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노니 그대는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나는 북쪽 바닷가 미인을 그리워한다네
연못에 붉게 핀 수많은 연꽃
연화 생각에 더욱 사랑스러워라
마음도 같고 뜻도 같고 사랑도 같아
어찌 한줄기에 나란히 핀 연꽃을 부러워했으랴
백년을 살면 즐거운 집이 원망스러운 집이 되고됙
좋은 인연이 나쁜 인연도 되지
하늘과 땅이 산하에 막혀
끝내 헤어져 한 맺힌 이별 노래를 부르네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이처럼 애통한가
연화야, 연화야, 그리운 너를 어찌하면 좋으냐
-본문 중에서-

'서방님이 오시지 않는다고 해도 기다릴 테야요. 정녕 오시지 않으면 그리워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가슴앓이를 그린 소설일까? 아니면 조선을 울린 위대한 사랑이라 하니 시대를 거스르지 못하는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이야기일까? 라는 섣부른 궁금증을 가졌다.
<그리워하다 죽으리>. 독자의 가벼운 짐작을 부끄럽게 한다.
조선의 여인과 양반네 남성의 사랑을 한낱 불장난 같은 그런 사랑으로 본다면 알콩달콩하고, 재미가 쏠쏠하게 느껴지는 사랑이야기야 수없이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가슴 저리도록 그리워하는 깊은 아픔이 느껴지는 사랑이야기는 그들의 사랑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흐른다.
<그리워하다 죽으리>는 역사의 사실을 바탕으로 탄탄한 스토리를 그려낸 작품을 발표한 이수광 작가의 소설이다.
조선 시대 시인 김려와 부기 연화를 사랑을 역사에서 찾아내고, 그들의 사랑을 글로 구구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다.『나는 조선의 국모다』「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정도전」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방대한 역사 자료를 섭렵하고, 수많은 인터뷰를 하면서 제대로 된 역사소설과 추리소설을 아울러 그려내고 있는 작가로 꼽힌다.
그는 글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의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그 위에서 살아가던 시대의 사람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팩션 역사서를 개척했다는 평가는 당연한 표현이고 그것을 공감하게 된다.
<그리워하다 죽으리>의 두 주인공 김려와 연화는 유배객과 부기로 만났다.
서로의 힘든 상황과 그들만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감담일기」「사유악부」에 조금씩 남아 있다. 김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연화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여 「연희언행록」을 지었다. 선비가 기생의 언행록을 지었다는 사실도 대단하지만, 그녀를 회상하는 글을 담은 시집 「사유악부」를 남겼다는 사실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김려는 그의 글 곳곳에 연화를 그려내고 있다. 금기서화에 능하고 문장이 뛰어나고 절세미인이라 칭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여인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 더구나 양반댁 규수가 아닌 배수첩(유배객의 시중을 들던 여인)이었던 여인을 글로 남기고 칭송하는 일은 그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가늠할 수 있다.
작가는 이것을 바탕으로 삼아 두 연인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절절하게 그려낸다.
연화는 북방에서 이조참 이광표의 소실로 한양으로 왔지만, 파혼을 당해 함경도 부령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어느 날 남학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연화를 김려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도홧빛으로 붉은 뺨과 초승달같이 단아한 눈썹을 어찌 잊을까? 김려는 그날로 끙끙 앓기 시작한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이 터질 듯이 세차게 뛰었다. 그렇게 그녀를 가슴에 담고 앓이를 시작한다. 며칠을 고열에 시달리고 입안을 바싹 타들어가는 사랑 앓이를 호되게 겪은 후 김려는 연화의 집 담장 아래에서 듣는 그녀의 글 읽는 소리만으로도 위안을 삼게 된다.
둘은 운명이었다.
글을 읽으면서도 연화는 자신의 방 밖에서 서성이는 김려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바라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신의 처지가 김려를 편히 바라볼 수는 없다. 양반과 부기라는 관계도 그렇고 남녀라는 관계도 그렇고..그리고 성균관 유생으로 미래가 있는 약관의 청년과 노예의 신분인 자신의 팔자 때문에 연화 역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할 운명이었다. 그들은 어느 사랑보다 더 애틋하고 절절하게 이어진다. 시간이 도와주지 않아도, 세상이 도와주지 않아도 이들은 사랑할 운명이었다.
조선 시대 남녀의 사랑이 자유롭지 못했음에도 그들의 사랑은 편지로 이어진다.
김려는 1797년(정조 21년) 강이천의 옥사에 말려들어 재판도 받지 않고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연화 역시 북방의 땅 함경도로 되돌아간다. 멀고 먼 3천리 길, 함경도와 경남을 이어주는 편지는 300일 만에 서로에게 도착한다. 그 편지에는 원망도 있고, 절절한 그리움도 있고, 언젠가 만날 날을 기약하는 약속도 있다.
그들이 편지를 받기까지 겪어야만 하는 수많은 고통은 읽은 독자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유배길에서조차 대접받지 못하는 처절한 상황을 버텨야 하고, 억울한 누명조차 변명할 기회도 갖지 못한다. 기생이 수절한다고 온갖 고초를 당해도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멀리 있지만 그리워할 이가 있다는 것이다.
오랜 유배가 끝나고 세상으로 돌아온 김려는 죽어가는 연화의 소식을 접한다.
그녀를 만나러 부령으로 가는 길은 그가 유배를 당해 가던 고통의 길과 똑같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연화를 그리워했던 시간이 떠올린다. 자신의 고통을 떠올린다. 세상의 풍파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 자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부르는 연화를 떠올린다.
눈물 나게 아름답다. 눈물 나게 그립다. 그리고 눈물 나게 행복하다.
김려와 연화의 사랑은 이렇다. 너무 가슴이 아파 아름답게 이루어지길 원하게 된다. 조선 시대 김려라는 사람이 가진 그 모든 상황을 벗어던지고 과감하게 연화를 찾아 나서는 길을 독자들은 그것을 불쾌하다 생각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영혼을 사랑하는 이를 보겠다는 가느다란 희망으로 겨우 쥐고 있는 연화의 소망까지 이루어주어야 하는 김려의 행보에 독자는 함께 걸을 수밖에 없다.
죽음의 저승사자에게 마지막 소원이라 빌었을까? 그녀의 절절한 아픔과 그리움에 저승사자가 잠시 모른 척 해주었을까? 떠나는 길에 연화는 김려를 눈에 담는다. 마당 가득히 고개 숙여 엎드린 기생들의 화사한 향기는 마치 연화의 사랑을 향기롭게 만들어줄 꽃잎처럼 느껴진다.
그 꽃잎을 헤치고 초라한 행색으로, 피곤과 아픔에 찌든 행색으로 나타나는 김려지만 그 누구보다 향기롭고 근사하고 멋있는 사랑을 가슴 가득 담고 오는 김려의 모습에 독자들은 오히려 엎드린 기생들과 함께 울 수 밖에 없다.
사랑을 아프게 보내고 도려내는 울음을 울어버리는 김려의 아픔을 독자들은 함께 울어줄 수 있을 것이다.

"연화야"
나는 목이 매어 연화를 불렀다.
착각이엇을까.
연화의 얼굴에 언뜻 작은 미소가 번진 것 같았다.
...
서방님.
연화가 속삭이는 소리가 내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소원을 이루어주어서 고마워요.
...
하얀 천 자락 하나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연화를 안고 하얀 천조각을 바라보다가 못이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은 이승에서 유계(幽界)로 떠나고 있는 연화의 영혼이었다.
-본문 중에서-
<그리워하다 죽으리> 오랜 시간을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했다는 것만으로도 저승길을 사뿐히 걸어가는 연화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하늘하늘 치맛자락을 흩날리면서 사랑을 남기고 떠나는 연화의 눈물도 보이는 듯 하다. 아름다운 아픔이라는 느낌을,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그런 사랑이야기를 독자들의 가슴에 남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