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의 쉐프라는 영화를 보면 라면에 환장한 남자가 '내 몸은 라면으로 이루어져 있나 봐' 하고 울먹이는 대사가 나온다.
요즘 같아선 '내 몸은 커피로 되어 있나 봐'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체액은 물론 피까지도 커피로 되어있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을 했었는데...
어제 간단한 검사를 하려고 블리딩하는데 보니 커피 빛깔은 아니더라.  

정말 피곤했었는지 죽은 듯 자고 일어나서 보니...
내가 이런데서 어떻게 잠이 들었었나 싶다, 몸이 가려운 것 같아서 북북 긁고 앉아있다.
난 청소에 관해서 너무 깔끔 떠는 남편이 싫어서 돼지우리에서도 살 수 있다고 투덜거리곤 했었는데,
지금 보니...난 돼지우리에선 살 수 없는 존재였다. 

정신이 사나와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극의 쉐프에선 '면과 스프면 돼. 고명도 필요없어.'라고 울먹이던데...
내 몸은 남편의 갈비뼈로 이루어져 남편이 꼭 필요하다...뭐, 이런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청소하는 남편만 있으면 돼, 밥도 혼자 먹을 수 있고 잠도 혼자서도 잘 수 있어.'이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요리는 그럭저럭 되는데 청소가 영 젬병이다. 
지금 남편을 청소하라고 불러 들이면, 내가 어머니 옆에 가 있어야 하는데...오늘 그건 좀 싫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집안이 지저분해선 그럭저럭 되는 요리도 하고 싶지가 않고,
요리를 했다고 해도 이 속에선 먹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 시를 빗대어서 남편을 불러들여야겠다.
내 實用의 마음이 남편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 정진규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차미켜 원하는 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만 하라고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實用도 끝이 있구나! 나는 놀랐다 내 텅빈 實用 때문에 텅빈을 채우려고 육십평생을 소진했구나 아내의 實用이 바뀌었구나 눈물이 한참 났다 이제서야 사람 노릇 좀 한 번 하려고 實用 한 번 하려고 나는 實用의 그림들을 잔뜩 그려넣었는데 없는 實用의 實用을 아내가 터득했구나 눈에 뜨이지 않게까지 알아버리다니 다 지웠구나 나는 아직 그냥 그탕인데 마침내 一字無識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 구름도 탁탁 물기 털어 제 몸 내다 말리는구나 염치없음이여, 조금 짐작하기 시작한 나의 일자무식도 거기 가서 잠시 끼어들었다 염치없음이여, 또다시 끼어드는 나의 一生이여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

미이라 /정진규 

천년 썩지 않은 미이라를 두고 썪지 않았음을 찬탄하는 사람들은 썩었어야 정상이라는 정답을 내리고 싶은 거겠지만 앞으로 천년 동안 욕망의 날내가 두고두고 진동할 사람들이다 썩지 않을 사람들이다 다만 사랑은 다르다 천년동안 썩지 않을 미이라로 네게 남겠노라고 뻔한 거짓말을 한 바 있다 지우려 했으나 지워지지 않았다 사랑은 본래 형체가 없는 것이니 본래 디딜 가장자리가 없었던 것이니 거짓말이 상습常習이다 사랑은 

'몸詩 66--병원에서'/ 정진규


몸이 놀랬다

내가 그를 하인으로 부린 탓이다

새경도 주지 않았다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제 끼에 밥 먹고

제때에 잠 자고

제때에 일어났다

몸이 눈 떴다

(어머니께서 다녀가셨다)


 

어쨌든 '정진규'가 누구인지 참 좋다.

내 實用의 마음이 아직 남편에게 가 닿지 않았는지 연락은 없고,
주위를 둘러보니...여기저기서 주문하고, 선물 받고, 공수해온 책 박스가 쌓여 7층 석탑을 이루었다.

잘못했다, 심심하면 박스를 갖고 테트리스라도 해서 한칸씩 지웠어야 했다. 
잘못은 심심하다고 알라딘 이 동네에 들어온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ㅠ.ㅠ
<살인의 해석>을 읽은 내가, 제드 러벤펠드의 새 책을 보고 지르지 않고 참을 수 있냔 말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뭘 먼저 할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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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6-19 21:52   좋아요 0 | URL
전 청소는 좀 되는데 요리는 하기 싫어요.
그래도 오늘 삼계탕 끓였어요. 하루만 딱 더 쉬고 싶은 일요일 밤이예요. 아.쉽.다!!

양철나무꾼 2011-06-20 15:55   좋아요 0 | URL
저랑 정반대시네요~^^
삼계탕도 여름 보양식으론 그만이죠, 저도 삼계탕 먹고 싶어요, 추릅~

마녀고양이 2011-06-19 22:02   좋아요 0 | URL
살인의 해석을 읽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그럼 여의사 나오는 책은 제목이 머였지? 너무 더워서 머리가 멍... ㅠㅠ

청소라, 그러니까 남편은 청소기였구먼.... =======33333333333

양철나무꾼 2011-06-20 16:03   좋아요 0 | URL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을 공부 하는데, 제드 러벤펠드 기억해 두면 좋을 듯~^^
여의사 나오는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퍼트리샤 콘웰은 너무 지 잘난 맛에 사는 여자라서 난 별루고,
테스게리첸이 좀 낫더라~

성능 좋은 청소기보다는 남편이 훠~얼~씬~이지...ㅋ~.

꿈꾸는섬 2011-06-19 23:5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마녀고양이님ㅎㅎㅎㅎ양철댁님 옆지기님을 청소기ㅎㅎㅎㅎㅎㅎ 어째요. 저 마녀고양이님때문에 너무 웃었어요. 죄송해요. 양철댁님.

양철나무꾼 2011-06-20 16:05   좋아요 0 | URL
무더운 여름엔 웃음이 보약이죠.
남편도 당근 알거예요, 자기가 큰 웃음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리시스 2011-06-20 04:40   좋아요 0 | URL
히히 그럼 청소는 제가 해드릴까요?^^ 양철댁님이 요리를 하실 수 있게요. 그러면 잠시만요. 금방 갈게요. 으흐흐흐.

양철나무꾼 2011-06-20 16:06   좋아요 0 | URL
아직도 꿈나라는 아니실테고...
아직 안 오셨는뎅.

아이리시스님도 청소가 낫단 말이죠?^^
으흐흐흐.

하늘바람 2011-06-20 09:01   좋아요 0 | URL
옆지기님에 대한 걱정을 청소로.
정진규 시 정말 좋네요

양철나무꾼 2011-06-20 16: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예민해서 병원 한번 다녀오면 두번씩 씻고 소독하는 남편보단,
병원 밥 20년 먹어 그쪽으로 수더분한 제가 훨~ 낫긴 한데...어젠 정말 병원 가기 싫었다는...
근데 제가 하루만 안 보여도 더 막 안 좋아지시니, 원~ㅠ.ㅠ

2011-06-21 16:03   좋아요 0 | URL
남편님께 실용의 마음이 빨리 가 닿기를요..하핫
그나저나 정진규도 그의 아내도 그의 시도 모두 좋아요. 이 시들를 소개해준 양철댁님도 좋아요.ㅎ

청소기.ㅎㅎㅎㅎ
아내를 위해 기꺼이 청소기가 되어주는 남자 있음 기꺼이 집에 들일 요량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6-22 14:35   좋아요 0 | URL
정진규 님도 정진규 님이지만, 시 곳곳에 등장하는 이 분의 아내도 참 좋았는데...역쉬, 수필가라고 하시네요.

이 분에 대해서 꼬치꼬치 찾다가 흡~중단했는데요.
이 분 사진은 글이랑은 많이 다르네요~ㅠ.ㅠ

루쉰P 2011-06-22 21:01   좋아요 0 | URL
갈비뼈이신 남편을 둔 양철댁님이 너무나 부럽네요. ^^ 실용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있어야 실용이 되는법, 청소기라 불리우는 남편 분과 청소는 싫으나 다른 것은 자신 있는 예를 들면 책으로 7층 석탑을 쌓으시는 양철댁님의 조화가 뭐랄까 수레의 양 바퀴 같다고 할까요? 양철댁님과 남편 분 두 바퀴가 짝을 이루어 지금은 병석에 누워 힘드신 어머님도 태우고 기타 좋아하는 아드님도 태우고 굴곡 많은 인생의 길을 굴러 굴러서 가고 있는 것 같아, 지나가는 양철댁님 부부 수레에 대고 행복하게 잘 사시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팍팍 솟아나는 글이네요. 그래도 씻으셔야 병 안나요. ㅋㅋ
교주도 씻기는 합니다. ^^

비로그인 2011-06-24 22:38   좋아요 0 | URL
에고고.
더운 여름에 하늘도 낮은데.. 얼른 청명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맑음이 오시길 빌겠습니다. 양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