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의 서재 글에 대한 독자의 반응 란에는 “좋아요”라는 항목이 있다. 흔히 찬(贊)이 있으면 반(反)이 있기 마련으로 ‘싫어요’가 있을 법도 한데, 알라딘의 항목에는 ‘찬’은 있으되 ‘반’은 없는 경우이다. ‘찬’이 있다고 꼭 ‘반’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찬’을 하지 않은 나머지는 저절로 ‘반’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어서 침묵은 경우에 따라 ‘찬’으로도 ‘반’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중립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찬’과 ‘반’을 함께 묻는 경우와 ‘찬’만 있고 ‘반’이 없는 경우는 결코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전자는 양 극단 중 어느 하나를 반드시 도출해내야 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반면 후자는 ‘반’할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요긴하다.

 

이는 알라딘이 잘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알라딘의 알라디너에 대한 배려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항상 상대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직격(直擊)은 불가피한 전쟁에서나 사용하는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여기는 이유이다. 직격하는 글은 흔히 상대방에게 직접적이고 깊은 심적 내상을 주거나 정도가 심하면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을 통해 종종 접하는 비극적인 경우이다. 명분을 가진 내용의 글이 방법상의 문제로 그 누군가에게 불면의 밤을 선사한다면 이것은 정녕 글쓴이가 원하는 바는 아닐 것이라 여기는 바이다. 그러하기에 불가피한 전쟁에서나 사용하는 것이 직격인 것이다.

 

 

묵공은 어떻게 보면 전쟁의 달인이었다. 그의 전쟁 솜씨만 놓고 보면 얼마든지 병가(兵家)라 할만하다. 그러나 묵가(墨家)를 병가(兵家)라 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묵공은 직격(直擊)을 우선으로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불기피한 상황에서 만이 직격을 이용했다. 그의 사유는 겸애(兼愛)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가는 묵공의 겸애를 인의를 모르는 처사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묵공의 가르침을 공경한다.

 

목적이 정당하다하여 모든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녕 뜻을 이루려 하는 사람이라면 바르고 정당하며 가급적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작 핵심은 직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데 있는 것이니 말이다. 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무기탄하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방법론에서 자신만의 쾌감을 느끼는 것에 그치고 마는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경우를 두고 분노의 배설이라고도 했다. 좋은 명분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마치 욕구를 배설하는 느낌을 주어서는 원하는 바를 얻기가 어렵기에 하는 말이다.제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하나 매사에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원합의체’란 공산당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니 말이다. 공산당이 아닌 이상 안건에 다수의 동의를 얻고자 힘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중국의 한 대(漢代)에 내가 좋아하라는 음양가의 학설로 경학을 이해하려는 경학자들에 불만을 품고, 다른 종류의 경학에 시동을 걸었던 학파가 있었다. 이를 ‘고학’ 즉 ‘고문학파의 경학’이라 한다. 이들은 음양가를 괴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라 칭했고 유흠이라는 학자가 제창했다고 한다.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양웅(楊雄)과 왕충(王充)이라는 냥반들이다.

 

(주역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양웅과 왕충의 접근법을 공부한다면 주역을 훨씬 더 풍성하게 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양웅이라는 냥반은 중국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혁명가로 간주되는 인물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노자(老子)를 ‘인의를 배격하고 예절과 학문을 멸절한다’하여 노자를 멀리했다. 또한 장자와 양주를 평하기를 ‘제멋대로이고 법도가 없다’ 고 하였고, 또 내가 겁나 겁나 사모하고 있는 묵자와 안영(晏子)을 ‘예를 폐기했다’고 했다. 신불해와 한비는 ‘험악하고 교화를 무시했다’ 고 평했다. 신불해와 한비는 개인적으로 친근한 인물들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위에서 언급한 노장과 양주 그리고 묵자와 안자등은 양웅의 견해에 사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웅이 남긴 말씀 중 옳거니 하는 금쪽같은 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書不經非書 서불경비서

言不經 非言 언불경 비언

言書不經 多多贅矣 언서불경 다다췌의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글이 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말이 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말이 아니다

말과 글이 부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아도 군더더기이다

 

 

이 말을 다시 의역해본다면,

 

글을 다스리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말을 다스리지 않으면 말이 아니다

말과 글을 다스리지 않으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고 해로운 것이다.

 

췌(贅)라는 말은 ‘쓸모없다’ 거나 ‘불필요하다’ 또는 ‘군더더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풍우란은 한 발 더 나아가 췌(贅)라는 말을 ‘해롭다’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풍우란의 해석에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간혹 마주하는 직격하는 모습의 글을 보면서 뜻을 이루기에 더 가깝고, 거칠기 보다는 세련미와 더불어 배려를 갖춘 글을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퇴근을 했을 것이다. 중추가 내일 모레이니 말이다. 즐거워야할 중추에 증후군이라는 접미어가 뒤따르는 요즘이다. 때로는 한 가정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중추인 듯하다. 알라디너분들께서는 부디 즐거운 중추를 맞이하여 서로 반갑고 고마운 중추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부디, 몸은 힘이 드시더라도 마음은 즐거운 추석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토록 노래를 잘 부르는 오연준님,

아직 치아도 다 갈지 않은 나이 같은데, 어찌 이리도 노래를 잘 무른단 말이오??

그대의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찌든 내 마음의 때를 올올이 벗겨주는 듯 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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