니까요...
 
정치의 생각 - 정의에서 민주주의까지
애덤 스위프트 지음, 김비환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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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정의에 목말라 있거나, 정치철학과 같은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많아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는 느낌도 강하다) 그것을 필두로 하여 그 뒤로 정치철학 관련 책들이 제법 출간되고 있다. 정치철학은 이제 정치가와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종의 인문학적 지식으로 자리잡은 듯 하다.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원제 Political Philosophy)> 은 그러한 정치철학에 관한 입문서로, 정의와 자유, 평등과 공동체, 그리고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사회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해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1부에서는 사회 정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부분만 읽으면 샌델의 책을 읽을 때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샌델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를 주요한 테마로 다룬 반면 이 책은 정치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개념들에 대해 각각의 장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곧 사라지게 되었다. 사회 정의가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가 된 배경과 함께, 하이에크, 롤스, 노직의 사회 정의에 대한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 정의라는 관념 자체를 부정하는 하이에크의 입장에 대하여, 저자는 불평등한 상황 혹은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비록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결과를 낳은 정치적 행위에 따른 책임의 문제는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또한 다른 책에서도 자주 접했던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에 기반을 둔 롤스의 '공정으로부터의 정의'와 그 한계를 설명하며 롤스와 가장 빈번하게 대비되는 노직의 '자기 소유권적 개념'에 기초한 정의론을 권리로서의 정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담이지만 내게 있어서 노직의 정의론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상당히 냉혹한 것으로 느껴졌다.  

2부에서는 자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사야 벌린이 구분한 '~으로부터의 자유'인 소극적 자유와 '~할 자유'인 적극적 자유의 이분법적 구분에 대해 저자는 그 둘 사이에는 궁극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한 구분을 극복해야만 자유에 대한 관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벌린이 적극적 자유의 개념을 전체주의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본 반면 저자는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라는 가치를 보호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자유의 개념에 호소하는 많은 정치적 논쟁들은 재산과 재분배와 관련된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우파는 재분배를 위한 과세가 재산을 가진 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좌파는 재분배가 대다수 사람들의 실질적 자유를 더 증진시키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라 말한다.  

3부는 평등에 대한 부분으로, 저자는 평등이라는 가치의 곤혹스러운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는 반면, 평등은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주장으로 취급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정치철학은 평등을 전제로 하여 진행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천적 차원에서 평등이 배척되는 것은 분배의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이며, 정치철학에서의 평등의 의미는 '모든 시민들의 행복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역시 같은 개념이라도 때로는 관점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진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는 부분이다. 평등에 대한 이러한 복잡성은 정치인들이 평등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기를 꺼리게 한다. 정치인들이 재분배정책들에 대한 옹호가 분배적 평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생활수준의 개선이 가장 시급한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시켜주는 것과 완벽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흐뭇할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아주 강력히 동감한다. '젠장, 누가 부자들 것 다 뺏어서 똑같이 나눠주자고 했나? 단지 가장 가난한 이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것 아니야!'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항상 하고 있는 나는 꽤 불온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4부에서는 샌델의 책에서도 등장한, 공동체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공동체주의 전반에 대해 비판하며, 공동체주의자들이 자유주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지적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의 관계, 공유된 가치, 공동의 정체의식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저자는 자유주의적인 정의 자체가 하나의 공동선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적 가치 자체가 개인의 권리를 진술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지역 공동체나 다른 정체성(계층, 종교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위가 분열적이고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지역감정이나 종교분쟁, 인종간의 갈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샌델은 저자의 글을 '명석하며 공정하고 유려하다'고 평가했지만, 아무래도 이 챕터에서 저자는 샌델을 한 방 먹인 것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5부에서는, 현대 정치철학이 좀 더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인 민주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절차일 뿐인데,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일종의 정치적인 만병통치약으로써 사용되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는 무해하고 순수한 것이며 정의, 자유, 평등 등의 다른 개념들과는 달리 논쟁할 필요가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지닌 가치들을 진정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민주주의에는 왜 가치가 있는지 등을 생각하면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지극히 까다로운 과제를 부여한다. 민주적 가치들은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더 많은 가치들 중 일부 가치들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 적어도 우리는 어떤 것을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인들의 모호하고 불명확한 말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정치적 개념들에 대해 정확하고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몇 가지 핵심적인 정치적 개념들을 논할 때 발생하는 이슈들을 설명하고 명료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장이 어떻게 들리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지 주장의 실질적인 내용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개념의 엄밀한 사용이나 도덕적 책임은 표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인들의 달콤해 보이는 공약 따위를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발등 찍힌다는 이야기다. 가까운 예로 '반값 등록금' 공약이 그렇다. 이 말은 납부해야 하는 등록금을 반으로 줄인다는 말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말은 '심리적 반값'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로 등록금의 부담이 반으로 줄어든 것으로 느낄만큼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는가? 물가는 계속 오르고, 생활은 팍팍해져 가는 것이 현실 아닌가? '반값 등록금'보다 차라리 모 대형마트에서 내건 '통큰XX'이라는 이름이 훨씬 정직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래저래 정치 관련 책은 읽으면서 마음이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망할 놈의 사기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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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5장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반값등록금'에 대한 정치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어요. '정치'라고 하는 것은 항상 알고 싶고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생각을 많이 하는데 어떻게 된 것이 공부를 어디서부터 해 봐야 되는지? 뭘 봐야 하는지부터 막힌다고 할까요? 특히나 선거 때는 쏟아지는 후보들 속에서 어떻게 투표의 길잡이를 잡아야할지도 막막하다고 많이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는 않고 투표장에 가요. ^^
휴..쿄고쿠도님은 세심한 독서력에 감탄을 절로 하고 갑니다. 네이버의 본거지에 좀 자주 놀러가야 하는데 알라딘에서만 자꾸 들려서 죄송하네요.
책을 좀 사고 싶어서 좋은 책이 없을까해서 쿄고쿠도님의 서재에서 계속 놀고 있어요. ㅋ

교고쿠 2011-06-12 20:43   좋아요 0 | URL
예,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저도 정치적인 내용들은 잘 모르지만서도, 가장 작은 자들을 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뽑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알라딘 신간평가단의 다른 분들 보면 글빨이 장난 아닌데 제 글은 투박하고 솜씨 없는 편이지요, 흑. ㅜ.ㅜ
 
진화의 무지개 - 자연과 인간의 다양성, 젠더와 섹슈얼리티
조안 러프가든 지음, 노태복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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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커플이 등장하는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해 어떤 보수단체에서 게재한 비난성 광고가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들은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가 된 내 아들이 에이즈로 죽으면 방송사가 책임져라'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그 드라마에 외설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성정체성이 드라마 하나 본다고 그렇게 간단히 변하는 것이 아니며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 비해 에이즈에 걸리는 비율이 더 높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아직 사회에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의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 만연해 있고,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나라에서 동성애를 법적으로 처벌했다. 19세기 말, 영국의 문필가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 혐의로 재판을 받고 2년간의 강제노동형에 처해졌으며 20세기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역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형을 받고 자살했다.  

얼마 전, 무지개 색상의 띠지가 인상적인 조안 러프가든의 책 <진화의 무지개(원제 Evolution's Rainbow : Diversity, Genter, and Sexuality in Nature and People)>를 읽게 되었다. 저자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물학을 강의하는 교수로, 1998년 52세의 나이에 여성으로 성을 전환했다. 그는 성전환을 함으로써 직업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계속 교수로 재직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것이 옳은 것이, 어떤 개인의 학문적 성취, 업무수행 능력과 성적 정체성은 전혀 연관이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따르는 동시에 다윈의 성선택 이론을 수정한다. 수컷은 활동적이고 암컷은 수줍으며, 수컷은 암컷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암컷은 우수한 수컷의 씨를 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 이론을 그는 반박하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우선 진화에는 다양성이 좋은 것이라는 '다양성 긍정 이론'의 관점에서 생물학적 범주인 암컷과 수컷을 사회적 범주인 젠더와 구분한다. 암수의 구분은 생식세포의 크기 차원에서 끝나지만, 젠더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좀 복잡하다. 이 책에 예로 등장한 생물들 중 선피시(sunfish)라는 물고기는 큰 수컷, 중간 크기의 수컷, 작은 수컷, 그리고 암컷의 네 가지 젠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몸의 크기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형과 성 역할에서 차이를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많은 젠더를 가지고 있는 종은 옆줄무늬도마뱀으로 수컷 세 젠더와 암컷 두 젠더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젠더를 가지고 있는 종들은 암컷다운 수컷, 수컷다운 암컷 등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이분법적 성역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또한 동성 간의 구애와 짝짓기도 의외로 자연에는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큰뿔양은 거의 모든 수컷이 동성애적 구애와 교미를 시도하는데, 이러한 동성간 구애와 교미는 사육 양에서도 발견된다. 오랫동안 이런 행동은 다른 수컷을 암컷으로 착각했거나 암수 간의 교미 전에 행하는 일종의 연습이라고 설명되었으나, 동성애 숫양은 그냥 게이일 뿐 게이인 척 하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 반응 등으로 보면 다른 수컷을 암컷으로 여기고 구애하는 것이 아니라, 암컷과 수컷 중 수컷을 선택해서 호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한 보노보는 거의 모든 암컷이 동성간 성 접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인 연합체를 구축하여 생존에 유리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재생산할 수 없는 관계는 다윈의 성선택 이론에 따르면 도태되어야 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사회적 선택'이라는 답을 제시한다. 정자를 배달하는 것보다 번식 기회의 획득과 거래, 번식에 필요한 자원을 통제하고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2부에서는 인간의 젠더가 언제 어떻게 결정되며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불확실한 편견들이 실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XX/XY 성염색체 시스템은 이분법적이지만, 몸의 형태는 젠더들 간에 상당히 겹치고 교차하기도 한다. 또한 두 성 모두가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을 가졌으며 단지 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성적 지향은 단일한 주요 유전자에 의해 유전되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성적 이형성에 관계된 세 가지 신경세포 다발은 서로 독립적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양한 성적 정체성의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 트랜스젠더만 해도 이미 1000명 중에 한 명 이상의 비율로 존재하며, 남녀 동성애자들의 비율은 더 높다. 그렇기에 이러한 다양한 젠더들은 돌연변이나 기형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다양성의 일부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이성애 중심의 이분법은 이들의 상태를 일종의 질병으로 여겨 전형에 끼워맞추고자 하는 사회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또한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의 성소수자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것 역시 편견으로, 성행위를 하지 않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들의 수도 상당하다.  

3부에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젠더를 보는 관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느 시대, 사회에나 성소수자들은 존재했고 때로 이들은 신성시되기까지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두 영혼' 사람들, 종교의식을 맡았던 인도의 히즈라, 고대 로마의 거세한 남성들, 인도네시아의 레즈비언 공동체, 멕시코시티의 베스티다, 고대의 남성간 성행위, 그리고 남성의 옷을 입고 전장에 나갔던 잔 다르크 등의 예를 통해 다양한 문화에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트랜스젠더 남성이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추측은 좀 비약이 지나친 듯 하다. 잔 다르크는 스스로를 남성으로 생각해서 남성의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격렬한 전투에 편리하도록 기사의 복장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가톨릭의 성녀 테클라와 에우제니아가 남장을 하고 살았던 것 역시, 당시에는 여성이 혼자 은수생활을 하기에 위험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복장도착(transvestite)과는 무관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물학자로써 진화 과정에서 성적 다양성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나아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성 다양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제는 다수 혹은 표준과 다르다고 차별하고 불이익을 주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며(사실 동성간 성폭력의 경우에도, 가해자가 이성애자인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들은 평범한 우리의 친구, 이웃, 동료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동물의 다양한 젠더들에 대해 나오는 부분은 학술적인 편이라 읽기가 녹록치 않았지만(나는 과학에 약하다), 인간의 젠더와 문화사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면 훨씬 읽기가 수월해진다. 또한 더 자유롭고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용기있는 외침에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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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성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 보다는 그들에게 우리의 잣대를 대고 차별하는 것이 사회의 시선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더불어 모든 생활 속에서는 학력, 학벌, 남성과 여성의 차별 등 그 차별은 여러 모습을 띄고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 같아요. 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차별'이라는 단어로 색깔을 칠하는 것 역시 자신도 어딘선가 누군가에게 '차별'이라는 단어로 색깔이 칠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우매한 자신이죠.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키는 것은 찬성하며 제 개인적인 성적 호르몬은 여자를 무척 좋아합니다. ^^

교고쿠 2011-06-07 12:03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누구나 어떤 부분에서는 약자, 소수자가 될 수 있는건데...역시 인간은 일종의 '구별짓기'의 욕망이 강한 듯 합니다.

네오 2011-06-08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이군요~더 자유롭고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용기를 불어주는 책이군요^^

교고쿠 2011-06-08 10:11   좋아요 0 | URL
예, 비록 저자의 모든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가톨릭의 성녀들 이야기라던지) 50세가 넘었음에도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여성이 된 저자의 용기가 멋집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소래섭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 192~30년대의 이야기는 꽤 매력적입니다. 일제강점기하의 어두운 분위기도 있었지만 문학과 예술이 살아 숨쉬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그 시대가 어쩌면 지금보다는 더 낭만적이었던 느낌이 듭니다. <경성리포트>라는 책을 한참 전에 꽤 재미나게 읽었는데, 이 책도 그 당시의 내용을 다루고 있고 또 '명랑'이라는 감정 역시 일종의 주입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마인하르트 미겔 <성장의 광기> : 확실히 100년 전, 아니 30년 전과 비교해 보면 이 세계는 경제적으로 많은 성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성장한 만큼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때보다 더 지독한 무한경쟁에 내몰리며 열심히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워킹푸어 현상까지 심해지고 있지요. 언제쯤 이 세상은 미망에서 벗어나, 맹목적인 성장보다 진정한 '삶의 질'을 중시하게 될까요.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강의> : 실은 신간추천리스트에 올리면서 꽤나 고민한 책입니다. 자본론, 한때는 금기시되었던 책이니까요...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이론을 알고 있어야 착취에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수행 <세계대공황> : 서울대의 마지막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님의 책입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돌베개에서 너무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서경식 선생님 책부터 시작해서...꽤 어려워보이는 책이지만 읽어낸 후의 보람도 분명 있을것 같습니다. ^^ 

 

 

    

  

 제이슨 포웰 <데리다 평전> : <해체>로 유명한, 바로 그 데리다입니다. 저는 국문과 재학 시절 어떤 과목에서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처음으로 데리다의 <해체>를 읽고 열광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어떤 내용이었는지가 가물가물합니다) 데리다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하여, 그리고 덤으로 <해체>도 복습하기 위하여,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추천하고 싶으나 출간일이 4월 30일이라 고민한 책

최정태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  2006년에 나왔던 책인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새로 출간되었네요. ^^그러고보니 같은 저자의 책인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을, 신간평가단 8기 활동할때 추천했었지만 반응이 저조해서 탈락했었어요. 아, 저는 책이 많은 장소에 일종의 로망을 갖고 있습니다. 책이 쭉~ 꽂혀 있는 모습은 가히 아름답지요.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랄까요. ^^

 

 

  

5월 출간도서중 제가 이미 갖고 있는 책 : 미타니 히로시 외 <다시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장 미셸 지앙 <문화는 정치다> (그러므로 이녀석들은 제발 뽑히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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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5 0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 강의를 사서 독파하고 있는 요즘이에요. 김수행의 자본론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과 대조해서 읽고 있는데 새로 나온 자본론을 사야 할지 또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근데 왜이리 어려운지...괜히 읽고 있나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푸훕...

교고쿠 2011-06-05 19:26   좋아요 0 | URL
흑, 읽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아서 차마 손을 못 대고 있는 책들이 많아요. ㅜ.ㅜ항상 가볍고 읽기 쉬운 책과 깊이있고 어려운 책 사이에서 고민하는 듯 합니다.

루쉰P 2011-06-06 09:11   좋아요 0 | URL
저는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ㅋㅋㅋ 어려운 책은 장기적인 계획을 잡고 조금씩 읽어나가고 그 중간 중간에 가벼운 소설들을 읽으며 버티고 있죠.
독서도 정말 힘들어요. 취미 생활인데 말이죠. 푸훗! 왠지 이렇게 쓰니 정말 지성인 같은 느낌. ㅋ

교고쿠 2011-06-06 10:28   좋아요 0 | URL
사실 처음에는 책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글쓰기 수업...같은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인가 그것이 저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 편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데...

네오 2011-06-08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스와 김수행의 책이 쏟아지는군요~

교고쿠 2011-06-08 10:13   좋아요 0 | URL
예, 읽고 싶지만 차마 자신이 없는 책들입니다. 이론적인 기초를 탄탄히 해둬야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항상 엉뚱한 책들만 읽고 있어요, 흑.

윈터 2011-06-0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 말기의 '명랑'은 거의 '전장 용어'에 가깝죠. '명랑'을 소재로 한 시와 소설도 많이 쓰여졌구요. '명랑'이 획일적인 시국 수사로 활용되는 맥락이 흥미롭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에도 이와 비슷하게 '정서의 자원화'를 꾀했었죠... 국문학계에서는 이미 이와 관련한 논문이 여러 편 있습니다. 물론 소래섭 선생님도 이런 식민지기 정서 연구를 가장 활발하게 하신 분이고요. 저도 아직 책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유행'과 '풍속'을 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 풀어낸 책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교고쿠 2011-06-08 21:18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오래전 현대소설강독 과목이었나...여튼 수업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듯 합니다. ^^정서의 자원화, 이제 sentiment까지 일종의 관리할 자원으로 간주되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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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수리철학자, 탁월한 사회비평가, 그리고 반전반핵운동가였던 버트런드 러셀은 많은 글을 남겼다. <수학의 원리>, <게으름에 대한 찬양>,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행복의 정복>,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서양철학사> 등 그의 글들은 정말로 많은 분야에 걸쳐 있다. 평화와 시민권과 인권을 부르짖은 그는 195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거의 100세에 가깝게 장수했다. 하지만 이렇듯 유명한 그의 책들을 나는 여기저기서 약간씩 접했을 뿐, 아직 한 권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던 중 그의 글들을 발췌하여 묶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원제 Bertrand Russell's Best)>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의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챕터의 시작과 끝에는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져 있고, 이는 번역본에만 있는 듯 하다. 그의 저서나 연설 등에서 핵심적이고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을 발췌한 그다지 길지 않은 길이의 글들이 모여 각 챕터를 구성하고 있다. 러셀은 정치적으로도 꽤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국가간 분쟁을 야기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평화적인 수단을 찾아갈 것을 촉구하는 평화주의적 입장을 보였고 인류를 몰살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의 사용에도 강력히 반대했다. 평화주의자에 가까운 나로써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여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하고, 정치와 정치이론을 비판하는 그의 글은 꽤 신랄하고 풍자적이다. 또한 그는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역시 상당히 날카롭고 비판적인 글들을 남겼다. 그는 거침없이 의견을 표명하고 여러 차례 보수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공격당했음에도 '신성시되는'사안에 거리낌 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처럼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시류에 영합하고 권력에 굴종하는 학자들은 결코 지식인답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전혀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그는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에서, 유럽인 통치자들이 아프리카인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해온 일들이 인구 증가 때문에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고, 아프리카인들이 행적적인 훈련을 받고 책임감 있는 습관을 기르기 전에 갑자기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이식한 문명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제3세계의 인구증가 속도가 빨랐던 것은 사실이나, 과연 서구 열강 국가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도우려고' 그들의 땅을 식민지로 삼고 경제적 수탈을 일삼은 것인가? 그들은 자유를 누릴 능력이 없으니, 계속 식민지 지배를 당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러한 수탈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제3세계 국가들은 아직도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일종의 차별적 태도에는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 않다.   

또한 그는 불가지론(agnosticism)의 입장에서, 종교적인 신화를 해부하는 일에도 주저 없이 뛰어들어 불합리한 사례들을 찾아낸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가 무신론자인줄 알았는데, 그의 신에 대한 입장은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무신론과는 다르다. 그는 종교가 인도주의와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수많은 사례들을 예로 들고 있다. 19세기에 마취제가 발명되었을 때, 성직자들은 출산하는 여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취제를 쓰는 것을 반대했다. 창세기에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인체 해부에 반대함으로써 의학 발전을 방해했고, 육체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것은 죄로 이어지기 쉽다는 관점에서 목욕하는 것조차도 비난했다. 이처럼 과거 도그마로서의 기독교가 어떠한 이성적, 합리적 근거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박해했다고 러셀은 말한다. 나 역시 가톨릭 신자이지만, 중세 시대에 행해진 이단자 화형과 마녀사냥, 과학자들에 대한 탄압 같은 것은 결코 좋게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은 옳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참 흥미로운 것은 러셀의 저서 중 <결혼과 도덕>으로 인해 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부도덕하고 선정적이며 음란하다는 이유였는데, 그가 노벨상을 받자 많은 미국인들은 격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췌된 그의 글들을 읽어 봐도 특별히 음란하거나 외설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가 심하게 비난을 당한 이유는 아마 그의 성과 결혼에 대한 생각이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청교도주의적 도덕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흔히 행해지고 있는 이혼, 산아제한 등을 그 당시에는 금지했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피임방법을 알려주는 소책자조차 음란서적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외설스러운 내용을 기대하고 러셀의 책을 펼친다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기대했던 바에는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러셀의 사상과 글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토막내어 일종의 명언집과 같은 형태로 바꾸어버린 편집이 그렇다. 이것만을 읽고 러셀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주장들을 했으며 이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확실하게 캐치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든다. 러셀의 저서에서 인용된 각각의 글들이 전부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각 챕터의 시작과 끝에 덧붙여진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에 거의 남는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코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일종의 파편화된 느낌이 들어서, 이 책보다는 차라리 그의 저서들 중 관심있는 것을 하나 골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참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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