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쟁 4 - 노론과 소론 - 예학의 분쟁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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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은 같은 서인이라는 모체에서 분열한 세포이다. 노소론의 분열 시기는 숙종대의 일로 부지불식간에 사문 난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동서인의 쟁투가 주자학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무리들간의 쟁투 였다면 노소론의 분열은 주자학을 신봉하던 노장 세력과 주자학에 도전장을 내민 소장 세력간의 쟁투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하게 대처하자는 쪽이 노론이요 어느 정도 온정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느냐의 입장이 소론인 것이다. 숙종대의 시대는 당쟁으로 인하여 국정이 매우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권력을 중심으로 선회하는 당파간의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상대방에 대한 살육을  서슴없이 자행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예송에 관한 치열한 투쟁은 서인과 남인들이 서로를 살륙하는 정치적 양상을 띈다. 서인은 2차 예송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들을 대상으로 복수극을 벌여 결국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죽임으로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서인 김석주는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했다고 사주하여 고변케함으로서 일대의 파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참에 남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남인의 씨를 말리자는 쪽이 노론이요 죄없는 사람까지 죽여서야 되겠느냐는 쪽이 바로 소론인 것이다.  

이 때 억울하게도 윤휴마저 사사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된다. 윤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게 사문 난적으로 찍혀 결국 죽음에 이르르게되는데 윤휴는 끊임없이 북벌을 주장하며 군사력을 양성하고 백성들의 안전된 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 송시열의 마음을 매우 불쾌하게 했다. 더구나 송시열과 노론들이 고집하는 주자의 편집광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이러한 태도의 윤휴가 자신에게 사상적인 도전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 송시열은 결국 윤휴를 이참에 죽여버리는 것이다.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은 경종의 독살 의혹과 더불어 더욱 악화되는데 영조를 등업고 정국을 장악한 노론이 소론을 지지하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른다. 정조는 그러한 노론과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장본인들을 숙청하게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 노론이었던 정순왕후는 영정조가 그토록 애써 일궈낸 조선의 바른정치 형태를 되돌려 조선의 미래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히게된다. 

후기 조선은 노소론의 권력 다툼으로 점철된 피의 역사이다. 오로지 권력과 이익을 위해 타자를 용서하지 않고 죽음으로 처단하는 조선을 비극으로 몰아갔다. 이것이 바로 노소론의 정체인 것이다.  

조선의 역사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노론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노론의 후예들은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일제의 역사관을 가져왔다. 일제사관이 중고등부의 국사책에 기록되고 그 일제사관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주입되어 왔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노소론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노론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암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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