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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수리철학자, 탁월한 사회비평가, 그리고 반전반핵운동가였던 버트런드 러셀은 많은 글을 남겼다. <수학의 원리>, <게으름에 대한 찬양>,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행복의 정복>,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서양철학사> 등 그의 글들은 정말로 많은 분야에 걸쳐 있다. 평화와 시민권과 인권을 부르짖은 그는 195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거의 100세에 가깝게 장수했다. 하지만 이렇듯 유명한 그의 책들을 나는 여기저기서 약간씩 접했을 뿐, 아직 한 권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던 중 그의 글들을 발췌하여 묶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원제 Bertrand Russell's Best)>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의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챕터의 시작과 끝에는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져 있고, 이는 번역본에만 있는 듯 하다. 그의 저서나 연설 등에서 핵심적이고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을 발췌한 그다지 길지 않은 길이의 글들이 모여 각 챕터를 구성하고 있다. 러셀은 정치적으로도 꽤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국가간 분쟁을 야기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평화적인 수단을 찾아갈 것을 촉구하는 평화주의적 입장을 보였고 인류를 몰살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의 사용에도 강력히 반대했다. 평화주의자에 가까운 나로써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여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하고, 정치와 정치이론을 비판하는 그의 글은 꽤 신랄하고 풍자적이다. 또한 그는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역시 상당히 날카롭고 비판적인 글들을 남겼다. 그는 거침없이 의견을 표명하고 여러 차례 보수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공격당했음에도 '신성시되는'사안에 거리낌 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처럼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시류에 영합하고 권력에 굴종하는 학자들은 결코 지식인답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전혀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그는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에서, 유럽인 통치자들이 아프리카인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해온 일들이 인구 증가 때문에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고, 아프리카인들이 행적적인 훈련을 받고 책임감 있는 습관을 기르기 전에 갑자기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이식한 문명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제3세계의 인구증가 속도가 빨랐던 것은 사실이나, 과연 서구 열강 국가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도우려고' 그들의 땅을 식민지로 삼고 경제적 수탈을 일삼은 것인가? 그들은 자유를 누릴 능력이 없으니, 계속 식민지 지배를 당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러한 수탈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제3세계 국가들은 아직도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일종의 차별적 태도에는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 않다.   

또한 그는 불가지론(agnosticism)의 입장에서, 종교적인 신화를 해부하는 일에도 주저 없이 뛰어들어 불합리한 사례들을 찾아낸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가 무신론자인줄 알았는데, 그의 신에 대한 입장은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무신론과는 다르다. 그는 종교가 인도주의와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수많은 사례들을 예로 들고 있다. 19세기에 마취제가 발명되었을 때, 성직자들은 출산하는 여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취제를 쓰는 것을 반대했다. 창세기에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인체 해부에 반대함으로써 의학 발전을 방해했고, 육체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것은 죄로 이어지기 쉽다는 관점에서 목욕하는 것조차도 비난했다. 이처럼 과거 도그마로서의 기독교가 어떠한 이성적, 합리적 근거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박해했다고 러셀은 말한다. 나 역시 가톨릭 신자이지만, 중세 시대에 행해진 이단자 화형과 마녀사냥, 과학자들에 대한 탄압 같은 것은 결코 좋게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은 옳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참 흥미로운 것은 러셀의 저서 중 <결혼과 도덕>으로 인해 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부도덕하고 선정적이며 음란하다는 이유였는데, 그가 노벨상을 받자 많은 미국인들은 격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췌된 그의 글들을 읽어 봐도 특별히 음란하거나 외설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가 심하게 비난을 당한 이유는 아마 그의 성과 결혼에 대한 생각이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청교도주의적 도덕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흔히 행해지고 있는 이혼, 산아제한 등을 그 당시에는 금지했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피임방법을 알려주는 소책자조차 음란서적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외설스러운 내용을 기대하고 러셀의 책을 펼친다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기대했던 바에는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러셀의 사상과 글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토막내어 일종의 명언집과 같은 형태로 바꾸어버린 편집이 그렇다. 이것만을 읽고 러셀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주장들을 했으며 이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확실하게 캐치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든다. 러셀의 저서에서 인용된 각각의 글들이 전부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각 챕터의 시작과 끝에 덧붙여진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에 거의 남는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코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일종의 파편화된 느낌이 들어서, 이 책보다는 차라리 그의 저서들 중 관심있는 것을 하나 골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참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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