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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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는 이퇴계를 이부자(李夫子)라 칭했다. 학문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성리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조선의 선비로 평하고 존경했다.

 

사실 이퇴계는 학문 뿐 아니라 인품 또한 고매했고 언과 행은 일치했다.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좌도의 학풍을 이끈 이퇴계는 인(仁)을 숭상했고 도학에 심취했다. 아마도 주희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이퇴계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이퇴계의 가문은 부호였다. 부족함이 없는 가문의 자제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실록에 서얼 차별의 강력한 주장에 앞장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퇴계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노비의 수는 367명이었고 전답을 합치면 현대기준으로 34만 평의 규모였다. 그런 그가 집안의 노비들로부터 무척이나 존경을 받았다. 노비를 물건 취급하던 시절 그는 노비들을 사람으로 대했다.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자 그 며느리를 재가시킨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로서는 불가한 일이었기에 그가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는 갑의 위치에 있었으나 결코 갑질하지 않은 조선의 몇 안 되는 선비 중의 선비였던 것이다.

 

 

겸손과 이해의 휴머니스트 이퇴계, 고봉에게 캐치볼을 던지다

 

편지로 먼저 연서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이퇴계였다. 얼핏 기고봉께서 먼저 편지를 보냈을 법도 한데,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둘의 나이 차나 관직의 차이로 보아도 먼저 손을 내밀기란 양쪽다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이퇴계의 나이 58세(1501년생), 관직은 대사성(성균관 총장)이다. 1527년생인 기고봉의 나이는 새파란 32세로 명종 13년 막 과거에 급제하고 아직 관직을 수여받지 못한 선달(先達)의 신분이었다. 관직으로 보아도 하늘과 땅 차이, 나이 차이로 보아도 26년, 기고봉은 이퇴계에게 자식뻘 되는 젊은이였다. 게다가 이퇴계의 학문은 성숙할 대로 성숙해있었고 기고봉은 아직 새파란 젊은이였다.

 

조선의 대사성이 이제 막 급제한 젊은이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것도, 아직 9급의 관직조차 제수 받지 않은 선달이 지체가 높아도 한참 높은 이퇴계에게 먼저 편지를 드리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지방 공무원이 임금에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더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로서는 스승님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 사제지간도 아닌, 선후배의 간극이 멀어도 너무나 멀기만 했다. (기고봉의 학문은 대개가 독학이라고 한다)

 

이렇게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만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퇴계가 기고봉에게 먼저 볼을 던진 것이다. 이퇴계가 보낸 첫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기고봉께서 이퇴계를 먼저 찾아 인사드리고 학문을 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고봉이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이퇴계를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고 이로서 13년간의 기나긴 캐치볼 성격의 서신 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1558년의 일 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퇴계는 학문으로 당대 중국에서조차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반면 기고봉의 학문은 주로 독학이었다. 독학하며 궁금한 것도 많았을 것이고 의문을 가진 것도 많았을 것이며, 이미 널리 알려진 이퇴계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에 차이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독학이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발달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쨋거나 이것이 이퇴계를 찾은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기고봉의 방문에 답하는 이퇴계의 짧은 편지는 정말 읽어보아야 그 맛을 알 수 있다.

 

기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이황이 삼가 말씀 드렸습니다. 退

 

편지는 이렇게 쓰는 거다. 편지를 잘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연서도 이런 연서 또 없다. 특히, 이퇴계의 편지에 주목해도 좋다.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퇴계가 기고봉보다 편지를 훨씬 더 잘 쓴고 느낄 것이다. 연애편지를 대필하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그 시절을 보낸 분들이 계실 것이다. 과거 「편지 쓰는 법」이라는 책이 집집마다 꽂혀있던 시절도 있었다.

 

각설하고, 이퇴계가 병이 났다하니 문병을 핑계삼이 이참에 찾아뵙고 학문을 논하고 싶었을 기고봉의 마음도 전해온다. 이퇴계가 “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이미 기고봉의 학문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퇴계도 사실은 기고봉을 은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기고봉이 1등으로 과거에 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문을 논할만한 사람이라고 퇴계는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벼슬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이퇴계의 행적과 학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면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춥고도 추운 겨울 이퇴계의 부실한 몸에 병이 들었고, 이를 계기삼아 초면이지만 서로 만나 학문을 논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때만 해도 조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를 13년간이나 주고받는 캐치볼을 하게되리라 이퇴계는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대목이 이를 말해준다. 이퇴계는 아직 기고봉의 학문이 설익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은근 알려주는 대목이 아니던가. 그러나 기고봉은 앞으로의 기나긴 그들의 개치볼을 직감했을 것이다. 볼을 먼저 던진이는 이퇴계였지만, 그 볼을 뜨겁게 달구어 낼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이퇴계가 이토록 애정이 절절히 배어나는 연서를 먼저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퇴계가 누구던가. 주자대전을 손에 쥐자마자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하던 대가 중 대가요 선비 중 선비가 아니던가. 그런 선비가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르려는 젊은이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기고봉의 문병에 대한 감사를 비롯, 그 인물됨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견스런 자식을 대하듯, 혹은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알아보듯 했을 것이다. 학문에 정진하는,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보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람답게 대하던 이퇴계였던 것도 사실이나 기고봉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여 그는 세대 차와 관직의 차이, 한마디로 넘사벽을 무너뜨리고 기고봉을 학문의 벗으로 여겼을 것이다. 학자에게 학문의 벗만큼 좋은 상대도 없다. 학문은 학문을 그리워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 학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다음해 편지의 마지막에 뭍어나 있다.

 

 "------ , 기미년 정월 5일,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退"

 

 

이퇴계. 영혼의 밥을 짓다

이퇴계의 인물됨과 벗에 대한 그리움이 이보다 더 잘 배어나오는 대목이 또 있을까..이 순간 나는 잠시 글을 멈추었다. 어린 벗에게 머리를 숙이는 이퇴계를 생각해보시라. 그의 인품이 아름답다. 물론 여러 곳에서 이런 모습들이 잘 드러나 있다. 어디 이 한 줄 뿐이랴. 그러나 이 순간,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역자가 원문을  함께 싣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할 따름이더라...

 

최한기에게는 벗이라 칭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古山子 김정호가 바로 그였다. 사람이 없어서 벗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딱 한 사람의 벗이면 족하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벗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이퇴계는 기고봉을 자신의 벗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동서양을 두루 살펴도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전설은 남아있지 않다. 오로지 조선 땅에 역사적인, 살아있는 전설을 남긴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이퇴계의 인물됨은 십여 년을 이어가는 편지에서 더더욱 빛이 난다. 후학을 대하는 대가의 태도를 배울 수 있으며, 이부자라 칭송받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굽힐 줄도 아는 진정한 대가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이 편지는 앞으로 진행될 실로 뜨거운 쟁점인 사단철정론도 담고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대가의겸허함과 신독(愼獨), 그리고 진정한 학자이며 선비로서의 자세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편지이기도 하다.

 

조선의 학문이 그 얼마나 왜곡되어있었고 편협되어있었던가. 선비들은 학문을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고 지키는데 사용했다. 이상하게도 조선땅에 학문이 발달할수록 그 백성들은 더 배고프고 고단했다. 이것이 조선의 역사가 가지는 이율배반이자 딜레마이다. 학문과 백성들과의 괴리, 그 거리감은 너무가 컸다. 제 아무리 무슨 말로 변명을 해도 소용없는 역사가 이를 반증하고있다.  이퇴계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대방을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의 노비들에게마저 그 인격을 존중했다. 관용과 존중, 학문을 추구하되 행동이 따랐던 인물, 이퇴계. 그의 이름은 권(權)과 학(學)의 표본을 우리에게 남기고 갔다. 갑질로 소외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는 세상, 이퇴계가 짓고 간 영혼의 식사를 마다해서야 되겠는가.

 

학문과 실천이 일치했던 사람, 이퇴계. 그의 후예인 대한민국은 이퇴계가 남기고 간 영혼의 식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기꺼이 먹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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