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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철학자 강신주가 다상담이라는 제목의 강연과 책으로 인간사 생노병사, 사랑, 지지고 볶고,모든걸 다 두루섭렵하여 상담을 하시더니, 이번엔 감정수업이란 제목으로 책을 내셨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이런 제목의 책을 냈다면,
엄청 산만하고 방대해서 하나로 아우르지 못했을테고,
그래서 나는 '이 뭥미?'하고 툴툴거렸을 텐데,
내가 강신주를 그동안 애정하기는 애정했었는지,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내게로 한줄로 달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고독한 사유주체'라는 걸 발견하자마자, 근대철학에서 '타자와의 소통'이란 문제가 전면으로 대두되었다고 한다.
스피노자처럼 기쁨과 슬픔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한 철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라이프니츠처럼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불필요하다고 한 철학자도 있었다.(강신주의 '철학VS철학'인용)
근데, 강신주가 누구인가?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으로 논문을 쓴 사람이고,
대중과 소통하고자 상아탑에서 벗어나서, 대중이 알아듣기 쉬운 저술 활동과 문턱을 낮춘 강의들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무려 철학박사' 아니겠는가 ?
그런 그가 스피노자를 들고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어찌보면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존재이지만,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이성적으로 발휘하고자 했던 철학자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강신주가 하는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하게 될때도 있지만,
그의 저변이나 전작을 읽지 못하였다면 '뭐, 이런 넘이 다 있나?'하며 열변을 토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를 놓고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어쩜,
그가 양극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충격 요법을 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열고 소통을 간절히 원하지만 방법을 모르는 몇몇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모든 사람을 다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잘 하고 있는 사람은 잘 하니까 된 것이고,
아무리 말해도 소귀에 경 읽기인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과감히 포기해 버린다.
그가 대상으로 삼는것은,
너무 바른 생활을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착하게 곧이 곧대로만 숙맥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상대로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다보니, 직설법으로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전후 사정에 대한 파악없이 그냥 받아들이려고 하다보면 그래서 거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가감없이 받아들이는, 정말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교리이고 불문율인 셈이다.
그들이 하루 빨리 세상의 때가 묻어 덜 순수하고 덜 순진해지길 기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강신주가 하는 얘기들을 둥글리고 완화시키고 미화시켜 미사여구가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바래야 되는건지,
그것도 아니면 강신주보다 더 쿨한 구루가 나와서 강신주의 수위 정도야 별거 아닌게 되길 꿈꿔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이 책에 언급되고 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본것도 아니고,
에티카를 인용하며 나오는 다양한 감정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느껴본 것도 아니고,
소개되는 책들도 읽은 것과 안 읽은 것 반반 정도 되는 것 같고,
그림 또한 본적이 있는것, 처음보는것의 비율이 2;1정도 되는 것 같다.
하지만, 526쪽이나 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것은,
48가지 감정을 다 구분하여야 겠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다시말해, 나에게 어떤 감정이 오면...
그 감정이 나를 충실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오픈시켜 받아들이자는 거다.
벽은 타인과의 소통에만 장애물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 스스로를 들여다보는것도 굴절시킨다.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면 나 자신의 벽이나 경계 먼저 허물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내 자신의 명확한 가치관이나 에고를 갖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유약한 감정을 가진, 우유부단한 사람이란다.
강신주는 '프란츠 카프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ㆍㆍㆍㆍㆍㆍ카프카는 소설가로서도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원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쓴 원고를 펼쳐 볼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
ㆍㆍㆍㆍㆍㆍ하지만 '영원한 아이' 카프카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지인의 집에서 자신이 들고 온 꽃다발에 대해 사과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어느 색깔의 꽃을 골라야 할지 몰라 너무 여러 색의 꽃을 섞었다고. 또 카프카는 사랑에 자주 빠졌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불평했다. "나를이해해 주는 사람, 예컨대 연인을 갖는 것은, 신을 갖는다는 뜻이리라."(255쪽)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감정과 책의 인용이 좀 잘못되지 않았나 싶었던 부분이 있는데,
어쩜 잘못된게 아니라, 감정의 해석을 내가 잘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질투(invidia)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라고 말하며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를 예로 든다.
화자의 아내와 이웃집 남자가 시내에 나가 하룻밤을 보내고 온 것을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질투 때문에 화자의 내면이 산산이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투는 화자에게 이미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증발해 버린 예기치 못했던 건강한 긴장을 가지고 온다고...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한 긴장 정도를 가져오는 것을 난 '시샘'정도로 대치했으면 좋겠다, ㅋ~.
개인적으로, 난 이 책의 <철학자의 어드바이스>코너가 가장 좋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 말이다.
말을 걸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하하!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계속 이야기하면 되고, 불행히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된다. 식사도, 운동도, 여행도, 영화 관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좋은 것은 다른 것이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욕정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허락한다는 조건에서 기꺼이 섹스를 시도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가 지속적으로 정사를 나누면서 그 외의 것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섹스는 사랑의 완성이나 결실이 아니다. 그건 단시 사랑이 시작되는, 혹은 사랑이 진척되는 한 가지 계기일 뿐이다.(338쪽)
상상하지 말고 행동하라고 한다.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선 혼자 상상만 해선 안된다, 행동으로 보여주든지, 함께 행동을 해야 하는게 자명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