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은
-이성복
어떤 풍경은 늦게 먹은 점심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있다
주먹으로 누르고 손가락으로 쑤셔도
내려가지 않는 풍경,
밭 갈고 난 암소의 턱에서
게 거품처럼 흐르는 풍경,
달리는 말 등에서, 뱃가죽에서
뿜어나오는 안개 같은 풍경,
묶인 굴비 일가족이 이빨 보이며
노래자랑하는 풍경,
어떤 밤에는 젊으실 적 어머니
봉곳한 흰 밥과 구운 꽁치를
소반에 들고 들어올 것도 같지만,
또 어떤 대낮에는 ‘시집 못 간
미스 돼지‘라는 돼지갈비집 앞에서
도무지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워지는 풍경,
갈비 두 대와 된장찌개로 배를 채우고
녹말 이쑤시개 혀끝으로 녹여도 보는 풍경,
그러나 또 어떤 풍경은 전화 코드 뽑고
한 삼십 분 졸고 나면 흔적이 없다
***
“우리 어디 갈까?”
“어디?”“그냥 아무데나....동막 갈까?”
“그래. 각자 짐 싸들고 만나기로 하지 뭐.”
그렇게 모의는 이루어졌다.
동생과 나는 각자 가방 하나 씩을 뒷좌석에 던져두고
애들도 짐짝처럼 뒷좌석에 던져두고
길거리에서 제부를 픽업해서(“야, 타! 한 번 해봤다) 동막으로 떠났다.
어둠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완벽하게 거리를 제압하는 줄 몰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표지판을 보고 찾아 가는 길.
빙 돌아 제일 먼 길로 하여 우린 동막에 도착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민박집들이 거북해서 무작정 더 올라가본 그곳에서
아주 운치 있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거기도 민박집이란다.
베란다 문을 열고 보니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참 좋다.
갈매기 우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처음이지 싶다.
봄볕이 하도 따뜻해서 갯벌을 걸어다니는데도 춥지 않다.
물은 다 빠져서 멀리에서만 반짝였지만
군데군데 웅덩이를 보며 물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몸이 어찌나 큰지 송아지 보는 듯 했는데
이 녀석 물을 좋아하는지 주인이 부르는 것도 못 들은척
혼자 신나서 이리저리 풀썩거린다.
어김없이 '나 잡아봐라' 족들이 보이고
핸드폰에서부터 디카까지 카메라라고 생긴 건 몽땅 들이대며
증명사진들을 박고 있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왔다.
아직도 이런 풍경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몽땅 꺼내 햇볕을 다시 쪼여줄 수도 있는데
자꾸만 한 쪽 다리를 붙잡는 풍경은
싸움 구경하던 일이다. 점잖게 생긴 양반들이 서로 밀치고 당기던 풍경이다.
내가 다 부끄러워지던 풍경이다.
동막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전등사에도 올라갔다.
대나무 흔들리던 마당에서 차를 마셨다.
경내에 있는 찻집이라 꽤 운치가 있었는데
바람이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니 풍경이 댕그렁 화답하더만
그 풍경 꺼내 들고 와 바람 좀 불어주십사 부탁하고
싸움꾼들 앞에 그거 들려주면 조금쯤 정신이 맑아지려나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주말에 본 내 풍경을 꺼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