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전쟁 - 말을 상대로 한 보이지 않는 전쟁,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파헤친다
이희재 지음 / 궁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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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와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도발적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모든 사회 현상(문제)의 배후에는 금벌(금권주의자들)이 있다'가 책의 한 문장 요약이다. 읽다 보면 점점 설득이 된다. 그러면서 정말 그런지 더 찾아봐야겠다는 숙제를 안게 된다. '음모론'과의 경계에 좀 걸쳐있다는 의문도 드는데, 이러한 주장 또는 이 반대의 주장(현재 서방과 우리 '주류'의 시각)을 통해 누가 이익을 얻는가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 속 몇 구절을 옮겨 놓는다.


  독일은 세르비아 때문에 1차대전에 말려들었다면 2차대전 때는 폴란드 때문에 전쟁에 말려들었습니다. 주류 역사가들은 독일이 1933년 1월 30일 나치 집권 뒤 1935년 3월 자를란트 귀속, 19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1938년 9월 체코 주데텐 점령에 이어 1939년 9월 1일 폴란드가 단치히 반환 요구에 불응하자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호전주의의 마각을 드러낼 때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유화책으로 일관하다가 2차대전이라는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고 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를란트부터 단치히까지 모두 독일이 1차대전 패전으로 외국군에 점령당한 독일 땅이었거나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타국 영토가 되었지만 절대 다수의 주민이 독일인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113 페이지)

  군산복합체는 2차대전 이후 미국에서 처음 생긴 게 아닙니다. 군산복합체는 국민 절대 다수는 아직도 가난에 허덕이는데 1차대전을 준비하면서 영국 정부의 무기 발주로 떼돈을 벌었던 무기회사의 대주주에 퇴역 장성은 물론 현직 장성도 다수가 포진했던 영국에서 이미 20세기 초에 생겨났습니다. 영국은 전범 독일을 응징한 나라가 아니라 영국과의 전쟁은 피하려 애썼던 독일을 전쟁으로 몰아간 나라입니다. 나토도 세계 자유 진영의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을 응징하는 조직이 아니라 세계를 자꾸 불안하게 만들어 군수산업과 보안산업으로 돈을 버는 소수 금벌의 돈벌이를 위해 테러와 전쟁을 유도하는 조직입니다. (119 페이지)

  영국인에게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손꼽히는 윈스턴 처칠은 보어전쟁, 1차대전, 2차대전에 모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보어전쟁 때는 장교로 참전했고 1차대전 때는 해군장관으로 군비 증강에 앞장섰고 2차대전은 총리로서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처칠은 돈벌이를 위해 전쟁이 필요한 영국 금벌의 이익을 가장 충실히 대변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처칠은 영웅이 아니라 전범입니다. 하지만 진짜 전범은 처칠을 앞세워 영국을 전쟁으로 몰아간 금벌입니다. (120~121 페이지)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공화국이 아닙니다. 개인이 웬만큼 자유를 누리는 민주국일지는 몰라도 공화국은 아닙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그 공동체가 자위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모래성일 뿐입니다. (219 페이지)

  근대적 의미의 징병제는 프랑스혁명이 낳은 국민군이 보여주듯이 침공의식이 아니라 방어의식의 산물입니다. 옛날 유럽의 왕들은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용병을 뽑아서 약탈전쟁을 하고 그 전리품으로 은행빚을 갚았습니다. 방어 목적이 아니라 수탈과 약탈 목적의 전쟁이었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모병제였습니다... 약탈전쟁을 벌이는 공격수단이었던 모병제가 약탈전쟁에 맞서는 방어수단이었던 징병제보다 선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392 페이지)

  군수산업이 굴러가려면 적이 필요합니다. 적의 위협을 강조해야 국방예산을 늘릴 수 있지요. 미소 냉전은 1946년 모스크바의 주러 미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조지 케넌이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국무부에서 경종을 울리면서 미국 대외정책이 급변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

  냉전은 유능하고 성실한 조지 케넌이라는 한 소장 외교관의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냉정한 분석이기보다 수백 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떼돈을 벌어온 금벌이 마름의 마름의 손자를 통해 관철된 물욕과 지배욕의 결과가 아닐까요. (471~4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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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까. 현재가 힘들수록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 올바로 나아갈 미래를 희망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6월 19일 저녁 7시30분 충북 청주 흥덕성당에서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교구별로 매주 월요일마다 여는 사제단의 시국미사는 이번이 10번째다. 다음은 배포한 성명서이다[*].


성명서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보수保守가 지킬 것은 지키자는 쪽이라면, 진보進步는 고칠 것은 고치자는 쪽이다. 보수가 있어서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을 가질 수 있고, 진보가 있어서 무엇인가 버리거나 끝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둘 다 좋고, 둘 다 고맙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사람이 사는 세상도 두 날개를 써야 높이 날고 멀리 간다.


1. 지킬 때나 고칠 때나


하지만 ‘보수’라고 다 훌륭하고, ‘진보’라고 다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지킨다는 보수가 지키기 위해 어떤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지, 고친다는 진보가 고쳐나가기 위해 어떤 십자가를 메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자기 살과 피를 내주는 십자가를 갖지 않는 한 가짜요 허깨비다. 성경은 지키든 고치든 힘없고 가난한 이웃을 염두에 두라고 가르친다. 지켜야 할 것이니 지킨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고쳐야 할 것이라서 고친다 하더라도 힘없는 사람들에게 득이 되지 않으면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키려거나 고치려는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서도, 부서지기 쉬운 사람들은 괴롭게 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들어 올리는 억강부약의 아버지이시니, ‘있는 나’를 낮추어 ‘없는 남’을 높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지켜도 고쳐도 그릇됨이 없다. 이런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나라를 보수에게 맡겨도 되고 진보에게 맡겨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태생이 보수거나 진보인 사람이 있을까?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사안에 따라 보수가 되기도 하고, 진보가 되기도 할 것이다.


2.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된다


눈만 뜨면 대립하고 의심하고 격돌하는 한국사회다. 공동선에 부합하는 최상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다툼이라면 오히려 권장할 만하다. 하지만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하고 만다. 지역감정에 사로잡혀서, 여태껏 6.25라는 원한에 눈이 멀어서 무엇이 자신과 미래세대를 위한 선택인지 차분히 생각해보지도 않고 맹목적 지지와 다짜고짜 반대로 갈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극단적 성향의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특정 커뮤니티가 복제해내는 거짓뉴스에 맛들이고 나면 이성적 판단이 작동할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는 무슨 당만 찍는다”고 했던 어느 시장 상인의 ‘양심선언’(?)을 듣고 있노라면 민주주의가 가능하기나 한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매사에 둘로 갈라져 욕하고 미워하는 쟁투에 신물이 난 나머지, 너 나 할 것 없이 교회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 세상사는 아예 거론하지 않기로 하자는 묵시적인 합의가 대세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정도로 우리네 마음은 상처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런들 심리적 내전은 멈출 줄 모르고, 작은 일에도 우리는 격렬하게 반응하고 충돌한다. 신앙인이라도 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어느 한쪽에 기운 인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는 분단체제 속에 생겨난 원죄와도 같은 것이니 서로 이해해 주어야지 등을 돌리거나 미워할 일이 아니다.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 원수는 따로 있다.


3. 진보와 보수 공동의 적


진보와 보수 공동의 적敵이 있으니 그것은 입장이 다른 ‘남’이 아니라 나만 위하는 ‘나’ 자신이다. 한사코 저와 제 사람들만 위하려는 ‘사사로운 사랑’이 진보와 보수의 진면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물론 안으로만 굽는 팔을 좌우에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선을 유지 발전시켜나갈 지도자를 찾아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국가라는 집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가장 큰 사랑, ‘사회적 사랑’을 발휘하리라 믿었던 지도자가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으로 시작해서, 일본 <핵폐수 무단투기>까지 대통령이라는 이는 목숨 내놓고 지켜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영혼을 짓밟고 국민생명권 보호 의무마저 보란 듯이 팽개쳤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부화뇌동하느라 경제를 망쳤고, 모처럼 축제에 참석했던 젊은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기껏 마련한 양곡관리법과 간호사법을 거부했고, 노동자들을 적대하고 노동조합을 모욕했다. 정작 끊어 버려야 할 친일, 친미 사대근성은 키우고 또 키웠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런 청개구리는 없었다. 영혼의 목자인 사제들은 그에게서 ‘자기애적自己愛的 성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을 본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에 빠져 대화와 소통을 거부하고, 자기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상대는 가차 없이 처단하는 모습은 나르시시즘의 전형적 특징이다. 그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좌와 우, 심지어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극우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는 실격의 배신자일 뿐이다.


4.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2016년 겨울 촛불대항쟁으로 본분을 잊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던 날,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 때의 열망과 성취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실 촛불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었으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듯 세상을 ‘촛불’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강자들의 사생결단이 윤석열의 집권이라는 변칙적 사건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한방에 끝내는 민주주의는 없다. 프랑스대혁명을 보더라도 1789년 8월의 역사적 인권선언은 대장정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첫 공화국이 성립한 것은 1792년이었고, 그 후로도 나폴레옹의 황제정치, 부르봉가의 왕정복고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제정帝政이나 왕정王政으로의 복귀 위험이 사라진 것은 제3공화국이 수립되던 1870년에 이르러서다. 우리도 갈 길이 멀다.


아직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모든 면에서 거꾸로 달리는 이 폭주열차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물론이고 인류사회 전체의 대혁신, 대전환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오히려 복된 시기를 맞았다고 여기자. 당장의 성과보다 “옳은 일이니 내가 하겠다. 나라도 하겠다”는 결기로 긴 성공을 도모하자. 먼저 예수성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자. 사리사욕으로 뭉친 기득권동맹을 거슬러 아직 가져보지 못한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자면 나다운 나를 먼저 세워야 한다. 날로 새로워지자. 깊어지고 넓어지자.


2023년 6월 19일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청주 흥덕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 출처: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096542.html?_ga=2.139465971.1970090050.1687260101-1600249779.167634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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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ct (Paperback) - 『콘택트』원서
칼 세이건 / Gallery Books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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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훨씬 깊고 다기한 얘기이다. 영화는 스토리를 단순화해서 좀 더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자 했다. 영화도 괜찮았지만, 줄거리를 알고 읽는 소설도 좋았다. (영화에는 없는 반전도 있다.) 


칼 세이건이 소설 쓰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알게 됐다. 물론 주제가 완전히 발전되지 않고 애매하게 끝나는 것도 있고, 또 복선이 충분치 않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의 핵심 주제 의식은 명확하다. 칼 세이건은 외계 지성의 존재가 가져올 전 지구적 각성--국적을 초월한 '지구인'이라는 의식--을 갈망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창백한 푸른 점'이란 사진을 두고 얘기했던, 우리의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지구, 하지만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지구와 그 위에 사는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덧없는지, 이 우주를 두고 명상한다면 깨닫게 될 경이와 종교적 체험 등도 그는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소설을 통해 잘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의 상황에 기반한 소설이기 때문에 소련이 나오고 제조업 강국으로서의 일본이 나온다. 이런 부분도 일종의 역사적 유물이 될 것 같다. 한국은 단 2번 언급되는데, 중국인 캐릭터(Mr. Xi)가 한국(분명 북한)에서 복무했다는 얘기에서다. 


영화가 워낙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세이건의 생각과 숨결을 직접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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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시사인) 제821호 : 2023.06.13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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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뉴스 보기가 싫어진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자면 뉴스를 봐야 하지만, 봐도 좋은 소식은 없고 앞으로가 더 걱정이 될 뿐이다. 여러 우울한 뉴스에 더해 이번 호 <시사인>에는 교육에 관한 뉴스가 실렸다. 이른바 '수능의 타락'이다. '킬러 문항'이라는 것이 의대 등 선호학과/대학의 당락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모양인데, 본문을 인용하자면 "패턴을 예상할 수 있지만 풀이 과정과 시간을 극단적으로 늘려놓은 문항"이라서 사교육 의존도를 높이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도 그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 같아서 더욱 우울하다.


'학종 설계자'라고 불리는 서울대 김경범 교수는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게 하는 선다형 시험"인 현재의 수능이 "특별히 나쁜 시험"이며 "교과 이해도나 사고력보다 '기술'에 고득점이 달려 있다"고 말한다. 초기에는 수능도 이렇지 않았다고 한다. "2000년대까지도 수능시험은 각 교과 개념의 정확한 정의와 사고력을 묻는 문항으로 변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대 어느 시점부터" 수능 출제 경향이 바뀌었는데 "평가원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자 점차 수능은 '족보화'되었다"(사교육걱정없는세상 2028 대입포럼의 문호진 연구원). 더욱이 "학습 부담 경감"을 위해 시험 범위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역효과를 낳았다. "평가원은 대다수 수험생이 주목하지 않는 지엽적인 교과 내용에서 '꼬여 있는'문제를 내기 시작했다." 이 결과가 '킬러 문항'이다. 이 모든 것이 상대평가에서 최상위권을 변별하기 위해서이다. 


김경범 교수는 현 수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항 수를 줄이고 문제 푸는 시간을 늘려 생각하는 문제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전반적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아마 이러한 시도도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대학갈 필요가 있는 사람이 줄어들게 되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는? 난 절대평가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최상위권 변별은? 그건 대학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그냥 추첨으로 뽑으면 어떨까. 어쩌면 여기에 학벌 해체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늘 나오는 얘기지만,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좋은가? 결과의 평등인가, 기회의 평등인가? 정답은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이것이 인간세상의 어려움이다. 하지만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기도 하다. 바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누군가는 흑백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지만.


---

[*] "수능창시자"라고 불리는 박도순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의 인터뷰도 있는데, 여기를 보면 수능은 원래 절대평가로 의도됐다고 한다. 일종의 '자격고사'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등학교 교과와의 연계를 끊다시피" 해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지능검사처럼 논리력, 사고력을 측정하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응시 영역도 언어와 수리로만 한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평가에서 빠지게 된 분야를 담당하는 교사들과 여타 전문가들이 비판"해서 과학, 사회, 영어 과목이 추가됐다. 더욱이 "막상 새로운 시험을 도입하고 보니 대학은 이걸로 줄을 세웠다." 이것이 수능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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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3-06-16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교육부가 쑥대밭이 됐다. 관련기사: https://v.daum.net/v/20230616153858732
그냥 말 한마디로 사교육 문제가 해결될 줄 아는 모양. 킬러 문항이 단순히 ‘비문학 문제‘나 ‘과목 융합형 문제‘인 줄로만 아는 듯.

평가원도 감사한단다. 관련기사: https://v.daum.net/v/20230616155129109
˝난도 낮추라는 뜻은 아냐…교육과정 안에서도 어려운 문제 가능˝
말은 쉽지... 현재 수능의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 고민 없이 그냥 칼만 휘두르면 된다고 생각.

2023-06-16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23-06-16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뉴스 아예 안 보고 오로지 과학책과 미스터리물 그리고 유튭의 크라임쪽만 봐요. 정치는 이동형작가 정도만 보고.. 너무 무겁고 답답해서 뉴스는 거부하고 있어요. 저의 남편도 그런지 저의집은 티비 아예 안 켜져 있네요. 이명박이후 수능이 변질 된 것
같은데. 아이들은 지금의 입시제도를 선호하고 있더라고요. 아이러니죠??!!!

blueyonder 2023-06-17 08:46   좋아요 0 | URL
요즘 아이들은 지금의 입시제도를 선호하나요? 잘 몰랐습니다. 수능만 해도 기계적으로 반복 연습만 하면 되고, 돈 쓴 대로 결과가 나오니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2001년 간 <콘택트 1>에서 주인공이 외계신호를 처음 받는 부분을 옮겨 놓는다.


  허겁지겁 엘리는 통제구역으로 들어서 계기판에 다가갔다.

  안녕들 하세요? 데이터를 좀 봅시다. 으흠, 진폭 범위는 어떤가요? 간섭 위치는? 자, 그럼 이제 그쪽에 가까운 별이 혹시 있나 봅시다. 아! 직녀성이군요. 아주 가까운 별인데요

  말을 하면서도 엘리의 손가락은 바쁘게 자판 위를 움직였다.

  음, 겨우 26광년 떨어져 있군요. 이미 관찰을 했었지만 신통한 결과가 없었지요. 아레시보에서 근무할 때 개인적으로 관측한 적이 있고요. 절대강도가 얼마죠? 이런, 수백 잰스키jansky나 되는군요. 이건 FM 라디오로도 잡을 수 있는 수준이잖아요.

  정리해 봅시다. 직녀성에서 아주 가까운 하늘에서 신호가 오고 있군요. 주파수는 9.2기가헤르츠, 대역 너비는 몇백 헤르츠 정도. 선편광이고 서로 다른 진폭 안에서 움직이는 파동들을 보내오고 있어요

  엘리가 입력하는 명령에 따라 화면에는 이제 모든 전파망원경 상황이 나타났다.

  116개 망원경이 수신하고 있군요. 망원경 이상 작동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간에 따른 움직임을 살펴볼까요? 별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나요, 아니면 전자 첩보 인공위성이나 비행기일 가능성이 있나요?

  별의 운행과 동일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애로웨이 박사님

  그렇군요. 지구 위에서 오는 신호는 아니군요. 또 몰니아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도 아닌 것 같고. 물론 이건 확인해 봐야겠지만. 북미 대공 방위사령부와 연락해서 인공위성일 가능성이 있는지 의견을 들어봐 줘요. 인공위성이 아니라면 두 가지 가능성이 남는군요. 짓궂은 장난, 혹은 마침내 날아온 외계의 메시지. 수동 장치를 좀 가동해 봅시다. 전파망원경 몇 개를 골라 신호의 세기가 충분히 큰지 확인해 주세요. 우리를 놀려먹기 위한 장난인지도 모르니까 (95~96 페이지)


번역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 번역. 일단, 한국 독자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없앴다. 과학자 둘의 이름(윌리, 스티브)이 그렇다. 이건 이희재의 번역론에도 나오는데, 난 사실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문화적으로 낯선 것을 그대로 두지 말자는 것이 이희재의 주장이다. 편한 것으로 대체하거나 중요치 않으면 아예 삭제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도 아닌데 잘 모르는 문화 정보가 나온다면 그냥 두고 각주로 처리해도 되지 않나. 아니면 그냥 각주도 없이. 내가 영어책을 보면서 느끼는 낯섦을 번역책을 보면서 느끼면 안 되는지. 두 번째는 '그녀' 대신 그냥 이름 '엘리'를 써서 주인공을 지칭했다. 이건 배워둘 만한 습관인 것 같다. '그녀'가 자꾸 나오는 것보다는 이름이 더 자연스럽다.  번째는 대화체가 상당히 간결하다. 그냥 명사로 끝날 때도 있다. 뭐, 크게 나쁘지 않아 보인다. 주인공 캐릭터의 말투니까 역자가 그렇게 컨셉을 잡을 수도 있다. 네 번째, 원문에는 없는 말("정리해 봅시다")을 넣어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어느 정도는 역자의 맘이지만(난 원문주의를 버렸다), 너무 많이 바꾸는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 과학적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다. 하지만 time baseline 부분을 너무 의역했다. 영어로 읽었을 때 딱딱하고 일반인이 잘 모를 것 같은 기술적 내용이 튀어나오는 경우 이를 말랑말랑하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이 부분도 난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잘 읽히는 괜찮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난 가능하면 원문 읽는 느낌을 살리도록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자는 독자의 가독성을 조금 더 중시하는 이희재의 주장 쪽으로 가 있다. 


하지만 오역이 하나 있는데, 수동 조작으로 "신호의 세기가 충분히 큰지 확인해" 달라는 부분이다. 40년 전 번역과 마찬가지의 오역이다. 신호의 세기가 충분히 크지 않다면 "놀려먹기 위한 장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중간에 들어간 '신호의 세기가 충분히 크다'는 말은 개별 전파 망원경에서도 수신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일 뿐이다. 신호가 만약 너무 약하다면 개별 전파 망원경에서 수신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호의 세기와 장난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PS. 특이한 점 하나: "⌟" 앞에 마침표가 없다. 원래 이런 규칙이 있나 다른 책(예컨대, 열린책들 간 <장미의 이름>)을 살펴봤는데 여기에는 마침표가 있다. 이 출판사만의 규칙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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