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은 김여물의 전략을 듣고는, 우리 병사는 기병이고 왜군은 보병이다, 왜군을 넓은 평야로 유인 한 후 날쌘 기병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사용한다면 이길 것이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선조의 보검을 받은 주장(主將)인 신립의 명이니 어쩌겠는가... 신립이, 군기를 떨어트리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호통을 치며 강행하니 이러다 죄다 죽겠구나 하면서도 김여물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의 영화들은 대군을 일렬로 죽-늘어서게 한 다음 정면에서 서로 맞짱뜨는 장면들을 곧잘 보여준다. 제갈량식 전투를 서구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병법은 일찍이 동양의 것이었지 싶다. 전쟁의 달인인 제갈량도 게릴라 전을 곧잘 쓰던 인물이었다. 이런 기똥찬 전투 방법을 제안 받았으나, 역사에 길이 남을 김여물의 책략을 신립은 묵살해버린 것이다.

 

 

임란 당시 조선군이 게릴라 전술을 써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역시 자료들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정기룡 장군이다. 정기룡장군은 기병을 지휘하며 왜군을 상대로 60전 60승을 올리는 전설을 써내려간 인물이다. 이 전설은 절대로 구라가 아니다. 실록이 전하고 있는 사실이다. 정기룡장군에 대한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나 학위 논문은 11편, 학술기사는 75편 정도가 있음을 확인한바 있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나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음). 정기룡 장군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왜란 당시의 눈부신 공로를 남겼고 후에 그 공로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자리를 제수 받는다. 그는 왜군에게는 최악의 패배를 남겨준 또 다른 인물이었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있었다. 그의 전술은 바로 조선의 날쌘 기병들을 게릴라식으로 운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기룡장군이 조선군의 장점과 왜군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지용을 겸비한 장군이라는 명징한 역사적 정거이다. 여하튼 정기룡장군은 기병을 운용하는 데는 단연 최고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기룡장군배 전국 승마대회」가 있을 정도이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정아무씨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정기룡장군의 리더쉽을 학술지를 참고하여 첨언하자면, 그는 자신이 벤 왜군의 머리를 부하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라고 쓰고 있다. 비록 신분이 노비일지라도 적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에게는 면천하여 양인의 신분을 주고, 비록 양인의 신분이라도 공이 많은 자(적의 머리를 많이 베어오는 자)에게 벼슬을 주겠노라는 선조의 선언이 있었다. 그리하여 왜적의 머리는 값이 비쌌다. 그 비싼 것을 정기룡장군은 부하 병사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어 공로를 그들에게 돌렸다. 이런 장군의 지휘를 따르지 않을 병사, 그 어디에 있을까... 나를 따르라! 그 공로는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라고 외치며 모범을 보인 장군의 리더쉽!  그러니 연전 연승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물론 선조는 전쟁이 끝나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지? 하면서 이 면천 제도를 철폐해버렸다. 아, 진짜.... [참고자료,「정기간행물 524호, 정기룡;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인들/ 국방부역사편찬위원회」] 정기룡의 살아있는 전설을 참고한다면, 당시 종사관 김여물이 제안한 기병을 운용한 게릴라 전술이 그 얼마나 왜군을 상대하는데 필요한 것 이었는지는 잘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신립은 이를 묵살해 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병서를 읽었고, 또한 화려한 전투 경험을 가진 신립은 하필이면 또 배수진을 고집했다. 사실 조선 병사들의 활솜씨는 천하가 다 인정하는 명궁들이다. 우리 땅의 사람들이 쏘아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은 예로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엉덩짝에 몽고 반점을 가진 족속들의 강력한 장기이다. 말 등짝에 훌쩍 올라타고는 날렵하게 달리면서도 화살은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그런 족속들 말이다. 그것이 화살이든 총포든 구별하지 않는다. 신립은 그런 기병의 기민함과 강력한 활 솜씨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힘을 이미 함경도에서 입증했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여타 장수들의 조언에서 언급된 사항만이 아니었다. 우선, 적장은 왜국 본토에서 숱한 전투를 치루며 끝까지 살아남았고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고니시(소서행장)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왜군은 침략 당일 부터 조선군을 상대로 파죽의 연승을 거두어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조선 침략을 철저하게 준비해온 왜군은 조총수들을 잘 훈련시켰다. 조선군은 조총의 이해할 수 없는 능력에 너무나도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왜군 제1 선봉대를 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육지의 조선군에게 유리한 점이라고는 날쌘 기병과 정확한 활솜씨가 유일했다. 더구나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였던 제승방략의 문제점은 본진이 무너지면 후방은 속수무책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치명타는 바로 일기(日氣)였다. 하필이면 신립이 필승의 전투를 벌이기로 한 그 전날에 그만 탄금대에 비가 내렸다. 출전하지 않았으니 아직도 기회는 있었지만 신립은 전술을 바꾸지 않고 밀어 붙인다. 조선군이 필승을 해도 모자랄 판에 탄금대는 조선군에게 최악의 불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전투는 절대로 패해서는 안 되는 전투였다. 패해도 되는 전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할 경우 임금은 한양을 버려야하며, 셀 수도 없는 백성들의 목숨도 풍전등화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립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장수였다. 신립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해본다면 전 조선군의 사기와 직결되는 전투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패전의 패전을 거듭하던 조선군도 왜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고, 또한 장수는 천하의 명장 신립이 아니던가. 조선의 국운이 이 한 번의 전투에서 갈린다고 볼 수 있는, 대 전환점이 되는 그야말로 절대 절명의 전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탄금대는 전 날 비가 내린 탓에 조선의 쾌도 기마병의 말발굽을 잡고 늘어졌다. 초장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나 싶었다. 초반 전투에 조선 기병들은 활을 쏴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마들이 급속도로 지쳐간다는 것이었다. 말의 발이 진창에 빠져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틈을 노리던 왜의 조총수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어 조선의 기마병들을 쏘아 넘어드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조군의 수십만 대군을 추풍낙엽처럼 베어내며 적진을 뚫고 내달리던 조운이라도 살아남지는 못했으리라. 기마병들이 혼비 백산하는 사이 왜의 창칼 잡이들이 진을 이탈한 조선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8,000∼ 16,000여 장졸들은 기량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무참하게 패했다. 계백은 죽기로 작정을 하고 결사대를 결성, 황산벌 전투에 임했다지만 신립은 결코 죽음으로 끝내서는 아니 되는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는 점이 계백과는 확연하게 다른 입장이었다,

 

 

조선의 모든 장졸들은 지휘관의 판단 착오로 그렇게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는데, 불과 한 나절만의 처참한 궤멸이었고 왜란이 발발한지 딱 보름만의 일이었다. 신립의 나이 47, 장수로서는 지용을 겸비할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신립은 지피(知彼)와 지기(知己)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조총의 위력도 잘 알지 못했다. 왜군이 조총수를 어떻게 운용하는지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조종으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로 조선의 기병들을 어떻게 운용해야 승리를 할 수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다. 오직 한가지, 신립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것은 자신감, 나 신립이야!, 하는 그 용맹함이었다. 탄금대 전투에서 전장에 나아가는 장수가 지장이어야 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보여준 이가 바로 신립인 것이다.

 

 

장수가 전투에 패배한 후 자신의 목숨을 장렬히 강물에 던지는 것으로 할 일은 다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목숨을 던져 용서받을 수 있는 전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전투가 있는 것이다. 탄금대의 전투는 목숨을 던졌다고 용서를 바랄 수 있는 성질의 전투가 아니었다. 장수 이일은 졸병들이 목숨으로 전쟁을 치루는 틈을 타 평안도로 내뺐다. 리더들이 이모냥이다. 오늘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이 참극은 왜란이 발발한 지 보름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장수 한 사람의 실책이 가져온 결과도 국운을 좌우할 만한 것인데, 현재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추운 날 수험생들까지 촛불 집회에 나가도록 하는 지도자의 실책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립의 판단 미스로 인한 패배의 소식은 바람보다 먼저 선조의 귀에 당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탄금대의 소식을 보고받은 선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신립이라면 승전 할 것이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했던 선조는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 또한 신립의 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피란도 가지 않은 상태였다. 신립에 대한 군왕과 백성들의 신뢰를 가히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신립의 판단 착오는 제승방략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후방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이다. 군왕은 도망가야했고, 그 많은 백성들은 무참히 참살 당하거나 왜군의 포로 신세가 된다. 신립을 협의의 충신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그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크게 놀란 선조는 장대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날, 부디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라고 목 터지게 외치다가는 쉬어 터진 백성들의 곡소리를 뒤로하고 불야 불야 몽진에 오른다. 애비에게 애원하는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치듯 선조는 온 백성들의 어버이가 되기를 그렇게 거부했다. 과거 이승만이 저 살자고 한강의 다리를 끊어 셀 수도 없는 국민들을 사지로 몰았던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그렇게 임금의 버림을 받은 백성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변했다고 전한다. 도성으로 들어와서는 경복궁을 불살라버렸다, 라고 이 날의 일을 선조수정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촛불 시위는 너무나도 얌전하고 격이 높은 수준이다.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조선의 냥반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패닉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냥반들은 가진 것이 많았기에 지켜야 할 것도 많았던 것이다. 피란은 그 모든 것을 죄다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신립은 그렇게 냥반들의 자존심마저도 산산이 무너뜨렸다.

 

⋇ 당시 경복궁 방화 사건을 「선조실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선조수정실록」에 새로이 추가된 내용인데, 일본의 자료를 살펴본 국내 학자들은 왜군의 실화로 판단하고 있다.

 

 

왜장 선봉 1군의 고니시는 탄금대의 기세를 몰아 단숨에 한양에 당도, 바로 입성했다. 탄금대의 패배는 왜군의 입성을 의미했던 것이다. 왜군 선봉대 2군인 가토 부대는 고니시보다 하루 먼저 성으로 들어왔다. 왜군의 선봉들은 말 그대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선의 궐에 들어선 것이다. 탄금대의 전투가 그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더불어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왜군들이 입성 할 때, 고니시는 흥인지문으로 들어왔고, 가토는 숭례문으로 들어왔다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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