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가 머리를 숙이면 부끄럽다는 것이고, 턱을 고이면 한(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 생각에 잠긴 것, 눈썹을 찡그리면 수심에 빠진 것, 난간 아래 있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이며, 파초 밑에 앉았으면 꿈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그녀가 서있기를 반듯이, 앉아 있기를 조각처럼 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양귀비가 치통을 앓고 번희가 머리칼을 만진다고 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박지원이 한 말인 것 같다.
그림 하나를 그리면서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태도를 지적했었던 것 같은데,
마이클 코넬리에 이어 로버트 크레이스를 읽으며 이 구절이 떠올랐다. 
똑같은 외롭고 고독한 캐릭터를 그려내는 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어서 였다.
 

 

 

  

 워치맨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최필원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1월


마이클 코넬리와 로버트 크레이스가 한 동네에 사는 친구라는 건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로버트 크레이스의 <라스트 디텍티브>에 해리 보슈가 카메오로 잠깐 등장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지만, 아직 책으로 만나 보지는 못했다.
‘마이클 코넬리’는 전작을 꼼꼼히 챙겨 읽었지만, ‘로버트 크레이스’는 전작이래야 이제 겨우 세권이어서...어떻게 보면 비교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로버트 크레이스의 <투 미닛 룰>을 넘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 책 <워치맨>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초반에 끌어 들이는 흡입력이 좀 약한 데, 그 부분을 참고 읽어내면 참 괜찮은 작품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문장을 짧게 끊어 급박함과 긴장감을 표현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조 파이크의 캐릭터를 표현해 내는 데도 성공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끊어놓으니 호흡이 잦아 맥이 살짝 빠지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군데 군데 직역한 듯한 부분도 있어 거슬리긴 하다.
파이크의 집은 비어 있었다. 그들은 파이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신중을 기했겠지만, 주방에 놓아둔 주소록이 사라졌고,(158쪽)
이 부분은  ‘파이크의 집은 털려 있었다’ 정도가 적절하겠다.

207쪽의,
상완신경얼기는 상완신경총이라고 더 많이 사용하고,
노보카인은 국부마취제로 두루 두루 쓰인다. 치과용 국부 마취제로 주석을 달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 파이크가 너무 좋아졌는데, 조 파이크는 그의 친구 엘비스 콜(로버트 크레이스가 밀고 있는 명탐정)과도 다르고,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와도 다르다.
내친 김에 이 둘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무엇보다 조 파이크는 친구가 많다.
해리 보슈에게 친구들이 공존공생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조 파이크의 친구들은 그의 인간됨을 알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파이크가 말했다. "선배님이 그리워질 겁니다."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사람.
파이크는 트럭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쥐고 있는 패가 형편 없더라도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때때로, 파이크는 더 나은 삶을 꿈꿨다.(270쪽) 

조 파이크와 해리 보슈 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해리 보슈가 ‘마초’인 것과는 달리 조 파이크는 ‘쿨 가이’ 되시겠다.
나이,직업 불문하고 죄다 집적거렸던 해리 보슈와는 달리, 조 파이크는 고객이라는 구실로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잠든 라킨의 모습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다. 몸도 작아 보였다. 마치 몸의 일부가 소파 안으로 빨려 들어가버리기라도 한 듯이. 파이크는 이것이 바로 그녀의 솔직한 모습일거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노출되는 모습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안에서 밖으로. 안쪽 사람은 긴장과 의지로 바깥쪽 사람을 꼭 붙들어놓는다. 바깥쪽 사람은 세상에 내보이는 얼굴이다. 가면, 눈속임, 메시지, 그리고 목적을 이루는 수단. 그것은 안쪽 사람이 단단히 붙들고 있는 동안만 존재한다. 안쪽 사람이 가면을 놓는 순간 바깥쪽 사람은 사라지고,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잠은 가끔 그 가면을 벗겨내기도 한다. 술이나 마약, 그리고 극단적인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단단히 붙들고 있지 않으면 가면은 쉽게 걷힌다. 가면이 벗겨지면 비로소 사람 안의 진짜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 속임수는 무엇보다 안쪽과 바깥쪽이 일치하는 곳으로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곳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사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안쪽과 바깥쪽은 완전한 일체였다. 파이크는 그런 점이 부러웠다. 콜이 그것을 설계와 노력으로 이루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렇게 타고났던 것인지 궁금했다. 답이 무엇이건 항상 콜을 지켜보며 그런 점을 닮아보려 애썼다. 파이크의 안에는 요새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요새는 쓸모가 많았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게 했다. 요새는 외로운 공간이었다.(241쪽)

 이런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은 로버트 크레이스의 전작을 찾아 읽게 만든다.

또,커피를 외로움 치료제 쯤으로 달고 사는 해리 보슈와는 달리, 조 파이크는 커피를 마시기는 하지만 아침에 한잔 정도이다.
먹는 음식도 혼자 있을 때는 샌드위치 정도가 고작인 해리 보슈와는 달리, 조 파이크는 미식가에 웰빙 음식을 즐기는 베지테리언 이다.

무엇보다 내가 조 파이크의 손을 들어줄 수 있었던 건...해리 보슈는 밤이면 여자와 보내거나, 혼자 있어도 간이침대에 엎드려 악몽을 꾸는게 고작이었다면, 조 파이크는 규칙적으로 총기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운동도 꾸준히 한다.

그러니까 하려던 얘기가 뭐냐하면 말이다.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외로움, 고독 따위나 분석하고 있지말고...
나와 내 이웃의 외로움이나 고독, 추위 따위를 돌아보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날이 얼어죽게 춥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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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14 10:51   좋아요 0 | URL
너무 멋지군요! 뭔가 대단한 걸 얘기할 것 같은데
지극히 당연하지만 잊고 지낼뻔한 것을 결국 이렇게 멋지게 풀어 쓰다니!
양철님의 내공에 헉!하지 않을 수 없군요.ㅋ
이쯤되어주시면 저도 왠지 이 책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커피 좋아하는데. 해리 보슈를 좀 뜯어 봐야겠군요.ㅎ
혹시 외롭고 고독한 건 아닌가요? 그럼 강남으로 건너오시죠.
제가 커피로 따뜻하게 해 드리겠슴다.^^

이쪽엔 영 마음이 가지 않아 물만두님 리뷰대회도 포기상태라능...ㅠㅠ
물만두님이 천국에서 저 보시면 한숨 한번 푹 쉬시고,
"알아요. 괜찮아요. 다음도 있잖아요."하시지 않을까 내 멋대로 상상중입니다. 이그~

양철나무꾼 2011-01-17 00:58   좋아요 0 | URL
멋지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냥 평범한 페이퍼였는데, 님과 여러분의 댓글 덕에 멋져진 것 같습니다.

강남 사시는 군요.
저는 강북이라서...강남 건너가는 일이 요원하답니다.
직장 때려치우고 한번 건너가겠습니다.
그때를 위해서 커피 저축해 놔도 되겠죠?^^

stella.K 2011-01-17 10: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직장을 그만 두시는 게 더 요원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저의 은행을 이용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자도 붙여드려야겠군요.^^

양철나무꾼 2011-01-18 01:31   좋아요 0 | URL
따뜻한 봄바람이 불 때쯤은 가능할 듯도 하구요.
그 은행, 이자까지 쳐주시고 인심이 후한걸요~^^

글샘 2011-01-14 12:09   좋아요 0 | URL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전부 사랑하라.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전부 사랑하라.

빛이 있는 곳에서도, 어둠이 드리운 곳에서도.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까맣게 하얗게,

잿빛으로 초록빛, 황금빛,
그리고 진한 갈색 빛으로 사랑하라.

낮에도 밤에도 먼동이 틀 무렵에도,
열린 창문으로 나를 사랑하라.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버리지 마라.

아니면 나를 사랑하지 마라.

둘세 마리아 루이나스, <날아가는 어떤 꿈의 감시원>

양철나무꾼 2011-01-17 01:02   좋아요 0 | URL
우와~이 시 아주 멋져요.
이 시인 좀 더 찾아봐야겠어요.
좋은 시 감사합니다~^^

마녀고양이 2011-01-14 12:39   좋아요 0 | URL
어제 진짜 얼어죽게 춥더군요. ㅠ

그렇지, 외로움, 집착, 고립, 광기에 대한 찬미는 20대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생산의 시기잖아요. 주위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해리 보슈 보다는 조 파이크 같은 타입을 좋아해요. 나두 그렇게 되고 싶구요.
따뜻하면서도 절제하는 사람, 절제를 통해 주위에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아요.

양철나무꾼 2011-01-17 01:05   좋아요 0 | URL
그쵸? 해리보슈보다는 조 파이크가 낫죠?^^
근데 조 파이크보다는 매튜 스커터가 좋아요, 저는.

cyrus 2011-01-14 14:44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 속에는 각기 다른 개성적인 성격의 탐정들이 많이 있네요.
이번에 소개하신 조 파이크,, 정말 괜찮은 캐릭터인데요 ^^

양철나무꾼 2011-01-17 01:07   좋아요 0 | URL
괜찮다 뿐이겠어요, 매력적인 캐릭터죠.
조 파이크 같은 남자 소설 속에서 걸어나오지 않나 모르겠어요~^^

잘잘라 2011-01-14 16:27   좋아요 0 | URL
'파이크 안에는 요새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요새는 쓸모가 많았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게 했다.
요새는 외로운 공간이었다'...

요새는 외로운 공간이다,에 공감 백만개요.

콘크리트-폐쇄-단절-단절-단절.. 단절을 끊고, 닫힌 문을 열고, 콘크리트를 콘크리트를 쳐부수고? ㅜㅜ

양철나무꾼 2011-01-17 01:16   좋아요 0 | URL
파이크-명사;헤엄치는 속도가 빠르고, 공격적인 긴 몸의 포식 물고기
-옥스포드 아메리칸 사전

이 소설 첫 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요새가 보금자리가 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해 보자구요~^^

애쉬 2011-01-14 16:32   좋아요 0 | URL
아, 쿨가이란 말이죠?
고독하고 외롭고 쓰라린 남자 주인공 참 멋지긴 하지만,
제가 고독하지 않고 그다지 외롭지 않고 거의 쓰라리지 않다보니, '멋' 이상은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헤리 보슈가 그냥저냥인가 봐요.
근데, 쿨가이란 말이죠? 아하~~~ 조 파이크. 접수.

양철나무꾼 2011-01-17 01:22   좋아요 0 | URL
그니까~~~애쉬님도 해리보슈 시리즈 몇 개 읽어 주셨잖아요.^^
전 마이클 코넬리 것, 반은 제가 좋아하는 역자 때문에 읽었어요.
로버트 크레이스가 말예요, 장르 소설을 읽는 분이라면 은근 매력 있더라구요.
전 워치맨보다 투 미닛 룰이 더 멋졌어요.

아이리시스 2011-01-14 18:45   좋아요 0 | URL
오호라! 고독.
그러니까 혼자 커피마시는 것도 고독이란 말이죠.
남자가 하면 좀 궁상같기도 한데,,
너무 고독,광기에 집착하면 별로지만, 어떤 사람의 숨겨진 고독의 내면은 좋아해왔어요.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외로움, 고독 따위나 분석하고 있지말고..
나와 내 이웃의 외로움이나 고독, 추위 따위를 돌아보자는 말이다.]
이거 좀 힘들겠지만 반드시 그래야겠다..^^

양철나무꾼 2011-01-17 01:2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이 ‘고독’이 궁상스럽기는 한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해주면 ‘쫌’ 멋지잖아요.
내가 이래서 장르소설에 홀릭하나 봐요.^^

순오기 2011-01-14 21:42   좋아요 0 | URL
오호~ 양철나무꾼님 읽는 책, 저자나 주인공은 나한테 낯선 분들이지만... 마지막 결론은 너무 멋진데요!! 추천 꾸욱~~~

양철나무꾼 2011-01-17 01:29   좋아요 0 | URL
좀 멋졌어요?^^
누차 얘기하지만, 제가 멋진 게 아니라 장르소설 속의 그들이 이렇게 멋지구리 하다니까요.
저는 순오기님의 리뷰나 페이퍼들을 통하여, 또다른 책들을 만나는 걸요~^^

루쉰P 2011-06-22 21:19   좋아요 0 | URL
아...멋지네요. 제가 꿈꾸던 인간상이 여기에 있어요. ㅋ 고독계의 지존, 절대 최강자!! 해리 보슈와 조 파이크 이 두 사람 직접 만나봐야 겠어요. 흐흐흐
전 우울하고 처질때 읽고 싶은 작가를 만나면 의욕이 생기는데 양철댁님 덕분에 만난 것 같아요. 완전 감사해요. 흠..뭔가 마음 깊숙이 의욕이 확 솟네요. 케케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