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휴가 - 교황과 달라이라마의 5일간의 비밀 여행
롤런드 메룰로 지음, 이은선 옮김 / 오후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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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독특한 소설을 읽었다. 시작은 가톨릭교도라면 누구든 우러러보는 교황이 모두가 모르게 5일간(!!) 비밀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자신의 사촌이자 수석보좌관인 파올로에게 제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비밀여행의 동행자는 불교도라면 누구든 성스럽게 생각하는 달라이라마, 교황에게 여행을 제안 받은 파올로, 그리고 파올로와 이혼한 전처 로자. 이렇게 4명이다. 




일단 교황이 아무도 모르게, 쥐도새도 모르게, 바틴칸 궁을 떠나 5일간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부터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그 동행자가 불교도의 수장인 달라이라마라니? 가톨릭과 불교계의 수장이 같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아이러니한테, 극비에 진행한다는게 과연 가능할까. 이 비밀여행을 진행시켜야할 교황의 사촌이자 수석보좌관 파올로는, 가뜩이나 추기경출신이 아닌 상태에서 수석보좌관이 된 케이스라, 바티칸 내에서도 미움을 잔뜩 받고 있는데 말이다. 


따지고 들자면 장애물은 끝도 없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꿈은, 행복한 결혼생활이나 성공적인 육아나 영원한 구원과 같은 야심만만한 발상에는 비이성적인 믿음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체 모를 낙관주의에 취해 모든 게 잘 되길 바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p 035


현실을 우선시 하는 파올로 입장에선 교황과 달라이라마의 비밀여행은 매우 리스크가 큰, 어쩌면 본인의 생명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인데, 그는 결국 이 여행에 앞장선다.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천국이니까! 



이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건 말 그대로 ‘비밀여행’. 그 누구도 교황을 알아봐선 안되고, 달라이라마도 알아봐선 안되며, 교황과 달라이라마를 납치했다고 대서특필 될 파올로를 알아봐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파올로는 전처 로자에게 SOS. 로자는 미용업계에선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실력가였으니까. 그렇게 교황의 비밀여행 멤버는 교황, 달라이라마, 파올로, 로자 총 4명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할 점이, 교황과 달라이라마, 파올로가 분장한 모습이다. 속세를 떠나 성스러운 인물로 대표되는 카톨릭계의 수장인 교황은 돈 많고 부유한 사업가로 변장했다. 역시나 속세를 떠나, 해탈의 경지에 있는 불교계의 수장인 달라이라마는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록스타로 변장했다. 교황의 수석보좌관이자 이탈리아 토박이인 파올로는 무려 지중해를 건너온 보트피플,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에게 무시와 혐오를 받는 난민으로 변장했다.



속세를 떠나서 어딜가나 추앙받던 교황과 달라이라마는 자본의 극치에 있는 사람이 되었고, 누가봐도 지적인 이탈리아인 파올로는 무시와 혐오가 일상인 난민이 되었다. 이들의 변장에서부터 교황이 주도한 이 여행이, 정말 쉬기위한 여행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두 분 다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믿으시는거죠? 어린아이들이 죽고, 사람들이 암과 전쟁과 전염병으로 고생해도 조물주가 저 위에서 세상을 관장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됐건 부처님이 됐건 누가 됐건.” p 083 (로자)


거기다 동행인인 로자는 독자인 나처럼 종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교황과 달라이라마를 앞에두고 로자는 하고 싶은말을 가감없이 그대로 내뱉는다.  



달라이라마는 까만 선글라스 너머로 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렌즈로 덮여 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과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뭐가 더 중요하겠어요? 정신없이 돈을 많이 벌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이번 생애에서 깨달음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것, 둘 중에서 말이에요.” p 094



“우리는 남들을 보고 소설을 써요. 저 여자는 이래, 저 남자는 저래, 봐, 저 여자는 늘 이렇잖아, 저 남자는 늘 저렇잖아. 이런 식으로 혼자 소설을 쓰기 때문에 현재 그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하죠. 화가 나거나 할 때는 자존심이 고개를 드는지 살펴요. 알았지요?” p 110~112


그런 로자의 질문에 달라이라마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불편한 기색없이 대답을 한다. 이 대답을 들은, 나와같은 독자를 대변하는 로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적어도 나는 조금이나마 생각이란걸 하게되었다. 분명 나도 돈을 많이 벌고 소유하는 것에 방점을 둔 사람이다. 풀소유를 하면 행복할거라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그 생각이 조금씩 변했다. 정말 풀소유를 하면 행복한건가?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요즘에 더 행복한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자살율이 전 세계 1위를 찍을까. 왜 하루하루 중대사건사고가 일어날까. 왜 이렇게 분노에 찬 사람들이 늘어나는걸까. 


우리에게는 스승이 주어졌다. 나와  교황과 10억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달라이라마와 수많은 추종자들에게는 부처가. 그밖에도 소크라테스, 모세, 마호메트, 아인슈타인. 이런 스승들이 한 방향을 가리켰지만 우리는 그쪽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호흡이나 땅이 쩍 갈라지는 것이나 위치 추적이 불가능한 전자로 이루어진 100만개의  소용돌이치는 우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현재 종이장처럼 얇은 얼음 위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건너는 중이고 언젠가는 그 속으로 빠져서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다 이해한다고, 세상을 어느 정도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p 126



역사 이래 수많은 스승들이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류애를 말하고, 또 말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는 그저 ‘소유’를 쫓으며 살아간다. 아니, 말이 살아가는거지 실상은 하루하루 죽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그 목적을 ‘소유’에 둔다. 



수많은 스승들의 바람과는 달리 소유가 삶의 미덕이 되면서, 소유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죄의식이 옅어지고, 소유를 위해 악착같이 사는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서 죄의식이 옅어졌다. 그렇게 오롯이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들로 머리속을 채운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말한다. 나는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고, 마리아를 믿는다고. 대체 이 모순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걸까. 차라리 나는 돈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솔직하고 순수해보일지경이다.


하지만  고문과 살해를 당한 성인들은 어떤가? 능지처참과 화형식을 당하고 화살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힌 성인들은 어떤가? 예수님은 어떤가?  그건 어떤 업보였을까? 요제프 스탈긴 같은 사람은 어째서 별다른 고통 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자연사했을까? 티베트의 수많은 승려들이 중국인 이교도들에게 고문을 당한 이유는 뭘까? 아이들이 암으로 고통 받거나 기형으로 태어나거나 천국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얼룩진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는 뭘까? p 162 


다시 책 속으로 돌아오면, 교황과 달라이라마, 로자와 여행을 하던 파올로의 관념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파올로는 가톨릭을 가정에서 태어나, 계속 가톨릭을 믿는게 당연한 삶이었다. 심지어 사촌이 교황이 되었고, 그 사촌을 따라 본인은 교황의 수석 보좌관이 되었다. 타인이 보면 누가봐도 성공한 가톨릭교도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본인이 믿어 의심치 않던 종교의 모순을 조금씩 깨닫고, 그 속에서 ‘왜?’을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시기, 질투어린 시선이나, 교황의 측근이라는 부러움을 샀던 그가, 난민에게 쏟아지는 무차별적인 혐오를 받기 시작했다. 



이 여행을 시작한건 분명 교황이지만, 이 여행에서 제일 큰 깨달음을 얻은 건 파올로,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 모두일것이다.



“내 생각에는 젊은이들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네. 그들은 위선을 기가 막히게 간파하지. 심지어 교회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가난한 계층에 대해 계속 어쩌고저쩌고 떠들면서 금색 제의를 입고, 금으로 만든 성배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난방비로 수백만 유로가 들며 전 세계 대다수 인구가  구경조차 한 적 없을만큼 으리으리한 대성당에서 의식을 거행하잖나.” p 198


물론 이 여행을 시작한 교황, 달라이라마도 파올로와는 다른 그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여행은 교황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 아니다. 달라이라마도 이유없이 그 여행에 동참한게 아니다. 알고보니 각각 다른 이유가 있었고, 또 그 이유가 서로 일치했다. 달랐으나, 같았고, 같았으나 다른 이유. 다만 이 책을 읽는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그 내용은 리뷰에서 전부 배제했다. 소설은.... 스포일러만큼 무서운 적이 없으니까!



확실한건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생각났다. 아마존 에디터가 왜 최고의 책이라 극찬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저 바라는게 있다면, 이 책이 영화화 되는 것!



교황과 달라이라마, 파올로가 바티칸을 몰래 탈출하는 장면이 영상화 된다면 긴박한 추리극이 펼쳐진것처럼 쫄깃할 것이다. 그들이 재해현장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과, 여행길에 만난 매춘부와 식사를 하는 장면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부셔줄것이다. 



와, 뭐라고해야할까. 추리나 스릴러가 아닌, 일반 문학을 읽은 것도 오랜만이지만, 그 와중에 서양권 문학을 읽은건 더더욱 오랜만인데, 이렇게 일반 문학을 감명깊게 읽은 건, 보자.......... 내 생에 처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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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없이 메이저 없다 - 풀꽃 시인이 세상에 보내는 편지 아우름 50
나태주 지음 / 샘터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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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시인 나태주. 시와는 거리가 먼 나지만 유퀴즈에서 나태주 시인이 출연한 모습을 보니, 한 번은 이 분의 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시집을 통채로 읽어보기엔, 아무래도 시를 음미할 줄 모르다보니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에나, 나태주 시인님의 에세이가 나왔다. 이 에세이 안에는 나태주 시인님의 시도 곳곳에 들어있어서, 시를 읽어보고 싶지만, 시집을 통채로 읽기에는 조금 부담이 느껴지는 시 초보자에게도 딱 좋은 구성인듯 싶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냥 에세이가 아니다.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단 하나의 주제가, 에세이 전체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풀꽃 시인이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20대에게, 30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에세이로 엮어서 내곤 한다. 하지만 그런 에세이 중에서 진정 가슴에 남는, 우리를 위로하고, 위안을 주고, 격려를 해주는 책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대부분의 책이 젊은 세대가 왜 힘들고 아픈지, 그 현실은 직시하지 않은채, 그저 다 커가는 과정이다, 성장통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한다, 힘내라,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라, 등등등. 누구나 할 수 있는 입 바른 이야기만 나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태주 시인이 쓴 이 에세이는 그런 에세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뭐라고 해야할까? 모든 글에서 진정한 ‘어른’의 위로가 느껴진다.



난 지금까지 본인이 어른이라고 대세우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 속에 진짜 ‘어른’은 없었다. 꼰대들만 있었을뿐. 어쩌면 진정한 어른은 내 꿈속에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주변에는 본인이 어른임을 내세우는, 나이만 든채 미성숙한 사람들만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난 나태주 시인은, 내가 꿈속에서 그리던 진정한 ‘어른’ 이었다.



그는 내가, 우리들이, 수 많은 젊은 세대들이 어떤 현실에 힘들어하고, 어떤 현실에 아파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현실이 되어버린 걸 같이 마음아파하고, 어른으로써 이런 현실을 만들게 되버린 것을 미안해한다. 하지만 이미 이런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더라도 이런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그는 진심을 다해 한 마디 한마디를 써 내려갔다. 거기다 모든 문장들이 딱딱하지도 않고, 가르치려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 수록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럴까? 같은 말이라도 나태주 시인이 하는 말에는 설득력이 있고,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 나태주 시인의 글을 읽으면 왠지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여진다.



나를 키운 것은 마이너입니다. 결핍입니다. 부족함입니다. 실패가 나를 키웠고 마이너 요인들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해 주었습니다. 그 무엇도 좋은 것, 반반한 것, 자신 있는 것, 내세울 만한 것, 자랑스러운 것이 못 되었지만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p 029


우리 부모님께선 나를 키울 때 적어도 지금까지 경제적인 문제로 강하게 제지를 하거나, 밥을 굶기거나 하신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걸 응원하면 응원하셨지, 경제적인 문제로 반대를 하신적도 없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 부모님은 항상 밖에 나가 힘들게 일을 하시며, 돈을 벌어야 했지만.



오히려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들어서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금수저, 흙수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흔히 말하는 금수저에 대한 내용을 보다보니, 그들의 생활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솔직히 현타도 많이 왔다. 우리는 아등바등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먹고 싶은거 덜 먹고, 사고 싶은거 덜 사서 학자금을 내고,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어떻게든 대출 받아서 내 명의로 된 집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데 금수저라 불리는 그들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금수저라 불리는 그들은 언제나 편하게 남이 벌어오는 돈을 쓰는 편에 속했고(예컨대 대기업 자제들), 지위가 높은 부모님 파워로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돈이 많은 부모님 덕택에 대출 1도 없이 본인 명의 집을 사는건 아주 쉬운일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를 깨달았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TV속에서 금수저들이 나올때마다 언제나 그랬다.



“나를 키운 것은 마이너입니다. 결핍입니다. 부족함입니다.”



하지만 위 문장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분명 나는 그들 입장에서 보면 흙수저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과 달리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채우기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왔다. 실패를 마주해도, 어떻게든 일어설 수 있었고, 그 실패를 양분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민폐끼치지 않고, 내 스스로 앞가림을 하는 내 삶. 항상 부족했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 아닐까?  



내가 금수저들에게 느꼈던 박탈감은 그야말로 내 감정 낭비였다는 것을, 난 이미 내 스스로 부족함을 잘 채워가며,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공은 꼭 외형적으로 보아 그럴듯한 성취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타인의 평가나 인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긍정과 인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은 또 만족감과 행복감과 통합니다. 만족과 행복이 없는 성공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습니다. p 049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내 삶이 내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떵떵거릴만한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말하는 유망 직종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내 삶에 만족하고, 내 삶이 충분이 행복하니까. 어찌되었던 퇴근하면 쉴 수 있는 포근한 집이 있고, 그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웃으며 밥을 먹을 수 있다. 



성공에 대한 관점을 조금 바꾸니, 내 삶도 충분히 성공한 삶이란걸,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재물을 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how’ 보다는 ‘무엇 what’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란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여기서 편법이 생기고 지름길이 생기고 정직하지 못한 삶이 있었습니다. 불법만 아니면 불의한 일이라도 괜찮다는 참 나쁜 인식들이 싹트게 된 것이지요. p 063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물을 때도 너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묻지 말고 너 커서 어떻게 살래, 하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 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도 ‘무엇 what’에서 ‘어떻게 how’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보다 더 가지런해지고 덜 고달파지고 덜 공소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p 064



내가 그동안 돈이 많아야, 혹은 ‘사’짜 돌림의 전문 직종을 가져야 성공한거라고 생각했던 건,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조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해야한다고, 서울 4년제에 들어가기 위해선 무조건 공부를 해야한다고, 학교에서 무수히 들어왔던 이야기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기, 횡령, 갑질 등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자. 대부분 내가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성공’의 기준에 부합한 사람들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분명 그들은 내가 되고 싶었던 ‘성공’한 사람들이고, 사회적으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인데, 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한번에 받는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니 나태주 시인의 말을 다시 곱씹게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물을 때도 너 커서 무엇(what)이 될래, 하고 묻지 말고 너 커서 어떻게(how) 살래, 하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부탁하고 넘어갑시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생을 포기하지 안겠다는 말이 그말입니다. 인생은 의외로 길고 먼 길입니다. 아름답고 좋을 때도 있습니다. 현재의 처지가 힘들다고 처음부터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인생한테 미안한 일이고 죄짓는 일입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한 발자국씩 노력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라고만 말하고 싶어요. 



어쨌든 함께 갑시다. 가는 데 까지는 가봅시다. 그러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나이 든 사람의 말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p 103



요 근래 죽음과 가까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에세이를 여러 차례 읽었다. 그 책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죽음이 있는데, 다름 아닌 스스로를 포기하는 죽음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힘든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난다. 그만큼 세상에 절망만 가득해서일까 싶기도 하고, 내가 사는 이 나라는 정말 희망이 없는걸까 싶기도 해서 서글퍼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쯤은 웃을 날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 날을 믿고 기다리면서 버티다보면 진짜 한번 쯤은 웃을 날이 오지 않을까? ‘아, 그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날이 하루 쯤은 있지 않을까?



“어쨌든 함께 갑시다. 가는 데 까지는 가봅시다. 그러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나이 든 사람의 말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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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태실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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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는 조선사에 대한 책이 정말 많다. 정말 인터넷 서점에 ‘조선’이라는 두 단어만 쳐도, 정말 무수하게 많은 역사책들이 줄줄이 나온다. 나 역시도 조선사에 대한 책은 꽤나 많이 읽었던 터라, 언젠가부터는 조선사에 대한 책을 읽을 땐 특정한 주제가 있는 책만 읽었다. 예컨데 조선시대에 기록된 동물들 이야기나, 혹은 조선시대의 여성들, 혹은 조선 왕릉이나 백성들의 시대상 뭐 이런거? 내 다름대로는 조선에 관한 왠만한 주제에 대해선 책을 다 읽어봤고, 더이상 궁금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은 제목에서도 보다시피 조선왕실의 ‘태실’을 주제로 한 책이다. 태실이라…. 내가 조선왕실의 태실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었나? 아니, 그전에 수 많은 답사를 하면서, 많은 무덤들을 찾아다녔으면서, 정작 태실을 찾아가 본적은 있나? 단 한번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묻히는 곳이 무덤이라면, 사람이 태어났을때, 그 태를 묻는 곳이 태실인데. 난 그 태실을 문화재로써도, 답사지로써도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왕릉/원/묘처럼 태실역시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충분할진데, 왜 나는 단 한번도 태실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었을까. 



그래서 이 책이 나한텐 꽤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읽어내린 건 안비밀.



조선왕실의 태실은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달랐다. 크게 차기 왕이 될 신분인지와 왕비 혹은 후궁의 소생인지에 따라 태실의 규모는 달리 정해졌는데, 이는 『태봉등록』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태실이라고 다 같은 태실이 아닌 것이다. 태실의 규모는 1등급지와 2등급지, 3등급지로 구분된다. 1등급지의 경우 왕의 태실로, 가봉된 태실을 의미한다. 다만 세자나 원자처럼 향후 왕으로 즉위할 신분이라면 태실을 조성할 때부터 태실의 가봉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선 초에는 왕비 태실이 조성되기도 했고, 정조 때는 사도세자의 태실이 가봉된 사례가 있다. 특히 세자의 신분으로 태실이 가봉된 사도세자 태실의 사례는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되며,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조치였다. p 018


조선왕실에서 사람이 죽으면 신분에 따라 무덤양식이 달랐다. 왕/왕비가 죽으면 왕릉(영릉, 광릉 등), 세자/세자비/아들이 왕이된 후궁이 죽으면 원(효창원, 수경원 등), 그 외는 묘(연산군묘, 광해군묘 등)으로 나뉜다. 뭐 살아서도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달랐으니, 죽어서도 대우가 다른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이거 참.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다른건 태어나면서부터 였다. 어느 위치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태어난 사람의 태가 묻힐 땅이 달랐고, 조성형태가 달랐다. 이거 참.... 신분제 사회 어디 안가나 싶다.



아니, 그전에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조성하는데다 태실까지 조성했으니, 우리나라 산 곳곳에 빈 자리가 얼마나 될까? 이쯤되면 우리나라 산 곳곳은 무덤과 태실로 가득가득 차있을 것만 같은데. 그리고...조선의 백성들은 왕실 사람들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있어서 땅을 빼앗기고, 부역을 하고 등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런 백성들의 고충과 부담이 무덤 뿐만 아니라 태실 조성할때도 있었을거라 생각을 하니, 참... 씁쓸하다.



하지만, 역시 왕조사회에 백성들의 힘든 삶은 어쩔 수 없으니...... 잠시 잊고, 다시 태실의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태실에 대해 제대로 알아본적이 없다보니, 태실을 조성하는 과정이나, 태실을 구성하는 모든 석물들이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우선 아기가 탄생하면 태를 수습한 뒤 길한 방향에 두었다. 이후 3일째가 되는 날을 기다려 태를 물로 100번을 씻고, 향온주로 다시 태를 깨끗하게 씻었다. 태는 미리 준비된 태항아리중 내항아리에 동전과 함꼐 넣고, 입구를 봉인했다. 이어 내항아리를 외항아리에 넣고, 비어있는 공간을 솜으로 채웠다. 이 과정까지 마치면 태항아리의 입구를 밀봉하게 되는데 이때 감당을 사용했다. 또한 태항아리에 있는 4개의 고리에 붉은색 끈을 묶고 홍패를 달게 된다. 홍패의 전면에는 태주의 생년월일과 생모를 적고, 후면에는 담당내관과 의관의 이름을 적었다. p 023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저렇게 잘 갖춰진 왕의 태실을 마주한다면 “뭐지? 승탑인가?” 하는 착각에 빠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정도로 태실에 대한 지식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 하…. 이쯤되니 서점에서 만났던 수많은 조선사 책들이 또 떠오르고, 왜 그 책들은 거의 비슷한 주제만 있는건가 싶고, 왜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분야에 대한 책은 별로 없는건가 싶고. 그러다보니 많은 정보가 없는 조선왕실의 태실에 대해 연구를 한, 이 책의 저자이신 김희태님이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러웠다. 



태실의 가봉이 이루어질 경우 전례에 따라 해당 지역은 승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태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은 미묘했다. 즉 태실이 들어오면서 지역의 중요성은 커졌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태실 공사에 따른 부역과 태실 조성 이후 금표의 설정에 따른 재산권의 침해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p 045



당시 태실의 조성과 가봉은 국책사업에 해당했기에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고, 가봉에 쓸 석재의 이동 과정에서 논과 밭이 훼손되는 사례가 있었다. p 078



역시나, 태실을 조성함에 있어서 백성들의 고충과 부담이 정말 심각했나보다. 금표까지 설정한것을 보면 말이다. 금표 내에서는 벌목, 채석, 방목, 개간 등 일체의 행위들이 금지되는데, 조선왕실의 자녀들이 한둘이 아닐테니. 조선의 산이란 산에는 금표가 얼마나 많았을까? 이 금표들이, 가뜩이나 삶이 힘들었을 백성들의 삶을 더더욱 옥죄어갔을 생각을 하니. 휴.



태실의 조성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부담이 얼마나 심했으면, 조선 왕들이 손수 자신의 태실조성을 축소하기까지 했을까? 쿠테타로 왕이 된 세조는 자신의 태실을 이봉하지 않고, 별도의 가봉비만 세웠다고 한다. 후궁의 아들이었던 영조는 자신의 가봉 태실을 조성할 때, 백성들의 고충을 생각하여 창덕궁 후원에 태실을 조성했고, 심지어 석물 크기까지 줄이라고 한다.



신분제가 당연한 왕조사회에서 백성들의 삶이란. 그들에겐 자녀가 태어나도 태실은 커녕,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해뜰때 나가서 해질때 돌아오는게 일상이었을텐데. 물론 그 당시의 그들에겐 왕실의 태실 조성을 위해 부역을 하는게 당연한거고, 땅을 빼앗기는게 당연한거라지만. 언제나 느끼지만 조선이든, 그 어느 왕조시대든 민초들의 삶을 생각하면 참 애달프고 그렇다.


다시 태실로 돌아와서! 저자가 답사한 많은 수의 태실들의 상황은 흙이 파헤치고, 비석이 깨져있고, 태함만 일부 노출되거나, 심지어는 그 흔적도 찾을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마디로 문화재로써 태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이야기. 간혹 지자체 문화재로 지정되어있거나, 지자체에서 신경써서 태실을 복원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소수의 일일뿐. 대부분의 태실은 그 흔적조차도 찾기가 어려운게 현실이다. 



왜일까? 조선왕실의 무덤들은 나름대로 잘 관리가 되고 있는데 말이다. 그 시작은 백여년 전,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8년부터 시작된 태실의 이봉 과정에서 경성 수창동 이왕직 봉상시에 봉안실을 신축해 임시로 봉안했고, 1930년 4월 15일~17일에 서삼릉으로 옮겨 봉안했다. (생략) 풍수지시를 기반으로 길지에 태실을 조성했던 맥락을 고려할 때 이는 사실상 훼손에 가까운 만행이었다. 이처럼 태실이 이봉된 뒤 기존 태실지의 상당지는 민간에 팔려나가게 된다. 이 때문에 태실지에 분묘가 들어서게 되고, 태실 관련 석물은 묻히거나 유실되는 등 제자리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책에서 소개할 상당수의 태실이 이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p 051



일제는 조선왕실의 태실들을 대부분 파내어, 서삼릉으로 한데 모았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은 태실지는 민간에게 팔려나갔다. 뭐, 이렇게 일제만 탓하면 참 좋겠는데, 조선 자체의 관리 부실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1625년에 조성된 태실임에도 1872년에 제작된 「전라좌도 광주지도」에 ‘고려왕자태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247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용성대군(인조子)이 아닌 고려 왕자의 태봉으로 표기된 점은 태실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p 198



결국 조선 왕실의 태실지가 지금처럼 관리되지 않고 파괴되는 그 원인은 일제에도 있고, 조선왕실에도 있고 뭐 그렇다는게 내 생각이랄까. 확실한건 일제의 무분별한 태실 이봉 과정과 태실지 판매, 조선왕실의 관리부실이 한데 모여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태종의 태실은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산 65번지로, 현재 태실지에는 분묘가 들어서 있어 태실과 관련한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과거에는 분묘 주변으로 태실 관련 석물이 방치된 채 흩어져 있었으나 지난 2015년 성주군청에서 태실 석물을 수습해 현재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p 061



법림산에 위치한 단종 태실지의 경우 태실지에 분묘가 들어선 상황으로, 지난 2012년 지표 조사 결과 노출된 우전석 1매와 묘의 석재로 활용된 상석 2매, 전석 2매등이 확인된 바 있다. p 075



현재 傳단종 태실(인성대군 태실)은 제자리를 잃어버린 채 태실 관련 석물이 주변으로 밀려난 것을 볼 수 있다. 태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묘의 주인공은 최연국으로, 사천의 대표적인 친일파다. p 076



현재 현종 태실과 관련된 유일한 흔적은 아기비다. 발견 경위는 태봉산에 태양광 발전 시설 관련 공사를 진행하던 중 땅에 묻혀있던 아기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예산문화원으로 옮겨졌다. p 105



『조선의 태실2』를 보면 태봉에 있던 태실비가 1961년 7월 말에 당시 면장이던 신상현 씨에 의해 천당리 면사무소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후 명안공주(현종女) 태실비는 면사무소의 연못을 메울 때 메몰되었다고 하며, 현재 명혜공주(현종女) 태실비는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옮겨져있다. p 205


지금까지 관리가 부실했기에, 지자체가 태실지가 있어도 몰랐다고 한다면, 그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당대였던 조선에서조차도 관리부실은 있어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태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이 직접 두 발로 뛰어서 태실의 위치를 찾고, 태주가 누군지까지 고증하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개인이 이정도까지 했는데, 지자체가 이를 방관하고 있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비지정 문화재라 할지언정 태실지도 엄연한 우리의 문화재이며, 이러한 문화재의 보호와 관리는 당연히 지자체에 있다. 문화재가 민간 소유지에 있다면, 그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것도 당연히 지자체가 할일이다. 이런것도 안하면서, 자리를 보존하는 공무원들이라면, 없느니만 못하지.



지금까지 관리 부실의 문화재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수 많은 태실지가 관리 부실로 버려져 있다는 사실에 정말 쌓여있던 분노가 터져나왔다. 오죽하면 조선왕실의 태실지에 친일파가 무덤을 쓰냐고. 하. 정말, 우리나라는 바로잡아야하는게 많아도 너무 많다.



흠흠, 다시 오롯이 태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경상도읍지』 「성주목읍지」에는 태종 태실의 수호사찰인 태봉사가 조곡산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때도 이미 터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p 063



『일성록』에는 명봉사의 승려 봉관이 명봉사가 태실(문종과 장조)을 수호하는 사찰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p 069



인종 태실의 수호사찰인 은해사는 809년 혜철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최초 해안사로 불렸다. p 092


조선왕실의 태실은 각각 수호사찰이 있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조선 왕릉에는 각각의 원찰이 있다는건 알았는데, 태실에도 수호사찰이 있었다니. 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정도로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뭐랄까, 그동안 공부를 헛했구나 싶고, 그렇게 사찰을 자주 다녔는데, 나는 대체 무엇을 본건가 싶고. 하 ㅠㅠㅠ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다닌 다닌 사찰들 중 일부는 내가 모르는 태실의 수호사찰일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도달하니, 자괴감이.. 대체 난 뭘 보고, 뭘 배운거니....ㅠㅠ



지금이라도 이런 내용을 알게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영조때부터 태실을 창덕궁 후원에 묻는 조치가 이루어졌고, 이는 고종 때까지 계속 이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태봉등록』을 보면 영조는 자신의 가봉 태실을 조성할 때 전례에 얽매이지 않고, 태실의 규격을 간소하게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는 무분별한 태실의 조성을 억제해 백성들의 고충을 경감시키고자 했던 영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p 232



이러한 영조의 의지는 손자인 정조 역시 계승했는데, 이는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의 태를 주합루 북쪽 돌계단에 묻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 정조 때부터 외부에 아기씨 태실을 조성하는 사례는 줄어드는데, 주로 세자와 원자 등 왕위 계승과 관련이 있는 왕자의 태실만 외부에 조성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고종의 자녀인 영친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왕자, 고종 제9왕자의 태실 등이 창덕궁 후원에 조성될 수 있었다. p 233



앞에서 우리나라 산 곳곳에 무덤과 태실로 가득 차고, 백성들의 고충과 부담에 대해 푸념을 했는데, 세상에나. 영조도 같은 생각을 했었나보다. 영조가 자신의 태실 조성을 축소한 건, 책 앞부분에서도 읽었던 부분인데, 뒤로 가니 더 자세한 내용이 나왔다. 태실을 무려 궁궐 내에 조성하기 시작하다니. 확실히 태실을 궁궐 내에 조성하면, 백성들의 고충도 확실히 덜할테니 말이다. 심지어 영조의 뜻을 정조도 잇고, 고종도 잇고. 오. 고종은 그렇게나 토목공사를 진행하며 재정을 축냈는데, 그래도 태실 조성 만큼은 영조의 의지를 이은걸 보니. 그래도 생각이란 걸 좀 했나보다.



물론 이렇게 창덕궁에 조성되었던 태실은, 기록에 비추어 장소를 추정만 할뿐 정확한 장소는 비정할 수 없다. 이들의 태실이 일제에 의해 서삼릉으로 이봉된게 제일 큰 이유라면 이유다. 이후 창덕궁이 일제에 의해 농락당했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안타까운 점은 태실 유적의 상당수가 비지정 문화재로,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다보니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이다. - 맺음말 中


이 책의 저자인 희태님은 맺음말에 위와 같이 썼다. 상당수가 비지정 문화재이고, 실태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 태실이 이렇게 된 제일 큰 이유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음에 있을 것이다. 비단 태실의 문제만이 아닐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문화재들이 사람들의 관심밖에서 훼손되고, 또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가 사라질때마다, 한 덩이의 역사도 같이 사라진다. 



그러니, 제발, 이렇게 훼손되고 방치된 태실같은 비지정 문화재들이... 잊혀지고 사라지기전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더 잃어버리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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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꽃 이야기 - 원예학자와 떠나는 역사 속 꽃 여행, 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김규원 지음 / 한티재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가드닝 책을 하나둘 읽다보니, 슬슬 식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키우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가 아니라, 내가 보고 있는 이 식물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라던가, 이 꽃의 꽃말은 어디서 유래된걸까? 뭐 이런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근데 또 곰곰히 생각해보니, 세상에 알려진 꽃말들의 유래는 대게 서양이었다. 예컨데 수선화의 꽃말인 ‘자기애’는 그리스신화의 나르키소스에서 유래된 꽃말이고, 물망초의 꽃말 ‘나를 잊지 마세요’는 헝가리의 다뉴브 전설(루돌프와 베르타)에서 유래되었다. 아네모네의 꽃말도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고, 히아신스도 그리스 신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꽃말은 전부 서양에서 유래된 이야기다.




나는 우리 역사속에 등장했던 식물들, 꽃과 나무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데 !!!! 왜 때문에, 죄다, 모조리, 전부 !!!! 과반 이상은 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요, 나머지는 그외 서양 전설이란 말인가. 정녕 우리 역사 속 식물 이야기는 없는걸까? 하고 슬퍼하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냉큼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 초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꽃 문화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보니, 대부분이 외국의 신화, 설화, 꽃말 등이었다. 이것은 외국의 꽃 문화가 더 좋아서인가, 우리의 꽃 문화가 없어서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꽃 문화는 어떤 모습과 역사를 가졌을까.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꽃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꽃을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특히 우리 고대 사회의 꽃 문화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p 009


원예학자인 저자조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저자는 많은 꽃말들이 전부 외국에서 유래된 이야기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고. 그래서 저자는 우리 역사속의 식물들 이야기를 발굴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동부여에서 물의 신으로 불리는 하백에게는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이라고 하는 세 딸이 있었다. 큰언니 이름으로 쓰인 버들꽃은 노란색으로 이른 봄에 피고, 둘째 이름으로 쓰인 원추리꽃은 주황빛이 도는 노란색으로 초 여름에 핀다. 막내 이름인 갈대꽃은 은색으로 가을에 핀다. 세 자매의 이름은 신기하게도 각 계절을 대표하는 우리나라 토종의 아름다운 꽃이기도 하다. p 031


고구려의 초대왕 주몽. 우리가 알고있는 주몽의 부모는 하늘신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다. 지금까지는 유화라는 이름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와보니, 유화라는 이름의 한자가 꽃이름이다. 버들 유(柳), 꽃 화(花). 한마디로 버들꽃이다. 유화의 언니들 훤화, 위화도 한자를 풀이해보면 꽃 이름이다. 원추리 훤(萱), 꽃 화(花)· 갈대 위(葦), 꽃 화(花). 즉 하백의 딸, 세자매의 이름 유화·훤화·위화는 각각 버들꽃, 원추리꽃, 갈대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를 비추어볼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수 많은 꽃과 나무들이 우리 역사속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화제를 남긴 여인들은 모두 귀하고 특별했다. 왕비이거나 공주이거나 왕의 총애를 받거나 신라 최고의 미인이었다. 이 여인들 이름은 가상 식물이나 특정 식물의 이름, 또는 그 식물의 꽃 이름과 같은 경우가 많았다. 특정 식물의 이름을 그대로 쓰거나, 꽃 화(花)자를 넣어 이름을 지은 것이다. p 048



역사속 등장인물들, 특히 여성들의 이름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주몽의 엄마인 유화를 비롯하여,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꽃과 나무의 이름을 가져다 쓴 경우가 많다. 고구려 유리명왕 부인 송씨부인의 ‘송’은 소나무 송(松)을 썼으며, 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부인 계화는 계수나무 계(桂), 꽃 화(花)를 써서 계수나무 꽃, 즉 ‘금목서’라는 이름을 가졌다. 진지왕과 사이에서 비형량을 낳은 도화부인 역시 복숭아 도(桃), 꽃 화(花)를 써서 ‘복사꽃’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우리에게는 진평왕의 셋째딸이자, 백제의 무왕 부인(서동부인)으로 알려진 선화공주는 착할 선(善), 꽃 화(花) 라는 ‘착한꽃’ 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외에도 찾을라치면, 식물의 이름을 쓴 역사속 인물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우리가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 역사속에는 우리가 생각치 못했던 식물의 이름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심지어는 식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도 곳곳에서 등장한다.


박/석/김씨가 돌아가며 왕을 했던 신라 초기. 첫 ‘김’씨 왕조를 열게 한 왕이 바로 미추왕이다(물론 미추왕 사후 다시 석씨가 왕이 되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미추왕의 아들인 내물왕을 시작으로 신라의 왕은 ‘김’씨가 대물림한다). 이 미추왕이 묻혀있는 왕릉이, 경주 대릉원에 있는 ‘미추왕릉’이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신라 왕릉의 대다수는 추정의 형식으로, ‘ㅇㅇ왕릉’이라고 명명되었지만 미추왕릉은 예외다. 그 옛날부터 계속 이 무덤은 미추왕릉이라고 구전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왕릉 주인이 구전되어 내려온 이유 중 하나가, 다름아닌 미추왕 호국신화에 기인한다


신라 13대 미추왕의 무덤은 대릉 또는 죽장릉(竹長:긴 대나무)이라고 불렀다. 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이 공격해왔는데 신라는 맞설 힘이 부족했다. 그때 알수 없는 병사들이 나타나서 신라의 군사를 도왔는데 모두 귀에 댓잎을 꽃고 있었다. 적이 물러간 후에 그 죽엽군들은 사라졌고, 댓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있었다. 이때부터 이 능을 댓잎이 쌓여 있다 하여 죽현릉(竹現:대나무가 나타난)이라고 불렀다. p 078


이 호국 신화에 등장하는 미추왕의 병사들은 귀에 대나무잎을 꽂았다고 하는데, 이 신화로 인해 미추왕릉은 ‘죽장릉/죽현릉’ 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이와 비슷한 시기 고구려에서도 식물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심지어 이 일화에서 나온  한 단어는, 지금까지도 계속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바로 ‘쑥대밭’에 관한 일화다.


고구려 동천왕 20년에 왕이 중국을 적대시하자 신하 득례는 “장차 이 땅에 봉호(쑥대)가 날 것”이라 말하고 굶어 죽었다. 쑥은 우리가 즐겨 먹는 계절 음식으로 땅속줄기에서는 새싹이 많이 나고 땅 위에 올라온 싹은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쑥줄기, 곧 쑥대가 나면 다른 농작물이 자랄 수 없는 쓸모 없는 밭이 되는데, 이런 밭을 쑥대밭이라고 한다. p 104


우리는 삼국지에서 비롯된 사자성어(고사성어)는 많이 알고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쑥대밭’ 처럼 우리 역사에서 비롯된 단어는 잘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향유하는 동안, 정작 우리 문화를 등한시한 것이다. 꽃말도 당연히 서양의 신화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굴 탓할까. 그저 이런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풀이나 나무 등을 용기에 심어서 기르는 것을 분화나 용기재배라고 한다. 용기재배는 절화와 함꼐 화훼산업과 생활원예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직사각형이나 원형 또는 연꽃 모양의 돌 용기에서 연꽃과 창포를 수경재배하였다. 절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떄 원형이나 직사각형의 석조와 석련지에 연꽃을 심어서 절 주변을 장식하였고, 백제 관사에서는 원형의 돌 용기에 창포를 심어 건물 주변을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p 148


신라 사람들의 허리띠에는 정사각형의 작은 용기에 심겨있는 소나무 그림이 있다. 이로보아 삼국시대에는 소나무도 용기재배를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p 153


분재 또는 화분등의 용기에서 식물을 키우는 문화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속에서도 이런 분재나 용기로 식물을 키웠다는 사실은 유물이나, 옛 기록에서 뜨문뜨문 나타난다. 심지어 고려시대에 간행된 문집이나, 병풍 같은 문화재를 보면 당대에 소나무나 매화나무등의 분재가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흠흠흠, 다시 역사속의 신기한 식물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과거에 영주 여행시, 부석사에서 애지중지 보호되고 있는 한 나무를 보았다. ‘선비화’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고 본인의 지팡이를 땅에 푹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거 참, 뭐라고해야할까. 식물의 ‘ㅅ’도 보르던 식초보시철, 나는 이 이야기를 그저 전설에 치부했다.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인도로 떠났다. 처마 밑에 지팡이를 꽂으면서, “내가 떠나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다. 그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라”고 하였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 p 180


식집사가 된 지금, 나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전설이 아닌 사실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무 번식 기법 중에는 삽목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꺾꽂이, 물꽂이 기타등이 있는데, 나 역시도 매화나무가지를 잘라서 물꽂이를 해서 성공했다. 물론 이렇게 삽목을 할 때는, 환경등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의상의 지팡이는 실제로 갈잎 떨기나무인 골담초 줄기이며, 나무 줄기를 자른 시기는 눈이 자발적으로 휴면을 하는 가을에서 강제휴면을 하는 늦겨울 사이이고, 살아 있는 눈이 붙어 있는 지팡이를 꽂은 시기는 이른 봄 지팡이에서 싹이 나기 전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팡이를 꽂은 장소는 처마 밑이라 하였으니 직사광선이 없는 반그늘로, 상대습도가 높고, 토양 수분이 충분하고, 토질도 적당하여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으리라 본다. p  182


결과적으로 의상대사가 쓰던 지팡이가 막 추위가 와서 잎눈이 휴면하는 시기에 나무에서 뚝 끊어서 쓰던 지팡이였다고 가정하면, 그 지팡이를 얼마 안 쓰고 봄이 올 즈음에 때마침 직광이 들지 않던 처마 밑 흙에 푹 꽂았기 때문에, 이 지팡이는 흙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의상대사가 삽목의 원리를 알고, 하필 그런 환경에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상대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삽목을 시도해서 성공한 사람으로 기록에 남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따지면, 부석사에 있는 저 나무는 진짜로 의상대사가 쓰던 지팡이가 된다. 나같이 아둔한 중생은 그것도 모르고, 의상대사를 의심하다니, 천벌받을 뻔 했다. 아휴..


의상대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삽목을 성공한 사람이라면, 위라나라 최로의 원예학자로는 이두문자로 유명한 신라의 설총을 꼽을 수 있다. 그 근거로는 설총이 지은 설화 「화왕계」를 들 수 있다.


네이버에서 검색한 「화왕계」 일부를 발췌했다.


"이 몸은 설백(雪白)의 모래사장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리면 목욕하여 몸의 먼지를 씻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 유유자적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름은 장미(薔薇)라 하옵니다. 

전하의 높으신 덕을 듣자옵고, 

꽃다운 침소에 그윽한 향기를 더하여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전하께서 이 몸을 받아주실는지요?"



자기를 장미로 소개한 이 꽃은, 우리가 아는 장미가 아니라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당화로 추청한다.


설총은 이두를 집대성한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열왕 때 원효법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화왕계」에는 모란, 장미(해당화), 할미꽃의 생태, 형태, 생장습성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점이 놀랍다. 이렇게 보면, 설총은 식물에 대한 이해와 관찰력이 뛰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학자 또는 식물학자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p 197


모란, 해당화, 할미꽃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식물의 습성을 자세히 적어가며 설화를 지어, 신문왕에게 올렸던 설총. 그는 유학자이기 이전에 식물학자였다.


이토록 우리 역사에는 식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이 있었다. 왜 우리 이야기에는 눈을 감고, 외국의 이야기에만 귀를 쫑긋했었는지. 식집사가 된 지금, 이제라도 우리 역사 속 식물 이야기를 인지하고, 주의깊게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식물 책은 뭘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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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7-14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설마 지팡이가 나무가 되겠어? 했는데 실제로 묘목을 보니 진짜 지팡이같이 생겼더라고요 ㅎㅎㅎ 이 책 정말 재미있겠어요 !!! 저는 세계사를 바꾼 17가지 꽃이야기 지금 읽고 있어요 ㅎㅎ

피로 2021-07-16 14:58   좋아요 1 | URL
오옷 재밌어보이는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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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읽은 책들을 떠올려보니, 묘하게 유퀴즈에 출연한 저자들의 책이 많다. 이거참, 의도한건 아닌데. 허허허.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이 책도 유퀴즈에 출연했던, 특수청소부 김완님이 쓰신 (자전적인?) 에세이다. 이러다가 내가 책을 선별하는 조건에 ‘유퀴즈’까지 포함될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인 뭐지...........? 




이 책의 제목은 특수청소부인 저자의 일을 그대로 보여준다. 제목 자체가 「죽은 자의 집 청소」이기 때문이다. 유퀴즈에서 저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 신기하긴 했다.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다 저자의 소개글을 보고 조금은 이해가 갔다. 



저자는 몇년 간 일본에 거주하며, 특수청소업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가 일본에 거주했을 때 동일본 대지진을 마주하고, 수 많은 죽음을 보았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일본은 우리와 달리, ‘죽음’에 대한 준비가 철저하다는 거다. 그 나라는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노년층이 증가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 가파르게 노년층이 증가하며 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로써는, 지금의 일본의 모습이 미래의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뭐, 그러한 이유로 일본은 고독사(특히 노년층의 고독사)에 대한 처리가 이미 시스템화 되어있고,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도 우리보다 일반화되어있으며, 디지털 장의사라던가, 의도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대처가 우리보다 앞서있다. 이렇게 죽음을 정리하는 일본의 모습을 수년간 보았던 저자가 한국에 돌아와서 택한 직업이 바로 죽은자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업이다. 그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에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죽음에 대한 처리를 하는 일본의 모습이 저자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자명하다.



건물 청소를 하는 이가 전하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다. 그 착한 여인은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사람이 되어 생을 마쳤다. 자신을 죽일 도구마저 끝내 분리해서 버린 그 착하고 바른 심성을 왜 자기 자신에겐 돌려주지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만은 친절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 바른 마음이 날카로운 바늘이자 강박이 되어 그녀를 부단히 찔러 온 것은 아닐까? p 027


저자가 청소를 하는 곳은 대게, 흔히들 말하는 호상은 아닌 곳이다. 뉴스에서 종종 보는 ‘고독사’ 하신 분들, 혹은 너무 힘들어서 홀로 생을 끊으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위 여성도 그랬다. 주위 사람들에겐 항상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던 사람이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착하지 못했던 사람. 남에게는 폐끼치기 싫어하는 그 사람은 본인 스스로를 죽이는 와중에도, 집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기를 죽이는 도구마저도 분리수거를 했다.



자기 집을 치울, 이름모를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도구마저 분리수거할 정도의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모진 마음을 품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쳐했던건지를 생각하면, 괜시리 마음이 씁쓸해진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때때로 부유한 자가 혼자 살다가 자살하는 일도 있지만, 자살을 고독사의 범주에 포함하는 문제는 세계적인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니 일단 논외로 하자. 고급 빌라나 호화주택에 고가의 세간을 남긴 채, 이른바 금은보화에 둘러싸인 채 뒤늦게 발견된 고독사는 본적이 없다. p 041



그가 살던 202호 현관문에는 ‘전기공급 제한 예정알림’이라는 굵은 고딕체의 제목이 붙은 노란딱지가 붙어 있다. 문구 전체가 인쇄된 다른 예고장과 달리 사인펜으로 직접 쓴 예정일자가 눈에 띈다. 아마도 악성 체납요금 문제를 직접 처리할 담당자가 배정되고, 그가 집까지 찾아와서 딱지를 붙이고 손수 날짜를 써놓고 간것이리라. 전기공급 중단 예정일과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 겹친다. p 046


이 챕터를 읽고 죽음에도 빈부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지금까지 뉴스에 보도된 고독사 관련 기사를 보면, 대부분이 가난한 이였다. 챙겨줄 사람 하나 없는,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소액으로 겨우 먹고 사는, 아픈 몸을 이끌고 폐지를 수거하러 다니시는 그런 분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는데, 찾아오는 방식에서조차도 빈부격차가 느껴진다는 사실이 치가떨렸다. 살아서도 돈때문에 힘들었는데, 죽으면서까지도 돈때문에 힘들어야한다니, 맨날 ‘지원’한다고 말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맞는건가?



우리나라에는 분명 홀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행정부처가 있는데,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까지 뉴스에 나온 사건들을 보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순환되고 있으니까. 일단 누가봐도 지원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인데, 지자체에선 이래서 안된다, 저래서 안된다, 뭔놈의 안된다고 하는 이유가 쌓이고 쌓였다. 이런 이유를 뚫고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 금액이 하도 소액이라서 집세, 각종 공과금 생각하면, 하루에 1끼를 먹는게 고작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본 뉴스 및 시사보도 방송에서는 그랬다. 



6월마다 돌아오는 6월 25일은 법적으로 지정된 한국전쟁 기념일이다. 법적으로 기념일을 지정할정도로,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는 크다. 이렇게 기념일로 지정한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받쳤던, 아직까지 생존한 국가유공자들이 우리 곁에 있다. 국가유공자기 때문에 당연히 나라에서 지원해줄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나라가  지급하는 유공자 연금은 진짜 쥐꼬리만해서 생활비는 커녕 병원치료비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국가유공자들의 연세를 생각했을때, 대부분이 건강이 좋지않은 노년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심지어 이 국가유공자 연금을 받고 있다고 해서, 다른 기초연금은 중복지급이 안된다고 하는게 바로 우리나라다. 과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쳤던 노인들에게도 이런 대우를 하는데, 이런 훈장조차 없는 그저 길에서 폐지를 추워야만 하루 한끼 꼬박 먹을 수 있는 노인들은 어떨까. 



죽음의 빈부격차를 만든건 결국 나라를 꾸려간다는 위정자들이다. 그 위정자들이 비정한 행정가들이고, 그들이 만든게 오늘날의 비정한도시다.



행정부처 직원들이 탁상행정만 하지않고, 두발로 뛰며 지원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집을 주기적으로, 아니 한번이라도 방문을 했다면? 국가유공자들의 삶을 한번이라도 두 눈으로 봤다면? 그들이 정말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사회가 이렇게까지 비정해지지는 않았을거다. 그랬다면 ‘전기공급 제한’을 알려주로 한전 사람이 집 앞을 찾아왔을때, 그 집앞에 우편물이 오랫동안 쌓여있는 것에 의문을 품고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의 빈부격차가 나타나야 사회가 변할까? 하긴, 아동학대 사건도 많은 아이들이 죽고나서야, 뒤늦게 이런저런 법안 만들기에 급급한 대한민국인데, 뭐 얼마나 더 바라겠는가. 겉으론 아닌척하면서 뒤로는 죽음의 빈부격차를 만든 나라, 참 씁쓸하다.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이나 메시지를 다시 읽어본다. 나쁜 시키, 나쁜 시키. 그래,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을 속였고, 그 바람에 당신의 계획을 아주 보기 좋게 망쳐놓았다. 스스로도 잘 모를 이야기를 남발했으며 당신이 자유로울 권리를 공권력을 이용해서 침해했다. 그런 사람을 나쁜시키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온당한 일일 것이다. 고백하건대, 당신의 전화번호를 내 휴대전화에 고이 저장해두었다. 당신이 나에게 또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도 내가 당신을 막기로 할지, 과연 또 한번 당신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탁하건대, 언젠가는 내가 당신의 자살을 막은 것을 용서해주면 좋겠다. 나는 그 순간 살아야했고, 당신을 살려야만 내가 계속 살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p 184



비정한 사회가 되면서 타인의 일에 개입하는 일이 극히 드물어진 지금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비정해진 사회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보인다. 저자처럼 죽으려하던 누군가를 살리고,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리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덕분에 비정하기만 한 사회에도 아주 조금이지만, 가슴을 따뜻하게하는 온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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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7-09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족음에도 빈부격차가 있다는 말 정말 공감합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가난한 죽음 ㅠㅠ 저도 참 맘 아프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피로 2021-07-14 07:50   좋아요 1 | URL
정말 저 구절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ㅜㅜ..

초딩 2021-08-06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1-08-06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