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들리의 책에서 물리학의 역사 중 또 하나 주의 깊게 봐야 할 사건으로 언급되는 것이 폴 디랙의 예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으로 우리 눈이나 다른 감각기관으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직관적 상상이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과학이 시작되었다. 고전물리학과 달리 양자역학은 파동함수라는 기묘한 도구를 이용하며, 고전물리학에서 사용하던 개념에 근본적 제한이 있음을 보였다(불확정성 원리). 이러한 발전에서 한 발 더 내디뎌서, 폴 디랙은 이제 가지게 된 양자역학적 수학 체계를 더욱 밀고 나아가 수학 체계 자체의 완결성을 추구한 후, 그 결과에서 물리적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수학이 자연현상을 정량적으로 기술하는 단순한 도구 역할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위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디랙이 주장한 반전자(antielectron)의 존재이다. 디랙은 그가 만들어낸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방정식이 기묘한 해를 하나 더 주는 것을 알았다. 보통 물리학 방정식에서 의미 없는 해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물리와 연관된 이차방정식을 풀게 되면 두 개의 해가 나오는데, 종종 음의 값을 주는 해는 물리적으로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버린다. 디랙의 방정식도 이와 유사하게, 전자와 질량은 똑같지만 양의 전하를 갖는 입자를 해로 주는데, 디랙은 이 해를 버리지 않고 이러한 입자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자(반전자)가 나중에 실험에서 실제로 발견되어 버렸다! 이 입자를 보통 '양전자(positron)'라고 한다[1]. 수학이 물리보다 앞서나가고, 물리가 뒤를 쫓는 양상이 된 것이다.


이후, 이러한 패턴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물리 이론이 수학으로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예견한다. 가속기에서 이러한 입자를 실제로 발견한다.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최근 노벨상 수상과 관련된 '힉스 입자'의 발견이 이러한 패턴의 정점을 찍었다.


그래서 종종 언급되는 것이 왜 자연이 수학적으로 기술(이해)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다. 디랙의 주장은 물리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단순한 도구에서 핵심으로 격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사건으로 기억될만하다. 


디랙은 굉장히 과묵한 천재형 물리학자로 유명했다. 그의 전기가 최근 번역 출간됐는데, 영문판의 제목은 <The Strangest M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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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모든 입자마다 질량은 같지만 전하의 부호가 반대인 '반물질(antimatter)'이 존재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Wigner says that for the physicist, it is in essence an article of faith that physics can be couched in mathematical laws--it's pretty much a definition of physics that it is the search for such laws, and, so far, faith in that principle has been amply rewarded. But no amount of practical success can prove, to a logician's satisfaction anyway, that the principle is a priori correct. "The enormous usefulness of mathematics in the natural sciences is something bordering on the mysterious," Wigner says, "and there is no rational explanation for it." (The Dream Universe,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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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16 1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루 욘더님이 언급하신 이책 david lindley 드림 유니버스 방금 킨들로 구매했어욯ㅎ 블루 욘더님이 추천하시는 물리학책은 믿고 읽음 ^ㅎ^

blueyonder 2021-04-16 13:22   좋아요 1 | URL
이 책 너무 뻔한 얘기라는 평도 있지만, 물리학의 역사에서 수학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나름 그 의의를 잘 짚어주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린들리의 책은 전반적으로 다 좋습니다. 저는 린들리의 팬이 되어 버렸어요. ㅎㅎ

Jeremy 2021-04-16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학 다닐 때 Physics 와 Physical Chemistry 에서 저를 몹시도 괴롭혔던
Schrödinger equation 의 Erwin Schrödinger 와 Dirac equation 의 Paul Dirac.

갑자기 Paul Dirac 의 ‘fermion˝ 과 ˝antimatter˝ 에 대해
수식과 함께 설명하는 주관식 답안지를 작성했지만
˝Nice try, but....˝ , 형편없던 점수의 악몽같은 기억이 떠오르며
이런 책 읽으시는 blueyonder 님에 대한 ˝좋은˝ 호기심까지 상승.

저는 대학.대학원 이후로 제 전공과 관계된 것이나 과학 관련 서적은
목숨을 건지기 위한 CE requirement 제외하곤,
정말 절대적으로 피하고 있거든요.

blueyonder 2021-04-16 13:51   좋아요 2 | URL
사람마다 관심의 영역이 다른 것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우리네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여러 관심의 영역이 합쳐져 아름다운 하모니가 될 수도 있겠지요. ^^
Dirac equation까지 배우셨다니 대단하시네요. ^^ 저는 물리를 배우기는 했지만 졸업 이후 물리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다가, 대학시절 관심을 가지던 근본적 문제로 조금씩 회귀하고 있습니다. 그냥 관련 책을 찾으며 읽어보는 수준입니다.

han22598 2021-04-22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수학이 부심부릴만 하네요 ㅎㅎ 그런데.어렵네요. 물리 어려워요.수학은 좋은데, 물리만 나오면 쫄아지는 건 변함이 없네요. blueyonder 글 잘 읽어보면서 배워야겠어요 ^^

blueyonder 2021-04-22 18:27   좋아요 0 | URL
수학은 좋은데 물리는 어렵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 성향 차이도 있는 것 같아요. 수학은 고매하고 깔끔한 성격에 어울리고요, 물리는 지저분하고 현실적 성격에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이론물리학자들은 아무래도 수학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디랙도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