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너 다이어리 - 사계절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실전 노하우
국립수목원 지음 / 지오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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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버렸다. 가드닝 책. ..하하..하하하.


시중에는 가드닝 관련 책이 정말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대체 뭘 사서 읽어야 할지 고민이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애초에 내가 책을 읽는 취향과는 동떨어져 있던 장르이기도 하다보니, 어떻게 책을 골라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가드닝 책을 고르는데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① 식집사들 사이에서 호평되는 가드닝 책(식물카페에서 대거 서평의뢰가 들어간 책 제외!)


② 누가봐도 식물 키우기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쓴 책



이 책은 후자다. 누가봐도 식물 키우기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쓴 책! 음 정확히는 단체가 쓴 책이라고 해야하나? 무려  국립수목원에서 발행한 책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포천에 있는 국립수목원(광릉숲)은 1999년에 설립된 국내 최고의 산림생물종 연구기관이니, 이 책에 대한 신뢰도는 천장을 뚫고 올라갈 수 밖에.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국립수목원(광릉숲)을 가려고 사전예약을 한 상황이었는데. 크 ㅋㅋㅋㅋ 이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





내가 식집사의 길로 뛰어들었을 땐, 식물카페의 모든 글을 보며 용어들을 익히고, 식물을 키울때 주의사항 등을 익히고 그랬다. 그럼에도 알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T/R률이다.



분갈이를 위해 검색을 하다보면, 식물의 뿌리를 잘라내면, T/R률을 고려하여 식물의 가지도 일부 쳐내야한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난 대충 뿌리가 잘린만큼 영양분을 흡수하는 양도 줄어드니, 그만큼 줄기도 잘라내야 한다고 인지했었다. 어휴, 근데 이건 너무 쉬운 생각이었다. 이래서 책을 읽어야해!



T/R률이란 Top/root ratio. 나무 지상부와 지하부의 비율을 말한다. 나무 지하부의 뿌리와 지상부의 가지가 비례하지 않으면, 뿌리가 흡수할 수 있는 물의 양보다 지상부에서 더 많은 수분을 증산하기 때문에 잎이 말라버리거나, 나무 전체가 고사할수도 있다고! 만약 T/R률 조절을 했는데도 잎이 계속 말라간다면, 가지를 더 솎어내거나, 전체적으로 잎사귀를 따야한다고 한다.



얼마전 수 많은 꽃송이를 비웠던 토종동백이 분갈이를 하였는데, 화분에서 꺼내보니 동백이 가지에 비해 뿌리가 조금 부실했었다. 하지만 난 아무생각 없이 동백이 집만 키워줬을 뿐이고. 허허허허. 하지만 아랫잎부터 자꾸 노래져서 떨어지고 허허허허. 혹시 몰라서, 지면에서 나무의 중반부까지 잎을 다 떼어냈더니, 그재서야 동백이가 안정적으로 새순 펑펑내고 순항중이다. 크흡. 어디까지나 소 뒷걸음치다 얻어걸린거긴 하지만, 진작에 알았다면, 더 빨리 동백이를 보살펴줄 수 있었는데. 전문지식의 중요성이란 이런건가!!






 



식집사 생활에서 중요한 건 또 있다. 바로 가지치기!!! 초본류를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크게 상관없겠으나, 목본류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집중해야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내 관심도 집중!! 뭐,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선 프로개님 블로그에서 어깨넘어로 배우긴 했었지만 말이다.



가지치기를 조금 더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면, 이 책의 51p ‘전정하기’ 파트를 보면 된다. 가지가 나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고, 그 부분 위주로 가지치기를 진행하면 된다. 위 사진의 A ~ F 가 가지치기 할 때, 쳐내야하는 가지이다. 



개인적으로 저 흡지는 회사 화단에서 정말 많이 봤다(흡지: 땅속에 있는 뿌리에서 부정아가 생겨 땅위로 나타난 것).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이 흡지들을, 그저 나무들이 새끼친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게 정확한 이름이 있었구나 싶었달까? 뭐, 각설하고. 회사 화단에 있는 벚나무, 은행나무, 매화나무 등등 대부분의 나무가 흡지를 엄청나게 만들어내고(공단이 식물들 살기에 더 좋은 환경인건가ㅋㅋㅋ), 매번 제초작업때 마다 잘려나갔다. 올 봄도 어김없이 흡지들이 엄청 올라왔는데, 유독 내 눈에 띄는 흡지가 있으니 바로 매화나무 흡지!!! 매화나무 흡지는 제초작업으로 잘려나가기 전에, 미리 구출하여 집에서 키워보려고 생각중은 안비밀이랄까(회사 드루이드님이 캐주기로했!)!



삽목하려고 가지고 왔던 매화가지(역시나 회사 드루이드님께 겟)들은 하나 빼고 다 죽었기에 흑 ㅠㅠ, 하나만 살아남은걸 감사히 여겨야할지 뭐라해야할지 흑흑. 여튼 매화가지 삽목의 대참패에 충격을 받아, 조금은 안정적인 흡지를 묘목삼아 키우기로 노선 변경을....!








위에 목본류를 위한 가지치기라면, 초본류를 위한 순따기도 있다. 아 물론 율마도 순따기가 필요한 아이긴 하지만 ㅋㅋㅋㅋ. 순따기야 율마를 키우면서 나름대로 경험하긴 했는데, 정말 순따기는 언제봐도 신기하다. 하나의 순을 따면 두 갈래로 순이 나오고, 또 하나의 순을 따면 두 갈래의 순이 나오고. 오랫동안 아무생각없이 율마 순따기를 하면, 정말 풍성하고 이쁜 율마를 만날 수 있다는데. 내 율마는 언제 풍성해지려나.....율마야 힘을내...ㅜㅜ







꺾꽂이 방법도 있다. 뿐만아니라 휘묻이, 포기나누기, 접목 등 각종 번식방법이 이 책 속에 있다. 하 이 책도 많은 사람이 봐야될 거 같은데 ㅋㅋㅋ


진짜 초록이들 온갖 번식방법이 이 책 한 권에 다 있는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좋은 건 혼자알고 있지 말라고 했는데.....!





 




이 책이 좋은 건 각종 식물 키우기 방법만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국립수목원에서 발행한 책이라서 그런지, 일종의 식물도감도 있다. 식물별로 파종, 이식, 개화시기도 있고, 거기다 월별 캘린더도 있다. 수많은 가드닝 책들을 제치고, 8쇄 인쇄한 비결이 바로 이것인가....ㄷ.ㄷㄷㄷ




아유, 이 책을 읽고나니 빨리 국립수목원 가고 싶어지고. 왜 난 5월에 예약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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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세종 더 그레이트 킹 세종 더 그레이트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 핏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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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외국인, 그 유명한 《스타트렉》의 작가가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한국인이 썼다면야 그려러니 했겠는데, 외국인이 썼다지 않은가. 심지어 그 유명한 스타트렉 작가가, 그것도 국문과 영문 동시출판이라니. 얼마나 잘 썼는지, 이건 꼭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와,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생각보다 수작이었다. 예컨데 역사소설 ‘뿌리깊은 나무’ 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첫번째 외국인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쓸 수 있는지, 외국인이 조선 궁중문화를 이렇게 자세히 알고있는지(예를들어 왕실 어른이 돌아가셨을때, 궁 기와에 올라가 ‘상위복’을 외치는 것이라던가), 훈민정음 창제의 바탕이 어떤 것인지 등. 와 이건 정말 한국을 사랑하고, 세종대왕을 사랑하고, 한글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쓸 수 없는 내용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보았던 세종 관련 매채는 대게 그 시각이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조선이라는 땅을 벗어나, 명나라, 몽고, 왜(일본)까지 시각을 동아시아로 확장시켰다.



※이 리뷰에는 스토리 진행에 절대 중요하지 않은(ㅋㅋㅋ) 아주아주 의미없는 곁가지 스포일러가 아주 조금 있습니다. 거기다 이 소설과는 아무 상관없는 감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런 책은 스포일러 당하면 절대 안되는 책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책 꼭 읽어보세요. 강추강추!





세종이 바라는 세상은 언제나 백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모든 순간을 백성들을 위해 쏟아부었다. 해서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기를 바랐다. 그저 말하지 못하여 당하지 않도록, 억울한걸 억울하다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문자는 지배층의 점유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왕조시대에, 한자를 쓰며, 한자를 발명한 중국에 사대를 하는 유학자들이 정치를 하는 그 시대에, 세종의 이러한 발상은 한 나라를 망국으로 일으킬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생각이었다.



세종은 물시계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겼다. 너무도 익숙한 옛 동료나 오랜 친구인 양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장영실은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난 것인가? 왕은 물시계를 발명한 사람을 그리워했다. p 108



그래서 이 책속의 세종은 언제나 자기 뜻을 이해하고, 어떻게든 실행시키려고 하던 친구 ‘장영실’을 그리워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바탕으로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는 왠만하면 나오지 않는 인물 ‘장영실’. 그 장영실이 이 책속에선 왕왕 등장한다. 



소설속의 세종의 침전 건너방, 그곳에는 물시계가 있다. 시간을 다스릴 수 있도록, 그 시간으로 백성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그런 세종의 바람을 담아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바로 그 물시계가 그 방에 있었다. 세종은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풀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할때, 심적으로 지칠때 이 물시계를 보러 왔다. 오랜 친구 장영실을 만나기 위해.



세종이 그렇게나 아꼈던 장영실. 유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등용했던 장영실. 그런 장영실을 왕의 가마를 망쳤다는 이유로 곤장을 내렸다는 기록 이후엔 기록속에서 사라진 장영실. 만약 역사의 타임머신이 있다면, 세종에게가서 “장영실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꼭 묻고 싶었다. 역사속에서 사라졌기에, 장영실은 세종 후반기 이야기에서도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도 그를 잊었다. 심지어 그가 만들었던 발명품들은 조선중기 이후에는 그 조작법조차 모를 정도가 되었다.



백성을 위했던 세종, 그런 세종을 위해 각종 발명품을 만든 장영실. 하지만 그 보다 더 백성에게 중요했던 문자. 하지만 반상이 유별하고,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이 모든걸 다 가져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장영실을 버리고, 백성을 위한 문자를 지킨게 아닐까. 뭐 그런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을 저자는 물 위로 끌어내었다. 물론 이미 장영실이 죽었다는 가정 하에, 죽은 장영실을 그리워하는 세종이었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리고 진짜 그렇게 곤장을 맞았다면, 세종이 뒤로나마 구출하지 못했다면, 진짜로 그날 이후로 장영실은 생을 달리했을테니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시기의 세종을 그린 각종 매체에선, 장영실의 'ㅈ'짜도 없었는데, 이렇게나마 세종이 계속 장영실을 그리워했다는 이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소설을 쓴 외국 작가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그자에게 진 빚을 내가 어찌 갚을 수 있겠소? 아직 살아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초들에게 진 빚을 내가 어찌 갚을 수 있단말이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알릴 방법은 말하는 것이 유일할 게요. 하지만 죽은 뒤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이 죽고 난 뒤에도, 우리 조선인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길이길이 알릴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겠소?” p 146



문자는 귀족들의 권력이었다. 해서 일개 백성들, 사람취급 받지 못한 천민들, 그들은 억울해도 억울하다 할 수 없었다.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기천년간 이어져온 왕조시대, 수 많은 나라에서 수 많은 왕이 나왔지만, 이러한 생각을 한 왕은 몇 없고, 몇 없는 왕중에서도 이를 고쳐보고자 실행한 이는 적어도 공인된 역사속에서는 조선의 4대왕, 세종대왕 이도 한 사람 뿐이다.



“지금 우리 조선에서 사용하는 소리는 중국의 소리와 달라 한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결과 한자를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사연을 글로써 전달할 방법이 없다.” p 182



재위기간 내내 백성을 위해, 백성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던 세종대왕이 말년에 만든 우리글, 훈민정음. 이 훈민정음은 한글이 되어, 오백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던 그 날, 조정에 있던 대다수의 유학자들이 반대하였다. 심지어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반대하는 제일 큰 이유로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 큰 나라를 모시는 작은 나라가, 감히 큰 나라의 문자를 버리고 일개 ‘기예’에 불과한 문자를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일반 백성과 천한 것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면,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모든 예의범절이 파괴될 것이라 하였다.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 조선이란 나라가 사대주의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고, 있는 자들의 권력욕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본디 글을 안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것과 같다. 하여 조선은 차지하고 고려, 그 전까지도 우리 역사상에서 한낱 백성들이 글을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은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지배층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쇄혁명이라 일컫는 금속활자가 최초 발명된 곳은 바로 우리 땅이었다. ‘직지심체요절’이 바로 그 증거이다. 심지어 서양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2백년 앞선다. 그러나 금속활자가 나온 이후의 세상은 서양과 동양이 극명하게 달랐다. 우리는 금속활자를 꽁꽁 숨겨두었다. 왕실을 비롯하여 공자왈 맹자왈 하는 돈있는 양반네들, 그리고 사찰에서만 통용되었다. 해서 모든 정보는 왕실, 양반, 사찰에서만 독점하였고, 이러한 정보 독점은 권력으로 이어졌다. 금속활자인쇄가 발명된 이때도 이럴진데, 목판으로 인쇄했을 시기는 정보 독점은 오죽했을까.



반면에 서양은 금속활자는 성서 인쇄를 비롯하여 수 천권의 책들이 금속활자에 찍혀, 대폭적으로 전 계층에 퍼져나갔다. 왕실, 귀족, 서민 관계없이 누구나 손쉽게 책에 접근 할 수 있었다. 기존에는 왕실에서만 독점하던 정보를 일반 서민들까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되면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양의 각종 학문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여러 개혁들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그렇게 서양은 동양과는 다르게, 아주 빠르게 시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근대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동양은 소수의 지배층이 인쇄술을 독점하고, 문자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했고, 서양은 누구나 인쇄물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인쇄물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자를 배웠고, 문자를 배움으로써 옳고 그름을 깨우치게 되었다.



자, 이쯤에서 다시 보자.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문에 썼던 ‘예의범절이 파괴’, 이 말이 과연 적중했는가? 서양은 예의범절이 파괴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 서양은 예의범절이 파괴되어 세계의 패권을 잡았던 것인가? 반면에 지배층이 끝까지 한자를 쓰고, 문자를 독점한 조선은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삼정의 문란이 일어났고,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백성들을 쥐잡듯이 잡았고,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외세에 나라를 팔았는가?



세종이 만들었던 훈민정음은 유학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조선의 정식문자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여성들이 쓰는 문자로 전락하고, 천민들이 쓰는 문자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훈민정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백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한글이 된 훈민정음을 쓰고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을 세종대왕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라는 가정을 많이들 하는데, 난 그 반대의 가정을 하곤 한다. 그렇게 대국의 문자라고 한자를 극찬하던 유학자들이, 지금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게 대국의 문자라던 칭송하던 한자는 저 멀리 내팽개쳐져, 한국에서 사장된거나 다름없어진 이 모습을 보면 최만리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정말 궁금하다.



그것은 왕이 받은 첫 번째 편지였다. 왕 자신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쓰인 첫번째 편지!


세종은 큰 소리로 쪽지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황씨부인은 읽고 쓸 수 있사옵니다. 전하, 감사하옵니다.” p 227



내가 조선조에 태어나, 훈민정음을 처음 접했다면, 나는 가장 처음으로 어떤 글을 썼을까? 아마, 황씨부인처럼 글을 알고, 쓸수 있게해준 세종에 대한 ‘감사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황씨부인의 저 쪽지는, 훈민정음을 배우게 될, 세종에게 감사함을 갖게 될, 과거와 먼 미래인 오늘날 모든 백성들의 편지와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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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기까지!!!!!!!!!!!!!!!!!! 최대한 책속의 내용은 피하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ㅋㅋㅋ) 내용에 대해서만 내 생각을 덧붙여보았다. 그러니까, 이 리뷰를 읽은다 한들 이 책의 내용은 알 수 없단 이야기.




뭐라고 해야할까? 이 책은 흡입력이 최고조에 달한다. 책을 쓴 저자가 스타트렉 작가여서 그런건지,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소설이자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뿌리깊은 나무》가 그저 국내판이라면, 이 책은 세계판으로 상위호환한 느낌이랄까?



읽으면서 국뽕이 넘쳐흐르는 구간도 있었고(특히 반포할 때), 슬퍼서 눈물이 찔끔한 구간도 있었으며(희생된 사람들이..하...ㅜㅜ), 욕지꺼리가 나온 구간도 있었다(최만리가 한 작태라던가 뭐 그런..... 상소문에서 멈췄어야지 이 양반아!!). 거기다 어디까지나 ‘역사판타지 장편소설’임을 감안하였음에도, 사실과 허구가 너무 조화롭게 배치되어서 그런지, 만약 이 책을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면 그대로 믿을 사람들도 많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의미에서 영화로 제작된다면, 극장을 잘 안가는 나지만 이것만큼은 영화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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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 겸산 홍치유 선생 권학가, 2020년 지역출판활성화 사업 선정 도서
홍치유 지음, 전병수 옮김 / 수류화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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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고택에서 오래된 고문서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고문서나 두루마리는 대부분 세상에 공개되지 않는다. 국사책에 나올 법한 아주아주 유명한 위인의 글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박물관 수장고나 고택에서 계속 보관할 뿐이다. 이 책 역시 그럴뻔 했던 고문서중 하나였다. 




이 책의 저자 겸산 홍치유 선생은 조선 말을 살아가던 유학자였다. 그러다 남헌 선정훈의 권유로, 관선정서숙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관선정서숙은 남헌 선정훈이 건립한 교육기관이다. 물론 현재 관선정은 남아있지 않다.  관선정을 세웠던 남헌 선정훈의 고택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관선정은 당시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서 전통한학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이은 곳으로서, 1944년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철거되기까지 약 200여명의 학생이 관선정을 거쳐갔다. 이후 1945년 경북 문경 농암면 서령으로 옮기고, 또 경북 상주군 화북면 동관리로 옮겨 1951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p 010




이 책을 엮은이는 남헌 선정훈의 고택을 방문하여, 그 집의 며느리로 있는 겸산 홍치유 선생의 후손을 만났고, 그 곳에서 겸산이 쓴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시작이다. 어쩌면 광에 묻힐 뻔 했던 겸산의 글이, 선생의 후손과 그 글에 관심을 가진 엮은이를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 두루마리에는 겸산 홍치유 선생의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한 글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글이기도 하면서 가사(歌詞)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초학자에게 글만 읽으라고 하면 싫증을 내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노래를 부르게 하면 쉽게 떨치고 일어나 분발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반드시 이것(노래)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p 012



딱딱한 글은 배우기 어렵고 따라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가사(歌詞;노래)로 된 글은 배우기 쉽고, 따라하기도 쉽다. 해서 겸산 홍치유 선생은 딱딱한 글이 아닌, 가사문학의 형식을 취해 가르침을 남겼다. 그가 후진 양성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겸산의 글이 담긴 이 책은 유학자가 쓴 글이기에 유학이 무엇인지를 쉽게 접할 수 있고, 그가 유학자였기 때문에 공부한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한자와 한글이 같이 적혀있기에, 한자 공부에도 매우 적합하다. 무엇보다, 겸산의 글은 조선 말기에 쓰인 글이지만, 현대를 사는 사람이 썼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에 대해 깊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 




※책에 실려있는 가사에는 전부 역주가 달려있지만, 본문만 옮겨적습니다.


人道가 不明하면(사람의 도리가 밝지 않으면)


天地도 長夜로다(하늘과 땅도 깜깜한 긴 밤이로다)


人身이 不修하면(사람이 수양되지 않으면)


家國이 어이되랴(집안과 나라가 어찌 되랴?)


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p 91~92



사람의 도리가 밝게 드러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의 도리도 밝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 그러니까 세상이 깜깜해지면, 집안과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사람은 항시 수양을 해야한다. 어찌보면 공자왈, 맹자왈 - 죽은 자의 이야기만 읊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생각이 짧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수양을 한다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이다. 학문적으로 갈고닦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도적적으로 갈고 닦는 의미도 내포되어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의 ‘됨됨이’를 갈고 닦는 것이다.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게 아니며, 부모/형제/친구/동료 등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나를 갈고 닦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헌데 이를 행하지 않게되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수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 많큼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고, 그러다보면 범죄자가 판치는 세상이 될 것이며, 결국 내 인생, 내 자식들 인생까지도 망치는 세상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다.



萬券詩書 다 읽어도(만 권의 시서를 다 읽어도)


無一善行 可稱하면(일컬을 만한 선행이 하나 없다면)


이 내 몸에 무삼有益(이 내 몸에 무슨 보탬이 있으랴)


不學無識 다름없다(배우지 않아 무식한 것과 다름이 없다)



위와 이어지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아무래 학문적으로 높은 위치를 이루었다 한들, 그 학문적 지식을 엄한데 쓴다면 무식쟁이와 다름없다는 이야기다. 예컨데 공부 열씸히 해서 LH공사 같은 곳에 들어가도,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그 지식을 쓴다면, 그들은 무식한 것과 다름 없다는 이야기다.  조선조 말을 살아간 사람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1백년이 훌쩍 넘는 지금에 큰 울림을 준다.



이렇게 자신의 수양을 위한 글도 있는 반면, 우리의 역사에 대한 글도 쓰여져있다. 이는 겸산이 유학자이기에 쓸 수 있는 글이다. 단군 조선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까지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가사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世宗의 文武大業(세종의 문덕과 무략의 큰 업적)


天縱하신 聖知시고(하늘이 내린 성지시고)


輯賢殿 雪夜貂衾(<문종이> 집현전 <학사에게>눈 내린 밤 담비가죽 이불을 덮어주고)


待士恩禮 特殊터니(학사를 대우하는 은총과 예우가 특별하였는데)


淸泠蒲 自規소리(청령포 두견새 소리)


千古怨恨 그지없다(천고의 억울한 한 끝이 없네)


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p 194~199


세종과 문종의 업적을 칭송한 반면,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의 비극을 이야기한 가사다. 조선 말의 유학자가 세조를 보는 시각과, 현대를 살아가는 내가 세조를 보는 시각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아래 2문장에 담겨있다. 결국 세조는 왕이였던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심지어 죽여버린 비정한 삼촌으로 역사책에 남았다. 거기서 더 들어간다면, 조선 개국 이후 신하들에게 권력을 넘길 수 있는 첫 단추를 꾀어버린 사람이 되었달까.



이 외에도...


조선조 오백 년 동안 학문을 높이고 <어진 정치로 백성을> 다스려 교화하여


여러 현인이 무리 지어 나오니


예의를 아는 동방의 조선국이 세계에 빛났는데


종남산 큰나무 수령이 오래되어 속이 썩네.


당쟁이 일어나자 공론은 없어지고


사장학의 폐단인 형식에만 치중하여


과거시험을 거쳐야만 현량이 되고,


지체와 문벌이 잇어야만 재상이 되는 세상이로다. p 236~244



바다 건너온 도적이 빈틈을 타고 들어와


을사년에 늑약을 감행하였다.


정미년 6월에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의사 이준이 피를 뿌리며 억울함을 외쳤고,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벼락소리는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간신배가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경술국치가 비통하고 분노가 치민다. p 250~254​



선조 이후 붕당정치를 비판하고, 바다 건너온 도적 왜놈들을 비판하고, 그런 왜놈들에게 빌붙은 간신배를 비판하였다. 조선 말을 살아간 유학자 겸산 홍치유는 비뚤어진 세상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비뚤어진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눈을 가졌다. 



살아오며 비뚤어진 세상을 보아 온, 그 세상을 비판해온 나이든 유학자 겸산 홍치유. 그는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四千餘年(우리도 사천여 년)


歷史가 있는 나라이니(역사가 있는 나라니)


亂極思治 此時機에(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여 태평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 시기에)


老夫一言 省念하소(늙은이의 한마디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시오)


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p 278



겸산이 살던 시대는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였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그 성격은 다를지언정, 어지러움이 극에 달한 시대라는 사실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나이든 유학자, 겸산 홍치유의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난 비뚤어진 이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건 아닌가 하고.



난 그동안 공자왈, 맹자왈 - 죽은 자의 말만 읊으며 조선을 쇠락하게 하고, 외세가 침략할 빌미를 주었던 유학자들을 좋게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제대로 된 사상을 가진 이가 있었으며, 삐뚤어진 세상을 비판할 줄 아는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쓴 겸산의 글을 읽고서야 알았다.




언젠가 지금은 사라진 관선정 터를 찾아가, 이런 겸산의 마음을 돌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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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일종의 장르소설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17일」.


장르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표지! 저 표지 속에 있는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해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실화, ‘퍼트리샤 허스트’사건에 대해선 1도 아는 바가 없었기에, 해당 사건에 대한 배경지식을 위해서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해본건 안비밀.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기에, 그 사건에 대한 결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 대해선 이미 스포일러가 넘쳐나고, 심지어 그 사건의 중심인 퍼트리샤 허스트는 지금까지도 멀쩡히 살아있는 인물이다. 장르소설의 백미는 결말로 치닫는 과정과 반전인데, 이미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다 알려진 상황에서 어떻게 소설을 집필한것일까? 그게 참으로 궁금했다.



소설 속 주인공 진 네베바. 미국인이었던 그녀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변호를 위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SLA에게 납치되었던 그녀가, 왜 SLA의 멤버가 되어 돌아왔는지, 은행테러 주동자가 되었는지, 그녀가 SLA에게 납치된 후 세뇌되었던게 아닌지, 혹은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인해 SLA멤버가 된 것은 아닌지. 이러한 내용을 잘 정리하여 ‘그녀는 SLA에 세뇌되었었기 때문에 테러를 한 것이니 그녀는 무죄다’ 라는 보고서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각종 자료 수집을 위해 직원 프랑스인 비올렌을 고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내가 생각하기에 네 해석은 좀 편협한 것 같아. 너는 실제 결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어. 이 사건들이 왜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은 안해 보았니?" p 042 



그저 순수하고, 맑게, 큰 문제 없이 살아온 여학생 비올렌. 그런 비올렌이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 사건’에 관한 각종 기록과 기사를 스크랩하고 정리하는 일은, 진 네베바의 성미에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속에서 그려진 진 네베바는 일종의 아나키스트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처음엔 페미니스트처럼 보였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두 까는 진 네베바를 보면서 페미니스트보단 아나키스트 쪽에 가까워보였다).



진에 비올렌에게 1968년 봄에 대해 물어봤을 때, 비올렌은 자신이 어렸을 때 눈으로 본 사실만을 이야기 했을 뿐인데, 진은 그런 비올렌을 다그치며 ‘편협’하다고 했다. 물론 진의 말처럼 실제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해 아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비올렌이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치않고, 무작정 “너의 의견은 편협해”라고 대답하는건, 학생을 가르쳤던 교수로써도, 어른으로써도 문제가 있어보인다. 이건 내 가치관이 이러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야한다고 강요를 하는 것 처럼 보인달까? 엄연히 살아온 세대가 다른 비올렌의 입장에선,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면 모를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비올렌에 대한 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큰 고생없이 자라온 비올렌에게, 미국을 동경했던 비올렌에게 이런 진의 모습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을것이고, 대단해보였을 것이다. 어린 여학생들이 커리어우먼을 보며 동경하는 뭐 그런거랄까? 그렇게 비올렌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진의 가치관에 물들며 진에게 ‘세뇌’를 당하게 된다.



퍼트리샤가 SLA에 납치된 후, 그들에게 ‘세뇌’를 당했다는 보고서를 써야할 진이, 정작 자신 스스로가 또 다른 사람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참 아이러니 했다.



퍼트리샤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구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모든 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즉 은퇴자 카드나 실업자 카드, 퇴역 군인 카드, 장애인 카드, 전 재소자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질 좋은 육류와 채소, 유제품을 1인당 70달러어치씩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받아야 할 식량을 못 받게 될 경우 우리가 알 수 있게 길거리와 버스정류장, 영화관에서 불만을 토로하라. p 061 



프랑스인 비올렌은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메리카 드림’같은 그런 동경이랄까? 그렇게 동경하는 미국에서 퍼트리샤 허스트라는 여성이 한 무장단체에 납치되었다. 그런데 퍼트리샤를 납치한 그 무장단체가 요구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있는 빈민들을 구호해달라는 거였다. 그렇게나 동경하던 미국은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심지어 그 빈민을 정부에선 돌봐주지 않는 반면, 테러를 일으키는 무장단체가 오히려 빈민들을 돕자고 하다니! 이렇게 모순적인 미국의 모습은, 미국을 동경하던 비올렌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뿐만인가? 진은 비올렌에게 1704년 아메리카 원주민 습격사건을 이야기 하며, 문명화된 미국이 원주민의 터전을 파괴하고 약탈한 사건을 들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분노한 원주민들이 미국 여성들을 납치하였다. 이후 풀려난 미국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자력으로 원주민들에게 탈출했던 여성들은 원주민에게 몸을 판건 아닌지 의심을 받았고, 협상으로 풀려난 여성들에겐 가문의 명예를 더렵혔다는 모욕만 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앞뒤를 자르고, 그저 원주민들이 문명화된 미국을 습격했다는 사실, 그런 원주민들이 미국의 여성들을 인질로 잡아갔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자, 이 사건은 비올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문명화된 미국이 원주민의 터전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건 폭력이 아닌걸까? 풀려난 인질들에 대한 미국 여론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니었던걸까?



또 하나, 무장단체에 잡혀있던 언론재벌의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 그녀는 어땠을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퍼트리샤 허스트는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자랐을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모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고, 약혼자가 성관계를 원할 때마다 그에 부응하며 살았다. 그런 그녀가 납치되었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기를 납치한 사람들 중 자기 또래의 여자들도 있다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이 미국의 빈민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도와야한다고 했을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SLA는 뒤집힌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지요. 즉 백만장자인 허스트 부부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고, 빈민구호협회들은 한 무장투쟁단체의 주도적 행동에 쌍수를 들어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p 083



이제 그녀는 인정한다. 납치야말로 그녀에게는 하나의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p 118



"젊은 미국인이라는 것은 곧 베트남에서 죽은 친구들의 수를 세는 것을, 만일 흑인이라면 경찰의 검문 때 미처 신분증을 내밀 겨를도 없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는 것을 의미하지. 또한 자기 부모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정부의 계속되는 실패를 막지도 못하고,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당이나 이념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 p150



퍼트리샤 허스트의 부모는 SLA가 요구하는 대로 빈민구제를 했고, 미국 국민들은 환호했다. 오히려 SLA를  잡으려던 경찰들을 문전박대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SLA가 퍼트리샤 허스트를 납치하고, 빈민구호를 외치던 그 시기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냉전시대. SLA처럼 급진적인 단체는 미국에겐 암덩어리였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더욱 그랬다.



미국 정부가, 경찰이 타니아로 개명한 퍼트리샤 허스트와 SLA를  소탕하기위해 급습했던 그날은 또 어땠나. SLA가 숨어있다고, 곧 소탕을 하겠다며, 전국으로 생방송을 하던 그 모습. 그 건물안에 민간인이 있건 말건 총질을 하던 그 모습은 또 어땠나. 그 건물이 재벌들이 사는 건물이었다면, 과연 경찰들이 그렇게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소개작전을 펼쳤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SLA소탕작전은 미국이 그만큼 빈부격차가 심하고, 빈민들의 처우가 어떤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저는 제 부모님의 신중한 삶을, 그들의 비겁함을 혐오했어요. 그들이 노숙인에게 동전 한 닢 던져줄 때의 그 인색한 호의를, 그들이 '우린 헛된 꿈 같은 건 일절 꾸지 않아'라고 뻐기듯 말할 때의 그(씩씩한 기상으로 위장된) 씁쓸한 체념을 혐오했어요. 저는 더 이상 지금의 나로 남아있지 않을 거에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비올렌에게 털어놓았습니다. p 196



비올렌은 이러한 미국의 민낯을 보며, 더욱 진에게 빠져들었다. 비올렌은 또 다른 진 네베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미 중년이 된 비올렌은 동네 여자아이를 은연중에 자기처럼 세뇌시켜갔다. 진의 행동과 언사는 비올렌을 세뇌시켰고, 진의 모든것을 기록으로 남긴 비올렌은 그 노트를 한 소녀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소녀 역시 바뀌었다. 



진 네베바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무죄를 위해, 그녀가 무장단체에게 ‘세뇌’ 되었다고 증명하는 보고서를 쓰려 했으나, 은연중에 퍼트리샤에게 공감하게 되었고, 그녀의 보고서는 다른 방향으로 쓰여졌다. 아니 쓰여졌을 것이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재판에 그녀의 보고서가 채용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아마도 진은 퍼트리샤가 SLA로 전향한 사실에 공감했을 것이고, 그녀가 SLA로 전향한 이유는 세뇌가 아니라, 다름아닌 미국의 문제라고 썼을 것이다.



그렇게 퍼트리샤에게 공감한 진의 영향은 비올렌과 어린 소녀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과연 비올렌과 그 어린 소녀는 정말 퍼트리샤에게 공감을 하고 싶었을까? 그녀들은 진 네베바같은 가치관을 원했을까? 그녀들이 원한건 정말 진 네베바 같은 가치관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가치관을 갖고 성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진 네베바는 그녀들의 성장기회를 박탈시킨 것이다. 



그렇게 진에게 세뇌아닌 세뇌를 당한 비올렌과 여자아이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재판을 어떻게 보았을까?



"퍼트리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차고 넘치지요. 하지만 그녀는 부자였기 때문에 이번 재판에서 무거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거에요. 허스트가는 퍼트리샤가 석방되도록 애썼고 1979년에는 캠페인까지 해서 성공을 거두었어요. 카터가 그녀를 특별 사면해주고, 클린턴이 복권시켰지요.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미국에서 이런 특혜를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으니까.(중략) 퍼트리샤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10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와서 어린아이처럼 어쩔줄 몰라 하는 그녀의 미소와 '용서해주세요'라고 쓰인 티셔츠를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겼지요. 말하자면 퍼트리샤는 타니아를 땅에 묻는 데 동의한겅요. " p 307



SLA로 전향하며 타이아가 되었던 퍼트리샤 허스트는, 타니아를 버렸다. 그녀는 다시 언론재벌가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로 돌아갔다. 심지어 미국은 다른 SLA 단원들은 잔인에게 죽이기도 했지만, 퍼트리샤 허스트만은 달랐다.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지미 카터가 구원을 요청했고, 클린턴이 복권시켰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생겨난 무장단체 SLA. 빈민을 구호하라며 총을 들었던 SLA. 물론 그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민간인을  납치하고, 민간인을 살해한 그 순간부터 SLA는 그저 그럼 범죄자일뿐이니까. 다만 그들이 문제를 제기했던 극심한 양극화, 극심한 빈부격차. SLA이 소탕된 이후에도 이런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언론 재벌 상속녀였던 퍼트리샤 허스트는 유명인사들이 구원을 요청했고, 실제로 복권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도 잘먹고 잘 살고 있다. 타니아로 개명하고, SLA로 전향했던 그 시절은 없었던 것 마냥.



이 소설은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한 장르소설이 맞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분명 이 소설은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그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니었다. 저자는 서로 다른 세대를 산 세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분명 같은 시간속에 살았고, 만날 수 있던 시간속에 살았던 세 여성이지만,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살아온 나이대가 달랐기 때문에, 그녀들의 가치관은 다 달랐다. 그 세 여성이 이 실화 속 주인공인 ‘퍼트리샤 허스트’가 SLA로 전향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각종 사회문제를 짚어내었다.




우리는 이런 사회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 눈 앞에 있는 사회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해보라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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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5-1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자서전도 있지 않나요?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이 책도 재미있겠어요. *^^*

피로 2021-05-17 10:24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럴거에요 ㅎㅎ! 요즘도 가끔 해당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ㅎㅎ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것들
사과집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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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 누구나 죽는다. 혹자는 인간은 죽기위해 살아간다고 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저녁 뉴스를 보면 누가 죽었고, 왜 죽었는지 보도가 안되는 날이 없다. 그 정도로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나 또는 내 주변인과 결부시키지 못한다. 특히 내 주변인과 결부시킨다는건 왠지 죄악같아서 더더욱 그렇다.


그러다 어느날, 내 주변인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죽음을 이겨낼 수 있을까? 온전히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사람을 추모하며,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을까? 이 에세이는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던,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빴던, 딸이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며 닥친 일상을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그 일상에는 사라진 줄 알았던 가부장제의 잔재가 발견되기도 하고, 직장에서 죽어도 산재승인을 받을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함도 있다. 반면에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도 있다. 무엇보다 글쓴이의 이야기가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정말 모든 자녀들이 읽기를 바란다. 그래야 언젠가 내 부모의 죽음과 맞딱드렸을때, 우왕좌왕 하지않고, 오롯이 내 부모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고, 그 상황에 처한 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테니까.

내가 목격하고 체험한 장례란 가부장적 ‘정상’ 가족이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를 평가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여성과 남성이 할 일은 엄격히 나뉘어 있었고, 여성은 장손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겸허히 한 발짝 뒤에 서야 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간 모든 제사와 명절에서 반복된 전통적 여성상이 가장 강하게 재생산되는 곳이 바로 장례식장이었다. p 023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본래 의례란 것은 산 자를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허례허식이 보일 때마다 애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감정이 순간순간 치솟을 때마다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도 냉소를 감추지 못하는 나 자신을 질책하게 됐다. p 030

오백여년간 주자성리학에 함몰되었던 우리나라, 여성에게 많은 제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 제제도 몇십년의 시간을 지나, 많이 약화되었고 사라지기도 하였다. 선택적이긴 하지만 자녀가 엄마의 성을 쓸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제제가 남아있는 문화가 있으니, 그게 바로 장례문화다.

그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위한 숭고한 의식이 장례식인데, 정작 저자가 마주한 아버지의 장례식은 허례허식이 난무한 한국의 장례식이었다. 고인은 분명 나의 아버지이고, 아버지의 자식은 바로 나인데, 여자라는 이유로 상주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라는 이유로 일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사촌오빠가 상주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다녔던 장례식장을 떠올려보았다. 세상에, 모든 상주는 남자였다. 심지어 꽤 오래전 내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였던 딸들이 아닌, 동생이었던 삼촌들이 상주가 되었다. 아, 그때 내 사촌동생들은 본인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배제되었었구나. 이제서야 알았다.

그러니 나는 상상한다. 육개장을 먹지 않아도, 남자 상주가 없어도 존엄하게 떠날 수 있는 장례식. ‘나 없는 송별회’가 이루어지는, 조금은 산뜻한 애도의 장을. 적어도 내가 죽고 없을 때도 고인을 애도함에 있어 성별이나 가정의 형태가 제약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죽음을 천천히 준비하기로 한다. p 041

만약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에겐 남동생이 있다. 또한 내 남편이 있다. 이런걸 다행스럽게 생각해야하는 한국의 장례문화란 대체 무엇일까. 지금의 대한민국은 핵가족화에 이어 1인가구가 많아지고, 편부/ 편모가정도 많다. 과거의 ‘정상가족’이라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형태가 변경되면서 나라의 정책도 변화하고 있는데, 왜! 장례문화는 고릿적 모습에 갖혀 변화하지 않는 걸까.

누구나 태어나면 죽고, 나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 해서 언젠간 내가 상주가 될수도 있고, 또 언젠간 내가 장례식의 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내가 주체가 되는 장례문화의 변화에 대해선 소심하게굴까. 허례허식이 난무하지 않는 장례식, 오롯이 고인을 추모하고, 고인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마음을 추수리는 장례식. 그런 장례문화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봐야할 때다.

면담은 예상과 달랐다. 노무사는 아빠의 죽음에 ‘이 정도’ 로는 부족하다며 ‘적당한 정도’의 승소 케이스를 보여줬다. 그 중 하나는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에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람의 산재 승인이었다. p 075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에서 맞딱드린건 한국의 장례문화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선 정말 어려운, 근로자의 죽음에 대한 산재 문제, 바로 그것이었다. 직장에서 과로로 죽은 아버지기에 산재를 받고자 했지만, 산재를 신청하면서도 당연히 안될거라 생각했다. 그게 대한민국이니까. 그리고 정말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뉴스에서 수많은 과로사를 마주한다. 배달을 하다가 과중한 업무에 죽은 피해자들, 반도체공장을 다니다 백혈병에 걸려 죽은 피해자들. 그들의 유가족들은 산재승인을 받기 위해 대기업과 싸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은 산재승인을 받지 못했다.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근로자의 과로사가, 근로자에게 없었던 질병이 발병된게 정말 업무와 인과관계가 없는건가?모두가 의심하지만, 대기업과 정부단체는 없다고 일축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나랑 상관 없는 일인데?’ 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기엔, 우린 모두가 근로자다. 내 부모가 대기업 임원이라, 대기업 대표라, 혹은 부동산 부자가 아닌 이상은, 우리같은 일개 서민들은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근로자다. 그래서 이런 과로사는 내 일이 될수도 있고, 내 친구의 일이 될 수도 있고, 내 부모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대기업과 정부가 산재 불승인을 내는 것을 남일이라고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 부모의 죽음, 조부모의 죽음에 관한 생각은 최대한 미루고 싶다. 하지만 묫자리 탐방과 엄마가 원하는 죽음 이후를 들으며, 이상하게 미뤄온 일을 끝냈을 때의 후련함을 맛보았다. 가족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에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p 151

위에서도 말했듯 이 책은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을 사는 모든 자녀들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자녀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20대 자녀는, 30대 자녀든, 40대 자녀든. 그 누구든 내 부모가 살아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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