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3 - 연산군에서 선조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3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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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나라를 안에서는 국가(國家)라고 부르고 밖에 나가서는 흔히 조국(祖國)이라고도 부른다. 국가(國家)는 나라(國)의 근본이 각 가정(家)에 있고, 조국(祖國)은 나라가 각 가정의 가족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용어이다. 한마디로 ‘국가’는 나의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말로 나와의 간극을 사실상 찾아볼 수 없는 말인 것이다. ‘국가’라는 한마디 용어는 나의 가족사를 내가 알아야 하는 것, 즉 내 조국의 역사를 내가 알아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국사는 남의 일이 아닌 나의 과거사인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나의 과거사인 국사가 한때 선택과목으로 전락하는 참담한 일을 겪기도 했지만 혹자는 말하기를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고도 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카는 한 술 더 떠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신경 하거나 접하기 어려운 상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잖은 듯 하다. 이야기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면서도 나라의 이야기에 소원하게 되는 것은 이야기를 이야기로 접하기 보다는 치열한 입시 경쟁 과정에서 오는 부정적 경험이 상당부분 작용한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거나 국민이 국사와 소원해지면서 한동안 역사는 전공자들의 영역으로 퇴보하는 듯 했다. 
  
 
그러나 최근 ‘역사저널 그날’은 나라의 이야기를 서로의 이야기로 풀어가면서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국사의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역사저널은 어려운 국사가 아닌 나라의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이야기보따리를 싫어하는 사람 있으랴. 그곳이 어디이든 예부터 이야기꾼이 보따리를 푸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았던가. 더욱 흥미로운 일은 역사 전공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진행자와 매번 등장하는 말뚝 회원인 시인 류근이다. 역사 비전문가를 역사저널에 등장시킨 의도는 분명하다. 이야기에는 전문가 비전문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전하고자 하는 의지로 이해하고 싶다.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 된다 뭐 그런...
  
 
책은 목차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연산군(1494)에서 임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기축옥사(1589)까지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흥미롭게 이야기 보따리를 펼쳐보이는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장
연산군의 폭정이 그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연산군일기는 반정 주체세력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가필을 했을 것으로 의심이 되지만 김처선의 비극적 죽음은 연산군의 폭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처선 같은 내관이나 공길 같은 광대가 나서야 할 만큼 국가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다.” (15-6쪽) 라고  출연자 중 하나인 신병주님은 상황을 또렷하게 설명해준다.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아니라, 그 신하가 아니라, 그 임금과 신하 밑에서 시름하던 그 어린 백성들이 말이다. 
  
 
 
2 장 
쿠데타였던 중종반정(1506)이다. 제왕의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던 진성대군은 신하들에게 한마디로 업힌 채 어좌에 앉는다.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었던 중종은 자연스럽지 못한 과정을 밟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강제 이혼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는가 하면, 자신을 등에 업어준 3 대신이 들고 날 때마다 몸소 어좌에서 몸을 일으키는 군약신강의 뼈아픈 체험을 한다. 남의 힘을 빌려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일이다. 
  
 
중종 재위 당시 조선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김종직의 직계이고 정동대감이라 불리는 정암 조광조의 출현이었다. 도학정치로 조선을 새롭게 만들려했던 풍운아 조정암은 33세에 관직에 나가 1519 기묘년에 화를 당해 죽으니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 장에서는 조정암의 정치적 이상인 도학정치를 엿볼 수 있음과 동시에 중종의 인물됨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조정암을 사사한 일을 두고 당시 사관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한다.
  
 
정이 부자처럼 가까울 터인데 조금도 가엽게 여기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했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듯하다. 69쪽
  
 
이런 경우를 두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식여도(食餘挑), 먹다 남은 복숭이라 했다. 더불어 사마천은 대의와 명분을 위해 죽음을 택한 ‘예양’을 자객열전의 반열에 올려놓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士爲知己者死), 라고 덧붙였는데 주군은 조광조를 외면했으니 정동대감을 탓하랴, 배신의 주군을 탓하랴....
  
 
 
3장 
임꺽정이 등장한다. 효성이 지극했고 조정암을 신원시킨 인종은 세자로 있다가 1544년 등극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그해 돌아가신다. 인종의 짧은 재위기간이었던 만큼 ‘그날’에서는 바로 명종으로 건너간다. 명종하면 아무래도 임꺽정이 대세가 아닌가 한다. 이는 백성의 고단함이 고단함을 넘어 도적이 되던 시절이었다 한다. ‘백성의 영웅, 임꺽정’은 백성의 고통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말일 것이다. 사관은 명종실록을 적으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을 도적으로 만든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79쪽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고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100쪽
  
 
‘그날’은 당시 우리 선조들의 실상을, 스스로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할아버지세대들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관도 임꺽정의 출현을 개인이 아닌 국가 시스템, 즉 국가와 사회의 문제로 인식했다.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던 조선, 단지 명종 때만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가정맹어호라 했던가. 국가의 포탈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4장 
정철과 기축옥사(1589)이다. 당시 위관이 누구였느냐를 두고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은 송강 정철을 당시의 위관으로 보고 있다. 당시 조선의 인구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700만에서 1,0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기축옥사 당시 죽음을 강제당한 사람의 수는 1,000명 정도라고 한다. 당시의 인구수로 보아 사망자 수의 규모는 놀랍기만 하다. 현재의 비울로 본다면 5,000∼7,000명 정도의 규모인 것이다. 당시 조선에 참담한 비극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사건의 담당자를 ‘그날’은 바로 송강 정철로 보는 것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배후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고변을 시작으로 조선에 불어 닥친 피바람을 ‘그날’은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또한 정철에 대한 극과 극의 평이 공존함을 전하는 대목은 인생무상을 연상시킨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기축옥사를 일으킨 장본인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송익필을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날’은 사건의 발단이 된 배경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기축옥사가 있던 해는 1589년(己丑年)으로 선조 22년째 되는 해이다. 당시는 이미 동서로 붕당 분열한지 10여년이 되는 해였던 것이다. 기축옥사의 피해자는 모두 동인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건의 배경을 좀 더 살펴도 좋았다고 본다.
  
 
 
5. 6. 7장은 조선 사회를 다방면으로 조명한 내용들이다. 우리 역사에 새로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닌가 한다. ‘그날’ 시리즈 3은 임란이 일어나기 직전에서 끝이 난다. 4번 에서는 임란과 두 호란을 포함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세 번의 전쟁으로 조선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드는 참극을 경험한다. 한 국가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다니....이 얼마나 큰 고통의 연속 이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조상은 나라를 지켜냈던 것이다. 사건으로 점철되는 것이 역사던가. 사건들은 모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지 싶다.
  
 
역사는 현재의 나와 무관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현대의 독일인들은 과거 잔혹사가 자신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 후손으로서 책임을 느낀다하여 사죄하고 반성하며 피해자들에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예를 갖추고 있다. 프랑스와는 공동 역사교과서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역사에 진솔하며 투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조상들의 잘못을 왜 후손들에게 묻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일본은 국가가 앞장서서 교과서를 왜곡하고 불리한 과거사를 숨긴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리발이다. 오죽하면 이를 보다 못한 세계의 지성인들이 규탄을 다하겠는가. 한,미,일, 유럽의 지식인들 524명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 바로 어제, 2015년 7월 29일이다. 일본의 지성인들마저 자신들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며 일본의 역사왜곡과 그 뻔뻔함에 규탄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 노엄 촘스키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두 눈을 뜨고 있는데도 일본은 과거 임란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코를 또 베어가고 싶어 한다.
  
 
이렇듯 우리는 일본과 또 다른 전쟁, 즉 역.사.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일본의 태도로 보건대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는 역사 전쟁을 치를 것으로 예상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동참해주고 있고 그 규모도 더욱 늘어날 전망이며 이는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이 아닌 지식인들의 참여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전쟁이 그랬듯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신하들의 등에 업혀 왕좌에 오른 중종처럼 타에 의존하면 스스로가 작아지는 법이다. 타에 의해 조국을 되찾은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 또한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해당 국민이 해야 할 일이며 역사전쟁에서 우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과거사는 현재와 미래에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부끄럽다고 지울 수 없는 것이 또한 과거사이다. 남의 과거사에도 관심이 가거늘, 자신의 과거사임에랴... 역사 저널 '그날'은 대한민국의 더 많은 분들께서 우리 역사를 더 쉽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데 큰 의의를 두고 싶다. 다음의 시리즈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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