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안에서 떼굴거리다가 EBS에서 하는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옛날에도 한번 봤었는데, 
그때는 줄거리를 따라 가느라 몰랐는데,
다시 보니, 풍광이 끝내준다.
언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장가계'를 한번 가보고 싶다.

영화는 책 보다 많이 순화시키고 둥글린 느낌이다.
인상깊었던 대사가 몇 있었는데,
"여자는 남자의 장점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는 않죠."
가 기억에 남는다. 

날 돌아보면,
사랑을 하는 데,장점이나 단점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라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위는 없다.
그냥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그렇게 그렇게 흘러간다.  

영화에서는 남자가 죽으며 여자에게,
"용서해 줘."
"당신은 잘못한게 없어요."
이런 대화가 오가는 데,
서머싯 모옴의 원작에선
"죽은 것은 개다."
이랬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사랑했어.
당신이 목적과 이상이 쓸데 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먹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해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자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서머싯 모옴의 <인생의 베일>중에서, 

이쯤되면 남자의 절절함에 가슴이 메어진다.

















 
그래서 올리버 골드 스미스의 시를 찾아 보다 만난 책 한권. 

 

 

 

 

 

가끔 '칼데콧 상 수상작'이라는 그림책을 보곤 하지만,정작 '칼데콧'의 그림책을 본 기억이 없었던 내게 이 책은 여러가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특히 어렸을 때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의 그림들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칼데콧'풍의 그림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충격이었다.

책은 그림책이어서 몇장 되지 않아,쉽게 읽혀지지만 '생각하는 동화'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그림이 글의 부속물 정도로 여겨지던 틀을 벗어나 그림이 책의 주인이 되어 이야기를 설명하도록 하는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 냈습니다.따라서 그의 그림책은 글을 모르더라도 그림만 보고도 이야기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습니다.'
라는 '작가소개'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간의 내 습관대로 글로 내용을 파악하며 읽었을 때랑,천천히 그림을 음미하듯 따라가며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우선,그림에 두개의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화가가,사람들을 보는 시선과 개를 보는 시선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자기가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림이 터무니 없이 상상에 의해 그려지지도 않았다.

그림 속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일치한다.
한 남자가 있고,그 뒤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의 복장이나 시선 등에도 일관성이 있다.
놀라서 도망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바람의방향, 뒷 남자의 쭈뼛한 머리까지 그려내는 것도 재밌고, 창문 안과 밖의 경계를 빗금 선으로만 표현해 내는 것도 놀랍다.
미친개 말고도 많은 개가 나오는 데,개의 종류나 표정이 다 다르지만,어느 하나 즐거워 하거나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

마을에 나타난 개 한마리가,착한 남자에게 간택되어 졌다,관심 밖으로 밀려나고,질투심에 발광을 하고,버려지고 죽는...일련의 과정들이 그림들 안에 잘 녹아 들어 있다.
개는 그렇게 죽고 나서도,한 남자는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전 과정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처연해지기까지 하다.
작품해설에선,
"...어쩌면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말썽을 피우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하고 얘기해서,
미친개에게 일말의 책임을 지우려 하고 있지만 말이다.

개와 사람의 대비를 통해서 보여주려 한 것이 소통 부재-不通의 문제인것은 맞겠지만,
그 전에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자신의 평판이나 명성을 위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적절한 관심을 나눠줄 수도 없으면서 자신이 단지 외롭다고...개를 거둬 키우는 사람들에 관해서이다.

사랑이라는 허울 아래 자기 만의 방식으로 상대방과 소통하려 하는 것은,
사랑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통이 되는 것이다.

결국,시대를 막론하고 벽이나 베일,굴레를 떨쳐내고 소통하는 것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자신의 그릇을 과대평가하여 모두를 다 사랑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니까 말이다.

덧,
'로버트 F.영'의 단편선 <민들레소녀>를 읽고 있다.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편집장이었던 시절에 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랑으로 글을 쓴다네." 누군가는 지체없이 이렇게 톡 쏘아붙였다. "잉크로 쓰는 게 나을 텐데."
로버트 F.영은 그 둘을 다 쓰곤 했다.

이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사물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단다.  
'난 마흔네 살이야! 저 소녀는 스무 살도 안 된 것 같은데,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12쪽)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해서 심난해 할 필요가 없다.
정말 제목 같은 풋풋한 결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살짝 가볍다.
화씨451의 그 소녀가 생각나는 건, 왠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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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3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2-13 23:50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긴 글을 꼼꼼히 읽어줬다는 얘기잖아.
내가 이리저리 널뛰기를 잘한다는 걸 암시롱~~~^^

'민들레소녀'의 결말까지 얘기해야 '어떤 사랑법'을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는데,
'민들레소녀'가 최신간이라서 내가 뭐라뭐라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해 버렸어요.
(그러니까,솔직히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잘 모르겠어~ㅠ.ㅠ'속닥')

반딧불이 2010-12-13 23:48   좋아요 0 | URL
나오미 왓츠와 에드워드 노튼을 좋아해서 영화를 보고 장가계도 다녀왔어요. 영화속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다운건 엇갈린 사랑이지만 거기 두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양철나무꾼 2010-12-13 23:54   좋아요 0 | URL
전 나오미 왓츠보다 에드워드 노튼이 좋아요.
장가계도 다녀오셨다구요, 부러워라~

"영화속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다운건 엇갈린 사랑이지만 거기 두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구절 엄청 좋아요, 님의 해석의 깊이도요~^^

지나가다 2010-12-14 00:4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인용하신 부분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라 인생의 베일에서 나옵니다.
잠깐 착각하신 듯해서요. ^^;;

양철나무꾼 2010-12-14 01: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잠깐 착각이 아니고,완전 착각하고 있었어요.
전 왜 페인티드 베일을 <인간의 굴레>라고 제 맘대로 해석했었는지요~ㅠ.ㅠ

웽스북스 2010-12-14 00:49   좋아요 0 | URL
페인티드베일 영화로도 나왔구나...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데,
아뿔싸! 본 영화였군요. 그러고보니 영화속 장면이 참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해요

영화보다는 책을 더 재밌게 봤었어요. 하필 딱 그런 시기에 그 책을 만났었네요.

그나저나, 저는 이놈의 정신머리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이러는지 ㅜㅜ

양철나무꾼 2010-12-14 01:39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이놈의 정신머리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이러는지...예요.
저도 영화는 너무 둥글렸지 싶었어요.

음~저는 중국에 목마라 있을 때,이 영화를 만났었네요~

웽스북스 2010-12-14 09:53   좋아요 0 | URL
아 ㅋ 저는 인간의 굴레랑도 같은 지점이니까 통하는 면이 있는 작품이구나, 라며 멋대로 해석해버렸는데, (그건 못봤거든요) 착각하셨던 거로군요 ㅎㅎㅎ 그럴 수도 있죠. ㅎㅎㅎ

새해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어요 우리 ㅋㅋ

양철나무꾼 2010-12-14 17:30   좋아요 0 | URL
새해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는 것도 중요한데,
전 선입견이나 매너리즘 속에 절 가두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또 하나 누군가 충고해주면...
감사하게 쿨하게 받아들이기...새해 목표예요~^^

Arch 2010-12-14 10:00   좋아요 0 | URL
분명히 페인티드 베일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잘 기억 나지 않아 서지 검색으로 책 내용을 다시 보고 왔어요. 그래도 역시 기억이 안 나요. 보다가 말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서지 검색한김에 남들 페이퍼까지 다 읽고 와서야 다시 양철 나무꾼님 페이퍼로 와서 댓글 달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서지 검색은 좀 위험한 듯 ㅡ,.ㅜ;;

저는 저를 끌어올려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에 빠져든적이 없어요. 맘을 읽는 것도, '느낌으로 아는 것'도 부족해요. 그게 좋지 않다는걸 아는데 바뀌지도 않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런 자기 인식이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아, 저는 왜 아침부터 이렇게 오지게 긴 댓글을 달고 있을까요.

양철나무꾼 2010-12-14 17:33   좋아요 0 | URL
제가 Arch님의 오지게 긴 댓글을 사랑한다는 걸 안 선견지명을 가지고 계신거겠죠~

제가 페이퍼 중간에서도 밝혔지만, 전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그렇게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아요.

날 돌아보면,
사랑을 하는 데,장점이나 단점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라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위는 없다.
그냥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그렇게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감사드려요.
다시 되돌아와, 이렇게 긴 코멘트를 남겨주셔서~~~^^

2010-12-14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4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0-12-14 11:58   좋아요 0 | URL
저 인용구문 안의 구절...
누군가를 사랑하면 다 저리 되는것 같아요.

양철나무꾼 2010-12-14 17:45   좋아요 0 | URL
아,잉크냄새 님~
저 요즘도 가끔 마실은 가는데...흔적을 남기진 못했어요.
제가 누군가는 이제 저렇게 사랑할 수 없는데,
님의 글들은 저런 마음을 담아 읽고 있지요~^^

그곳은 겨울도 덜 추운 건가요?
건강하세요~!!!

cyrus 2010-12-14 22:16   좋아요 0 | URL
민음사에서 나온 서머싯 몸의 작품들을 가지고 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영화도 보면 참 좋은데,, 못 본 것도 아쉽기만 하네요. ^^;;

양철나무꾼 2010-12-16 01:01   좋아요 0 | URL
왠지 cyrus님은 이 책 읽으셨을 것 같았는데...가지고 계시기만 하시군여.
나중에 한번 보세요.
찐한 사랑도 해보시고 책도 읽어보고 하세요.
영화도 참 좋은데...영화 보면 중국이 가고 싶어져요~^^

순오기 2010-12-14 23:45   좋아요 0 | URL
예전엔-알라딘놀이에 빠지기 전- EBS영화 꼭 챙겨봤는데...이젠 잊고 살아요.ㅜㅜ
버림받은 개의 이야기는 찜해둡니다.

양철나무꾼 2010-12-16 01:03   좋아요 0 | URL
전 평일엔 텔레비젼 잘 안보고,주말에 가끔 봐요.
EBS공감,영화...좋아해요.
'버림받은 개'는 '칼데콧'그림이니 한번쯤 봐 줘도 괜찮아요~^^

2010-12-15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6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0-12-17 00:10   좋아요 0 | URL
영화도 책도 아직 못 봤지만, 써머싯 모옴이라면, 관심이 갑니다.
아직 어렸을 때, 그의 단편들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던 시절이 있었죠.

어쩜 양철나무꾼님은 이렇게 제가 솔깃할만한 책만 소개하시는지 몰라요!

여러모로 늘 고맙습니다!
책 빌려주신단 말씀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0-12-17 01:58   좋아요 0 | URL
저랑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있으셔서 솔깃하신가 봐여~
(바꾸어 말하면,님이 올리시는 글들도 제겐 '심히' 지름신 이십니다,ㅋ~.)

책은 제가 가진 책을 읽은 후 드리겠다는 거였는데,
벌써 공수를 받으셨다니...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죠~

2010-12-17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8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0-12-23 18:14   좋아요 0 | URL
전 영화도 책도 모두 아이들 위주로 가고 있는지라...
이젠 아이들이 방학이니 저의 세상으 끝입니다.ㅜㅜ

양철나무꾼 2011-01-11 06:03   좋아요 0 | URL
아~ 님의 댓글을 이제 봤네요~ㅠ.ㅠ
저도 방학하고 싶어요.^^
지금 아이들과 더불어 많이 즐기세요.
저희 아들보면 방학이어도 하나 좋을 것 없더라구요.
어찌보면 더 바쁜 듯~

2011-01-10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1 0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