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쟁 5 - 시파와 벽파 - 사도세자의 눈물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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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을 등에 업고 임금이 된 영조에게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것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모친이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신분인 무수리 출신으로 당시 비천한 신분이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종의 독살 사건이었다. 

이 두 가지 아킬레스건은 영조가 죽는 그날까지 영조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택군되어 경종이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제로 책봉되도록 경종에게 압박을 가한 것이 노론이었던 것이다. 경종은 노론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역모로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종 곁에는 이렇다할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소수의 남인들이 이를 경계했으나 사실상 남인들은 권력의 밖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결국 경종은 의문을 남긴채 죽음을 맞이한다. 연잉군이 임금이 되다. 영조는 임금도 갈아치울 수 있는 노론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고심끝에 탕평책을 들고 나선 것이다.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자신을 임금의 자리에 앉힌 노론과 경종 독살설은 영조로하여금 군주로서의 힘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극진히 사랑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군주감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도세자는 명석했다. 그러나 세자가 자라면서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이는 영조와 노론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아킬레스건은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던 영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사도세자는 경종의 독살설을 믿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노론의 택군에 의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임금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그리하여 가증스럽고 위험한 노론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소론쪽으로 기울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 영조는 소론 편을 들며 자신의 약점을 꿰뚫고있는 사도세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노론에서도 사도세자를 죽이고 싶어했다. 결국 영조와 노론에 의하여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사망하게 이르른다. 이른바 임오화변이 그것이다. 

같은 노론 중에서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쪽이 벽파, 임오화변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쪽이 시파, 이렇게 또 양분된다. 사도세자의 빈은 골수까지 노론  출신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사위를 죽이는데 침묵으로 동조한다.  흔히 사도세자의 정신 병력이 도가 지나쳐 세자가 죽음에 이르를 수 밖에 없었다는 혜경궁의 주장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다. 한중록은 자신의 가문인 풍산홍씨의 멸문을 막기위한 일종의 체스쳐였다.  

장헌세자가 자신의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면 정조는 왜 임오의리를 내세워 관련자들을 숙청했을까. 이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죽음을 억울하며 모략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사위를 죽은 홍인한은 정조에게는 외할아버지이다. 그런 외할아버지및 관련 홍씨 집안을 거의 씨가 마르도록 처단한 것이 정조의 조치였다. 임오의리는 바로 시파의 힘이 커졌다는 뜻이기도하다. 

노론 벽파는 정조를 죽이기위해 살수를 보내기도했다. 세상에나 임금을 죽이기 위해 신하들의 무리가 살수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동서고금 그 어느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아니던가. 그만큼 노론의 힘이 강성했고 임금의 힘이 약했던 군약신강의 대표적인 나라가 조선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에 등장했던 전흥문이라는 힘잘쓰는 인물은 노론의 홍계희가 그의 아들들을 포함시켜 계획한 정조 암살단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정조는 고독했다. 주변에는 온통 노론세력 뿐, 자신을 위해 일할 인물들이 부족했다. 그러나 채제공과 같은 명 재상이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으며 정치를 펴 나갔다. 조선에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 개혁의 단행을 앞두고 정조는 또다시 의문사한다. 

그리하여 정조가 일생을 통해 일궈놓은 조선의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렸다. 노론의 골수 대표 정순왕후는 정조의 모든 개혁을 뒤집어 놓는다. 영조 최대의 실수가 바로 정순왕후를 비로 들인 것이거나 골수 노론인 정순왕후를 정조가 처단하지 않은 것이거나.... 

진정 백성을 위해 변화를 단행했던 조선의 임금 중에는 대왕 세종과 영정조가 고작이다. 그러한 영정조의 개혁은 조선의 마지막 불씨나 다름없는 성과였지만 그 모든 불씨들 노론들은 짖밟아 꺼버렸다.  

시파와 벽파는 고독했던 장헌세자에 대한 의견의 차지가 가져온 결과였다. 결국 정권을 잡아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론들의 입장 차이었던 것이다. 백성을 위해 군신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이 조선이었고 백성들만 새우등 터지던 시대가 조선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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