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역사의 현장 방문기 (2)


이번 대전행 당시 선생님께서는 중요한 가르침을 2가지 주셨다. 한 가지는 행동으로, 다른 한 가지는 말씀으로...


 차를 타고 점심 식사를 하러가면서 지나치게 된 곳은 바로 우암사적공원 이었다. 선생님을 만나면 늘 우리 역사의 정취가 느껴지는 사적지를 방문하는 것은 필수 코스이다. 심지에 역사적 인물들이 잠들어있는 산소를 방문하기도 한다. 목적은 지리공부이다. 사적지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수 없이 많은 교훈을 가르치는 장소이다. 그것도 침묵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침묵의 외침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온다.


 ‘선생님, 오늘은 저 곳을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라고 말씀드렸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마침 나도 들를 일이 한 가지 있다네’ 하셨다. 누군가에게 한 가지 말실수를 한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헉~ 선생님께서 말 실 수를 다 하시다니... 속으로 이거 참 흥미로운 일이로구나 싶었다. 그런 일은 직접 목격하지 못한 상황이라 자못 궁금했던 것이다. 선생님의 말실수를 흥미로워 하다니...흠...이게 뭔가가 잘못된 상황이 아니던가... 그동안 보아온 선생님께서는 결코 말실수를 하실 분이 아니다. 그런데 말실수를 하셨다 하신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동구의 충정로에 있는 우암 사적공원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그 곳에서 안내를 담당 하고 계시는 분께서 꾸벅~ 인사를 하며 선생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잘 아시는 분이세요?’ 하고 여쭈었더니, ‘아니라네, 그러나 지난 번에 내가 한 가지를 잘 못 알려 준 것이 있다네’ 하셨다. 그리하여 선생님께서는 그 분과 말실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나는 우암사적공원 내의 자료실(유물관)을 둘러보았다.

 

 



송시열의 생원시 과거시험지:

송시열이 생원시의 과거시험지를 제출했다. 시제는 ‘한 번 음이었다 한 번 양이었다 하는 것을 道라 한다 - 一陰一陽之謂道’였다. 이는 주역에 담겨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송시열의 답안이 당시의 시권형식에 맞지 않아 모든 시관(試官)들이 탈락시켜버렸다. 컴퓨터로 채점하는 방식이 아니었던지라 일말의 여지는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같았으면 빵점 처리되는 그런 시험지가 아니던가.. 바로 이때 그 이름도 유명한 최명길께서 송시열의 시권을 보고 장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겨 합격자의 명단에 포함시켰는데 덜컥 장원이 되고 말았다.

 

 

최명길선생이 누구던가... 백사 이항복의 문인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핵심인물 중 한사람이었으며 지리학에는 물론 일기(日氣)를 파악하는 일에도 매우 능하여 쿠데타의 시기를 결정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특이 한 점은 반정세력들의 공통된 특징이 친명배금 혹은 지조 재은등의 명문을 내세워 명나라의 황제를 아버지 모시듯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인데 이 양반은 어찌된 일인지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어 말 그대로하자면 사문난적이나 다름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조선의 임금들은 신권에 밀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왕권을 제대로 사용한 임금이 있다면 유일하게 세종의 아버지 태종일 것이다. 요즘 한창 인기를 구가하는 안방 드라마 ‘해품달’에서도 왕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왕으로 등장한다. 왕권이 신하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꼴이 된 것은 특히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더욱 악화된다.


최명길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주화파의 핵심인물이다. 굴욕적인 삼전도의 항복문서를 직접 작성했고 이에 분개한 주전파 김상헌은 이 문서를 두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러자 최명길은 그 찢어발겨진 항복문서를 주섬주섬 집어들었고 퍼즐조각 맞추듯이 이어 붙였다는 내용은 실록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 더 쉬운 일일 수가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김상헌을 필두로 삼학사들은 죽으면 죽었지 항복은 절대로 불가하며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아가 싸우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심지어 김상헌은 남한산성의 자기 거처에서 직접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했다. 가인들이 이를 알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김상헌은 그 때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죽기는 쉽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니라...


최명길의 입장은 김상헌의 생각과는 달랐다. 최명길의 입장은 대략 이러하다. ‘나라고 항복하고 싶은 줄 아느냐, 모두 나가 싸운다 치자, 그까짖 내 목숨하나가 뭐 그리 대수겠냐, 나도 죽고 니들도 모두 장렬히 싸우다 죽었다 치자, 그럼 백성들은 어찌 할 것이냐, 저 불쌍한 백성들의 목숨은 도대체 어찌할 것이냔 말이다. 우리가 바보 천치 펴서 이 지경에 이르렀고 나라의 꼴이 요 모양 이꼴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죄다 우리의 책임이 아니더냐, 우리가 죽은 뒤 조선 강역의 불쌍한 저 백성들의 얼굴을 도대체 무슨 낮짝으로 바라볼 것이냔 말이다. 니들은 나가 싸우다 죽자하는데 나가 싸워봤자 질거 니들도 빤히 알고 있는 일이 아니더냐, 그럼 이 나라의 백성들의 아픔을 누가 달래줄 것이냔 말이다. 저 불쌍한 백성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더냐, 죄가 있다면 바로 나의 죄이고 너의 죄가 아니더냐, 그러니 우선 나라를 보존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후일이라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죽기는 쉽고 살아 남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때문이니라.... ’


그렇게 최명길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항복 문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여 결국 주화파가 쪽수로 엄청나게 밀리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강화를 체결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주전파는 충신이요 주화파는 배신자이고 역적이다. 인조 쿠데타에 가담했고 권력을 잡은 조선의 지배층들은 절대로 그 누구도 주화파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한 번 주화파이면 영원한 그 치욕을 대물림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충신이면 대대로 충신의 가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조선의 선비들은 사실상 화친을 주장하고 싶어도 그릴 수가 없었다. 화친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화친을 주장하는 그 순간, 자신과 그 후예들은 영원한 역적이자 배신자가 될 것임이 뻔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강역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 강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표면적으로 내세울 수가 없는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 조선의 지배 세력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척화를 주장하기보다 화친을 주장하는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 정치적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죽기는 쉽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김상헌을 필두로 척화를 주장하면서 화친을 주장하는 역적 모리배들의 목을 따서 효수하자고 외치던 인물들에게 솔직한 심정을 묻는다면 최명길에게 무한한 감사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후세가 있다면 찾아가 일일이 인터뷰를 해볼 일이다.  최명길은 이렇게하여 조선의 모든 선비들이 한꺼번에 날려 보내는 빗발치는 비난의 화살받이를 자청하게 되는 것이다. 최명길은 당시 지배세력들의 모든 짐을 그렇게 혼자 지고 간 인물이다. 최명길의 경우가 바로 죽기는 쉽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경우였다. 그 후 역사는 최명길을 나라를 팔아먹은 소인배라 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는 조선에 척화의 주동자를 색출하여 보내달라 요구했다. 이 때 김상헌은 당당히 척화의 핵심인물로 자처하고 나섰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상헌은 되려 삼학사라는 엉뚱한 인물들을 자신을 대신하여 보냈다. 평양의 서윤 홍익한, 교리 윤집 그리고 오달제가 바로 이들이다.

  서윤이라는 직책은 한양부와 평양부 소속의 종 4품 관직이고 교리는 정 5품 혹은 종5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 요즘 공무원으로 치자면 행정고시와 외무고시등에 해당하는 4-5급 공무원인 것이다. 어떻게 척화의 핵심인물들이 4품과 5품의 하관직에 있던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겠는가? 김상헌은 자신을 대신하여 애꿎은 하급 관료들을 척화의 리더들이라는 딱지를 붙여 등을 떠민격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김상헌의 조처는 세자와 왕자마저도 끌려가는 마당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려했다는 누명을 벗을 방법이 없다. 최명길의 화친서를 손으로 찢으면서 반대했던 인물이 떳떳하게 '내가 바로 척화의 우두머리요' 하고  나서지 못하고 겨우 관직이 4-5품인 사람들을 대리로 보내 그 책임을 떠넘겼으니..... 아...차라리 나가서 싸우다 죽느니만 못했다...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은 강화도에서 청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화약을 터트려 적군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스스로 자진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형만한 아우 없는가...김상헌은 척화의 핵심이었으면서도 대리자를 내세워 애꿎은 삼학사 세 사람의 목숨을 잃게했다. 그러한 김상헌을 후대는 목숨을 걸고 그 개기를 끝가지 지킨 선비라 창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이상한 평가는 조선의 선비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청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을 되찾는데 치루었던 몸값을 100냥으로 끌어 올린 인물 영의정 '김류'

 

김상헌의 이러한 행적을 떠올리려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사건이 또 하나 떠오른다. 이조판서, 좌의정, 도제찰사를 거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 '김류'라는 사람이 있다. 치욕의 병자호란 후 다들 아시다시피 청은 조선에서 세자와 왕자, 척화 주동인물등은 물론 수십만의 백성들을 노예로 끌고갔다. 노예로 가족을 잃은 조선의 백성들은 끌려간 자신의 백성들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50냥에서 60냥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가족들을 되찾아 오는 경우가 있었다. 정묘호란 당시의 몸값은 10냥이었는데,  병자호란으로 몸값도 5-5배가 치솟은 것이다.

 

왕세자마저 끌려가는 마당에 전쟁당시 도체찰사였고 후에 영의정이 된 김류도 식구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청으로 끌려갈 사람을 물색하다가 바로 자신의 애첩의 딸을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간의 몸값을 주면 가족을 되찾아 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를 환속금이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역관 정명수에게 자신의 애첩의 딸을 되찾고 싶으니 1000냥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당시 1000냥은 어마어마한 거금으로 쌀 200석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진 돈이었다.  

 이 김류라 조선의 아무 생각없던 영의정 때문에 환속금인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게된다. 아...이제는 가족을 되찾고 싶어도 그 길이 묘연하기만하다. 백성들에게 이 엄청난 거금은 꿈속에서도 만져보지 못할 금액이 아니던가... 그나마 가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근근하게 돈을 모아왔던 백성들의 절망과 실의에 찬 모습을 상상해보시라...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마치 최근의 전세값을 따라기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현대인들이 전세값을 혹은 집값의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느끼는 비애를 조선의 백성들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조선의 영의정이었던 김류라는 한 인물 덕분에 말이다...김류라는 사람의 인물됨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런 소인배가 한 국가의 최고직을 두루 역임했다니...반정의 역사가 아니고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런가...실로 안타깝고 그저 통탄할 일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하여 조선의 선비들인 지배세력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그리고 분명히 하자는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저자 계승범인 것이다. 계승법은 이 책에서 명료하지 못한 선비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당대를 지배했던 객관적인 이념을 통해 선비들의 행적을 파악함과 그들의 언행이 해당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하고 동시에 이 선비들이 후대인 우리들에게 끼친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후에야 그 선비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저자의 이러한 평가 기준은 막연하게 일단의 사건들만을 미시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단순한 시각을, 보다 넓고 심도으며 바르게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독자들에게 감식안을 주는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라는 책이 역시 널리 읽혀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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