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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불지르다 ㅣ 문학세계 현대시인선(시선집) 189
유영금 지음 / 문학세계사 / 2007년 1월
평점 :
이 시집은 옛날 h****님 서재에서 보고 친구에게 사 내라고 하였는데,
펼치자마자 너무 쓰라려 한쪽으로 접어 치웠었다.
상처도 없는 내가 이 시집의 시들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시인과 같은 통증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묘한 경험이지만,
통증이나 아픔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때론 힘이 되고 의지가 되기도 한다.
시집을 다시 집어들어도 쓰리고 아리긴 마찬가지였다.
우린 때로 상처를 공유한다는 핑계로,
상대방에게 또는 상처를 공유하려는 누군가에게, 칼의 손잡이를 들이대는 건 아닐까?
칼의 손잡이를 상대에게 들이댄다는건 칼의 부리가 건네주는 사람을 향하게 마련,
결국 본인에게 부메랑처럼 상처가 돌아온다는걸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시들이 하나같이 슬퍼서 서러웠는데,
시인이 교통사고로 생사를 넘나들던 사이,
사고 차를 운전한 남편은 술집 여자와 눈이 맞아서 사라져 버리고,
아들은 자실을 노래하고 자퇴를 하였다고 한다.
시인의 이런 기구한 운명을 알게 되었어도 난 호의적으로 시인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죽음만큼 아픈 순간도 꽃으로 승화시킨 이름 모를 시인의 또 다른 시 한편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홍제역에 가면 만나게 되는 시인데, 아직도 거기 걸려있는지는 모르겠다.
죽음을 노래하는건 마찬가지이지만,
한결 경쾌하고 재치있는 것이 격조있게 느껴진다.
반면 유영금은 아무래도 '귀천'의'천상병'을, 아니 '새'라는 시의 '천상병'을 꿈꿨나 보다.
누가 흐린 하늘을 자꾸 닦아내고 있다
무섭게 파래진다
새파란 물줄기가 주르륵
산마을을 흠뻑 물들이겠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희끗희끗 숨은 깃털
'새' 일부
흐린 하늘을 닦아내면 파래질까,
하늘의 구름을 걷어내면 창공의 파란색이 되는건 아닐까?
또는 누군가나 어디에 부딪혀 멍들어 무섭게 파래진 것은 아닐까?
새파란 물줄기이기도 한 그것은, 무섭게 파래지기도 하니 말이다.
'흰알약꽃으로피어나겠소 / 정신이아픈누구라도좋소 / 내가피거든나를꺾어 / 무통의시간으로 / 바꾸어가시오 '
라고 노래하는 '헌화'도 좋았다.
'속달'로 보낸 편지가 '수취인 불명'이어도 서러울 것 같다.
속달
그리움 나폴나폴 머리에 꽂고
초벽 사이 아슬아슬한 풀다리를 건너
숨이 노랗게 달려오는 누이야
어짜자고 내 집 앞을 서성이느냐
일곱 살 네 마당에
가마니에 감겨 깨지 않던 나를 찾는거냐
빨간 머리핀을 받으러 온 거냐
돌아가라
네게 줄 초막은 아직 짓지 않았다
머리핀도 준비하지 못했다
초막 빼곡히 앵속자를 심어
꽃내가 시끄러울 때까지
시인의 강에 함께 흘러라
이부용 년출년출 웃자라면
초벽이 춤추도록 풀피리 불어주마
아픔이 그치도록 머리에 꽂아주마
수취인 불명
내게 축지법으로
징그럽게 달려오던 죽음
외딴 풀섶 작살꽃 곁에서
살림 차렸나보다
사실이라면
오!미친 봄이군
복권 당첨 같은 횡재군
달구어진 꽃의 암술아
그 놈에게 작살을 꽂아
달근달근 몰염치하게 살아라
내 주소는 말소되었다
두편의 시는 장을 넘나드는데,
'속달'은 제 1장 '수인번호 5705번, 그녀는 애벌레를 키운다'에 속하고.
'수취인 불명'은 2장 '살아내기'에 속하는데,
묘한 대구를 이루는 것이 쓸만하다.
개인적으론 '살아내기'가 가장 좋았다.
살아내기
슬픔을 빨아 맑은 하늘에 널면
구름 사이로 펄럭이는 슬픔 자락들
햇살보다 눈부시다
해질 무렵
보송보송한 슬픔을 걷어
서랍 깊이 넣어 둔다
우기의 나날에도
곰팡이가 피지 않게
나프탈린 몇 알과,
그런데 가만 읽다보면 알겠지만, 시에 논리적 모순이 있다.
곰팡이 피지않게는 곰팡이 제거제, 나프탈렌은 좀약이다.
하긴 이 시에서는 그 어느것이 됐든 죽음보다 치명적이다.
이 시의 끝, 해설을 보게 되면,
고압을 견디지 못해 파열하지만,
끔찍한 삶을 견뎌내기 위해 유영금의 시는 뾰족해지고 강해졌을 거라고 한다.
무딘 칼자루를 뾰족한 칼부리를 택할 지는 각자의 몫이다.
무디고 뾰족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것에고 찔리면 아프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같은 값이면 난 상처받고 피 흘리고 쓰러지는 그런 삶이 아니라,
상처에 새살이 돋고 옹이로 단단하고 탄탄해지는 그런 삶을 택하겠다.
나도 꽃으로,
숲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고혹스럽게 부드럽게
휘감아오는 누가 있어 돌아보니
하늘가 수런거리는 햇살이더군
귓부리를 물고 속삭였지
하늘 귀퉁이 한 뼘 내줘, 죽도록 필게
'나도 꽃으로,' 같은 시를 보면 알겠지만, 죽음은 치열하고 가열찬 삶의 다른 이름임을 알겠다.
그런 유영금의 죽음 같은 삶에, 경의를, 또는 화려한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