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번역본, 영국판, 그리고 미국판]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Reality Is Not What It Seems>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을 쓴 카를로 로벨리의 신작이다. 실제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보다 먼저 쓰여졌는데,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유명해지고 난 후 영미권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로벨리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서 논의되었던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로벨리와 그의 글에 대해서는 아마존에 있는 다음의 2개 평이 매우 잘 요약하고 있다.


“Some physicists, mind you, not many of them, are physicist-poets. They see the world or, more adequately, physical reality, as a lyrical narrative written in some hidden code that the human mind can decipher. Carlo Rovelli, the Italian physicist and author, is one of them...Rovelli's book is a gem. It's a pleasure to read, full of wonderful analogies and imagery and, last but not least, a celebration of the human spirit.”—NPR Cosmos & Culture

 

“If your desire to be awestruck by the universe we inhabit needs refreshing, theoretical physicist Carlo Rovelli...is up to the task.”—Elle


이 페이퍼에서는 번역본의 제목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Reality Is Not What It Seems"를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라고 번역했다. 얼핏 보면 단순한 직역 같지만 오해의 소지가 많은 제목이다.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면 그럼 환상이라는 얘기인가'하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로벨리의 의도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 제목의 첫 번째 문제는 주어부와 술어부를 뒤바꾼 것이다. 원래는 '실재(reality)는 ...가 아니다'인데 이것을 '...는 실재가 아니다'로 바꾸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큰 문제 없어 보이기도 한다. A가 B가 아니면 당연히 B는 A가 아니니까. 마치 '사람은 고양이가 아니다'나 '고양이는 사람이 아니다'처럼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A는 B가 아니다'에서의 초점은 A인 반면, 'B는 A가 아니다'에서의 초점은 B이다. 이 단순한 차이가 의미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인간은 값을 매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만약 이 문장의 주어부와 술어부를 뒤바꾸면? '값을 매길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가 된다. 뒤의 문장이 앞의 문장과 동일한 뜻을 전달하는가? 뒷 문장의 초점은 '값을 매길 수 있는 존재'이며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문장이 부정문일 때 그럼 긍정문은 뭘까 생각하게 된다. 'A는 B가 아니다. 그러면 A는 뭐란 말인가?'가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러니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면 환상이란 말인가?'란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단순히 주어부와 술어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원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심대한 왜곡을 발생시킬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what it seems" 부분이다. "보이는 세상"이라고 번역했는데 직역하면 '보이는 것'일 터이다. "것"을 피하고자 아마 "세상"을 쓴 것 같은데 이게 어찌 보면 문제의 시발점인지 모르겠다. '실재는 보이는 세상이 아니다'라고 놓으면 말이 안돼 보이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실재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물리학자가 '실재(reality)'라고 말할 때는 보통 '물질 세계'를 의미한다. 실재(물질 세계)가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면 그럼 안 보이는 세상이란 말인가, 이거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주어부와 술어부를 뒤바꿔 놓으면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가 된다. 이건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럼 보이는 세상은 허상, 환상이란 불교적 생각도 들고...


로벨리의 의도를 살리자면 이런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실재는 겉보기와는 다르다. 또는 세상은 보이는 바와 다르다. 물리학자에겐 실재 = 세상(물질 세계)이다. 왜 로벨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자연을 연구하면 할수록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을 거스르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이용해야만 자연을, 세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겉보기와는 다른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서문의 마지막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이 책이 여행 책이라고 하면서 이 여행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A magic journey out of our commonsense view of things, far from complete."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관점을 떨쳐내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마법과 같은 여행.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란 제목은 저자의 의도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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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8-04-06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blueyonder 님의 분석이 섬세하고 논리 전개가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아무도 이의 제기 못하고 지나칠 만한 번역판 제목의 문제점을 잘 드러냈다고 봅니다.

원제: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번역판 제목: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blueyonder 님 제안: 실재는 겉보기와는 다르다

원제 술어부 What It Seems에서 It은 Reality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Seems는 겉보기에 무엇무엇(What)처럼 보인다는 걸 뜻하죠. 해서 술어부를 직역하면 《실재는 겉보기에 무엇무엇처럼 보인다》라고 할 수 있죠. 한데 원제 전체는 그게 아니라는 얘기죠. 즉 실재는 겉보기에 무엇무엇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즉 blueyonder 님의 제안처럼 《실재는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이죠.

한데 번역가나 출판사 측에서는 이걸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을 좀 멋지게 지어서 책의 가치를 좀 높이고 판매량을 늘리는 데에 더 신경을 쓴 듯합니다. 해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란 제목을 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blueyonder 님의 지적처럼 오독과 오역이 겹친 잘못된 제목인 동시에 원제의 주어부와 술어부를 뒤바꿔놓은 엉뚱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 모두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결정적 오류를 blueyonder 님께서 정말 날카롭게 집어내 잘 지적하셨다고 봅니다. 참신한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올린 시각: 2018-04-05 21:18
오타 수정 시각: 2018-04-06 08:40

blueyonder 2018-04-05 23:33   좋아요 1 | URL
긴 글 읽어주시고 정성스런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포자'란 말은 '수학을 포기한 자'의 준말일 터이다. '아, 수학 어려워, 그래서 나는 포기했어'의 체념을 담고 있다. 수학을 포기한 이유는 아마 '나의 능력 부족'이리라. '제물포' 좀 더 정확히 '쟤물포'는 '쟤 때문에 물리 포기했어'의 준말이다. 이 말에는 나는 하고 싶은데 '쟤'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원망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왜 물리는 어려울까? 수학은 좋아해도 물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것은 아마 둘 다 비슷하게 수식을 써도, 수학은 의미가 추상화된 수식이지만, 물리는 단순한 수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수식도 싫지만 그 수식에 의미를 붙이는 것이 싫거나, 아니면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이다. 수학에서는 수식을 그냥 논리로만 다루고, 여기서의 숫자는 단순히 추상화된 숫자일 뿐이다. 하지만 물리에서의 숫자는 어떤 물리량(가령 질량)를 나타내며, 그 물리량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한 단계 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한 번은 들어봤을 뉴턴의 제2 법칙, F = ma이다. 수식 자체는 매우 간단하다. 여기에는 2x3 = 6 이상의 복잡한 수학이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물리에서는 m은 물체의 질량을 나타내며 a는 가속도, F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이 식은 물체의 질량 m과 가속도 a를 곱한 것이 힘 F와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식 하나로 지구 위 물체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면 믿어지는가? 이를 위해서는 힘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알아야 하고, 이로부터 가속도를 구해야 한다. 유도하는 수학 자체가 아주 복잡하지는 않다. 이렇게 하나의 원리로부터 주변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물리이다. 


물리는 이러한 지식 위에 차근차근 다음의 지식을 쌓아간다. 앞의 지식을 모르면 다음의 지식을 쌓을 수 없다. 학창시절 '제물포'를 외쳤던 사람들은 아마도 앞의 지식을 모르는 과정에서 다음의 지식을 쌓으려고 하다가 좌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리는 생물이 아니다. 앞의 지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의 지식을 쌓을 수 없다. 


문제는, 앞의 지식의 의미를 잘 배우고, 배운 다음 잊어 버리지 않게 하고, 그 다음의 지식을 배우고자 할 동기 부여를 학교에서(혹은 '쟤'가) 잘 못 한다는 데 있다. 수식만으로 물리를 배워도 잘 따라갈 소수의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이 있다. 학교 교육은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잘 따라가는 소수의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동기 부여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마 그것에 대한 해답은 실험처럼 보인다. 매 시간 실험을 하는 것이다. 신기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그것은 왜 그럴까' 궁금하게 여기게 되지 않을까. 


<프랑스 아이들은 물리학을 이렇게 배운다>는 프랑스 초등학교 학생들이 수행했던 여러 실험을 담고 있는 책이다.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 식으로 물리를 배웠다면 적어도 물리에 대한 이미지가 지금과 같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이런 실험이 별로 재미없는 아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이 자연과 과학에 관심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적어도 '제물포'를 외치는 사람의 숫자는 지금보다 줄어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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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0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과학 수업에 진행되는 실험이 재미없는 것도 문제지만, 실험 위주의 수업 시간이 부족한 게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blueyonder 2018-04-04 14:43   좋아요 0 | URL
네 실험 수업은 준비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지요. 반면 일반 수업은 분필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나라 과학 교육이 더 좋아지려면 실험 수업을 늘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마쓰바라 다카히코 지음, 이인호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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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법칙 탐구에는 끝이 없다


모든 일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기본 법칙 탐구라는 목표에는 끝이 없어 보인다. 물리 법칙이란 소수의 법칙으로 다양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현대 물리학 이전에는 뉴턴 역학의 운동 방정식, 만유인력의 법칙, 맥스웰 방정식 등이 해당하였다.

  이러한 이론의 틀 속에서는 기본 법칙 자체가 성립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물리학이란 몇몇 기본 법칙을 이용해 그 밖의 다양한 현상이 성립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학문이며, 그 기본 법칙 자체는 무조건 성립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기본 법칙인 줄 알았던 것이 훗날 더 기본적인 법칙으로 설명될 때도 있다. 뉴턴 역학을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으로 설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는 기존 기본 법칙이 새로운 기본 법칙으로 대체된 것뿐이므로, 결국 기본 법칙 자체가 왜 성립하느냐는 본질적인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277 페이지)


모든 것의 이론에도 의문은 남는다


... 모든 것의 이론[자연계 네 가지 힘을 모두 통합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라는 말에 과도한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처럼 보이지만, 이는 모순을 품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면, 자기 자신이 옳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는 없다.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빗대면 알기 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해도, 증거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처럼 어떤 이론이 옳다는 사실을 그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는 없다. 이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 수학적 사실이다. 

  모든 것의 이론이 불릴 만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이론 안에는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 법칙이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이론이 있다면 모든 것의 이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 법칙이 왜 성립하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즉 모든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고 더는 탐구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이론은 존재할 수 없다. (279 페이지)


평범한 연구야말로 기대할 만하다


현대는 과거 어떤 시대보다도 과학 발전 속도가 빠르다. 그 중요한 원인으로 과학자 수가 많아진 것을 꼽을 수 있다. 옛날에는 기초 연구를 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당장 유용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연구는 사회적인 지원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이 사회 기반을 지탱하는 기술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 결과 과학자가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연구자 인구가 늘어나면 그만큼 과학의 발전 속도도 빨라진다. 물론 꼭 작업량에 비례해서 중요한 과학적 성과가 느는 것은 아니다. 우연과 행운에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양한 생각을 지닌 여러 연구자가 수많은 분야에 종사하다 보니 어디선가 커다란 발견을 할 확률은 커지고 있다.

  수많은 연구자가 다양한 생각에 따라 연구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러 연구자가 단 하나의 사고방식에 따라 연구해서는 가망이 없다. 물론 연구에는 유행이 있어서, 유망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 분야에 사람이 몰리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연구가 진전되는 속도도 빨라지므로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한 분야에만 집중되면 막상 그 분야가 벽에 부딪혔을 때 모두가 함께 무너지고 만다.

  유행하는 분야가 있으면 세간의 주목을 끌기 때문에 연구비와 일자리를 구하기 쉽다. 그래서 연구자는 현재 인기 있는 분야를 선택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분야에서는 재능이 넘치고 운 좋은 일부 연구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중요한 성과를 내기가 힘들다는 단점도 있다. 대다수 연구자는 그저 자잘하고 진부한 연구 성과만 내게 된다.

  유행하는 분야를 수많은 사람이 연구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이와 동시에 평범한 분야에도 연구자는 필요하다. 지금 주목받는 분야도 언젠가는 끝이 온다. 미래에 꽃필 분야는 현재 주목받지 않는 평범한 분야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연계의 신비를 해명한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과학을 지금까지 이끌어 온 것이다. (281~28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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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4-0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으신 내용 깊이 공감합니다. ^^
Blueyonder 님은 혹시 과학자이신가요?
매번 좋은 과학책 소개해 주셔서 혹시나 해서요. ㅎㅎ

blueyonder 2018-04-03 22:31   좋아요 1 | URL
아, 그냥 제가 물리에 관심이 좀 많아서요. ㅎㅎ 요즘 물리책 리뷰가 많긴 했네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해요~ ^^
 

 

 

 

 

 

 

 

 

 

 

 

 

 


원제가 <눈에 보이는 세계는 환상인가>인 <물리학은 처음인데요>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물리학을 거의 접해 본 적 없는 문과 출신자 등을 대상으로 한 물리학 입문서다." 그는 "특히 학교 수업 때문에 물리를 꺼리게 된 독자를 위해 이 책을 썼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이 물리를 싫어하게 된 원인은 주로 수식을 이용한 계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수식과 어려운 도표를 전혀 쓰지 않으며 물리학이 어떤 것인지 오직 글로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접근방법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물리를 왜, 어떤 생각으로 하는지 궁금했던 독자라면 이 책의 첫 부분인 뉴턴 역학 설명 부분에서 매우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천상계와 지상계를 통일한 뉴턴의 업적은 진정 근대과학의 시작이라 할 만한 혁명적 일이었다.

 

이후 물리학자들의 관심이 원자로 향하면서, 원자의 존재를 둘러싼 과학적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논쟁을 매우 잘 그리고 있다. 자연스럽게, 책의 논의는 원자 속 세상을 다루는 양자역학으로 이어진다. 책의 후반부는 또 하나의 혁명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한다. 상대성 이론을 설명할 때는 개인적으로 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전반적으로, 카를로 로벨리의 <모든 순간의 물리학> 느낌도 좀 난다. 하지만 논의는 훨씬 길고 상세하다.

 

현대물리학과 그 성과를 설명하는 책은 또 있다. 이종필 교수의 <신의 입자를 찾아서>이다. 제목만 보면 '신의 입자'라는 힉스 보존에 대한 얘기인 것 같지만, 사실 힉스 보존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 전체--양자론 및 상대론, 그리고 그 너머--를 개괄하는 내용이다. <물리학은 처음인데요>와 달리 그림과 수식이 '많이' 나온다. 상반된 접근법이지만 이 책도 매우 좋다. 그림과 수식이 이해를 도울 수도 있는데 굳이 삼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결국 저자와 독자의 취향 문제일 것 같다.

 

두 권 모두 장점이 많은 책이며, 물리를 공부하는 고등학생 또는 물리에 관심 있는 일반인이 읽으면 좋을 소개서이다.


<물리학은 처음인데요>의 오타(또는 오류)를 다음에 지적해 놓는다.

- 204 페이지: "빛이 진공 속을 나아가는 속도는 항상 초속 2억 9,979만 2,458km이며 절대 변하지 않는다." km를 m로 바꾸어야 한다.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 km이다. 

- 207 페이지: "전철을 타도 고작해야 초속 수십km일 뿐이다." 여기도 km를 m로 바꿔야 한다.

- 208 페이지: "이에 관해 마이컬슨-몰리 실험이라는 유명할 실험이 있었다." "유명할"을 "유명한"으로 바꿔야 한다. 

- 225 페이지: "이 상자 속에 있는 모든 물체"와 "는 어느 한 방향으로 힘을 받고 있다."사이에 필요 없는 줄바꿈이 있다.

- 231 페이지: "결국, 일반상대성이론은 1916년에 완성되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1915년에 완성되었다.

- 245 페이지: "중력파의 존재뿐만 아니라 강한 중력 현상도 확인함으로써 일반상대성이론이 옳다는 사실을 다시금 증명해 낸 획기적인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발견에는 확실하게 노벨상이 수여될 것이다." 2015년 9월에 검출되고 2016년 2월에 발표된 LIGO 실험에 대한 내용이다. 실제로 2017년에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었다. 노벨상 발표가 2017년 10월 3일이고, 책이 2018년 1월에 발행되었으니, 빠듯하긴 해도 수여 사실을 각주로 넣었으면 더 좋을뻔 했다.

- 254 페이지: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각 세 가지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세 가지"가 아니라 "세 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두 가지 종류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양성자는 업 쿼크 2개, 다운 쿼크 1개, 중성자는 업 쿼크 1개, 다운 쿼크 2개이다.

- 270 페이지: "현재 빛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먼 장소는 우주가 시작된 지 37만 년 후의 우주다. 그 이전의 우주는 빛이 물질에 가로막혀 똑바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관측할 수 없다. 이는 마치 구름이 껴서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아서, 37만 년 전의 우주를 '맑게 갠 우주'라고 한다." "37만 년 전의 우주를"을 "37만 년 후의 우주를"이라고 고치는 것이 맞다. 

- 272 페이지와 273 페이지 사이: "... 그 후에 우주에"와 "서 만들어진..." 사이에 필요 없는 공백이 하나 있다. 프린트된 책에는 안 나오지만 e-book에는 공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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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6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식과 도표가 없는 대신에 그림이 많은 과학책을 좋아합니다. 과학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

blueyonder 2018-03-26 13:3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동감합니다. 때로는 그림 하나로 말 열 마디 이상의 효과를 낼 수도 있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겠지요.
 















과학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물리학자 3인의 책을 모았다. 위의 3권보다 더 있지만, 과학이 무엇이고 과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과 더불어 지식을 전달하는 책 3권만 일단 모아봤다. 3인 모두 물리학자(특히 이론 물리학자)이다 보니 여기서 '과학'은 거의 '물리', 특히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 또는 '입자물리학'을 뜻한다. 


김상욱은 요즘 <김상욱의 양자 공부>라는 책을 내며 더욱 활발히 활동 중인데, 나에게 깊이 각인된 책은 역시 위의 <김상욱의 과학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읽으면서 그의 재기발랄함이 통통 튀는 것을 느꼈다. 과학 얘기와 더불어 그의 생각과 감상을 풀어내는 글재주가 감탄을 자아낸다. 정말 과학 '에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강영의 <불멸의 원자>는 에세이라기보다는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책에 가깝다는 느낌이다(그의 개인적 경험과 생각이 녹아있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책은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원자와 원자 속의 핵을 설명하는 얘기로서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2부는 여러 물리학자들의 초상이다. 잘 모르는 물리학자들, 가령 이탈리아인이며 우주선(cosmic ray) 연구의 대가였던 오키알리니 등에 대한 얘기가 특이하다. 저자의 연구분야와 맞닿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3부는 다시 미시세계로 돌아와 가속기, 충돌기와 이를 이용한 기본입자들의 발견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마지막 4부는 마무리로서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좀 더 녹아 있다. <불멸의 원자>는 짐 배것의 <퀀텀스토리>를 잘 보완하는 측면이 있으며, 어떤 내용(가령 가속기 얘기들)은 <퀀텀스토리>보다 더 자세하다.


마지막으로 이종필의 <사이언스 브런치>가 있다. 라디오의 과학 섹션에서 대담으로 나누었던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2012년 6월에서 2017년 1월까지 다뤘던 42개의 짧은 과학주제 얘기이다. 이름처럼 부담 없이, 옆에 두었다가 시간 날 때 조금씩 읽기에 최고의 책이다. 다루는 주제는 아마 당시 시사에 오르내리는 것들이 선별되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서 읽으니 그런 시의적절함이 있지는 않다. 그래도 다양한 주제들(예를 들면 '핵폭탄의 원리'나 '이세돌과 알파고', '현실이 가상현실이라면?' 등)을 일반인 눈높이에 맞추어 다루고 있어서 얻을 것이 많다. 부담 없이 읽을 과학주제에 대한 책을 찾는 사람에게 주저 없이 추천할 수 있다.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여진, 우리말 과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시간 내어 책을 쓴 3인의 물리학자에게 감사하며, 앞으로도 더욱 좋은 우리말 과학책을 많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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