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주의 시학 - 개정증보판
장정렬 지음 / 한국문화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시는 그저 느끼면 되는 것이라는 말을 흔히 들어왔다. 물론 이 말에 적극 동감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역시 어려운 것이 시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등부의 수능에 출제되는 현대시들의 문제를 보면 이러한 개인적인 생각을 확인하게 된다. 몇 편의 시를 한 그룹으로 묶은 다음 통합 질문 해오는 문제들은 그 개념을 비롯하여 한동안 풀이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답을 내기가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분석하기위해 내놓은 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움이 있다. 저자의 저술 목적은 오로지 생태주의 시학에 집중하고 있으며 국내의 시인들이 그동안 우리의 생태변화에 그 얼마나 깊은 우려와 염려를 해왔는지 보여주기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바라보는 즉, 시를 읽는 관점의 중요성도 처절하게 느끼게 한다.

 

소설은 저자가 마음껏, 그야말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전부를 무제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이 보장된 장르인 반면, 시는 공간이 지극히 제한된 범주 안에서 고도의 압축된 언어들을 어울려 버무려내야 하는 특성을 가진 장르이다. 하여 둘 중 어느 쪽이 더 어렵고 쉬우냐를 묻는다면 이건 완전 우문이겠지만 장르별 특성 혹은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고 시가 꼭 어려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해하고 공감하기 쉬운 시가 더 좋은 시임에도 틀림이 없다. 시 역시도 여타의 장르처럼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는 것이 공통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시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시를 찾아볼 수 있는 시인, 다형 김현승은 적합하지 않은 시어들을 제거하는 일을 마치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는’ 느낌이라고 그 아픔을 비견했고, 언어의 연금술사 김춘수는 마땅한 시어 하나를 지어내느라 몇날며칠을 우두커니 앉아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마냥, 바보가 식음을 전폐하듯 그렇게 앉아 있곤 했다 한다.

 

시를 탄생시켜내는 시인의 아픔과 고뇌를 대변하는 위의 두 일화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려주는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다. 이러한 어려움은 비단 시인만은 아닐 것이다. 한편의 시를 짓는다는 것이 그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던가…….

 

시를 짓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듯, 이를 제대로 읽어내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작품들이 있다. 시가 가지는 주제와 운율, 그리고 심상 게다가 압축 상징 그리고 시인의 정신을 읽어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화자가 처한 입장에서 그리고 독자가 처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공감력을 발휘해야 하는 고도의 능력을 요망한다.

 

어떤 시인은 말하길, 평론가가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는, 시인과는 전혀 무관한 이해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다. 한마디로 시인도 모르는 일을 독자가 해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독자의 평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더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시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 장정렬께서 시인들의 원래 의도와 그 얼마나 일치하는 분석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시를 내 놓았고 독자의 손에 넘어간 이상, 그 시는 시인의 것 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독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손을 떠난 시에 대한 법적 소유권 혹은 재산권을 소유했다는 것 이외에는 더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생태주의 시학」은 내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저자는 문학은 본질적으로 문학을 형성하는 시대의 환경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환경과 뗄 수 없다’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라는 표현이었다. 저자는 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이란 어떤 것에서 그 본질을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말이 내게 이토록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연과 친화해야 한다’는 말로 내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자연친화적이지 못한 문학은 그 본질을 상실한, 즉 문학이 더 이상 아닌 것이 된다. 본질이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말이다.

 

시의 형식은 변화하고 이미지들은 자본화되고 기계화되어가고 있다. 9쪽

 

시인은 생태계의 파괴를 인간사고의 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는 지극히 바른 말이다.

 

헐벗은 뒷모습 드러낸 채

종로구와 서대문구 변두리에 주저앉아

늘그막에 셋방살이 하는

불쌍한 인왕산

 

김광규, 「인왕산」에서

 

위 시에서 인간에게 신성한과 삶의 힘을 주던 산이 불쌍한 산이 되어 버렸다. 중략...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성함과 상상력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59쪽

 

 

 

내 눈엔

뿔뿔이 저마다 외롭고

무뚝뚝하게 몰려가는 甲皮魚들의 나라일 뿐,

건강한 야만인의 마을이 그리운

빛의 제국,

가짜비늘로 뒤덮인 화려한 빛의 제국.

 

최승호, 甲皮漁에서

 

‘비늘’은 물고기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어휘로서, 이것이 가짜 비늘로 표현됨으로서 정체성이 사라진 물고기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67쪽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들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정현종, 한 숟가락 흙속에

 

흙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본원적 처소이다. 흙은 모든 존재의 의지처이자 귀의처이기도하다.   187 쪽

 

 

 

저자는 우리의 시인들을 통해 자연과 점점 괴리되어가는 현대의 자화상을 좀 더 명료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물론 저자는 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이미 밝혔다. 어디 시인과 소설가뿐이겠는가. 문학과 관여하는 사람들 모두 이에 관계해야하며 독자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하는 바이다.

 

생태주의 시학이라는 분야는 널리 인식되지 않은 분야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고독한 열정이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개척자가 되기로 자처하는 일이란 본디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저자께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저자 덕분에 나는 새삼 우리가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인가를 되돌아보게되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