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더스의 개 동화 보물창고 49
위더 지음, 원유미 그림,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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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플랜더스 지방의 조그만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넬로라는 소년과 그의 가장 절친한 가족인 늙은 개 파트라슈의 애절하고 감동적이고 너무너무 슬픈 결말을 남겨주는 장편동화입니다.

<플랜더스의 개>는 1872년 여류작가 위다가 발표한 뒤로 140년 동안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동화입니다.

주인에게 모진 학대를 받고 죽음에 이르러 버려진 늙은개 파트라슈를 늙은 할아버지와 넬로가 발견합니다. 할아버지와 넬로 역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지만 파트라슈를 극진히 보살피면서 한 가족으로 살게 됩니다.

유일한 생계수단인 우유 수레를 끌면서도 넬로는 늘 가슴 한편에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당에 걸려있는 루벤스의 작품을 한번 보는 것이 넬로의 소원입니다.

 

<프랜더스의 개>는 파트라슈와 넬로의 끈끈한 우정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노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넬로를 위해 파트라슈 역시 늙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넬로는 그런 파트라슈의 마음을 다 아는 듯이 역시 마음을 다해 챙겨줍니다.

 

사람들은 개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수많은 반려 동물 중에 개는 가장 소통하기 정겹고 따스함을 주는 동물이니까요. 물론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반려견을 곁에 두고 있었지만 <프랜더스의 개>처럼 반려견을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고 표현하는 작품은 당시 그렇게 흔하지 않았습니다. 동물과의 교감을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대표작이라 할 수 있죠.

 

<플랜더스의 개>는 파트라슈와 넬로와의 아름다운 교감, 그리고 넬로의 유일한 친구 알로아와의 안타까운 마음 등을 읽는 부분에서 독자들은 짠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넬로와 파트라슈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결말을 원하겠지만 <플랜더스의 개>는 그런 아름다운 결론을 주진 않습니다.

만약에 넬로가 길가에서 주은 돈주머니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면, 만약에 추운 겨울날 돈을 찾아주고 돌아선 넬로를 알로아와 그 엄마가 빨리 붙잡았다면, 그리고 알로아의 아버지가 조금 더 서둘렀더라면 아마도 넬로의 행복한 결말을 볼 수 있었겠죠.

독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플랜더스의 개>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가난해서, 힘이 없어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이죠.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플랜더스의 개>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것은 순수하고, 늘 한결같은 넬로와 파트라슈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정직이 무엇인지. 나의 가치를 세우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넬로를 통해서 독자들은 느낄 수 있는 거죠.

 

차디찬 교회당의 바닥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서 넬로는 그 누구보다 따뜻함을 느꼈을 겁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파트라슈와 살았던 그 따뜻하고 향긋했던 그 시간만을 기억했을 겁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에게 똑같은 느낌을 남겨주는 <플랜더스의 개>

어릴 적 가졌던 감정과 어른이 되어서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변함이 없다는 것은 <플랜더스의 개>가 가지고 있는 진한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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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매미 같은 여름 푸른도서관 51
한결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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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게도 일기장엔 온통 고민뿐이다.

내가 나를 미워하게 된 첫째 이유가 가족이라고 적혀 있다.

교에서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된다고 적혀있다.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적혀있다.

<우리들의 매미 같은 여름>의 주인공 민희, 춘장, 조앤의 일기장에는 어떤 글을 담아내고 있을까요?

열일곱의 눈앞에 보이는 가족 이야기, 학교 이야기, 그리고 친구이야기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아들,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들, 딸의 친구 이야기이기도 하고, 친구의 친구, 주변에 있는 모든 청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넓은 세상을 향해 걸어야 하고, 세상의 육중한 문을 열어야 하는 열입곱이란 나이는 늘 싱그럽고, 생기발랄하고 미래에 대해 총천연색의 풍선들을 떠올리게 하는 나이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슬프고, 두렵고,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선택의 길목에 서 있게 될 때도 있습니다. 찰나의 순간이기도 하고, 선택의 순간이기도 하고, 때론 그들을 둘러싼 환경 탓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매미 같은 여름>의 열일곱 친구 민희와 춘장과 조앤은 그들이 갈등하고 그들이 선택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선택으로 고민하게 되고 아프게 되고 때론 전혀 엉뚱한 결과를 보이기도 하지만 세 아이는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어떤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줄까요.

 

민희는 언니한테 '엄마의 충직한 개'란 소리를 듣습니다. 엄마가 정해놓은 룰대로 살아가면 성적도 그럭저럭 괜찮고 칭찬도 받는 그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던 언니가 엄마에게 반항하기 위해 남자 친구를 사귀고 성적이 떨어지고 결국 지방대 기숙사로 떠나 버린 지금 언니가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자신에게 왜 그런 못된 말을 했는지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아직 민희는 그런 언니를 완전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언니 대신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엄마가 밉기만 합니다.

엄마와 함께하는 식사조차 거부하고 싶습니다. 민희의 감정은 잘못된 식습관으로 조금씩 표출되고 있지만 민희나 엄마나 아빠는 아무것도 눈치채지를 못합니다.

조앤의 엄마는 어느 날 떠났습니다. 엄마가 떠난 자리에는 엄마에 대한 고약한 소문만 무성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아빠는 조앤에게 아무 의미 없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술에 찌들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아빠가 머무는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조앤의 마음을 그나마 알아주는 친구가 민희입니다.

민희 역시 조앤과 마음이 제일 잘 통합니다. 그리고 그런 민희를 무조건 응원해주는 춘장이 있습니다.

 

방학을 앞둔 어느 여름, 세 아이에게는 당연히 거쳐야 하지만 지독하게 아픈 성장통을 겪게 됩니다.

평소 또래보다 성숙해 보이는 조앤에게 성추행이란 사건이 벌어집니다. 무서워 아무 대항도 못하는 조앤을 위해 민희와 민희의 열렬한 팬 춘장은 사건을 겉으로 끄집어냅니다. 발칵 뒤집힌 학교에서 과연 조앤은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요? 그리고 그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또 어떻게 행동을 할까요.

 

청소년 소설이라고 늘 생기있고, 발랄하고, 희망만을 향해 가는 이야기만 그리지 않습니다.

열일곱 청소년에는 아픔이 가장 많고, 두려움도 많고, 그리고 그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책임감도  성장통도 분명 있습니다.

우리가 덮어놓고 싶은 아픔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매미 같은 여름>에서는 그것을 피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민희와 조앤은 울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매미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대학에 가거나 어른이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거 같아. 애벌레가 매미가 된 것처럼 그냥 우리도 저절로 성인이 되는 거잖아, 원하지 않아도 말이야. 한철 울다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매미처럼 우리도 성인이 된다고 꼭 무엇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 거 같아."

 청소년들은 세상으로 나가는 자체가 두려울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껏 노래를 부르리라 꿈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두려워도 알아야 하는 세상이고, 무서워도 헤쳐나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반항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선택에 맞는 책임을 가져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민희와 조앤 그리고 춘장을 들여다보면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고, 전혀 다른 결말을 얻지만 세 사람을 서로 이어주는 것은 바로 우정입니다.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자신의 희망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이런 친구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은 울다 떨어져 죽지만 더운 여름을 대표하는 매미 울음을 남기는 것처럼 나의 인생에 귀한 사람을 하나 남긴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들의 매미 같은 여름>을 덮고 나서 아이들의 현실은 어쩌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치열하고, 더 경직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소설을 통해 아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표현하게 되는지 알아보는 시선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아이들 역시 어른들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늘 목표를 향해 재촉하는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어른들, 나의 부모님 역시 나약하고, 때론 아픔이 있음을 조금을 깨닫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름 한때 울고 죽어버리는 매미를 떠올리기보다는 그 시원한 소리를 내기 위해 오랜 세월 땅속에서 견뎠을 매미를 먼저 보는 시선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금의 아픔도 나의 미래엔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하리라는 것을 한 번쯤은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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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 빈처 올 에이지 클래식
현진건 지음 / 보물창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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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사감과 러브레터'란 소설로 유명한 현진건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라고 일컫습니다. 사실주의를 글 속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실주의에 충실한 표현으로 획기적인 소설의 한 획을 긋고 있습니다. 개인의 성향을 그려낸다거나, 시민계급의 자아의식을 표출한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현진건의 작품 10편을 모아 <운수 좋은 날 빈처>로 청소년이 읽기 쉽게 다시 나왔습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가 배경입니다. 자유를 꿈꾸는 의식의 발전을 하는 동시에 나라를 잃고 주권을 빼앗기는 속이 비어버린 껍질만 조선인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대의 암울함과 그 속에 사는 삶의 암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시대의 변화속에 서서히 나타나는 개인주의와 자유연애 평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진건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내포된 소설이 '빈처'입니다. 1인칭 주인공 나를 통해 독서와 습작을 통해 작가로 거듭나고 싶은 주인공의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가난이 아내에게 큰 짐이 되지만 그래도 물질보다는 부부간의 정이 더 돈독함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내면에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질을 무시할 수 없다는 감정을 보이고 있어 예술인과 생활인과의 갈등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슬픔을 알기 때문에 움직여보고 싶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대의 가장, 남성들의 울분이 결국 술로 세월을 보내는 자괴감에 빠지게 합니다.

당시 백성의 삶을 표현했고, 조선의 삶을 표현한 작품이 '운수 좋은 날'입니다. 지식인은 나라를 빼앗겼다고 술을 마시고 자괴감이 빠지고 있지만 그 지식마저 없는 백성은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갑니다. 인력거를 끌고 살아가던 김천지는 웬일로 아침부터 손님이 줄을 잇습니다. 너무나 술술 풀리던 하루를 잘 마무리하면 좋았으련만 아파 누워있는 아내를 떠올리면서도 술 한 잔 걸치고 그 술 한 잔이 두 잔이 됩니다. 술주정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을 사가지만 아내는 이미 주검이 되었습니다.

 

'희생화'와 'B 사감과 레브 레터' '까막잡기'는 자유연애에 대한 작품입니다. 사랑하는 남녀는 자유연애를 시도하지만 오래된 관습에는 지고 맙니다. 남자는 정해진 운명대로 움직이고 남은 여자는 죽음을 맞이하는 다소 신파적인 소설입니다. 자유연애와 개인주의를 내세우고 싶었던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이 '희생화'는 상당한 동감을 얻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유연애를 꿈꾸지만, 자신의 감정조차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이상 행동을 하는 B 사감의 이야기는 섬뜩하기도 한 소설입니다. 자유연애와 정해진 관습,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갈등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까막잡기'는 지금으로 말하면 꽃미남 상춘의 부탁에 억지로 음악회에 끌려간 추남 학수의 이야기입니다. 자신 있는 외모 때문에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고 추파를 던지고 싶은 상춘과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아름다움만을 내세우는 여자들을 혐오하는 학수의 이야기입니다.

미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참 고민스러운 부분입니다.

 

'사립정신병원장'은 물질의 빈곤이 사람의 정신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살기 어려운 주인공은 정신병 걸린 부잣집 아들을 돌보게 됩니다.

'불'은 시집와서 온갖 궂은일을 하고 남편에게 성적으로 억압당하는 한 어린 며느리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며느리를 들여 알콩달콩 살아가는 인생보다는 공짜로 밥 먹여 주니까 온갖 궂은 일은 다 해야 하는 어린 소녀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자라지 못한 소녀는 그저 시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남편이 하라는 대로 구박받고, 성적 억압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남편에게 대항하는 방법이 바로 불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생활상을 반영한 '고향'이라든지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심리를 표현한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운수 좋은 날 빈처>는 인간의 양면성을, 삶의 양면성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부유하고, 많이 배우고, 계급의 상위권에 있는 자들과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지배를 받는 자들의 비교를 통해 양면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가 변한 지금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설사 목표를 향해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비교 대상이 있고, 또 다른 동경의  대상이 있습니다.

또한, 삶이라는 것은 반전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반전과 나의 편안함을 위해 죽음을 재촉하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가족 앞에서 나의 달콤한 일탈이 더 우선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운수 좋은 날 빈처>를 교과서로 처음 접했던 학창 시절에는 그저 어렵게만 느껴지고, 매끄럽지 못한 표현기법 때문에 어렵게 읽었던 기억이 남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눈으로 이 작품을 읽어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만 가지의 감정에 대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어느 하나를 꼭 짚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수백만 가지의 감정을 가지고,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고 표현하고 숨기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운수 좋은 날 빈처>를 지금 이 시대에 읽어보더라도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암울한 시대에 살았던 삶에 대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장면의 세세한 표현을 읽고 그것을 떠올리면서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상상하며 책을 읽었으면 합니다.

내가 현진건이 되어 시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인생의 흐름 위에 서보는 독서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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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통과의례 - 1998년 뉴베리 아너 상 수상작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24
제리 스피넬리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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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틀을 벗어나 성인의 길목에 들어설 때 어른들은 성인식을 통해 아이들에게는 축하와 함께 성인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르쳐줍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지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죠.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아직은 어린아이의 시야로는 무섭고 두려운 의식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미국 인디언의 한 부족은 13세가 되면 맹수가 나타나는 계곡에서 혼자 하룻밤을 보내게 하고, 번지점프를 통해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18세가 되는 생일파티에서 열쇠마크가 새겨진 카드를 받음으로써 귀가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지만 그 후의 행동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의 성인식도 있고요.

물론 우리나라에도 성인식이 있습니다. '성년례'라는 의식이 있죠. 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지는 행사로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이죠.

 

<잔혹한 통과의례>는 이런 성장의 통과의례에 관한 소설입니다.

소설의 배경인 웨이머 마을에는 가족 축제 기간이 있습니다. 이때 5천 마리의 비둘기를 공식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비둘기를 쏠 수 있는 것은 기부를 한 사람에 한해서이고 이 기부금은 마을 공원 유지를 위해 사용되고 있죠.

이 축제에서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링어'입니다. '링어'란 비둘기 목을 비트는 사람입니다. 열 살이 된 남자아이만 참여할 수 있는 '링어'는 어쭙잖게 총을 맞아 죽지도 못해 괴로운 비둘기의 목을 비트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을의 오랜 전통이고 주인공 파머의 아버지 역시 '링어' 출신이고 사수였기 때문에 어쩌면 파머 역시 당연히 '링어'가 된다고 자부할지도 모릅니다만, 파머는 절대적으로 그 잔인한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다.

 

파머는 고민을 합니다. 마을의 관습인 만큼 '링어'의 역할에 동감을 해야 하는데 영 마음이 편치않습니다.

사실 '링어'의 일은 잔인하기만 합니다. 9살, 10살 소년에게 비둘기 목을 비틀라니요.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너무 다른 내용이라 제목대로 '잔혹한' 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성장통의 하나라고 하니 읽어봅시다.

파머는 친구들과의 어울림도 고민됩니다. 생일을 맞은 나이만큼 두드려맞습니다. 그런 의식을 치른 후에 패거리의 일원이 됩니다.

집단적 동지감을 얻는다고 할까요? 하지만 아마 그 아이들 모두 마음이 여린 부분이 있지만 서로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큰 소년, 어른의 한 부분을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파머의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이 바로 비둘기입니다. 곧 있을 마을 축제에 죽지 않으려면 피해야 하는데 이 바보 같은 비둘기는 파머를 따라다니고, 매일 창문 앞으로 찾아옵니다.

 

어린 소년이 어른으로 되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소설이 <잔혹한 통과의례>입니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파머일행에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도로시를 놀리는 것, 생일 맞은 아이에게 행하는 의식, 그리고 '링어'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소년으로 남자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모든 소년이 다 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겠죠. 정해진 룰이지만, 따라가고 있지만 마음까지 다 공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남자가 되고, 어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할 줄 알고, 싫은 것은 싫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파머는 솔직히 '링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을의 축제로 자리 잡은 전통이고 관습이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파머는 가지게 됩니다.

소년, 남자, 친구라는 울타리 때문에 매번 망설이게 되지만 파머는 점점 자신의 의사 표시를 하는, 무엇이 옳은가를 깨닫고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이런 파머에게 가족은 응원 합니다. 엄마는 파머의 비밀을 모른 척 해줍니다. '링어'를 했었고. 비둘기 사냥꾼을 한 파머의 아빠도 파머의 결정에 힘을 실어줍니다.

 

<잔혹한 통과의례>는 미국도서관협회가 매년 미국 아동문학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작가에게 주는 아동문학상인 '뉴베리 상' 수상작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서로 보자면 잔혹한 면이 있습니다만, 이것을 아동문학의 발전으로 꼽았다고 하니 공감되는 부분은 좀 적습니다.

원제가 'Wringer'입니다. 짜는 사람, 짜는 기계, 또는 비튼다는 의미처럼 아마도 파머가 당한 상황이 독자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할 지도 모릅니다. 또는 마을 축제가 가지는 의의보다는 그 행위의 잔혹함에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어른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녹록하지 않은 것이 바로 어른의 세계이고 성장의 끝이겠죠.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른들도 지금의 자리까지 도달하기에는 무척 많은 경험과 잔혹함과 슬픔과 갑갑함을 이겨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일들이 나에게는 어렵고, 내겐 쉬운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을 줄 때도 있다는 것을 이 책과 함께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어른으로의 성장이  저절로 쉽게 얻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잔혹한 통과의례>에 나오는 주인공이  한걸음씩 성장하는 모습을 공감하면서 성장통을 경험하는 독서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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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아이
정광조 그림, 김의담 글 / 작가와비평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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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마음에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하늘은 너무도 푸르게,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의 절망과는 상관없이.

나의 좌절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절박함과는 상관없이.

하늘은 보석처럼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절망의 끝에서 하늘을 보니. 빌어먹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이라니.

 

나의 인생에서도 빌어먹을..., 이라는 순간은 있었다.

살아오면서 늘 가슴속에 숨기고 싶은 나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그 '빌어먹을'이란 단어.

여자의 인생이, 엄마의 인생이, 딸의 인생이. 왜 그렇게 반복되고, 똑같고, 지지리 힘들 때가 많을까?

이 빌어먹을 여자의 인생은 언제, 어디서부터 '지지리...'라는 말머리를 달고 살게 되었을까?

 

<빨간 아이>는 어둡고 아픈 소설이다.

딸, 아내. 엄마라는 존재로 사는 여자가 겪는 인생의 어둠이 있고, 그것을 잊고 싶어하는 여자에게 다시 떠올리게 하는 그런 아픈 소설이다. 어느 날 누구의 딸로 태어난 딸은 세상을 배운다.

그녀에게 인생이란 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움이 우선이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소리다. 삶이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이것을 <빨간 아이>의 시선은 똑바로 보고있다. 아름답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인생보다는 오히려 더 지독하게 아프고, 무섭고, 외롭고, 두려운 것이 더 많은 인생을 보고있다.

일상의 평온함이 그 어떤 것보다 더 값지고 풍성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아픔의 시간 속에서 잠깐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빨간 아이>는 아마도 무의식 속에 잊고 싶었던 아픔 속에서 지금의 따스함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잠시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라고 본다.

 

'Her, 상상과 몽상의 경계에서'라는 김의담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 나는 그 책의 감정을 이렇게 말했었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책' '여자의 이야기' 라고. 여자이면서도 정작 여자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여성 독자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책이라고 말했었다.


<빨간 아이>는 그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어쩌면 세상의 지독함을 온몸에 받기에는 남자보다 강함이 적어 보이지만, 결국, 인생을 개척하는 것은, 자식의 울타리가 되는 것은, 그리고 결국 남편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는 것은 여자 아니었던가.

 

'Her, 상상과 몽상의 경계에서'라는 책에서 작가는 평범한 주부였음을 말했다. 남편과 아이와 오손도손 살고 있고, 서른이 넘어 그동안의 오손도손을 글로 표현했다고 했다.

뭔가 나와 공유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라는 동지감? 그렇게 하고 싶다는 부러움? 평범함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아낸 그 특별함? 그래서 김의담 작가의 책이 왠지 맛깔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잊고 싶었던 그 깊은 어둠 속의 트라우마를 어쩜 이렇게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일까?

 

예전에는 그랬다.

나름 일하지만, 때론 무능하고, 평소에 자신을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만, 술 한잔에 극도의 표현력을 넘나드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였었다.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나 역시 그랬다. 늘 창작의 고뇌 속에 살던 나의 아버지 역시 말 한마디 없던 양반이 술만 들어가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난 저런 남자랑 결혼 안 해. 나의 바램대로 되었다.

그렇게 됐다. 하지만 또 다른 인생의 복병이 이곳저곳에서 나온다.

 

<빨간 아이>를 읽으면서 잊혔던 나의 어린 시절이 망각속에서 떠오르고, 상처를 헤짚게 된다.

왜 그럴까?

잘 지내왔나?

앞으로 내가 찾아야 하는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마음먹던 어린아이도 어른이 되면 변할까?

자신이 받았던 상처가 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도록 발버둥을 치겠지?

그럼 내 아이는 이런 나의 아픔을 알까?

 

<빨간 아이>는 나의 모습이고 내 엄마의 모습이고, 어쩌면 나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픔을 주는 삶은 살지 말아야지..., 이런 덤덤한 정답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도 치유할 수 없을 것 같던  그 상처, 결국, 자신이 찾아 보듬어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런가 모르겠다.

하지만 말 그대로, 나의 상처는 내가 치유해야 한다는 것.

<빨간 아이>가 그 지독한 성장통을 겪으면서, 시간의 성숙 속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은, 찾으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를 독자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인생의 성장이라는 것이 어느 선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나이 들어서 인생의 성장이 멈출 수도 있고, 나이 들어서 새로운 인생의 스타트를 끊을 수 있다.

결국, 나를 키우는 것은 '나'라는 것.

<빨간 아이>의 '문희'와 그녀의 '엄마'는 나를 키우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책에, 다소 어두운 표지에, 그리고 강렬한 색채의 이야기에 진한 커피를 연거푸 마시게 한다.

진하면서 씁쓸한, 아련하면서 안타까운, 그리고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전해지는 '문희'의 성장에 눈물이 고이는 미소를 짓게 한다.

마치 나를 보는 듯해서.

마치 이 땅의 딸들을 보는 듯해서.

마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 여자를 보는 듯해서.

 

해당 서평은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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