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책 속의 주인공에 몰입을 할 때가 있다.
김탁환의 열하광인을 읽으면서 작 중 ‘명은주’라는 여인에게 흠뻑 빠졌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너무 맘에 들어 이 책을 참 여러번 읽었었다.
아마 내가 김탁환을 손가락 안에 꼽는 것도 ‘불멸’때문이 아니라 이 ‘열하광인’때문이었으리라.

가끔 ‘열하’가 미웠다. 나는 혼자 읽을 때는 이런 생각을 단 한 순간도 한 적이 없지만, 그녀가 온통 책에만 빠져, 나를 무시하고, 나와 운우지락을 나눌 때처럼 흥분할 때, 책이야말로 만만치 않은 연적이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책 대신 나만 보라 말할 수도 없다. 책을 질투하는 사내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런 내 마음이 때론 우습고 때론 한심했다. 더욱 비참한 사실은 이 책이야말로 너무 멋지고 사랑스러워, 내가 여자라도 매혹당하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틈만 나면 책과 사귀었다. 깨끗하게 멀찍이 두고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넘기는 식이 아니라 연모하는 사내 대하듯 그 책에 자신의 감정을 옮겼다. 겉표지에 입 맞추고 손바닥으로 쓸고 글자 하나하나를 검지로 만지며 내려가고 옆구리에 끼거나 젖가슴에 댄 채 잠들고 머리맡에 두었다가 새벽잠에서 깨자마자 냄새 맡고 여백에는 검지로 도장 찍는 흉내를 내며, 이 책과 영원히 함께 머무를게요 맹세했다. 그 책에 비하자면 나와의 사랑은 드문드문 허거웠다. 그녀와 나 사이에 책이 낀 것이 아니라 그녀와 책 사이에 내가 불청객처럼 찾아드는 격이다. 내가 슬쩍 책을 서안 밑으로 밀어두기라도 하면 그녀는 냉큼 책을 찾아서 품에 안고 앙처럼 웃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도 분명 저는 살았었죠. 한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요. 제삶의 첫 자리엔 이 책이 놓였고, 그때부터 전 비로소 숨 쉬고 걷고 밥 먹기 사작하였답니다.”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었다.(열하광인 상,114쪽)

그랬던 나는 열하광인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백탑파들 뿐만 아니라, ‘이옥’을 기억하고 있었다.
열하광인에서 이옥은 친척인 유등공의 그늘에 있는 변변치 못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 녀석에게 무슨 큰 약점이라도 잡히셨습니까? 자기가 입은 상처만 깊고 크다 떠드는 녀석과는 상종을 마십시오.”(열하광인 상,188쪽)

김내손은 염병에 까마귀 소리 같은 이옥의 장광설에 질린 듯 얼굴을 찌푸리며 짧게 물었다.(열하광인 하,146쪽)
“성품이 여려 탈이지 제멋대로는 아니네. 비유하자면 기상은 물과 같은 사람이지.”“물이라 하셨습니까?”“그렇다네. 아무 맛도 없는 듯하지만 모든 맛으로 변하는 물! 매실에 닿으면 신맛을 내고, 벌꿀을 따르면 건정과보다도 더 단맛이 나며, 소금 한 조각만 떨어져도 짠맛이 감돈다네. 기상은 이렇듯 천하 만물을 받아들여 그 느낌을 자유자재로 나타내는 재주를 지녔으이. 거북이나 물고기, 하얀 봉선화 등 미물을 읊은 부(賦)는 화광이 그린 꽃그림처럼 세밀하면서도 느낌이 또한 깊다네. 흰 봉선화를 차가운 매화의 아우나 아리따운 배꽃의 벗으로 두기가 어디 쉬운가. 특히 나는 기상의 ‘어부(魚賦)를 아낀다네. 물을 하나의 나라로 본다면 용은 임금일 테지. 작은 물고기에게 용이 아무리 인자하게 굴더라도 큰 고기들이 제 잇속을 챙기면 그 나라가 평안할 까닭이 없으이. 기상은 이렇게 노래했더군. 고래들이 작은 고기를 들이마셔 시서(詩書)로 삼고, 이무기나 악어는 작은 고기를 삼키고 씹어 삼농(三農)을 삼고,문절망둑이나 가물치들은 작은 고기를 덮쳐서 은과옥으로 삼는다고 말일세. 어떤가. 큰고기들을 피해 이리저리 숨고 도망치는 작은 고기들의 황망함과 고통이 손 끝에 닿는 것 같지 않은가? 저 고약한 황망함과 고통이 손 끝에 닿는 것 같지 않은가? 저 고약한 번승들을 몽땅 잡아 없앨 방도는 과연 없을까.”(열하광인 상 198,199쪽)


그랬던 차에, 이옥의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를 만나게 되었다.
이옥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던 게...
내가 그토록 흠뻑 빠졌던 김탁환의 ‘열하광인’은 결국 열하일기와 이탁오와 이옥 등을 읽고 나름대로 해석, 다시 버무려 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급기야 둘 중 하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조로 이어졌고,
심한 논리적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역사적 사실들에 서사를 입히는 방식이라면 나라도 뚝딱 소설 한권쯤은 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이옥을 뜯어보고 앞뒤를 헤쳐모아 살펴보아도,
자기가 입은 상처만 깊고 크다 떠드는 녀석도 아니고,
염병에 까마귀 소리 같은 장광설을 늘어놓을 사람도 아니다.
만들어낸 소설 한편을 가지고도 사람을 이렇게 곡해할 수 있는 것이구나 싶어 허탈하다.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는 책을 읽으면 알터이고,
내가 이토록 슬픈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제 명은주 따위는 잊어버리고, ‘묵취향’에 흠뻑 빠져야겠다.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는 이옥의 시작일 뿐이고,
생각을 깊게 하고 넓게 하는 참 좋은 글들이 많은데, 읽고 나면 어쩐 일인지 생각이 간소해진다.

<묵취향>의 서문

>> 접힌 부분 펼치기 >>

<초사>읽는 법

>> 접힌 부분 펼치기 >>

웹서핑을 하다가 <오늘의 장르문학>이라는 책에 김탁환이 필진으로 참여한 걸 봤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홀라당 샀을텐데, 오늘은 장바구니에 넣었다 뺏다 심히 망설여진다. 

아흑~이를 어쩔 거냐니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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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2-27 22:13   좋아요 0 | URL
열하광인이 이런 책이었군요. 이옥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나오는 모양이네요? 반가운 페이퍼였어요.

양철나무꾼 2010-12-29 22:41   좋아요 0 | URL
이옥으로 버무려졌다고 할 수 있어요~^^

이옥의 대화나 생각만 이옥이었으면 좋겠는데,
이옥의 글들은 다른 주인공 급에 내어주고, 찌질이로 나와요~ㅠ.ㅠ

마녀고양이 2010-12-27 23:56   좋아요 0 | URL
ㅠㅠ, 한번 읽고 두번 읽고 세번을 읽었는데...
역시 옛 어구를 쓰는 책들은 어려워요 어려워요... ^^

있지, 옛 추억 하나 생각난다.. 내가 엄청 좋아한 선배였는데
그 선배는 내 책 취향이 못마땅하여 책을 선물했어요. 음....... 자기가
인용한 이런 책. 크. 갑자기 그 생각이 나네. 이젠 나이두 먹었으니
찬찬히 한번 읽어봐야 할건데 말이죠.

근데 그렇게 좋아했던 책이 짜집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라도 너무 서러웠겠다... 이긍~

양철나무꾼 2010-12-29 22:47   좋아요 0 | URL
난, 그때나 지금이나 좀 옛스러운 사람이 좋은데...^^

그 선배는 지금 어디서 뭐해요?
이 책 그런대로 괜찮은 걸요~
누군가의 옛 추억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니...

책 짜집기 부분은 아직도 서러워요~ㅠ.ㅠ

cyrus 2010-12-28 00:22   좋아요 0 | URL
제 친구 중에도 <열하광인> 덕분에 김탁환을 좋게 보는 녀석이 있는데,,,
음,, 소설이란게 이런거(?) 였군요,,^^;;

양철나무꾼 2010-12-29 22:49   좋아요 0 | URL
소설이란 이런 거더군요.
그래도 김탁환 하면 알아주는 '스토리 텔러'인데 말예요.

하긴 열하광인 뒤에 보면, 참고문헌 해가지고 수십권이 나오니까요, 뭐~.

글샘 2010-12-28 00:47   좋아요 0 | URL
제가 김탁환을 왜 싫어할까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ㅎㅎ
김탁환 책을 읽노라면 인문학, 역사학 책 읽었던 게 좀 이상하게 얽히고 꼬이는 것 같긴 해요.

양철나무꾼 2010-12-29 22:5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왜 싫어할까'라니 좀 세신 듯~
좋아하지 않을까 정도로 둥글리셔도...?

2010-12-28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9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0-12-28 09:24   좋아요 0 | URL
열하광인
아, 김탁환 작가와의 만남에서 만나보고 참 멋져 보였어요
양철나무님
행복한 연말 되고 계시나요?
눈이 참 많이 왔는데 조심하셔요

양철나무꾼 2010-12-29 22:56   좋아요 0 | URL
그쵸~
김탁환 님, 직접 보면 '쫌' 멋지죠?^^

님도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요,
내년에는 그동안을 발판 삼아 우뚝 서실 수 있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저절로 2010-12-28 09:45   좋아요 0 | URL
요즘 저는, 서양사 특히 중세사에 몰입해 있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면
내가 지금 딴 동네에서 뭘 하고 있나
내 동네가 산 이력도 모르면서...!

<그녀와 나 사이에 책이 낀 것이 아니라 그녀와 책 사이에
내가 불청객처럼 찾아드는 격이다.>

혹, 제가 그 불청객은 아니겠지요???

양철나무꾼 2010-12-29 23:10   좋아요 0 | URL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올 한해, 에파타님 덕에 행복했는 걸요~^^

내년에는 얼굴 한번 볼 수 있었음 좋겠어요.
오늘 텔레비젼에서 진주온면 봤는데, 그거 엄청 맛있겠던데...

저절로 2010-12-30 09:19   좋아요 0 | URL
온면이든 냉면이든
오시기만 해요.
하늘에 별이라도 대령할터이니..=3

stella.K 2010-12-28 10:59   좋아요 0 | URL
ㅎㅎ 내 뭐래요, 김탁환은 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긴 그 사람뿐인가요? 역사 드라마 쓰는 사람 보면
좀 아슬아슬 걱정스러울 때가 많아요.
그래도 양철님 소설 쓴다면 전 열혈 광팬 될텐데. 진짜루!
이옥 전집이 있었군요. 나이들수록 저런 묵직하고 그윽히 향기나는 책이 끌려요.^^

양철나무꾼 2010-12-29 23:11   좋아요 0 | URL
ㅎ,ㅎ...김탁환이 '좀'이라면,
제가 글을 쓰면 간을 떼어놓고 다니셔야 할지도...
님 간은 무사하시라고 제가 쓰지는 않고 열심히 읽기만 하려구요~^^

잘잘라 2010-12-28 12:47   좋아요 0 | URL
이옥, 처음 듣는 이름..

책 소개 읽고 왔어요. 문체때문에 살면서 이런 저런 불이익을 당하고 임금한테 문책도 당하면서두, 끝까지 자기 문체를 고집했다,는 대목에서 확- 끌려들었어요. 이옥,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양철나무꾼 2010-12-29 23:15   좋아요 0 | URL
자기 문체를 고집할 수 있었던 저력으로 집안의 가산도 무시할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집안에 재산이 없었다면,
책과 경험은 반으로 줄었을테고...글도 좀 줄지 않았을까요?^^

감은빛 2010-12-28 14:44   좋아요 0 | URL
이옥에 대한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데, 여기서 만나는 군요.
저도 '오늘의 장르문학' 보고 장바구니에 넣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당장 읽을 책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참았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0-12-29 23:1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역시 님과 저는 '관심사'가 겹친다니까요~^^

2010-12-29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9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