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를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쓴 전중환 박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진화심리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학자이다.
진화심리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기반으로 하여 인지과학, 뇌과학, 컴퓨터 과학 등 첨단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는 통섭형 과학이며 사회생물학자, 진화인류학자, 인지과학자, 심리학자들이 한데 모여 인간 본성에 대해 함께 성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범학문적인 분야라고 한다.
이 책은 진화심리학의 기본 개념과 주요 연구들을 잘 정리한입문서가 아니며 유머, 소비, 도덕, 음악, 종교, 예술, 문화, 문학들을 진화 이론으로 들여다보는 책이니 묵직한 입문서를 원하시면 다른 책을 보라는 진심어린 작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진화심리학으로 들어가는 입문서로 볼 작정이다.
작가는 인간의 마음을 톱이나 드릴, 망치, 니퍼 같은 공구들이 담긴 오래된 연장통에 비유하여 톱이 판자 자르기, 드릴이 구멍 뚫기를 각각 잘 수행하게끔 특수화된 공구들이듯 인간의 마음은 각각의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특수화된 수많은 심리적 공구들이 빼곡하게 담긴 연장통이라고 설명한다.
<첫 번째 연장: 진화, 마음을 읽다>
인간의 마음은 인류의 진화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수많은 심리기제들의 집합이다. 마음이 설계된 목적을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은 심리학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이론 틀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미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한 예측들을 풍부히 생산하여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끌어준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종교, 미학, 경영, 법학, 경제, 의학 등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저마다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감안하면, 마음에 대한 진화적 탐구는 인간이 이룩한 학문 전체를 통합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두 번째 연장: 같은 행성, 다른 선택압>
남성과 여성에서 서로 다른 심리가 진화한 이유는 번식성공도(reproductive success:한 개체가 평생 동안 낳는 자식 수)가 분포하는 형태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남성의 번식 성공도는 성관계 상대의 수에 비례하므로 남성은 여성보다 하룻밤 섹스를 더 갈망한다. 이런 남성의 처지는 여러 가지 위험한 일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심리를 진화시켰는데 이것은 남성들이 배우자를 유혹하기 위한 방편으로 위험한 일을 추구하게끔 진화했다는 이론을 뒷받침한다. 여성의 번식 성공도는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워냈느냐에 많이 의존하므로 여성은 아이를 돌보거나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꾸려 나가는 일에 남성보다 능하다. 그래서 여성들은 타인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으로부터 그 사람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더 잘 읽어낸다. 남녀의 차이는 적지 않은 영역에서 발견되며 그 가운데 일부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심리기제가 남성과 여성에서 각기 다르게 장착되었기 때문에 나타난다.
<네 번째 연장: 문화와 생물학적 진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어 보이는 문화의 생성, 전파, 그리고 소멸조차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된 인간의 심리 기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두뇌에 들어갈 수 있는 정보량은 제한되어 있다. 또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므로 어떤 모방자에 대해 다른 모방자보다 특별히 더 관심을 쏟는 심리기제, 어떤 모방자를 다른 모방자보다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심리기제, 어떤 모방자를 다른 모방자보다 타인들에게 더 잘 전파하는 심리기제 등이 우리 인간에게서 진화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연장: 병원균, 집단주의, 그리고 부산갈매기>
병원균에 대한 심리적 방어가 외인혐오증과 자민족 중심주의를 낳았다. 자기 패거리 내의 사람들과 끈끈하게 뭉치면서 외부인을 배척하는 태도는 낯선 병원균에 노출될 가능성을 낮춰준다. 전통을 따르길 강조하면서 일탈을 용납 못하는 태도는 그 지역의 고유한 병원체들에 대한 방어로서 형성된 문화적 관습을 계속 유지하게끔 해준다.
<여섯 번째 연장: 다윈, 쇼핑을 나서다>
과시적 소비행태는 바람직한 배우자 자질을 광고하는 것으로 수공작이 암컷 앞에서 꼬리를 펼쳐 으스대는 행동과 다름없다. 채집활동과 관련된 쇼핑의 면면에서는 여자들이, 수렵활동에 관련된 쇼핑 행동에서는 남자들이 더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먼 옛날 수렵과 채집을 잘해내도록 설계되었던 심리기제들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연장: 웃으면 복이 왔다>
등도 따숩고 배도 부르니, 어서 심신의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유쾌한 기분으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자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사회적 신호가 바로 웃음이다. 창의적이고 머리회전이 뛰어난 남성만이 알짜배기를 유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우수한 유전적 특질을 은연중 광고한다. 여성은 웃기는 남성을 선택함으로써 자식들에게 좋은 유전적 이득을 물려준다. 여성들 앞에서 남성이 과시적 소비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구사하는 유머는 수공작이 암컷 앞에서 펼치는 화려한 꼬리이다.
<열 번째 연장> 진화의 장 너머 보이는 풍경
조류 생태학자 고든 오리언스에 따르면 우리 인류는 선사 시대의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생활해온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 대해 선천적으로 끌리게끔 진화하였다. 조경 연구자 제이 애플턴의 ‘조망과 피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끔 진화했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높게 쳐주는 것도!
사람들은 어떤 공간의 한복판보다는 언저리를 선호, 나무그늘이나 지붕, 차양, 파라솔 아래처럼 머리 위를 가려주는 곳을 측면이나 후면만 가려 주는 곳보다 선호, 측면이나 후면을 가려주는 곳을 온몸을 사방에 드러내는 곳보다 더 선호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외부적 실재가 아니라 잡식성 영장류인 인간이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특정한 환경을 잘 찾아가게끔 그 환경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정서일 뿐이다.
<열한 번째 연장> 자연의 미
사람들은 인공적인 환경보다 자연적인 환경에 더 호감을 느낀다. 물이 부족한 사바나에서 대다수 시간을 보낸 우리 인류는 어떠한 경관이건 그 안에 물만 들어 있으면 미적 쾌감을 느끼고 고요함이나 평화로운 정감에 흠뻑 빠지게 진화됐다. 동물이나 꽃에 대한 선호는 동물에 매혹되는 심리는 동물이 우리 먹이이고 우리가 동물의 먹이이기 때문이다. 꽃은 오래지 않아 과일이나 견과, 덩이줄기 같은 음식물이 나게 되리라고 알려주며 초식동물이 찾아오기 때문에 매혹된다는 가설이 있다.
<열세 번째 연장: 이야기의 생물학>
현실 속의 사람들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도 마치 인간이 진화해 온 환경 하에서 생존과 번식을 최대화했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간이 허구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는 극 중 인물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고 어떻게 해결하는지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자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주게 설계된 적응이다. 문학작품 안에서 보편적인 인간본성이 그 작품의 시대적 문화적 특수성에 비추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다윈주의 문학비평이다.
<열네 번째 연장: 발정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발정기가 사라져 배란이 은폐된 우리 종은 배란 주기 내내 줄기차게 성관계를 하도록 진화하였다. 하지만 인간 여성은 발정기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배란 주기 내내 성관계를 할 수 있긴 하지만 성관계에 대한 감수성이나 욕망이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발정기의 진화적 기능은 정자 그 자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는 상대를 더 까다롭게 고르기 위함이므로 여성의 가임기는 곧 여성의 발정기이다.
<열다섯 번째 연장: 털이 없어 섹시한 유인원>
진화생물학자 마크 페이겔과 월터 보드머는 오직 인간만이 불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고 따뜻한 옷과 주거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과 차디찬 냉기, 퍼붓는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털이 없어졌다고 본다. 털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기생충 없는 건강한 사람임을 이성하게 광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선택된 구애 도구라는 것이다.
<열여섯 번째 연장: 가을빛이 전하는 말>
타는 듯한 가을빛은 나무가 해충에게 전하는 경계 신호라고 본다. 가을 색소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따르므로 오직 건강한 나무만이 진하고 뚜렷한 가을 빛깔을 낼 수 있다. 진딧물은 이처럼 나무들이 각기 다르게 내는 신호들에 반응해서 가장 형편없이 단풍 든 나무에 내려앉는다.
<열일곱 번째 연장: 도덕은 본능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보편적인 도덕 본능을 진화시켰다.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선택으로 만든 이러한 도덕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그른지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게 한다. 도덕성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풀고자 선택된 보편적인 심리기제의 산물이다.
<열아홉 번째 연장: 음악은 왜 존재하는가>
음악활동이 한 집단 내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음악은 사슴의 큰 뿔이나 공작의 화려한 꼬리처럼 남성이 자신의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과시하여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구애 행동이라는 가설, 엄마가 갓난아기를 달래는 자장가로부터 음악이 기원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까지는 미스터리이다.
아직도 진화 이론은 창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불완전한 과학이라고 믿거나,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화적 접근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며 무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지만 다윈 혁명은 어쨌든 진행 중이다. (241쪽)
몇 가지를 정리해봤지만 대체로 가설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가설들도 있었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들도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학자들처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지는 않겠지만 작가의 의도대로 광활한 신천지(다윈주의 문학비평, 소비의 진화적 분석, 진화음악학, 종교의 진화적 분석, 다윈주의 문화 연구, 진화 미학, 윤리의 진화적 분석, 법의 진화적 분석, 다윈의학, 다윈미식학 등)가 우리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나야 새로운 것들에 눈을 뜬 유쾌한 책 읽기로 끝났지만 부디 좋은 학자들이 전중환 박사의 뒤를 이어 진화심리학을 탄탄하게 만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