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태실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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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는 조선사에 대한 책이 정말 많다. 정말 인터넷 서점에 ‘조선’이라는 두 단어만 쳐도, 정말 무수하게 많은 역사책들이 줄줄이 나온다. 나 역시도 조선사에 대한 책은 꽤나 많이 읽었던 터라, 언젠가부터는 조선사에 대한 책을 읽을 땐 특정한 주제가 있는 책만 읽었다. 예컨데 조선시대에 기록된 동물들 이야기나, 혹은 조선시대의 여성들, 혹은 조선 왕릉이나 백성들의 시대상 뭐 이런거? 내 다름대로는 조선에 관한 왠만한 주제에 대해선 책을 다 읽어봤고, 더이상 궁금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은 제목에서도 보다시피 조선왕실의 ‘태실’을 주제로 한 책이다. 태실이라…. 내가 조선왕실의 태실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었나? 아니, 그전에 수 많은 답사를 하면서, 많은 무덤들을 찾아다녔으면서, 정작 태실을 찾아가 본적은 있나? 단 한번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묻히는 곳이 무덤이라면, 사람이 태어났을때, 그 태를 묻는 곳이 태실인데. 난 그 태실을 문화재로써도, 답사지로써도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왕릉/원/묘처럼 태실역시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충분할진데, 왜 나는 단 한번도 태실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었을까. 



그래서 이 책이 나한텐 꽤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읽어내린 건 안비밀.



조선왕실의 태실은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달랐다. 크게 차기 왕이 될 신분인지와 왕비 혹은 후궁의 소생인지에 따라 태실의 규모는 달리 정해졌는데, 이는 『태봉등록』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태실이라고 다 같은 태실이 아닌 것이다. 태실의 규모는 1등급지와 2등급지, 3등급지로 구분된다. 1등급지의 경우 왕의 태실로, 가봉된 태실을 의미한다. 다만 세자나 원자처럼 향후 왕으로 즉위할 신분이라면 태실을 조성할 때부터 태실의 가봉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선 초에는 왕비 태실이 조성되기도 했고, 정조 때는 사도세자의 태실이 가봉된 사례가 있다. 특히 세자의 신분으로 태실이 가봉된 사도세자 태실의 사례는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되며,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조치였다. p 018


조선왕실에서 사람이 죽으면 신분에 따라 무덤양식이 달랐다. 왕/왕비가 죽으면 왕릉(영릉, 광릉 등), 세자/세자비/아들이 왕이된 후궁이 죽으면 원(효창원, 수경원 등), 그 외는 묘(연산군묘, 광해군묘 등)으로 나뉜다. 뭐 살아서도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달랐으니, 죽어서도 대우가 다른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이거 참.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다른건 태어나면서부터 였다. 어느 위치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태어난 사람의 태가 묻힐 땅이 달랐고, 조성형태가 달랐다. 이거 참.... 신분제 사회 어디 안가나 싶다.



아니, 그전에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조성하는데다 태실까지 조성했으니, 우리나라 산 곳곳에 빈 자리가 얼마나 될까? 이쯤되면 우리나라 산 곳곳은 무덤과 태실로 가득가득 차있을 것만 같은데. 그리고...조선의 백성들은 왕실 사람들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있어서 땅을 빼앗기고, 부역을 하고 등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런 백성들의 고충과 부담이 무덤 뿐만 아니라 태실 조성할때도 있었을거라 생각을 하니, 참... 씁쓸하다.



하지만, 역시 왕조사회에 백성들의 힘든 삶은 어쩔 수 없으니...... 잠시 잊고, 다시 태실의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태실에 대해 제대로 알아본적이 없다보니, 태실을 조성하는 과정이나, 태실을 구성하는 모든 석물들이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우선 아기가 탄생하면 태를 수습한 뒤 길한 방향에 두었다. 이후 3일째가 되는 날을 기다려 태를 물로 100번을 씻고, 향온주로 다시 태를 깨끗하게 씻었다. 태는 미리 준비된 태항아리중 내항아리에 동전과 함꼐 넣고, 입구를 봉인했다. 이어 내항아리를 외항아리에 넣고, 비어있는 공간을 솜으로 채웠다. 이 과정까지 마치면 태항아리의 입구를 밀봉하게 되는데 이때 감당을 사용했다. 또한 태항아리에 있는 4개의 고리에 붉은색 끈을 묶고 홍패를 달게 된다. 홍패의 전면에는 태주의 생년월일과 생모를 적고, 후면에는 담당내관과 의관의 이름을 적었다. p 023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저렇게 잘 갖춰진 왕의 태실을 마주한다면 “뭐지? 승탑인가?” 하는 착각에 빠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정도로 태실에 대한 지식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 하…. 이쯤되니 서점에서 만났던 수많은 조선사 책들이 또 떠오르고, 왜 그 책들은 거의 비슷한 주제만 있는건가 싶고, 왜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분야에 대한 책은 별로 없는건가 싶고. 그러다보니 많은 정보가 없는 조선왕실의 태실에 대해 연구를 한, 이 책의 저자이신 김희태님이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러웠다. 



태실의 가봉이 이루어질 경우 전례에 따라 해당 지역은 승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태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은 미묘했다. 즉 태실이 들어오면서 지역의 중요성은 커졌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태실 공사에 따른 부역과 태실 조성 이후 금표의 설정에 따른 재산권의 침해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p 045



당시 태실의 조성과 가봉은 국책사업에 해당했기에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고, 가봉에 쓸 석재의 이동 과정에서 논과 밭이 훼손되는 사례가 있었다. p 078



역시나, 태실을 조성함에 있어서 백성들의 고충과 부담이 정말 심각했나보다. 금표까지 설정한것을 보면 말이다. 금표 내에서는 벌목, 채석, 방목, 개간 등 일체의 행위들이 금지되는데, 조선왕실의 자녀들이 한둘이 아닐테니. 조선의 산이란 산에는 금표가 얼마나 많았을까? 이 금표들이, 가뜩이나 삶이 힘들었을 백성들의 삶을 더더욱 옥죄어갔을 생각을 하니. 휴.



태실의 조성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부담이 얼마나 심했으면, 조선 왕들이 손수 자신의 태실조성을 축소하기까지 했을까? 쿠테타로 왕이 된 세조는 자신의 태실을 이봉하지 않고, 별도의 가봉비만 세웠다고 한다. 후궁의 아들이었던 영조는 자신의 가봉 태실을 조성할 때, 백성들의 고충을 생각하여 창덕궁 후원에 태실을 조성했고, 심지어 석물 크기까지 줄이라고 한다.



신분제가 당연한 왕조사회에서 백성들의 삶이란. 그들에겐 자녀가 태어나도 태실은 커녕,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해뜰때 나가서 해질때 돌아오는게 일상이었을텐데. 물론 그 당시의 그들에겐 왕실의 태실 조성을 위해 부역을 하는게 당연한거고, 땅을 빼앗기는게 당연한거라지만. 언제나 느끼지만 조선이든, 그 어느 왕조시대든 민초들의 삶을 생각하면 참 애달프고 그렇다.


다시 태실로 돌아와서! 저자가 답사한 많은 수의 태실들의 상황은 흙이 파헤치고, 비석이 깨져있고, 태함만 일부 노출되거나, 심지어는 그 흔적도 찾을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마디로 문화재로써 태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이야기. 간혹 지자체 문화재로 지정되어있거나, 지자체에서 신경써서 태실을 복원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소수의 일일뿐. 대부분의 태실은 그 흔적조차도 찾기가 어려운게 현실이다. 



왜일까? 조선왕실의 무덤들은 나름대로 잘 관리가 되고 있는데 말이다. 그 시작은 백여년 전,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8년부터 시작된 태실의 이봉 과정에서 경성 수창동 이왕직 봉상시에 봉안실을 신축해 임시로 봉안했고, 1930년 4월 15일~17일에 서삼릉으로 옮겨 봉안했다. (생략) 풍수지시를 기반으로 길지에 태실을 조성했던 맥락을 고려할 때 이는 사실상 훼손에 가까운 만행이었다. 이처럼 태실이 이봉된 뒤 기존 태실지의 상당지는 민간에 팔려나가게 된다. 이 때문에 태실지에 분묘가 들어서게 되고, 태실 관련 석물은 묻히거나 유실되는 등 제자리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책에서 소개할 상당수의 태실이 이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p 051



일제는 조선왕실의 태실들을 대부분 파내어, 서삼릉으로 한데 모았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은 태실지는 민간에게 팔려나갔다. 뭐, 이렇게 일제만 탓하면 참 좋겠는데, 조선 자체의 관리 부실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1625년에 조성된 태실임에도 1872년에 제작된 「전라좌도 광주지도」에 ‘고려왕자태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247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용성대군(인조子)이 아닌 고려 왕자의 태봉으로 표기된 점은 태실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p 198



결국 조선 왕실의 태실지가 지금처럼 관리되지 않고 파괴되는 그 원인은 일제에도 있고, 조선왕실에도 있고 뭐 그렇다는게 내 생각이랄까. 확실한건 일제의 무분별한 태실 이봉 과정과 태실지 판매, 조선왕실의 관리부실이 한데 모여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태종의 태실은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산 65번지로, 현재 태실지에는 분묘가 들어서 있어 태실과 관련한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과거에는 분묘 주변으로 태실 관련 석물이 방치된 채 흩어져 있었으나 지난 2015년 성주군청에서 태실 석물을 수습해 현재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p 061



법림산에 위치한 단종 태실지의 경우 태실지에 분묘가 들어선 상황으로, 지난 2012년 지표 조사 결과 노출된 우전석 1매와 묘의 석재로 활용된 상석 2매, 전석 2매등이 확인된 바 있다. p 075



현재 傳단종 태실(인성대군 태실)은 제자리를 잃어버린 채 태실 관련 석물이 주변으로 밀려난 것을 볼 수 있다. 태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묘의 주인공은 최연국으로, 사천의 대표적인 친일파다. p 076



현재 현종 태실과 관련된 유일한 흔적은 아기비다. 발견 경위는 태봉산에 태양광 발전 시설 관련 공사를 진행하던 중 땅에 묻혀있던 아기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예산문화원으로 옮겨졌다. p 105



『조선의 태실2』를 보면 태봉에 있던 태실비가 1961년 7월 말에 당시 면장이던 신상현 씨에 의해 천당리 면사무소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후 명안공주(현종女) 태실비는 면사무소의 연못을 메울 때 메몰되었다고 하며, 현재 명혜공주(현종女) 태실비는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옮겨져있다. p 205


지금까지 관리가 부실했기에, 지자체가 태실지가 있어도 몰랐다고 한다면, 그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당대였던 조선에서조차도 관리부실은 있어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태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이 직접 두 발로 뛰어서 태실의 위치를 찾고, 태주가 누군지까지 고증하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개인이 이정도까지 했는데, 지자체가 이를 방관하고 있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비지정 문화재라 할지언정 태실지도 엄연한 우리의 문화재이며, 이러한 문화재의 보호와 관리는 당연히 지자체에 있다. 문화재가 민간 소유지에 있다면, 그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것도 당연히 지자체가 할일이다. 이런것도 안하면서, 자리를 보존하는 공무원들이라면, 없느니만 못하지.



지금까지 관리 부실의 문화재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수 많은 태실지가 관리 부실로 버려져 있다는 사실에 정말 쌓여있던 분노가 터져나왔다. 오죽하면 조선왕실의 태실지에 친일파가 무덤을 쓰냐고. 하. 정말, 우리나라는 바로잡아야하는게 많아도 너무 많다.



흠흠, 다시 오롯이 태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경상도읍지』 「성주목읍지」에는 태종 태실의 수호사찰인 태봉사가 조곡산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때도 이미 터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p 063



『일성록』에는 명봉사의 승려 봉관이 명봉사가 태실(문종과 장조)을 수호하는 사찰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p 069



인종 태실의 수호사찰인 은해사는 809년 혜철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최초 해안사로 불렸다. p 092


조선왕실의 태실은 각각 수호사찰이 있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조선 왕릉에는 각각의 원찰이 있다는건 알았는데, 태실에도 수호사찰이 있었다니. 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정도로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뭐랄까, 그동안 공부를 헛했구나 싶고, 그렇게 사찰을 자주 다녔는데, 나는 대체 무엇을 본건가 싶고. 하 ㅠㅠㅠ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다닌 다닌 사찰들 중 일부는 내가 모르는 태실의 수호사찰일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도달하니, 자괴감이.. 대체 난 뭘 보고, 뭘 배운거니....ㅠㅠ



지금이라도 이런 내용을 알게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영조때부터 태실을 창덕궁 후원에 묻는 조치가 이루어졌고, 이는 고종 때까지 계속 이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태봉등록』을 보면 영조는 자신의 가봉 태실을 조성할 때 전례에 얽매이지 않고, 태실의 규격을 간소하게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는 무분별한 태실의 조성을 억제해 백성들의 고충을 경감시키고자 했던 영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p 232



이러한 영조의 의지는 손자인 정조 역시 계승했는데, 이는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의 태를 주합루 북쪽 돌계단에 묻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 정조 때부터 외부에 아기씨 태실을 조성하는 사례는 줄어드는데, 주로 세자와 원자 등 왕위 계승과 관련이 있는 왕자의 태실만 외부에 조성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고종의 자녀인 영친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왕자, 고종 제9왕자의 태실 등이 창덕궁 후원에 조성될 수 있었다. p 233



앞에서 우리나라 산 곳곳에 무덤과 태실로 가득 차고, 백성들의 고충과 부담에 대해 푸념을 했는데, 세상에나. 영조도 같은 생각을 했었나보다. 영조가 자신의 태실 조성을 축소한 건, 책 앞부분에서도 읽었던 부분인데, 뒤로 가니 더 자세한 내용이 나왔다. 태실을 무려 궁궐 내에 조성하기 시작하다니. 확실히 태실을 궁궐 내에 조성하면, 백성들의 고충도 확실히 덜할테니 말이다. 심지어 영조의 뜻을 정조도 잇고, 고종도 잇고. 오. 고종은 그렇게나 토목공사를 진행하며 재정을 축냈는데, 그래도 태실 조성 만큼은 영조의 의지를 이은걸 보니. 그래도 생각이란 걸 좀 했나보다.



물론 이렇게 창덕궁에 조성되었던 태실은, 기록에 비추어 장소를 추정만 할뿐 정확한 장소는 비정할 수 없다. 이들의 태실이 일제에 의해 서삼릉으로 이봉된게 제일 큰 이유라면 이유다. 이후 창덕궁이 일제에 의해 농락당했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안타까운 점은 태실 유적의 상당수가 비지정 문화재로,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다보니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이다. - 맺음말 中


이 책의 저자인 희태님은 맺음말에 위와 같이 썼다. 상당수가 비지정 문화재이고, 실태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 태실이 이렇게 된 제일 큰 이유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음에 있을 것이다. 비단 태실의 문제만이 아닐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문화재들이 사람들의 관심밖에서 훼손되고, 또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가 사라질때마다, 한 덩이의 역사도 같이 사라진다. 



그러니, 제발, 이렇게 훼손되고 방치된 태실같은 비지정 문화재들이... 잊혀지고 사라지기전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더 잃어버리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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