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한국의 애호가들에게 애우 잘 알려진 곡이다. 1악장 도입부의 강렬한 피아노 타건이 무척이나 인상적일 뿐더러 협연도 매우 유려하면서도 장쾌하게 시작하는 대표적 피아노 협주곡이다. 비록 처음 듣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선율은 귓가를 맴돌며 떠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한마디로 장쾌하고 아름답고, 유려하면서도 화사한 피아노 협주곡인 셈이다.  

물론 음악계에서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빈번한 연주 레퍼토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인기도를 반영하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곡 자체가 빼어나고 좋은 곡이라는 의미 일 것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음반은 다음의 것이다.

                                        

                                                      명연주 명음반

흔히 아르헤리치의 연주나 리히테르의 연주를 애호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은 다른 음반에 크게 매료되지 않는 듯 보인다. 왜냐면 그 두 음반 만으로도 상당한 만족감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헤리치의 뜨겁고도 열정적인 연주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애호가는 없을 것이고,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폭풍이 몰아치는 연주에서 느낄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 주는 황홀함은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음반들은 아래와 같다. 

          

과연 그 어느 애호가가 위의 음반에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이미 널리 정평이 나있는 음반인지라 음반 평이고 뭐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은 협주곡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 화음을 낳을 수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명연이다. 이 둘의 연주는 그야말로 균형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보여주고있다. 서로의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조화로운 협연을 어떻게 이끌어야하는 것인지를 깨닫게해준다. 협연은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색체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위해 연주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구축하는 일이 그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이 둘은 서로 호응한다. 상대방의 부름에 적절히 답한다. 아바도의 이러한 협연은 아르헤리치의 프레이징을 투명하고 맑게 해준다. 더불어 아바도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탄성을 그 안에 함께 버무려 넣는다. 아바도와 아르헤리치의 협연은 그렇게 연주를 달구어 간다. 아르헤리치는 정렬의 화신이 된다. 연주는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던가...세상은 이처럼 상대방의 조화로운 도움을 필요로한다... 나는 이 두사람의 연주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배운다. 이는 이 두사람의 연주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된다. 음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교훈을 배울 수 있도록 연주를 해낸다는 것이 그 얼마나 장한 일이던가... 

리헤테르와 카라얀의 연주는 온 세상의 애호가들이 갈채를 보내는 명연 중의 명연이다. 둘의 연주는 압력이 매우 높다.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공격적인 연주로 들릴 수 있다.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과 매우 대조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연주인 것이다. 리히테르와 카라얀은 연주하는 내내 자신들의 색체를 강하게 주입시킨다. 리히테르는 리히테르대로, 카라얀은 카라얀대로 자신들의 장점을 살려내려고 힘을 쏟는다. 흔히 불꽂의 연주라 불리는 이유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장점을 하나의 연주 안에 주입하는 과정에서 빚어내는 개성들은 자칫 협연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는 요인이 될 수가 있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순간 협연는 망가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둘의 연주는 이상하게도 그런 엉뚱한 연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둘의 음악적 능력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리히테르와 카라얀이 누구던가. 그들은 각각의 연주에서 내노라하는 최고의 능력자들이다. 이 최고의 능력자들이 협연장에서 만나 자신들이 이루어낼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각자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음악을 망가트릴 정도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곧 폭풍우가 일고 음악이 혼란스러워지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것은 그들이 끝내 연주를 위해 해야하는 자신들의 그 목적을 온전히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장 치열하면서도 가장 긴장되는 연주를 만들어냈다. 협연의 핵심은 조화를 끝내 고수한 그들의 연주는 그러므로 각자의 개성이 강렬하게 드러나면서도 균형을 유지한 음만으로 남아있게된다. 

명연주를 생략한다면 너무나도 서운해 할 음반들이 남아있다.   

  

 이러한 빼어난 연주들이 즐비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싶은 연주가 바로 반 클라이번의 연주인 것이다. 

   

바로 아래의 음반인데 좌측의 음반이 우측의 음반으로 재발매가 되서 그런지 알라딘의 상품에서 이미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검색을 잘 못했나...

      

 여하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애호가라면 꼭 들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은 음반이다. 아르헤리치 여사와 아바도의 협연과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연주에 코드가 연결된 애호가들은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연주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연주에서 듣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색이 클라이번과 콘트라신느의 연주에서는 어느 정도 정제된 느낌을 감지하게된다. 콘트라신느의 협연은 기능성 연주처럼 들린다. 이를 약간 다르게 생각해보면 클라이번의 연주에 콘트라신느의 연주가 온전히 희생되는 느낌이다. 즉, 피아노의 연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밋밋하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콘트라신느의 특색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트라신느의 연주가 아바도나 카라얀의 연주와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선입견을 애호가들이 간과할 수가 있다는 점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녹음의 질적 열세는 논외로하더라도 연주의 완성도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할 수 있는 여지는 주로 아르헤리치와 리히테르 덕분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클라이번의 피아노는 매우 또렷하다. 협연의 악기들도 매우 돗보인다. 이것이 어쩌면 약점인 듯 보일 수도 있다. 너무나 또렷하게 구별되다보니 협연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3악장에서는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특성을 살려내지 못한 피아노를 들려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기타의 연주와 상대적인 비교를 했을 때의 일이다.  

기타의 연주와 비교 감상도 좋지만 편견을 버리고 오직 두 사람의 연주에 귀를 기울여보시라...반클라이번과 콘트리신느의 연주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단점으로 여겨지던 요소들은 장점으로 화하기 시작한다. 연주는 이제 자신들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연주로 변모한다. 내내 희생할 것만 같은 콘트라신느의 연주는 결코 개성을 죽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3악장의 필요한 부분에서 매우 또렷한 힘과 조화로움을 발산 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서야할 때 확실하게 나서주는 협연인 것이다. 두 사람의 협연은 협연으로서 매우 질높은 하나의 궤적을 그려가는 뚜렷한 특징을 가진 연주로 새로 태어난다.  

 팀파니와 트럼펫의 울림은 매우 명료하게 다가온다. 협연을 잘 살려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음을 직접 귀로 확인해보기를...마지막으로, 클라이번의 연주를 듣다보면 그의 인성을 짐작케하는 부분이 있다. 클라이번은 믿음직한 사람이다. 신뢰를 아는 사람이다. 정직한 사람이다 라는 느낌을 받게된다. 마치 켐페의 연주에서 듣던 그 느낌을 클라이번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켐페의 연주는 정직하다. 그의 성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과도한 기교스러움에서 오는 화려함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담백한 켐페의 연주를 과연 누가 홀대할 수 있을 것인가...바로 이와 같은 정직함이 클라이번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 둘은 결코 홀대해서도 홀대 할 수도 없는 명연을 합작해냈다.  

왜 클라이번의 연주가 아름답고 콘트라쉰느의 협연이 그리도 고마운지...나는 그들의 정직합과 자신들의 일을 명료하게 해내려는 노력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두 사람의 연주는 비록 아르헤리치 아바도나 리히테르 카라얀의 연주를 고려할 때 그에 버금간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것은 애호가가 음악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반 클라이번과 콘트라신느의 연주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연주를 명연주 명음반이라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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