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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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를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쓴 전중환 박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진화심리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학자이다.

진화심리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기반으로 하여 인지과학, 뇌과학, 컴퓨터 과학 등 첨단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는 통섭형 과학이며 사회생물학자, 진화인류학자, 인지과학자, 심리학자들이 한데 모여 인간 본성에 대해 함께 성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범학문적인 분야라고 한다.

이 책은 진화심리학의 기본 개념과 주요 연구들을 잘 정리한입문서가 아니며 유머, 소비, 도덕, 음악, 종교, 예술, 문화, 문학들을 진화 이론으로 들여다보는 책이니 묵직한 입문서를 원하시면 다른 책을 보라는 진심어린 작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진화심리학으로 들어가는 입문서로 볼 작정이다.

작가는 인간의 마음을 톱이나 드릴, 망치, 니퍼 같은 공구들이 담긴 오래된 연장통에 비유하여 톱이 판자 자르기, 드릴이 구멍 뚫기를 각각 잘 수행하게끔 특수화된 공구들이듯 인간의 마음은 각각의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특수화된 수많은 심리적 공구들이 빼곡하게 담긴 연장통이라고 설명한다.

<첫 번째 연장: 진화, 마음을 읽다>
인간의 마음은 인류의 진화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수많은 심리기제들의 집합이다. 마음이 설계된 목적을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은 심리학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이론 틀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미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한 예측들을 풍부히 생산하여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끌어준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종교, 미학, 경영, 법학, 경제, 의학 등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저마다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감안하면, 마음에 대한 진화적 탐구는 인간이 이룩한 학문 전체를 통합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두 번째 연장: 같은 행성, 다른 선택압>
남성과 여성에서 서로 다른 심리가 진화한 이유는 번식성공도(reproductive success:한 개체가 평생 동안 낳는 자식 수)가 분포하는 형태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남성의 번식 성공도는 성관계 상대의 수에 비례하므로 남성은 여성보다 하룻밤 섹스를 더 갈망한다. 이런 남성의 처지는 여러 가지 위험한 일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심리를 진화시켰는데 이것은 남성들이 배우자를 유혹하기 위한 방편으로 위험한 일을 추구하게끔 진화했다는 이론을 뒷받침한다. 여성의 번식 성공도는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워냈느냐에 많이 의존하므로 여성은 아이를 돌보거나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꾸려 나가는 일에 남성보다 능하다. 그래서 여성들은 타인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으로부터 그 사람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더 잘 읽어낸다. 남녀의 차이는 적지 않은 영역에서 발견되며 그 가운데 일부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심리기제가 남성과 여성에서 각기 다르게 장착되었기 때문에 나타난다. 


<네 번째 연장: 문화와 생물학적 진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어 보이는 문화의 생성, 전파, 그리고 소멸조차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된 인간의 심리 기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두뇌에 들어갈 수 있는 정보량은 제한되어 있다. 또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므로 어떤 모방자에 대해 다른 모방자보다 특별히 더 관심을 쏟는 심리기제, 어떤 모방자를 다른 모방자보다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심리기제, 어떤 모방자를 다른 모방자보다 타인들에게 더 잘 전파하는 심리기제 등이 우리 인간에게서 진화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연장: 병원균, 집단주의, 그리고 부산갈매기>
병원균에 대한 심리적 방어가 외인혐오증과 자민족 중심주의를 낳았다. 자기 패거리 내의 사람들과 끈끈하게 뭉치면서 외부인을 배척하는 태도는 낯선 병원균에 노출될 가능성을 낮춰준다. 전통을 따르길 강조하면서 일탈을 용납 못하는 태도는 그 지역의 고유한 병원체들에 대한 방어로서 형성된 문화적 관습을 계속 유지하게끔 해준다.

<여섯 번째 연장: 다윈, 쇼핑을 나서다>
과시적 소비행태는 바람직한 배우자 자질을 광고하는 것으로 수공작이 암컷 앞에서 꼬리를 펼쳐 으스대는 행동과 다름없다. 채집활동과 관련된 쇼핑의 면면에서는 여자들이, 수렵활동에 관련된 쇼핑 행동에서는 남자들이 더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먼 옛날 수렵과 채집을 잘해내도록 설계되었던 심리기제들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연장: 웃으면 복이 왔다>
등도 따숩고 배도 부르니, 어서 심신의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유쾌한 기분으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자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사회적 신호가 바로 웃음이다. 창의적이고 머리회전이 뛰어난 남성만이 알짜배기를 유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우수한 유전적 특질을 은연중 광고한다. 여성은 웃기는 남성을 선택함으로써 자식들에게 좋은 유전적 이득을 물려준다. 여성들 앞에서 남성이 과시적 소비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구사하는 유머는 수공작이 암컷 앞에서 펼치는 화려한 꼬리이다.

<열 번째 연장> 진화의 장 너머 보이는 풍경
조류 생태학자 고든 오리언스에 따르면 우리 인류는 선사 시대의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생활해온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 대해 선천적으로 끌리게끔 진화하였다. 조경 연구자 제이 애플턴의 ‘조망과 피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끔 진화했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높게 쳐주는 것도!
사람들은 어떤 공간의 한복판보다는 언저리를 선호, 나무그늘이나 지붕, 차양, 파라솔 아래처럼 머리 위를 가려주는 곳을 측면이나 후면만 가려 주는 곳보다 선호, 측면이나 후면을 가려주는 곳을 온몸을 사방에 드러내는 곳보다 더 선호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외부적 실재가 아니라 잡식성 영장류인 인간이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특정한 환경을 잘 찾아가게끔 그 환경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정서일 뿐이다.

<열한 번째 연장> 자연의 미
사람들은 인공적인 환경보다 자연적인 환경에 더 호감을 느낀다. 물이 부족한 사바나에서 대다수 시간을 보낸 우리 인류는 어떠한 경관이건 그 안에 물만 들어 있으면 미적 쾌감을 느끼고 고요함이나 평화로운 정감에 흠뻑 빠지게 진화됐다. 동물이나 꽃에 대한 선호는 동물에 매혹되는 심리는 동물이 우리 먹이이고 우리가 동물의 먹이이기 때문이다. 꽃은 오래지 않아 과일이나 견과, 덩이줄기 같은 음식물이 나게 되리라고 알려주며 초식동물이 찾아오기 때문에 매혹된다는 가설이 있다.

<열세 번째 연장: 이야기의 생물학>
현실 속의 사람들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도 마치 인간이 진화해 온 환경 하에서 생존과 번식을 최대화했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간이 허구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는 극 중 인물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고 어떻게 해결하는지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자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주게 설계된 적응이다. 문학작품 안에서 보편적인 인간본성이 그 작품의 시대적 문화적 특수성에 비추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다윈주의 문학비평이다.

<열네 번째 연장: 발정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발정기가 사라져 배란이 은폐된 우리 종은 배란 주기 내내 줄기차게 성관계를 하도록 진화하였다. 하지만 인간 여성은 발정기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배란 주기 내내 성관계를 할 수 있긴 하지만 성관계에 대한 감수성이나 욕망이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발정기의 진화적 기능은 정자 그 자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는 상대를 더 까다롭게 고르기 위함이므로 여성의 가임기는 곧 여성의 발정기이다.

<열다섯 번째 연장: 털이 없어 섹시한 유인원>
진화생물학자 마크 페이겔과 월터 보드머는 오직 인간만이 불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고 따뜻한 옷과 주거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과 차디찬 냉기, 퍼붓는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털이 없어졌다고 본다. 털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기생충 없는 건강한 사람임을 이성하게 광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선택된 구애 도구라는 것이다.

<열여섯 번째 연장: 가을빛이 전하는 말>
타는 듯한 가을빛은 나무가 해충에게 전하는 경계 신호라고 본다. 가을 색소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따르므로 오직 건강한 나무만이 진하고 뚜렷한 가을 빛깔을 낼 수 있다. 진딧물은 이처럼 나무들이 각기 다르게 내는 신호들에 반응해서 가장 형편없이 단풍 든 나무에 내려앉는다.

<열일곱 번째 연장: 도덕은 본능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보편적인 도덕 본능을 진화시켰다.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선택으로 만든 이러한 도덕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그른지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게 한다. 도덕성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풀고자 선택된 보편적인 심리기제의 산물이다.

<열아홉 번째 연장: 음악은 왜 존재하는가>
음악활동이 한 집단 내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음악은 사슴의 큰 뿔이나 공작의 화려한 꼬리처럼 남성이 자신의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과시하여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구애 행동이라는 가설, 엄마가 갓난아기를 달래는 자장가로부터 음악이 기원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까지는 미스터리이다.

아직도 진화 이론은 창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불완전한 과학이라고 믿거나,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화적 접근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며 무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지만 다윈 혁명은 어쨌든 진행 중이다. (241쪽)

몇 가지를 정리해봤지만 대체로 가설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가설들도 있었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들도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학자들처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지는 않겠지만 작가의 의도대로 광활한 신천지(다윈주의 문학비평, 소비의 진화적 분석, 진화음악학, 종교의 진화적 분석, 다윈주의 문화 연구, 진화 미학, 윤리의 진화적 분석, 법의 진화적 분석, 다윈의학, 다윈미식학 등)가 우리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나야 새로운 것들에 눈을 뜬 유쾌한 책 읽기로 끝났지만 부디 좋은 학자들이 전중환 박사의 뒤를 이어 진화심리학을 탄탄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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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 호랑이
이어령 엮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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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자취를 감추고 만 한국호랑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춥고 먼 시베리아로 가야 한다고 했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한국호랑이(백두산호랑이)와 같은 아종에 속해 있다. 라죠 자뽀베드닉(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최기순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니콜라이 바이코프가 만주 밀림을 호령한 한국 호랑이의 일생을 그린 「위대한 왕」 서문을 재일조선인 학자인 서경식이 썼는데 서베를린 동물원에서 마주친 호랑이에 대해
‘아무르 호랑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300킬로그램 이상 체중이 나가리라. 얼굴만 보더라도, 어른 팔로 한 아름은 족히 될 법해 보였다. 호랑이는 우울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고고하고도 위엄 가득한 모습이었다. 30분 이상이나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라고 표현한 그 모습이다.
 「十二支神 호랑이」는 한국(호랑이), 중국(虎), 일본(とら) 호랑이에 대한 고찰을 다룬 책으로책임편집은 이어령 선생님이 맡으셨다지만 실제 내용은 한, 중, 일 학자 16명의 시선인 만큼 호랑이에 대한 다양한 문화코드를 만나 볼 수 있다.

 책을 펴면 우리에게 낯익은 민화 <까치호랑이> 얼굴과 맞닥뜨리게 되어 딱딱한 책을 쉽고 편안하게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문학 속에 나타난 호랑이 이야기’였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우처럼 호랑이를 친근하게 여기지 않아 이야기 자체가 드물다는 것과 그런 이유로 일본 문화 속에 호랑이는 자취조차 희미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마다 요의 글에서
‘또한 일본에 호랑이가 서식했다면 해외에서 호랑이를 퇴치한 이야기가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다. 문학적 상상력에서 호랑이의 부재는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밝힌 것을 보면서, 우리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를 배척하고 싫어하기보다는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혹은 무섭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로 승화시킨 조상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우리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받은 셈이다.
 책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삼국의 호랑이 문화가 독자적으로 성립하여 개별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서로 교류하면서 융합되기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시켜간다는 윤열수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옛날 중국 회하(淮河) 이북에는 귤나무가 없었다는데 어떤 사람이 남쪽에서 귤 묘목을 얻어와 옮겨 심었더니 몇 년 후에 본래 달고 맛있는 귤이 열려야 할 나무에 작고 신 탱자가 열렸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귤이 회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라는 엄숙한 한마디가 기록돼 있다. 식물이 토양과 기후에 따라 이화될 수 있듯이 문화나 사상 종교의 전파에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토양과 기후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젠 누구 것이 먼저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교통의 발달로 거리가 가까워진만큼 문화의 넘나듦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에게 풍성하게 남아 있는 자료들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이나 세계 여러 나라 자료까지도 살펴보고 연구해서 또 다른 우리만의 새로운 문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책을 덮고나니 이 자료들을 토대로 재미있는 호랑이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원고지 앞에 앉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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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부르는 그림 Culture & Art 1
안현신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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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떠밀려 저절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고흐전에서
나는 보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했다.

아이들이 있는 대로 다 벗어 맡긴 옷가지에 치여 발걸음도 옮기기 어려웠고

행여나 열댓 명 되는 우리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까봐,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눈에 불을 켜야 했던 고흐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서야 6학년 아이들에게 1학년을 잠시 맡겨둔 채

부뚜막에 거의 서다시피 앉아  밥을 드시던 우리네 엄마들처럼 쫓기듯 구경했고

아쉬운 마음에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고흐 그림을 클릭해 본 기억이 새롭다.

 

그림을 보는 일은 좋아하는데 그림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다.

고흐니 고갱이니 모네, 마네, 드가, 피카소 같은 작가들의 이름을 아는 것도 미술 시험에

나왔기 때문에 외운 것이지  그림에 관심이 있어서 화집을 찾아본 것도,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 조각하는 사람이 있어 가끔 전시회에 초대되어 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나 제목을 봐야 이해되었으며 작가의 해설을 들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을 뿐

그림이나 조각 작품 자체로 대단한 감흥을 가져 본 것은 없었던 듯 싶다.

물론 사실주의 작품을 제외한 상태의 현대 작품에 관한 일반적인 느낌이란 말이다.

똑같이 베끼는 그림보다는 신화나 전설을 읽은 후 작가가 창조해낸 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들긴 하지만

어쨌거나 사실대로 보여지는 그림이 편한데 이 책도 후반부로 갈수록 그림이 난해해졌다.

 마르크 샤갈의 <파란색의 연인들>, <여자 곡마사>는 그 부드러운 색감에 반해버렸고

메리 카사트의 <엄마와 아이> 시리즈에서는 인상파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아아..그리고 클림트! 황금빛 화려함 속에 감춰진 우울함이 매력인 <키스>를 감상하는 기쁨도 컸는데

뭉크나, 에곤 실레, 피카소의 기괴한 그림에는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친절한 현신씨! 글이 매끄러워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림을 소개해주고, 그림을 그린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그림을 그렸던 당시 시대상을

이야기해주고, 작업일지 형태로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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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룬의 세계사 여행
헨드릭 빌럼 반 룬 지음, 김대웅 옮김 / 지양어린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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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반 룬이 손자를 위해 만들어준 그림책.

역사책은 매년 두꺼워지니까 75년 전에 만들어진 이 책에도 덧붙일 일들이 많겠지만

좋은 고전이 그렇듯 이 책도 반룬이 직접 그린 26장의 그림과 곁들인 설명만으로도 훌륭하다.

 

A 아테네, B 보로부두르, C 카르카손, D 델프트, E 에디스톤, F 피렌체, G 지브롤터, H 하를럼 ,

I 일리온 , J 예루살렘,K 카르나크, L 런던, M 모스크바, N 나폴리, O 오아후, P 파리, Q 채석장,

R 로마, S 스톡홀름, T 티베트, U 우페르나비크, V 베네치아, W 워싱턴, X 제너두, Y 에도,

Z 체르마트

 

소개해주고 싶은 도시를 알파벳 순서에 따라 26개를 정했다는 게 굉장히 독특하게 다가왔는데

다 읽고난 후에 나는 세계사는 잘 모르니 한글자음에 따라 도시를 선정하고 거기에 얽힌 우리나라

역사를 소개하는 것도 뜻깊은 작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들어보는 도시 이름이 의외로 많아 내가 모르는 역사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이 책을 읽은 손자는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저 도시들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테고,  

분명히 직접 자료들을 찾으면서 행복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극한 손자 사랑이 느껴지는 책이다.

 

 책 전체를 모두 반 룬이 지은 것인줄 알았다가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첫 장면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다른 이가 자료를 덧붙인 거라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읽다보니 사진 자료를 곁들여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줘서 오히려 직접 여행 가서 보고 싶은 곳이 늘었다.

 특히 얼마 전 '차마고도'를 보고난 참이어서 그랬는지 '티베트' 편에서 '라싸'를 보다가

오체투지의 절을 하며 순례를 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한참을 하얀 포탈라궁에서 떠날 수 없었다.

꼭 한 번 가봐야겠다.

 

 우리 아이가 자라 결혼을 하고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사랑하는 손주들에게도

이런 책을 선물할 수 있다면 나는 가장 먼저 '인천'을 소개해주리라. 그때는

'미추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던 곳, 세계에서 첫 번째로 아름다운 항구를 가진 곳,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국에서 제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요즘 인천은 낙후된 곳과 발전된 곳이 균형이 맞지 않아 어딘가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우리 아이가 태어난 이곳이 나중에는 꼭 그렇게 변하길 바란다.

 

 한 번 보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거나 기억할 순 없겠지만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라는 것이 좋았다.  

외우는 역사가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는 역사 공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지도서로도 써도 아주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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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혼 - 시간을 말하다
크리스토퍼 듀드니 지음, 진우기 옮김 / 예원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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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없어. 빨리 빨리 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급하면, 얼마나 이 말을 자주 사용하면,

중극인들이 다른 말은 몰라도 빨리빨리 라는 우리말은 알아듣는다는 말이 나올까?

뭐가 그리 급한 걸까? 하면서 나도 '시간 없어. 빨리 해.' 라는 말을 달고 산다.

무슨 시간? 하루에 24시간이나 있는데.

시계가 없어진다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아이들 의견이 반으로 갈렸다.

- 시간을 잘 모르니까 학원 안 가도 되니까 좋아요.

- 시간을 몰라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니까 걱정돼요.

나는 불행하게도 후자 쪽인 사람이다. 시간이야 가건 말건 그냥 배고프면 밥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자고, 책 보고 싶으면 책 읽는 그런 삶을 살면 오죽 좋으랴.

자본주의 사회에 살다 보니 일을 해야 돈을 받고, 그러려면 사용자가 정해놓은 시간에 맞춰

나도 움직이게 되면서 시간에 제약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시사회에 살면 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있으니 행복할까?

하루하루 먹을 걸 구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을 테고 해지기 전까지라는 나름대로의 제약이

있었을 테니 시간적인 면으로는 행복지수가 그닥 크지도 않았을 것 같다.

 

1200년대에 처음 시계를 가지게 된 이후, 점점 더 작은 시간 단위를 측정할 수 있게 되어

1,000조 분의 1초에 해당하는 펨토초가 측정되었다 한들, 시간을 아무리 잘게 쪼개본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가시적인, 딱 시계 바늘 움직이는 것만큼의 시간을 가질 뿐이다.

우리가 박자에 맞춰 까딱까딱 고개를 흔드는 메트로놈이 아니라  인간인 까닭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고,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진 사람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미 그 시간을 가졌어도 내가 또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은 너그럽기 그지없다.

 

시간의 관리와 사용은 먼 미래의 어떤 거대공학 프로젝트들보다 더 빛나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다.

시간은 최후의 자원이고 우주는 시간의 종말을 조롱하며 그가 가진 모든 패를

우리인간이 결국은 소유하게 될 죽음을 속이는 능력에 쏟아넣었다.

단지 우리의 후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 자체를 위해서 말이다.

 

세상은 톱니바퀴도 있어야 하지만, 바위 틈을 헤집고 올라오는 풀도 있어야 하고,

나른한 고양이의 잠도 필요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마음이 풀어지는 사람도 필요하다.

결국, 시간은 사용하는 사람의 몫이 된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이 말에 동의하지 못했지만

 

'시간의 화살은 동시에 모든 곳을 향하고 삼라만상은 시간과 함께 빛난다.'

에는 박수를 쳐주었다.

크리스토퍼 듀드니가 다양한 방면으로 끈질기게 시간에 대한 탐구를 해낸 것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무작정 그의 시간으로 끌려 갈 게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시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이 시각, 내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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