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폴 미래의 고전 22
이병승 지음 / 푸른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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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차일드 폴' child(어린이) + politics(정치)의 줄임말.

2019년 붉은 비가 내리고 전염병이 퍼지며 폭설이 내린 대재앙 이후 '인류의 희망은 어린이'

라는 깨달음으로 각 나라의 대표인 대통령과 수상은 반드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수퍼컴퓨터가 10살에서 14살 사이의 아이들 중에 뽑은 첫 번째 대한민국 어린이 대통령이 바로

완전한 보통 아이 5학년 안현웅이다.

대통령이 되면 늦잠을 자도 되고, 무시하고 놀리던 아이들을 쩔쩔매게 만들 수도 있고,

좋아하는 여자친구 보미한테 잘나 보이고 싶고, 무엇보다 줄반장조차 하지 못했는데

덜컥 돌아가신 엄마에게 미안해서 현웅이는 대통력직을 수락한다.

 

막상 청와대에 들어왔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현웅은 아빠에게 바보가 된 것 같다고 하소연하지만

여전히 아침마다 <만리장성>으로 자장면을 만들러가는 아빠는  

'인마! 아빠가 어떻게 중국집 사장이 됐는지 아냐? 배달 3년, 설거지 1년, 양파 까기 1년, 양파 썰기만 또 1년,

그러고 나서야 겨우 자장을 볶을 수 있었어. 근데 너, 대통령 된 지 얼마나 됐어?'

라는 말로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어준다.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 그냥 서류에 형식적인 사인만을 원했던 비서실장은 얼음조각 위에서 빠지기 직전이었던

개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이게 되고, 선글라스를 절대 벗지 않던 경호팀장은 심한 황사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썼던 방독면을 벗어 씌워준 현웅에게 감동하여 꼭 지켜주리라 다짐하게 된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에 눈을 뜨게 된 현웅은 무엇보다 환경문제가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황사를 몰고 오는

몽골에 나무를 심으려 하지만 필요한 돈 30억 달러를 마련하는 일은 마음처럼 쉽지 않다.

국내 최고 자동차 회사인 현기자동차 회장에게 협조를 구해봐도 요지부동. 결국 자동차 1대를 몰면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없애기 위한 나무 100그루 심기를 시작하자 차츰 동참하는 국민들도 늘어간다.

예산 때문에 고민을 하던 중 가게보안 장치를 해지한 돈으로 성금을 내는 아빠를 보면서 국방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가 모두 하나의 나라가 되면 전쟁도 없어질 테고 전 세계의 국방비를 환경기금으로 쓸 수 있겠다는

계산을 하게 된다. 대단한 현웅군! 사실 마음속으로야 다들 그러고 싶어하긴 하지.

 

비서실장이 '지금 대통령님은 아직도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아이 같아요.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에요.

많이 가진 사람이 조금 나눠 줄 수는 있겠지만 전부 내놓진 않아요. 그게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현웅은 멋지게 응수한다.

'그러니까 어린이 대통령을 뽑은 거잖아요. 어른들은 못 하니까. 우리가 하라고!'

우리도 순수한 어린이를 대통령으로 뽑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나? 기대하고 싶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세계를 하나로 묶는 'YOU & I ' 계획에 97개국 나라가 동참을 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그들을 막으려는

EAT 집단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5학년 보통 아이라는 설정치고는 생각이나 말투가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치명적인 결함이 있지만

생각할 거리들을 너무 많이 던져서 머리가 복잡한 탓에 후반부에는 그런 흠이 보이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뭐, 이런 애가 있을 수도 있지. 사람이 다 똑같으면 무슨 재미야' 라고 중얼대기도 했다.

섬진강 댐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맨발로 청와대를 향해 걷는 준일이, 황사 때문에 호흡기 질환이 늘어가도 돈 없는 서민들은

병원에 들어가보지도 못하는 광경, 'YOU & I' 문제로 세계정상회의를 하려는 현웅이를 막으려고 EAT가 벌이는 폭력들.

해군경비정이 미사일에 격침되고 그 주변에 러시아제 미사일 파편이 흩어져있었다거나 하는 일들이 자꾸만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져서 사막화된 몽골을 걷는 것처럼 입으로, 코로 모래가 날아들었다.

 

모든 영화나 책에서 미래를 어둡게 그리는 것은 많이 생각하고 경계하고 혹시 일어날지 모를 재앙을 막으라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2019년 대재앙, 자칫 허황되게 보일 수 있는 이 설정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몇 년이나

몇 십 년 후엔 이런 대재앙을 정말 만날 것 같은 징후들이 지금부터 보이기 때문이다.

<수상이 된 한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를 정치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그만큼 순수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더러운 술수와 음모가 판을 치는 정치판을 갈아엎고 싶은 간절함이 묻어 있는 것이다.

2년 후면 다시 최고 수장을 뽑는 시간이 돌아온다. 이번에는 제발 '생각 없는 어른'이 뽑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가 제일 강조하고 싶었을 이 말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환경 문제는 아주 먼 훗날의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불편해지고 싶지는 않았던 거예요. 기업도 미래를 위해 환경에 투자하고 싶지는 않았죠.

결국 정치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정치인들도 기업과 손을 잡고 당장 자기들의 이익만 앞세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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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의 방 푸른도서관 41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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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 이야기는 <키다리 아저씨>였고, <캔디>였고, 온갖 해피 엔딩이 난무하는 이야기들의 집합체였다.

무엇보다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그 소희가 아닌 게 좀 섭섭했다. 고집스럽고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것처럼 보였던 그 아이가 갑자기 고급스럽고 비밀스럽고 껍질만 꽉 닫은, 못 하는 게 없고 예쁘기까지 한 킹카가 되어 돌아왔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만한 아이로 자란 소희가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그래야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윤소희가 정소희가 되어 멋지게 등장한 게, 내가 키운 아이인양 자랑스러워야 정상인데 내 감정은 그걸 거부했다.

뭔가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너도 하늘말나리야>에 묻어 있던 아이들의 고통이 내게도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온 것에 비하면, 이 책은 유리창을 통해 남의 아픔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후속편의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은 아닐 테고, 뜬금없이 엄마와 새 아빠를 만나 멋진 집에서 살게 된다는 설정 때문만은 아닐 텐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할머니와 함께 꿋꿋하게 헤쳐 나가는 소희의 그런 자세가 참 좋았는데, 새로운 배경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 중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복잡하게 변하는 것도 그렇고,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른 것처럼 ‘짜잔’ 뭐든 다 갖춰진 채 등장하는 신데렐라를 보는 건 거북스러웠다. 작은 엄마네서 미용실 일을 도우면서 힘들게 성장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작가는 소희에게 왜 이토록 미안해하는 걸까?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는 드라마처럼 획일화된 재혼가정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 특별할 게 없었다. 연재했다고 들었는데 매일매일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이야기를 약간 가볍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묵혀두고 다시 꺼내서 살펴보고 하는 과정이 조금 더 길었더라면 <너도 하늘말나리야>처럼 가슴 찡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분명 참 잘 쓴 글이고 아이들도 자기들 이야기에 고개 끄덕이며 읽을 만한 작품이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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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망매가 달리고학년동화 7
강정규 지음 / 달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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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문학을 하는, 혹은 연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필사를 들곤 한다.

내가 아름다운 문장을 쓰지 못할 바에는 멋지게 잘 다듬어진 완벽한 문장을 베껴 써봄으로써

그 기운과 그 아름다움조차 내게로 옮아오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손으로 그 느낌을 익혀 글을 눈으로만 좇던 일에서 더 나아가 생각을 하게 하고

내게도 그런 문장이 손끝에서 춤추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도 필사를 한답시고 몇 권을 써 본일이 있지만 손으로 해야 마땅할 것을 알면서도

팔도 아프고 글씨도 엉망이라는 핑계를 들어 컴퓨터 자판을 톡톡 두드리는 얄팍한 짓을

해놓고 스스로 뿌뜻해 했던 어리석은 시간들이 떠오른다. 

 

<제망매가>를 끝까지 다 읽고 앞으로 돌아가 다시 작가의 말을 읽었다.

제자들의 주례사를 대신해 한 자 한 자 흐트러짐 없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옮겨 쓰신다는

그 말씀을 읽는다.

먹물이 번져 버려야 했던 수 많은 종이들과 호흡마저 가다듬고 단정한 자세로 쓰실

그 모습이 떠올라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있는 세대에 동참하고 있는 내가 또 부끄러웠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인 전래동화.

집마다 전집으로 빽빽하게 책장을 장식하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풍경은 사라져버렸다.

대가족이 해체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먼 곳에 사는 분들이 되고

같이 사는 엄마, 아빠는 바쁜 사람이 되어 테이프나 CD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아있으니

아이들은 뭐가 궁금해도 그냥 들어야 하고

어른들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어보는 반짝이는 눈을 볼 수도 없다.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남아있을까?

 

<제망매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살아나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1부와 2부에서는 '사람은 그저 땅바닥에 발 붙이고 살아야 하는데' 발전이라는 탈을 쓴 채

사람이나 짐승을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방법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을 질타하고 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마음 둘 곳도 없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크다.

그래서 3부에서는 힘들고 어려웠어도 따뜻한 마음이 살아있던 옛날로 돌아간다.

억지로 행복한 체 하지 않아도 충분히 따뜻하게 살았던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서

우리가 잊은 게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라고 넌지시 얘기하고 있다.

'오냐, 내 다 안다. 늬는 낭중에 성공혀서 훌륭한 사람 되거들랑 남의 가슴 아프게

허는 일은 허지 말그라'- <엿>-

'일을 해야 밥이 입으로 들어온댔구나' - <대추나무>-

그들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사람 숨결이 그대로 살아있던 그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숭배하며 사랑하던 순박한 사람들과,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다는 잃어버린 진리를.

<제망매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위한 위령제는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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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 아빠 백점 엄마 - 제8회 푸른문학상 수상 동시집, 6학년 2학기 읽기 수록도서 동심원 14
이장근 외 지음, 성영란 외 그림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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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푸른책들' 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만들어내는 건 다 큰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내가 건방진 말을 한 것 같지만

나는 그저 덩어리 '푸른책들'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남들이 외면하는 시집을 뚝딱뚝딱 신나게 잘 만들어주니 그게 마음에 들고

거기에 들어있는 시들이 또 마음을 쿵쾅쿵쾅 움직이게 만드니 그또한 좋다.

 

<빵점 아빠 백점 엄마>에는 다섯 명의 시인들이 쓴  좋은 시가 가득하다.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푸핫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코끝이 간지러워 씰룩씰룩 코를 매만지기도 했다.

이장근, 이정인, 김현숙, 안오일, 오지연. 이렇게 다섯 명의 시인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방에 갇힌 날

- 이장근

 

숙제 다 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마라

쾅!

방문이 닫혔다

방에 갇혔다

 

 

형아, 다 했어?

아니.

형아, 얼마나 남았어?

다 해 가.

방문 앞에서 조르는 동생

 

동생이 거실에 갇혀 있다

 

 

우리 아들은 결코 맛보지 못할 이 광경에서 나는 가슴이 찡했다.

혼자 자라서 이런 정겨운 추억 하나 못 만들어준 게 미안했지만

나처럼 시로 만나면 되지..하는 생각이 드니 또 금방 마음이 편해진다.

참으로 간사한 마음이다.

 

11월도 벌써 중순이다.

올해 계획했던 일을 반도 못 했지만 남은 시간동안 새로운 마음으로 할 일이 생겼다.

바로 하루에 하나씩 시를 옮겨 적는 일이다.

예쁜 노트를 하나 사서 펜으로 하나씩 정성껏 써 볼 작정이다.

그러다보면 잠자고 있던 내 시들도 언젠가는 나타나지 않을까?

노트를 사러 달려가려는 내 발이 꼼지락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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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19
이규희 지음 / 네버엔딩스토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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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이 떨어져 쌓이고 또 한 알이 떨어져 쌓이면 시간도 따라서 흘러간다.

똑딱. 1초는 별 것 아닌 시간인 것 같지만 그 1초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다.

교통사고가 날 뻔한 아이를 끌어안고 반대편으로 구르는 데 걸리는 시간.

단거리 달리기에서 1등과 2등을 판가름하는 시간.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시간.

미소를 짓는데 걸리는 시간.

'고마워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행복해요' 라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시간.

가슴 아픈 사람을 꼭 끌어안아줄 수 있는 시간......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자면 한이 없지만 이런 모든 일들을 다  꿰뚫는 건

그 1초 사이에 무언가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죽음의 문턱을 넘고, 누군가는 행복해지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변화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앉아 아무도 그냥 보내지 않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도 은비를 만나 짧은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참, 그런데요 할머니, 그렇게 멀리 끌려가서 몹쓸 짓을 당한 게 할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셨어요? 고향에도 안 가고 엄마랑 동생들도 안 만나고.

난 할머니처럼 살지 않을래요. 이젠 그날 밤 일 따윈 다 잊을 거예요.

아직 이렇게 어린데 꽃도 못 피우고 시들시들 말라가면 억울하잖아요.

전 누구보다 예쁜 꽃으로 피어날 거라고요!

 

늦은 밤에 찰흙을 사갖고 돌아오다가 수상한 사람에게 잡혀갈 뻔 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던 은비. 

꽃을 보면 꽃다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좋다고 꽃을 자식처럼 키우던 할머니가

정신을 놓고 요양소로 가신 뒤 화분을 몽땅 집으로 갖고 온 은비는

할머니를 대하듯 화분들을 돌보면서 이렇게 자신의 상처도 치유한다.

아래쪽에 꽉 차 있던 모래가 뒤집으면 다시 스르륵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처럼

시간을 거슬러 은비가 할머니가 된 것 같은 그 사건을 겪으며

할머니와 은비가 어느새 같은 걸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은비는 누구보다 할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하나둘 떠나가면 우린 결국 모래알이 다 빠져나간 빈 모래시계가 되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모두 다 잊히고 말 텐데. 아무도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를 텐데.

 

함께 활동하던 위안부 할머니가 한 분 한 분 돌아가실 때마다 걱정을 하시던 황금주 할머니.

용산참사는 그걸 겪은 사람들이 이고 갈 문제가 되고, 이산가족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된 것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도 그들과 그들을 도와주는 몇 몇 사람들만의 문제가 될 것이 염려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은비 엄마처럼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들과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라는 방관자들 속에 나도 넣어야겠지만

몇 알 남지 않은 모래가 다 빠져 빈 모래시계가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남아 흘러내리는 모래가 있을 때, 

몽땅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더불어 내 일이 아니면 신경쓰지 않는 어른들에게도 각성의 의미가 있다. 

 

덜 아문 상처를 그대로 덮어두기만 해서는 낫지 않는다.

다시 건드려 고름을 뽑아내고 적절한 치료를 해야 한다.

그 치료의 첫 걸음이 관심이라는 것을 이 책은 다시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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