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평전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1
신병주 지음 / 경인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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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학문의 배움에서 오는 강직함과 소신을 굽힐 줄 모르고 일생을 살다가 그 타협할 줄 모르는 완고함때문에 지극히 말년의 나이에 죽음을 강제당한 인물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흔히 대쪽같은 선비 혹은 선비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선비들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 죽음을 무릅쓰기도 하고, 죽음 앞에서 결국 소신을 꺽는 선비를 만나기도 한다. 우리들은 선비의 기개에 대해서 배운적이 있다. 정몽주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개를 꺽지 않았다.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소신을 지켜간 조선의 사림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우암 송시열 과 내암 정인홍이 있다.    

우암 송시열과 내암 정인홍의 공통점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사림의 거두였으며 학문적 정치적인 소신을 가지고 일생을 보낸 인물로 숙종에게 사사된다. 내암 정인홍은 남명 조식선생의 적통으로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학문적, 정치적인 소신으로 일생을 살다가 인조반정때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위 두 사람의 공통점은 참으로 많다. 우선 한국사에 길이 남을 인물들의 후학으로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송시열은 조광조, 이이, 김장생의 계보를 잊는 화려한 학맥을 가진 인물이었고 정인흥은 조선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남명 조식선생의 자랑스런 적통이다. 둘다 사람의 영수로서 산림에 있으면서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견해 한 마디는 국정을 좌우했고 정치적 결정의 핵심적인 근원이 되었다. 더불어 송시열과 정인홍 모두 학문적, 정치적 소신을 절대로 굽힌 적이 없다.  

 한 예로 현종은 예송 논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정이 불안해지자 조금만 양보해달라며 사정사정하면서 신하인 송시열의 손을 꼭잡고 눈물로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군왕의 이런 눈물어린 호소마저 단칼에 거절한 인물이다. 도대체 그 어떤 임금이 신하의 두 손을 꼭잡으며 눈물로 양보해달라고 간청한 사례가 있었을까... 마치 막내 아우가 큰 형님에게 봐달라고 간청하듯이 말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송시열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반면 정인홍은 군왕의 위엄에 해가된다면 과감하게 숙청을 단행했다. 그 예가 임해군의 강력한 처벌 주장이었다. 물론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문란하여 세자 책봉에서 밀려나 진도로 유배된 상황이었다. 꼭 죽이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은 정인홍을 위시한 분명 북인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점에서 성격이 거칠고 과격하여 정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로인하여 얼마 후면 자연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나이에(송시열 83세, 정인홍 89세)에 둘다 강제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학문의 경지가 높고 둘다 사림의 거두로서 사림정치를 하면서 비타협의 외골수등 다양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을 좀더 가까이 살펴보면 엄청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한 사람은 학자로서 한 사람은 사상가로서 그 차이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송시열과 정인홍의 차이점 

학자 송시열은 율곡의 학통인 김장생의 예학을 고스런히 전수받는다. 송시열이 받들던 주자는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유일 신(God)'과 다름 없는 존재였다. 일생을 주자로 살았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는 김정생으로부터 예학 만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받는다.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은 김장생이 이어온 학통에는 분명 율곡 이이가 그토록 가슴에 새기고 있던 보국, 보민, 애민, 생민, 휼민의 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서로 전수하지도 전수 받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송시열의 일생에 걸친 노력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율곡선생님의 드높았던 보민, 애민, 생민의 학문적 사상은 김장생과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오간데 없는 예학 중심의 학문으로 변질되었다. 그러한 예학을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거부하고 당파와 기득권의 보수적 이익을 지키는 무기로 사용했다는 점으로보아 절대로 그를 학문의 대가로 인정할 수 없게한다. 송시열 학문의 핵심이 되는 예학은 보국은 물론 백성을 위한 보민과 애민의 정신이 결여된 문제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관료들이 백성들의 고혈로 잇속을 챙겨 발생하는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대미수공법을 반대하는 핵심인물로 나섰을까...방납의 폐단이 그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게했었는지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방납은 공물을 낼수 없었던 백성들을 대신하여 공물을 대납하고 그 댓가로 이익을 챙기는 시스템이었다. 겉보기에는 공납의 능력이 없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괜찮은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백성들에게는 결정타를 입히게 된다. 우선 백성들이 직접 내는 공물을 관료와 짜고 의도적으로 퇴짜를 놓는다. 결국 대납을 안하면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엄청난 방납의 댓가를 요구하게 된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자신들이 살던 고향에서 야반 도주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된다. 한 가구가 도망을 가면 그 친척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를 족징이라 했다. 친척도 도망가면 그 이웃에게 책임을 묻는다. 결국 한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도망을 가야지만 끝이 나는 제도이다. 마을은 순식간에 페허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전국에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런 방납의 폐단에 관련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바로 왕실과 종실, 그리고 중종 때의 반정공신들 때부터 그 폐단은 시작된 것이었다. 반정의 공신들이니 중종도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흘러오다가 선조대에 이르러 문제의 해결을 적극 주장한 인물이 바로 율곡 이이였다. 과연 진정한 대 사상가이자 정치인인 율곡의 면모를 볼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율곡 선생님은 돌아가시고  인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흐지부지되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붕당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고 선언했던 선조는 붕당이 있다면 "그대의 당에 들고 싶노라"고 까지 말했을까...이이의 정치관을 짐작할만한 장면일 것이다. 율곡의 죽음은 조선에 커다란 손실이었다.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럼 백성들은 어디로 도망을 가버린 것일까...산속 깊은 곳에 숨어 화적떼가 되거나 아니면 관료들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멀리 달아나 타향 어디엔가 정착을 했고 아니면 더 더 먼~무인도...에 정착을 했던 것이다. 요즘 여행을 하다가 보면 저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나...싶은 연유를 이제는 좀 짐작하실런지... 아마도 시골 집이 멀고도 먼...시골 구석도 한참 구석이 고향인 분들이 계실 것이다. 때로는 도대체 우리 조상님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토록 개발의 바람이 불려면 100년도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시골도 한참 시골에서 일생을 사셨을까...생각해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방납의 폐단이었던 것이다. 수탈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야반도주하여 가다가 가다가 정착 한 곳...그 곳이 바로 지금 우리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이런 폐해의 심각성을 알고있던 율곡은 평생의 숙원이 방납의 폐단을 없앨 수 있는 대미수공법의 시행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납은 기득권의 수입창출의 창구였다. 그러기에 이원익, 김장생과 김육이 그토록 바랬던 대동법을 송시열은 결연코 반대를 했던 것이다. 사대부의 확실한 수입원을 송시열은 닫아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엄청난 수입원인데 그걸 폐하는 놈이 병신이던가... 이런...

또한 송시열은 효종의 최대 이슈였던 북벌, 주전론에 표면적으로는 동조하는 듯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다. 북벌론은 말 뿐이었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나라를 받들고 주자를 자신의 '신'으로 섬기며 당파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예송 논쟁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방증하는 명백한 증거물이다.  

흔히 실록에 송시열이라는 이름이 삼천번이나 등장하는 훌륭한 인물이며 '송자'라는 칭호까지 있고, 송자대전을 남겨줄 정도로 조선역사 불멸의 인물같아 보이지만 결코 명예롭게 생각할 이유들이 될 수 없다. 정인홍의 북인 계열들이 인조반정으로 제게된 후 서인들이 송시열을 필두로 노론세력을 형성하여 중앙정부를 쥐락펴락한지 100여년이 흐른 뒤 정조는 하는 수없이 서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송자대전을 만들도록 지시한 것 뿐이다. 정조는 일종의 협상용으로 노론들이 입을 떡 벌어지게 할만한 송자대전을 협상 카드로 내놓게 된 것이다. 이는 군약 신강의 정부에서 왕권이 약했던 탓이지 송시열이 결코 훌륭하고 이뻐서가 아니었다. 정조가 살아있어 이말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분명히...  

  

위대한 사상가 정인홍은 한마디로 정치적인 패배자였다. 강한 기질과 직선적인 성향의 정인홍은 스승과 맥락을 함께한다. 스승님에 대한 의리를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퇴계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 퇴출을 끈질기게 주장하면서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애초의 의도가 왜곡되어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인조반정의 세력에 의하여 89세의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쳐형되었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며 신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한 기질과 강직함,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은 결국은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화를 입게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송시열과의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정인홍은 송시열과는 판이하게 다른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라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의 스승 남명 조식은 정통 주자성리학과는 달리 성리학을 실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보민과 애민을 인생의 과제로 삼았던 선비이다. 이에 실천하는 학풍을 추구했으며 이는 수제자인 정인홍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정인홍은 군주의 주권을 중시하고, 붕당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는 보국, 보민, 애민, 휼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식의 제자들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투쟁을 진두지휘한다.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이대기등은 바로 남명학파의 의병장들이다. 경상 우도의 대부분 의병장들은 남명의 문하생들이라고 볼 수 있다. 풍신수길이 조선침략의 실패 중 하나가 '의병'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의병은 에측불허의 복병이었고 임진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핵심 요인 중 하나였다. 그 의병 활동의 하나는 그 이름도 찬란하고 장엄하기 이를데 없었던 1,2차 진주성 전투가 이니던가. 이렇듯 남명의 문하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분연히 일어선 것은 남명선생의 '의'를 중시한 사상적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의는 바로 밖으로의 실천을 뜻하는 말이다.

스승인 남명 조식의 가르침을 중히 여긴 정인홍은 수양의 개념인 '경'- 안으로 밝힌다-과 학문을 실천의 행위로 표현하려 노력하는 '의'-밖으로 실천한다-, 두 글자를 인생의 지침으로 살아갔다. 이러한 신념이 그를 임진 왜란때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던 것이다. 남명학파는 화담학파와 마찬가지로 싱리학을 실천의 문제로 인식하고 국부에 필요한 것이라면 다양한 학문을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학문의 구체적인 실현과 민생 문제의 해결, 이것이 이 두 학파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것이다.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생각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우며 죽음으로 형벌을 가했던 송시열계와는 정 반대로 보국을 위한 수용적태도였다. 이런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정신이 후에 북학파로 계승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특징은 실천 중심의 신분적 개방을 포함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개연성은 없지만 조선 초의 정도전과 그 사상적 맥락을 함께 한다고 볼수있다. 조선초의 삼봉 정도전의 사상이 중기의 정암 조광조를 통해 남명 조식에 이르렀다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남명과 정인홍은 율곡 이이 그리고 서애 유성룡등 과는 당파적, 학문적인 거리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국, 보민, 애민, 휼민의 정신에 있어서는 서로 통함이 있었는데 이는 서경덕과 이지함, 김육과도 사상적 맥락을 함께한다고 볼수있다. 서로 시대적으로 다른 사람과 그리고 학문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분들이 이와같은 사상적인 맥락을 함께하는 이유는 단 하나, 보국, 보민, 애민, 위민, 휼민의 정신에 있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 근본적인 정신이 같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대미수공법마저도 반대했던 송시열과는 달리, 정인홍은 상소문에서 광산 채굴, 운송 수단의 개발, 상업의 정려, 시장의 확대등의 정책을 내놓는다. 이는 농업 이외에 시장 상업과 무역등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고자하는 생각에 근간을 두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화의 유통을 통하여 '활여민'의 방책을 연구했음에 틀림없는 방증이라 하겠다.  

조선 중기의 주자성리학은 이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의'와 '리'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성리학자들은 이 둘을 철저하게 분리코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데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기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율배반적인 그들의 딜레마였다. 앞에서는 청렴한척 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듯이 말이다. 이에 반하여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는 '의'와 '리'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정인홍의 사상의 근간이 되었고 그의 철학이 되었다. 송시열을 절대로 사상가이며 학자라 칭할수 없으며 남명과 정인홍을 훌륭한 사상가이며  학자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송시열을 송자라 일컫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언어도단이다.  

내암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정치적 전개이다. 그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의리를 의병을 통하여 보여줬고, 군왕에 대한 의리를 광해군을 위해 발휘했으며, 스승과의 의리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지막 스승에 대한 의리에서 그는 급격하고, 과격했으며, 반대 세력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탄력적인 현실 정치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타협할 줄 몰랐던 정인홍은 많은 정적을 만들어냈다. 동문인들의 이탈은 이러한 정인홍의 독선적이며 수용적이지 못했던 정치력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산림에 있으면서 이이첨의 교활한 수법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된다. 정인홍의 뜻과는 달리 이이첨은 모든 정치적 음모를 정인홍의 이름을 도용했던 것이다. 이를 몰랐던 정인홍은 당시 '중앙 정치에 미숙했다'고 이 책의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이첨의 교활하고도 치사한 활약은 광해군의 정부를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갔고 결국 조선 역사에서 절대로 성공해서는 안되었을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게되고 비극적이게도 성공하게 만든다. 이로서 정인홍의 삶은 마감을 하게된다.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정인홍의 정신은 스승 남명의 가르침을 통하여 백성을 중심으로 사고했으며 철학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다같이 자신의 기개와 소신을 지키가 죽음을 맞이한 두 사람이건만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결코 같은 종류의 장엄한 죽음이 아닌 것이다. 하나는 졸열하기 그지없는 고집불통으로 인한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왕권을 강화시켜 백성을 위한 정부를 만들고 노력하다가 급진적 개혁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죽음을 맞이 것이었다. 진정 선비의 기개를 배울 수 있는 분은 바로 내암 정인홍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강직하고 비타협적인 원칙을 고수한 끝에 당파적인 패자가 되었고 신원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송시열과는 질적으로 다른 훌륭한 삶을 살다갔지만 아직도 조명받지 못하고있다. 드높았던 내암의 기개는 조선 천하에 퍼졌고 그의 '의'는 송시열의 그것 과는 확연히 다른 훌륭하며 붉른 꽃과 같은 삶을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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