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날」 이라고 하니 과거 누군가가 제게 해준 말이 떠오르는군요. 그는 인생을 발전 시켜가는 3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좋은 터요, 둘째가 스승님이고, 마지막이 좋은 책이다, 라는 것입니다. 터라는 의미는 자신의 환경을 말하는 것이지 싶고 스승님이야 말로 해 무엇 할까 싶습니다. 책은 셋 중 가장 접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좋은 터와 스승님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책은 마음만 먹는다면 되는 것이다, 라는데 동감합니다.
알라디너들께서야 늘 책과 함께 사시는 분들이지만 우리나라의 독서 현실은 꼭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런 우리의 독서 현실에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책의 날이 우리의 독서에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설문을 보니 답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도 있군요. 처음에는 왠지 겸연쩍어 주저했으나 어쩌면 제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평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는 답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하군요.
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첫 번째인데 답하기가 좀 부끄러운 질문입니다. 솔직히 고백해야하고, 그래야만 의미가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은 장소에 구애받는 편입니다. 편안해야 하고 방해하는 요인이 거의 없을 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제가 좋아하는 고전 음악 조차도 방해가 되더군요. 특히 집중력을 요하는 책들은 더욱 그러한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바로 침대입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이는 매우 어렸던 초등학교 시절의 환경 덕분에 생긴 버릇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기가 없었고 책상도 없었지요. 특히 밤에는 호롱불 아래에서, 혹은 등잔을 머리맡에 내려놓고, 가끔은 머리를 등잔 불꽃에 지져가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자리를 깔고 뒹굴거리는 버릇이 들어버렸네요.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을 실감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선호하는 장소는 욕실입니다. 반신욕을 하면서 책을 읽을 때 상당히 집중도가 좋고요. 물이 식는 줄도 모르지만 시간이 가는 줄 모르다가 몸이 차가워지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아, 저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도 독서를 합니다. 위험하지 않냐구요? 이해가 잘 안되시겠지만 답을 마칠 때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독서가 진정한 애독자라 할 수 있겠으나 이에 미치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기는 합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앞으로는 어떨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는 99% 종이책으로 읽는 실정입니다. 한때 메모를 하기도 했으나 다시 읽는 일이 거의 없어 독서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요. 언젠가부터 책의 여백에 직접 떠오르는 생각을 쓰고 밑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알고 보니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던 대학 1학년 때부터였습니다. 해서 타인에게 양도하기가 쉽지 않은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책에 좀 미안하기도 하구요.
좋은 점은 하나 있기는 합니다. 재독, 삼독할 때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빠르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으로 읽을 수 있거든요. 이 효율성은 제가 밑줄 긋는 버릇을 고칠 수 없게 하는 핵심 요인입니다.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많은 독서가들이 그러하시겠지만 머리 맡의 책들은 현재 읽고 있는 책과 가장 탐을 내던 책들이며 가장 애지중지하는 책들입니다. 또한 언제고 다시 꺼내 보아야 하는 책들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정권에 두고 있는 책. 이런 책들이 제게도 몇 권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 볼까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상품 넣기로 대신할까 합니다.
최근에 구입하여 머리 맡에 있는 책
오래도록 머리 맡에 있는 책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장르별로 배열하는 것은 신속한 되찾기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애용하고 있습니다.
책의 소장 관련 질문은 알라디너들이라면 한 번 쯤 고민해봤을 법하군요. 저도 한때 고민을 많이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20 여 년 전의 일일 것입니다. 이 고민도 결코 결정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지요. 결국 간소함을 선택했습니다. 정예 맴버 500권으로 하자는 것이 저의 결론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책의 상태에 따라 양도하거나 기증, 양도나 기증이 어려운 상태의 책은 분리수거 합니다. 종종 양서들을 제가 알고 있는 서당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서당이라도 한자로 된 책만 읽으라는 법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훈장님과 상의 했습니다. 훈장님은 흔쾌히 승낙하셨지요.
지난 해인가 헤세의 글에서 책 정리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정예 맴버를 구축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헤세도 그랬구나 싶은 것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 라는 의미에 대한 약간의 정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책과 관련한 ‘어렸을 때’ 라는 말은 일반 적인 어렸을 때와는 제 스스로 구별하고 있었거든요. 개개인에 대한 질문이니 제 생각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서와 관련한 ‘어렸을 때’의 정의는 제 스스로를 돌아보면 ‘20대 중반’ 까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생 때 읽었던 그 많은 책들을 사실 저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일리아드」,「니체 전집」,「장미의 이름」그리고 「달과 6펜스」등 입니다. 교양 철학의 한 교수님께서는 대학생이라면 일리아드는 필독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일리아드를 읽었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니체 전집」은 말할 것도 없고「장미의 이름」과 「달과 6펜스」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알고 보면 이런 책이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저 스토리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징은 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쉽게 접했던 고전들은 알고보면 은밀하고도 심오한 상징들 투성이 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 상징들의 의미를 나이가 훨씬 더 들어서야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한마디로 이제야 말입니다. 현재의 저는 새롭게 고전을 읽어가며 고전이 왜 고전인지 새롭게 깨닫고 있는 중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제게 ‘어린 시절’은 20대 중반 까지입니다. 그 어린 시절 제가 가장 좋아했던 소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김유정의 소품「동백 꽃」입니다.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로 시작하는 「동백꽃」이 너무 좋아 저는 달달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들고 다니며 책이 닳도록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지요. 수탉을 매개로 주인공과 점순이의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4월 연두 나뭇잎의 파릇한 감정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김유정의 「동백꽃」을 사랑합니다.
더더욱 좋은 것은 이 버릇의 발전에 있습니다. 대학 때부터 마음에 드는 문구나 책을 달달 외우던 버릇은 나이가 더 들어 고전을 외우는 것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못 다한 이야기인데요. 제게는 운전을 할 때도 매우 중요한 독서 시간입니다. 고전의 내용을 바로 제 목소리로 녹음한 음성 파일을 운전 중 들으며 따라 읽는 것 입니다. 제게는 최고의 고전 독법입니다. 행여 고전을 암기하고자 하는 분이 계시고, 운전 시간이 좀 있는 분에게라면 적극 권해드리고 싶을 만큼 효과는 단연 최고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가장 곤혹스런 질문이지 싶습니다. 제 스스로에게는 여전히 놀랄만한 책이지만 제가 아닌 남들에게는 전혀 놀랄만한 책이 아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리에 관련한 책으로 스승님께서 수십 년 전 쌀 6가마니를 주고 사신 책입니다. 안동의 어느 집에서 이 책을 내놨다는 소식을 들으신 스승님께서는 한걸음으로 달려가 구입하셨다고 합니다. 사실은 이 책보다는 스승님의 판단과 결정이 놀라울 뿐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제가 가지고 있는 사본 직지원진입니다.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이는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반가운 질문입니다. 사적으로 만나고 싶은 두 분이 계십니다.
첫째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입니다. 그는 「중용」의 저자로 알려져 있고 곽점 출토의 백서(帛書)로 보건데 거의 확실한 듯 보입니다. 중용 장구 중 한 글자를 왕숙이 첨가하고 송대의 주희는 그 부분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대학」에서도 주희의 스승은 글자 하나를 손질 했는데 주희는 이를 무비판하여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대학에서 그들이 바꾼 한 글자는 조선의 유학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대학」 역시 자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자사가 지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사’ 라면 저의 궁금증을 명료하게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자사는 공자보다 철학적으로 더 깊이 있는 인물이라고 여깁니다. 가능하다면 가르침을 직접 받고 싶군요.
둘째로는 헤르만 헤세입니다. 그는 동양의 고전을 상당히 섭렵한 인물로 사서는 물론 노자, 심지어 여불위의 저술까지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공맹과 주역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이상을 넘나드는 헤세에게 동서양의 사상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어떤 생각을 진솔하게 펼쳐 줄지 정말 궁금합니다.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책의 날」을 두 작가의 사망일로 정했다는데,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라고 합니다. 「돈키호테」를 꼭 다시 읽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그 버전이 아닌 제대로 된 버전으로 말입니다. 어린 시절 잠시 거친 책들을 다시 찾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실은 제 자신이 그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그런 식으로 읽어버리고 말 고전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가 더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상술의 희생자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고전의 진정한 맛을 저는 어린이 버전으로 지나쳐 왔으니 말입니다. 아, 개인 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물론 다 읽지 못한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언젠가 서재에 고백을 했지요. 바로 「리만 가설」입니다. 어지간하면 완독하려고 애씁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도 예의지만 자존심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왜 ^^. 그러나 이 책은 제 능력으로는 절대로 끝가지 읽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결국 스스로 중도이폐하고 말았지요. 이럴 때 정말 씁쓸합니다 ㅠ.ㅠ.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답하기 가장 곤란한 질문입니다. 꼭 골라야 한다면 「반야심경」, 「중용」 그리고 완역 소설 「삼국지」입니다. 무인도에서 탈출할 때를 기다리거나 준비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반야심경. 반야심경은 물론 주석이 상세히 달려 있는 책이라야 합니다. 주석이 없는 책은 능력 밖이니까요. 행여 깨닫는 순간 무인도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선택합니다. 필수 템인 이유입니다.
불경과 더불어 「중용」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경전입니다. 음성 파일을 만들에 제일 먼저 시작한 고전이 중용이고 가장 다양한 버전들을 읽은 대상도 중용입니다. 도서를 가장 압축시키고 나머지 버전들은 가장 많이 양도하거나 기증한 책이기도 합니다. 자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도 중용의 장구에 있지요. 그 가르침이 지극히 성스럽다고 늘 여기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 끊임없이 읽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책이 바로 중용입니다.
재미하면 삼국지. 무인도라 진짜 심심할 것 같습니다. 심심할 땐 혼자 놀아야 하잖아요. 이럴 땐 삼국지가 제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싸움터에서 상대방에게 외치는 장면들은 정말 웃기고도 재밌습니다. 특히 장비의 입이 걸쭉하고요. 언쟁이 전투 못지않게 재밌는 소설이 삼국지인 듯 합니다. 혼자 소리 내어 읽다보면 지루함은 어느새 사라질 것만 같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질문에 하나씩 답하며 제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 생각해 본적이 있는 질문도 있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질문도 있었습니다. 왜 어떻게 책을 읽는지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요. 그냥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설문의 기회는 뜻밖의 생각을 하게 해주었고, 개인적으로 매우 유익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