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의 등뼈 푸른사상 시선 7
박승민 지음 / 푸른사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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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시(詩)를 읽는 것은 고전을 제대로 읽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인이다. 시에 대한 느낌을 적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감히 시집에 대한 리뷰를 남겨본 적이 없는 이유다. 그러나 「지붕의 등뼈」는 왠지 특이한 느낌을 주는 시집이다. 시집에서 느끼는 시인의 스타일과 (산문형식의 시를 종종 쓰는 작가이다, 낮선 장면은 아니나 시어들의 아름다움 덕분에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읽었다) 시는 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도록 충동질 한다. 정말 묘한 시집이고 묘한 일이다. 해서 두서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나아가 가소로운 느낌을 가소로운 리뷰로 남기고 싶을 뿐이다.

 

하여 몇 편의 인상적인 시를 중심으로 적고자 하는 이 리뷰는 시인에게 무척이나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시인의 독.자.라는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외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너그러운 관용을 바랄 뿐이다. 

 

시집은 120쪽, 결코 두터운 것은 아니나 제목은 마치 무언가 체중계에 올려놓기도 전에 묵직하게 전해오듯,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다. 누구의 무게감일까, 그 삶이 고단하고 앙상하며 성기고 마른 어느 삶을 연상시킨다. 등뼈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읽지는 못하겠구나 싶다. 더불어 그 고단한 등뼈를 독자의 가슴으로 바라보고 어루만지며 느끼고 공명하고자하는 마음이다.

 

첫 번 째의 시, 「십칠 나한상(羅漢像)」은 그러나 도리어 이런 나의 등을 위로하듯 가볍게 두드려준다. 마치 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격려하고 있다. 경쾌하고 맑으며 사뿐하다. 그런데 이 냥반, 끝내 내 가슴을 한 대 퍽, 하고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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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옆에 종이 방석 하나 깔고

한 백년 쯤 앉아있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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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칠 나한상(羅漢像)」 중

 

 

종이 방석에, 한 백년 쯤 앉아 있고 싶댄다... 시인 옆에 나도 그렇게 한 백년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가슴이 먹먹하다. 이렇게 몇 방 얻어맞으면 결국 나도 피멍이 들겠구나..,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시인의 가슴과 비슷해 지겠지.

 

그리고 한 칸을 건너 뛴 시, 「메모」에서 시인은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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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이 비루하고

때로 지하에 떨어지는 철렁함이

매 끼니마다 찾아온다 해도

꽃은 어느새 날아와 그 자리에 피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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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어도

나 앉았던 자리에 꽃이 피고 눈이 내리는 쓸쓸함에 대해서

아니,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메모」의 일부

 

 

“꽃은 어느새 날아와 그 자리에 피었다”. 아, 이런 표현은 시인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아니 내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해낼 수 없는 시인의 언어겠지... 감동이 밀려온다. 내가 결코 시인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시적 표현에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시어들을 나는 몇 번이고 되풀이 읽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이 단호한 시인의 어조 속에서 나는 그레고리오의 현실과 시인의 시퍼런 슬픔을 보았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기저에는 시인이 처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인의 언어가 나의 심장을 같은 색으로 서서히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행,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다다르자 나는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 앉은 두 개의 공간을 마주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시집의 초장부터 나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잠시 후, 시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독자인 나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일단 시가 독자의 손으로 넘어 온 이상, 이 시는 나의 것이다. 나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음’은 초월적인 그 무엇 이라기보다는, 시인이 가장 절실하게 보듬고 싶어하는 세상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이다.. 결코 시인에게 ‘그 아무렇지도 않음’은 ‘절대로 아무렇지도 않음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박시인의 관조는 맑은 관조이다. 시인이 남다른 이유이겠지만 말이다. 시인은 우리 삶의 사소한 부분을 간과하지 않는다. 「명자 씨」,「빨래」, 「미선이」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시인이 무척 궁금해졌다. 시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관조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 시인은 작고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 관조를 보여준다. 결코 호방하지 않다는 말이다. 시인의 침잠은 알고 보면 스스로의 낮춤이다. 대상을 자신의 높이로 끌어올려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숙여 대상과 함께한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기도하며 말이다. 

 

가장 좋은 느낌은 독자를 휘두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를 휘두르려는 시는 처음에는 달달하지만 지나친 단 맛에 그만 독자가 물려버리고 만다. 박시인은 음식의 당분을 적정량 첨가한 느낌이다. 아니, 다른 시에 비해 약간의 당분을 되려 뺀 느낌? 아, 이것도 아니다. 달지 않은 당분을 안에 깊숙하게 숨겨 놓은 그런 느낌이 맞다. 이 느낌이 맞다. 씹을수록 고유의 단 맛을 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나는 새로운 시인의 탄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시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왠지 또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처럼 돌아서면 왠지 또 읽고 싶어진다. 애써 리뷰를 적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 보면 어느새 이미 깊이 깊이 내 가슴은 시인이 풀어준 물감에 배어 있음을...     

 

 

드디어, 「지붕의 등뼈」와 마주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바로 그 시이다.

 

 

  지붕의 등뼈

 

노인성 척추 측만증을 앓는

지붕의 등뼈는 난감하다

 

너무 오래 비를 맞아

가벼운 새의 발놀림에도

얇은 비스킷처럼 부서진다

어떤 기와는 살갗이 벗겨져

갈비뼈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수많은 모래와 모래가 만나

물이끼 같은 한 세월 이루었으나

밤새도록 내리는 장대비를 맞고 있는

한사코 제 등으로 비를 막는

어머니의 등뼈,

 

낡은 빨랫줄처럼 위태롭다

 

                      지붕의 등뼈, 전문

 

 

시인이 바라본 어머니가 어떤 상태에 계신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시인의 어머니께서는 아직 생존에 계신 모양이다. 그러나 그간 한 세월 고생하신 덕분에 척추가 휘고, 몸도 휘었다. 위태로운 시인의 어머니... 곧 무너져 내릴 것 만 같은 집, 낡은 집을 떠 받들고 있는 아슬아슬, 위태로운 지붕의 등뼈, 앙상하고 고단하며 성기다.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깊이 전해온다.

 

이 모습이 시인의 어머니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기에 더 깊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대부분 이런 모습을 하시고 계시다. 이토록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들이 우리의 어머니를 잃는 그 순간, 우리의 집도 와르르 무너지는 참담함을 경험할 것이다. 마음이 정녕 헛헛하다.

 

「지붕의 등뼈」에서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물론 나의 지독한 편견에서 비롯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위의 작품에 등장하는 직유법은 모두 세 번이다. ‘비스킷처럼’ ‘물이끼 같은’  ‘빨랫줄처럼’ 이 그것이다. 시에서는 직유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느끼는 일인이다. 소설이라면 얼마든지 허용하지만 시에서는 직유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환원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다. 크게 길지 않은 한편의 작품에서 세 번의 직유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느낌을 적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박시인의 첫 번째 시집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딜레마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다시 시집의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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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어도

나 앉았던 자리에 꽃이 피고 눈이 내리는 쓸쓸함에 대해서

아니,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위는 초반에 언급한 「메모」의 일부이다. 처음에는 뭔가가 상통하지 않는 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부분이다. 그러나 시인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딜레마는 딜레마가 아니었다. 이것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박시인의 시적 태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의아했던 대목이 풀리는 순간이다. 대표적인 예로 시인은 「화기―능소화」에서 “저 환한/ 주홍빛 일주문 열고 들어가면/ 미련도 미련 없이 해탈할까?/” 라고 자문한다. 어쩌면 현실의 도피일 수고 있는 시인의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다는 아니다. 「당신과 나 사이」, “그럴수록 당신의 몸에 내 몸 섞으려는” 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늘 상대성을 인정한다. 세상과의 간극을 관조하고 인정하며 나아간다. 시인의 태도는 결코 침잠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늘 관계하고 있다.   

 

한편, 시인의 그레고리오에 대한 절절한 언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내 가슴도 덩달아 멍들어가는 느낌이다.

 

「역류성 식도염」, “아무리 흘러가도/시간은 거꾸로 온다/ 내 목구멍을 화롯불 같은 입맞춤으로 지져놓고/” 「사라지는 시어들」, “갑자기 방안에 입 다물고 있던 안개들/ 일제히 일어나 키득거린다/” 「가홍동 마애불」, “밤새워 벼린 조선낫 같은 손으로/ 바위를 쪼개고 또 쪼갰을 것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오는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 일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의 그레고리오를 세상으로 환원시킨다. 시집 전체에서 보여주는 시적 태도는 그리하여 흐름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쯤에서 어느 알라디너가 자신의 서재에 썼던 말이 떠오른다. “시는 시집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라는 표현 말이다.  

 

 

시인의 시는 결코 넘치지 않는다. 박시인의 태도는 독자를 후리려 하지 않는다. 독자의 가슴을 후리는 시인은 욕망이라는 덫에 걸린 시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런 시인은 흔히 머리로 시를 쓴다. 박시인은 결단코 그러한 짖은 하지 않는다. 박시인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시를 잉태하고 출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부족하고 모자란 모든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약한 모든 것에 대하여 마음으로 다가가 조용히 자신의 가슴을 내밀고 손을 내민다. 소란스럽지 않다. 호방하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이다. 시인은 슬픔을 꼭 이기려하지 않는다. 작은 슬픔일지라도 말이다. 시인에게 주어진 상황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품어 않고 가는 것이 시인의 세상을 향한 태도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적 태도와 전혀 닮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안타까이 여기는 심정을, 에미가 버린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시가 반드시 승화작용을 해야 한다거나, 초월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새로운 나의 깨달음을 박시인을 통해 얻었다. 때로는 초월이나 승화는 우리의 실제 가슴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기에 말이다.

 

시의 전반적인 느낌은 지극히 사적으로 독자와 마주하여 만나는 느낌이다. 청빈한 초대의 장 말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다. 노골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세련된 절제미를 느끼게 해준다. 가식 없는 시어가 나를 사로잡는다. 독자인 나를 후리려 하지 않는다고 느낀 이유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시어들을 속.박.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어들은 그야말로 자.유.를 얻는다.

 

우연히 발견한 시집이 신선하고 매력있다. 돌아서면 왠지 또 다시 돌아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내가 박 시인의 시를 되돌아보고 또 돌아본 것 처럼 말이다.  앞으로 더더욱 대한민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러리라 믿는다. 박형(朴兄). 인테넷 검색으로 바라본 그레고리오 아비의 미소가 맑더니, 시에서도 그 맑은 영혼을 느끼게 한다. 오염되지 않은 미소 속에 어찌 이런 시어들을 감추어 두었소? 박형(朴兄)! 이 독자, 박형을 사랑하오.

 

PS: 맨 마지막에 고봉준이라는 분의 해설이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다. 마치 정현종의 「시의 이해」를 읽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국문과 강의실에서나 있을 법한 해설. 출간된 시집의 해설은 독자와 소통을 위한 장(場)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소통을 위한 장이 아니라 마치 시를 통해 이어졌던 그 맥을 단절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러 번 읽고 나서야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찾아갈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겁나 어려운 해설이라는 거다.  

 

행여나 하고 시인의 두 번 째 시집 「슬픔을 말리다」를 살펴봤다. 다행이다. 정우영씨의 해설은 소통을 위한 장이 틀림이 없었다.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썼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오의 아비에게 이 어줍잖은 리뷰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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