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다. 오죽했으면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벌겋게 익어갔을까. 사과가 그럼 벌겋게 익지 파랗게 익어가야겠냐고 반문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이 여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씀. 그렇게 작열하던 지난 여름, 나는 모처럼의 친구와 그 뜨거운 땡볕아래에서 얼굴을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모처럼의 재회를 기념하며 각자가 준비한 책을 교환하고 날짜와 더불어 그 표시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소는 한 낮의 탄금대!

 

 

탄금대에서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8,000의 조선군을 추모하는 탑이 그들의 높은 충성심 만큼이나 우뚝하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 새 탄금대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도착한 나는 탄금대 주차장 변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가 이열치열, 따끈한 차를 마시며 기다린다. 곧 친구가 도착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탄금대로 향한다. 기왕 온 곳이니 탄금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나무 그늘이 있어 그나마 가능한 그런 날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우륵과 임경업의 혼을 담고 있는 탄금대의 전설. 그러나 내게는 우륵도 임경업도 아닌 또 다른 이의 전설에 그만 안타까움이 더할 뿐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신립과 8,000〜16.000 조선군의 전설이 그것이다. 「연려실 기술」과 「선조수정실록」은 신립과 그의 종사관 김여물이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몸을 던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예천의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신립이 왜군에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도 한다. 일본의 역사는 신립을 자신들이 붙잡아 참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역사서는 워낙 뻥이 심하고, 일본의 사학자들은 역사 왜곡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냥반들이라 기연미연한 것이 사실이다. 신립과 그 부하 장졸들의 충혼을 기리는 탑은 우뚝 솟아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애달프고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신립에 대한 평가는 바라보는 이 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혹자는 충신이라고 하고 또 다른 혹자는 장군으로서 마땅치 못하다는 것이다. 탄금대의 기록에 관한한 「선조수정실록」 보다는「연려실 기술」을 더 신뢰하는 입정이고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자신의 몸을 장렬히 던진 신립을 가히 충신으로 보고 싶다. 우주와도 바꿀 수 없다는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는 것이 나와 같은 범인으로서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한마디로 신립은, “터럭 하나라도 적에게 넘길 수 없다”며 장렬히 강물에 몸을 맡기었으니 또 다른 주장이 있기는 하나 그 곳이 바로 열두대이다.

 

 

이 장면에서는 삼국지의 관운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립은 함경도에서 거칠고도 거칠었던 이탕개의 무리를 파죽지세로 격파하여 그 이름이 드높았다. 당대 조선 최고의 장수였던 것이다. 물론 관장군과 신립은 인품이나 성정에서 큰 차이가 있는 인물들이다. 관장군은 기품이 있었고 고매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신립은 성정이 많이 거칠었다고 한다. 신립에 관한 논문을 살펴보니, 인간의 생명을 경시했고 독선적이며 과격한 성격을 지닌 인물, 이라고 평하고 있다. 불구하고 관운장을 떠 올리는 것은 관운장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남긴 말이 있기 때문이다.

 

 

솔까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않았던 손권은 제갈자유를 보내 관장군을 설득하려 한다. 제갈자유는 관장군에게 형주와 양주를 다시 돌려주고 가솔도 만나게 해주겠으니 손권에게 귀순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관장군이 누구던가. 당시의 입장이 제 아무리 코너에 몰려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순순히 회유에 넘어갈 인물이 아니잖은가. 그랬더라면 애초에 홀홀단신으로 오관참육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의(義)를 위해서라면 결코 목숨을 아낄 위인이 아닌 것이다. (공명의 형님만 아니었어도 제갈자유는 분명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갈자유의 회유를 묵묵히 듣던 관장군이 한마디로 답을 한다,

“玉可碎 而不可改其白(옥가쇄 이불가개기백), 竹可焚 而不可毁其節(죽가분 이불가훼기절)옥은 비록 부서져도 그 흰 빛을 잃지 않으며, 대나무는 불에 탈지언정 그 마디를 잃지 않소이다". 몸은 비록 죽을지라도 나의 이름은 죽백에 남아있을 것이오.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라며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어째거나 신립도 자신의 최후를 선택하여 자신의 이름을 죽백에 남겼으니 이 순간만큼은 나로 하여금 미염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마땅치 않은 부분도 있는 것이다. 사안은 솔직히 마땅치 않은 정도로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립은 자신의 명(命)으로 마무리를 했고, 결국 조선은 나라를 구했으니 완곡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 뿐이다. 기왕에 삼국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를 덧붙이고 싶어진다. 한비나 제갈공명 그리고 손자등은 장수를 여러 유형으로 분류했다. 

 

 

흔히 용장(맹장), 지장, 덕장, 현장등이 그것이다. (아, 조선의 서유대 장군은 특이하게도 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대단히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가끔 듣는 말로는 “용장불여지장, 지장불여덕장”이라는 말이 있다. 장수가 전투에 임해서는 반드시 지용(智勇)을 겸해야 한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지혜롭지 못할 때, 장수는 일을 크게 그르치고 만다. 그러므로 용장의 기상은 가상하나 일을 맡기기가 어렵다. 백전 불태가 아닌 백전 필패의 수를 둔다. 전장의 장수가 지용을 겸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용장은 부하 장졸들을 사지로 몰아넣기 십상이다.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처사이다. 신립은 조선 최고의 용장이었던 것이다.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신립으로 하여금 이를 격파하라는 구국의 명을 내린다. 날랜 기병을 포함하여 8,000혹은 16,000천의 조선 병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일은 직전에 이미 왜군과 붙어 패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일은 신립에게, 조령(문경새재)은 이미 늦었으니 한강으로 후퇴하여 방어진을 구축하자, 고 했다.

 

 

종사관 김여물은 말하기를, 왜군은 대군이며 조총에 능합니다. 조령은 산이 험하여 지형지물을 이용한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라고 조언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일과 이종장 역시 김여물의 전략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김여물 등은 전면전이 아닌 산악지역에서 일종의 게릴라 전을 구상했던 것이다. 사실 왜군이 한양 땅을 밟으려면 소백산 줄기의 령을 세 개나 넘어야 했다. 바로 당시에 조령이라 불렀던 문경 새재, 죽령, 그리고 추풍령이 바로 그곳이다. 이 세 곳은 방어를 구축하는 편에서는 자연이 준 요새나 다름이 없었다. 통과하는 적군의 목줄을 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형지물로 매우 험준하니 말이다. 게릴라 전술로 왜군의 진로를 막고 교란시키며 타격을 주기에 최 적합한 지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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