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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이성복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
아주 어린 목소리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다.
누구냐고 물으면 조그맣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순식간에 엄지손가락이 입속으로 들어가고
내 몸은 점점 움츠러져 태아와도 같은 자세가 된다.
어린 양하는 폼이 아주 역겹다.

나이도 많은 주제에 덜 들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폼도 우습다.
이 나이에 아줌마라고 불리는 게 당연하거늘
누가 아줌마라고 부를라치면 뒤돌아보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모습에
쓴 웃음이 날 지경이다.
왜 이렇게 유치해지는가
누가 날 이렇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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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경은
-이성복

어떤 풍경은 늦게 먹은 점심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있다
주먹으로 누르고 손가락으로 쑤셔도
내려가지 않는 풍경,
밭 갈고 난 암소의 턱에서
게 거품처럼 흐르는 풍경,
달리는 말 등에서, 뱃가죽에서
뿜어나오는 안개 같은 풍경,
묶인 굴비 일가족이 이빨 보이며
노래자랑하는 풍경,
어떤 밤에는 젊으실 적 어머니
봉곳한 흰 밥과 구운 꽁치를
소반에 들고 들어올 것도 같지만,
또 어떤 대낮에는 ‘시집 못 간
미스 돼지‘라는 돼지갈비집 앞에서
도무지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워지는 풍경,
갈비 두 대와 된장찌개로 배를 채우고
녹말 이쑤시개 혀끝으로 녹여도 보는 풍경,
그러나 또 어떤 풍경은 전화 코드 뽑고
한 삼십 분 졸고 나면 흔적이 없다

***
“우리 어디 갈까?”
“어디?”“그냥 아무데나....동막 갈까?”
“그래. 각자 짐 싸들고 만나기로 하지 뭐.”
그렇게 모의는 이루어졌다.
동생과 나는 각자 가방 하나 씩을 뒷좌석에 던져두고
애들도 짐짝처럼 뒷좌석에 던져두고
길거리에서 제부를 픽업해서(“야, 타! 한 번 해봤다) 동막으로 떠났다.
어둠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완벽하게 거리를 제압하는 줄 몰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표지판을 보고 찾아 가는 길.
빙 돌아 제일 먼 길로 하여 우린 동막에 도착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민박집들이 거북해서 무작정 더 올라가본 그곳에서
아주 운치 있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거기도 민박집이란다.
베란다 문을 열고 보니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참 좋다.

갈매기 우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처음이지 싶다.
봄볕이 하도 따뜻해서 갯벌을 걸어다니는데도 춥지 않다.
물은 다 빠져서 멀리에서만 반짝였지만
군데군데 웅덩이를 보며 물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몸이 어찌나 큰지 송아지 보는 듯 했는데
이 녀석 물을 좋아하는지 주인이 부르는 것도 못 들은척
혼자 신나서 이리저리 풀썩거린다.
어김없이 '나 잡아봐라' 족들이 보이고
핸드폰에서부터 디카까지 카메라라고 생긴 건 몽땅 들이대며
증명사진들을 박고 있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왔다.

아직도 이런 풍경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몽땅 꺼내 햇볕을 다시 쪼여줄 수도 있는데
자꾸만 한 쪽 다리를 붙잡는 풍경은
싸움 구경하던 일이다. 점잖게 생긴 양반들이 서로 밀치고 당기던 풍경이다.
내가 다 부끄러워지던 풍경이다.

동막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전등사에도 올라갔다.
대나무 흔들리던 마당에서 차를 마셨다.
경내에 있는 찻집이라 꽤 운치가 있었는데
바람이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니 풍경이 댕그렁 화답하더만
그 풍경 꺼내 들고 와 바람 좀 불어주십사 부탁하고
싸움꾼들 앞에 그거 들려주면 조금쯤 정신이 맑아지려나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주말에 본 내 풍경을 꺼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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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안도현

군내 버스 때 절은 좌석 덮개 뒤에다
나도 삐뚤삐뚤
싸인펜으로 쓰고 싶다

애인 구함
나이: 16세
성격: 명랑 쾌활
TEL: 353~2698
많은 연락 바람
기다릴게요

**
나이: **세
성격: 소심, 삐뚤어짐, 지극히 부정적임.
아참 결혼도 했음
그래도 사귀고자 하는 사람은 연락바람
후후
이렇게 써서 붙이면 나더러 미쳤다고 할테지
가끔 이렇게 잠이 안 오는 밤에는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더러 나는 법이다

정말이지 열 여섯이라는 나이로 돌아가버렸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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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란 말인가
-이성복

한 잎의 결손도 없이
봄은 꽃들을
다 불러들인다
해 지면 꽃들의
불안까지도

하지만 뭐란 말인가,
저렇게 떨어지고 밟혀
변색하는 꽃들을
등불처럼 매달았던
봄의 악취미는?

****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아직도 약간 쌀쌀함을 느낀다.
맨 다리가 드러난 짧은 바지 위로 숄을 덮어주어야 할 만큼.
답답해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가 다시 닫는 그 순간에
나무들이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자목련과 꽃사과나무, 벚나무. 하나는 이름을 모른다.
늘 봐오던 풍경임에도 이름을 몰라 불러줄 수 없음이 안타깝다.
꽃사과는 하얀 꽃이 몽글몽글 피어 제법 귀여워 보이고
벚꽃은 이미 다 피었다가 벌써 지고 잎이 나기 시작했다.
자목련은 처참하다. 어릴 때 축구하다 걷어채인 허벅지 상처처럼
시커먼 멍을 달고 바람이 떨구어 땅으로 떨어뜨려주길 기다리고 있다.
꼭대기에 딱 두 개. 짧은 치마 입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의 뒷모습같은
상큼한 녀석도 있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멘트인 그 마당에
자목련이 아무렇게나 가래침을 퉤퉤 뱉어놓았다
치워버리지..보기 싫다.
버려진 꽃들은 보기 싫다.
나무가 다시 흡수해버릴 수는 없는 건가
그럼 굉장한 장관이 될 것 같다.
필름을 다시 돌리는 느낌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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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
서로 낄낄대면서 한 구절씩 받아 외우던 친구가
멀리,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땅으로 이민을 간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
"식구들이 몽땅 같이 가는 길이니 여기 올 일이 없을 거야."
"사람들은 만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야"
간단하게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던
그런 친구를 잃는 일은 무섭다
다시 그런 친구를 만들기에는 내게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
열정이 없어졌으므로.
젊은 날 내 곁에 머물던 열정들 모두 그 친구와 나눠가졌기에.

"난 이렇게 추억을 갉아먹고 있다"
유치환의 시귀절도 떠오른다
나도 그렇게 그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없는 자리를 서서히 잊어가겠지

가는 길, 공항에 나가지는 않기로 했다.
서로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평생 찾아다녔던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기 위해 떠나는 길
집에 앉아 같이 마시고 싶었던 와인을 새로 따고
혼자 건배를 하며 축배를 들 예정이다.

잘 가라 사랑하는 내 친구야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잘 살어
조금 늦었지만 아이 하나는 낳아야지?
아이 낳으면 전화라도 주렴

너 없는 이곳에서 나도 열심히 살도록 할게
보고 싶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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