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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생활수준이나 경제력, 과학기술 등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고, 이 발전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몇백년 전, 아니 몇십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아주 쉽게 향유하고 있고, 오래 전의 사람들보다 우리는 훨씬 잘 먹고 풍부한 영양으로 인해 신체적 조건도 좋아지고 있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생활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일종의 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볼프강 작스를 포함한 세계의 저명한 발전 비판론자들의 글을 모아놓은 <反자본 발전사전(원제 The Development Dictionary)>은 2차 대전 이후로 발전론에서 나온 개념들에 대하여 논평하고, 발전, 환경, 평등,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빈곤,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생활 수준, 국가, 기술이라는 19가지 주요 개념을 통해 현재의 빗나간 좌표를 일깨워주고 있다. 제목은 좀 무시무시해 보이지만(무려 反자본이라니!) 그렇게 무서운 내용들은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
이 책은 성장과 개발을 절대적인 선으로 믿어온 우리의 고정관념을 꼬집으며, 화석 연료에 입각하여 쌓아 올린 공업 문명의 막강한 생산력을 무기로 서양(정확히 말하자면 제1세계)이 전 세계인을 지난 200년동안 어떻게 현혹시켜 왔는지를 드러내며, 서구 따라잡기에 급급했던 우리에게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사실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에서나 미래를 위한 희망은 오직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사람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상을 모범으로 삼는다. 하지만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생활하는 방식처럼 지구의 모든 인류가 생활하게 된다면, 지구가 몇 개 더 있어도 부족하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자원(특히 화석연료)를 소모하고 많은 폐기물을 내놓는 방식이고, 절대로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유럽-대서양의 풍요 모델은 18,19세기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생물 자원과 땅에서 캐내는 화석 자원으로 인해 등장한 것이다. 곧 예전에 제3세계에 대한 수탈로서 그들이 발전했다면, 지금은 지구에 대한 수탈로서 현재의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예외적 조건이 없었다면 공업 사회는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자원도 부족하고, 생물다양성도 사라지고 있으며 기후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이런 배경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발전'이라는 사고방식에서 결별함으로써 뒤늦게나마 식민지 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발전과 관련된 핵심 개념들을 까발린 이 책의 각 항목들을 읽으며, 그 동안 우리가 인식하고 있었던 개념들의 배후에 어떤 것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도움(Helping)이라는 것은 원래는 강도를 만난 나그네를 보살펴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처럼 긍정적인 것이지만, 사람들 입에 부스러기를 넣어주어서 자기들을 끌고 가는 힘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현대의 원조는 결코 측은지심(라틴어의 misericordia)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제도화되고 전문화되어 '도움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지 않고서는 도움을 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 사이에 권력 격차가 생기는 일 역시 흔하다. ("자, 우리가 가난한 너희한테 이만큼 줬으니까 고맙지? 그럼 말 잘 들어.") 결코 도움은 남아도는 것의 부스러기를 선심쓰듯 넘겨주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인구(population) 역시, '인간의 집단 혹은 집합'이라기보다 일종의 통제해야 할 자원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population이라는 단어에는, 제3세계 등에서 사람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저발전 국가들은 인구 폭증으로 말미암아 기아와 질병, 무질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피임과 낙태 권장 등을 통해 인구를 조절하는 것은 곧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20세기 초에 생겨난 피임도구들 역시 그러한 '인구 폭발'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주는, 일종의 공중 보건 조치에 버금가는 지위를 얻었다. 세계 1위의 인구를 자랑하고 있는 중국에서도 한족은 자녀를 1명까지, 소수민족은 2명까지 낳을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세계적 인구 통제사업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 저자는 '성행위를 쓸데없이 공적으로 제어하려는 사회적 열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반문하고 있다. 실제로 출생률이 떨어진 경우라도 그 원인이 가족계획 사업에 의한 것인지 인과론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한국의 저출산 문제만 해도 과연 가족계획 때문에 출산을 적게 하게 된 것일까? 그보다는 자녀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위에 예로 든 중국의 인구통제 정책 역시, 저렇게 통제를 한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자녀 가정에 부과하는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피하기 위해 나머지 아이들은 호적에 올리지 않아 의료, 교육서비스를 받기 어렵게 되어, 삶의 질은 더욱 악화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빈곤(poverty)의 개념도 이 책에서는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빈곤에 대한 인식은 문화와 언어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데, 그것을 하나의 틀에 집어넣어 GDP가 어느 수준 이상 되지 못하면 빈곤한 것이 되어 버리는, 일종의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으로 이 책에서는 빈곤을 정의하고 있다. 사제와 수도자의 가난은 스스로 택한 것이며 거룩한 것인 반면, 스스로 택한 가난이 아닐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경멸과 무시를 받는다. 또한 세계 경제가 도래하면서 1948년에 세계은행에서 내놓은 보고서에서는 국민 한 사람의 평균 수입이 100달러에 못 미치는 나라는 빈국이고 저발전국이라고 정의하며, 그러한 빈국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부국의 책임인데 가장 부유한 나라는 미국이라고 못박는다. 이렇게 해서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나라에 견주어 총수입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나라의 온 국민이 가난하다고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나름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세계 경제가 세계의 모든 빈민을 구원하고야 말리라는 새로운 물신 숭배(대표적인 예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빈민을 양산하는 경제, 정치 제도의 입지를 굳혀주고 힘을 실어주었다. 재물을 축적하기 위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경제 신화에 젖어들어, 검소나 자발적 가난의 길을 걸으며 생활 양식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은 평가 절하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그 외에도 무분별한 환원주의로 행복의 다양성을 줄여 버리는 '생활 수준(Standard of Living)', 가치를 수립하기 위해 오히려 가치를 박탈해 버리는 '생산(Production)',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것까지 중독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요구(Needs)' 등 읽으면서 정말 속이 시원한 개념 정의들이 많았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에 정말로 획일화된 발전과 성장이 필요한가, 좀 천천히 가며 여유를 갖고 주변도 돌아보고 덜 벌고 덜 쓰며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종종 했다. 이 정도 살면 충분히 잘 사는건데 이제는 그 파이를 좀 구석구석 나눠줘야 할 때가 아닌가 때로는 분노했다. 그러한 생각들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통상적인 믿음을 강력히 흔들어놓고 새로운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게 하는 이 책이 나는 너무 고맙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을 소비할 때는 그것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고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사용하거나 구입하지 않는, 자발적 가난의 길을 나는 걸어오려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말로는 가장 가난한 자를 위한다면서 캐비어 좌파(Gauche caviar)나 샴페인 사회주의자(Champagne Socialist)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성장과 발전이 항상 옳은 것인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