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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ㅣ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1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2월
평점 :
내 개인적으로 임용한 교수님을 늠나 좋아하는지라, 토크멘터리 전쟁사가 폐지되었을 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더군다나 토전사 폐지 이유가 마땅치 않았고, 폐지될까 전전긍긍했던 전 정권도 아닌 현 정권에서 폐지된 것이 정말 어이가 없었더랬다. 토전사는 전 세계의 전쟁사를 돌아보면서 ‘리더’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것 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토전사를 그렇게 폐지해놓고 매주 주말 마다 토전사 재방 틀어놓는 국방TV 진짜-_-... 뿡이다. 흠흠.
이 책은 조선을 유린했던 두개의 전쟁 중 하나인 #병자호란 에 대한 이야기다(나머지 하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드라마나 영화로도 자주 다뤄졌던 이야기인지라, 행여나 주제가 새롭지 않다고 이 책을 외면하는 독자들이 있을까 걱정이다. 이 책은 그저 ‘병자호란’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게 아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대 역사서에서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서술했는지, 전쟁 상황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전쟁 준비가 되있긴 했던 것인지…. 거기다 제일 중요한, 당시 조선의 리더였던 ‘인조’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이 책의 성격을 말하자면, 뭐라고해야할까? 대충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이 집필했던 《징비록》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했던 이유는, 더 이상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훗날 환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슬프게도 이 《징비록》은 조선에서는 널리 읽히지 못했고, 임진왜란이 끝난지 채 50년도 안되서 병자호란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이후로도 외침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반복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조선같은 왕정시대가 아닌, 공화정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임진왜란 이후 《징비록》이 널리 읽히지 않아, 동일한 이유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 처럼 말이다. 그때만큼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더하면 더했지 과거보다 더 빠르게 세계 정세가 돌아가고 있다. 해서 한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대통령)의 자질과 사상, 행동력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지어 곧 있으면 대선이 코앞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를,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작금의 대선후보들 행태를 보면 역대급 비호감에, 정책은 사라졌고, 네거티브 천국이지만.
여튼 그나마라도 제대로 된 리더를 가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깨달아야 한다. 어떠한 리더가 국민에게 좋은 리더인지를.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약 40년간 조선은 더욱 망가져갔다.
신충일이 묘사한 퍼알라의 모습은 무지에 기반했기에 문명권과 거리가 먼 후진국의 모습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이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테고, 거칠고 투박한 것이야 야만인에게는 정상적인 모습 아닌가. 문제는 신충일의 보고에는 여진군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는 점이다.
“소수 부족이 좀 강하다 한들 글을 하는 자도 없는 저들의 문명 수준을 보건대 약탈 집단에 불과하며, 공격을 한다고해도 마을을 휩쓸고 분탕질을 할 뿐이지 광범위한 영토를 정복할 수는 없다. 무장수준도 조선이 여진 정벌을 감행했던 15세기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저들은 아직 화포도 없지 않은가?” p 035
명은 14만 대군이 요동으로 모여들고 있으며, 더 많은 병사가 오고 있다고 허풍을 쳤지만 광해군은 믿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경험 덕분인지 명군과 누르하치 전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광해군은 말했다.
“조선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안다.”
조선군의 문제점은 야전과 공격 능력이었다. 수비는 곧잘 하는데 공격이 안 됐고, 더 큰 문제는 원정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 이동, 보급 등 모든 것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다. p 045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정권에서는 당시 세력이 커지던 여진족 누르하치를 만나고 돌아왔다. 하지만 여진족을 만나고 돌아온 신충일은, 불과 십년도 채 지나기 전 일본에 다녀왔던 조선의 사신단과 다를바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얕보았던 조선은 그렇게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그렇게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 뒤, 이번엔 여진족으로 갔던 조선의 사신들은 일본에 갔던 그때처럼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했다. 조선의 국방력이 튼튼해서 여진족을 무시한거라면 다행이겠지만, 그 역시도 아니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지 오래 지나지 않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 7년간의 전쟁에서 배운 것이 없었다. 류성룡이나 허균같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말이다. 하지만 권력은 언제나 소수가 아닌 다수에 있다.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 조차도 조선의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혁할 수 없었다. 광해군이 아무리 왕이었고 북인의 힘을 믿고 있었다 한들, 전체적인 권력은 서인들이 쥐고 있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7년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해도, 조선은 2백년간의 평화에 젖어있어서 ‘국방력 강화’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의 건국은 분명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장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건국 후 이백년간 조선은 무신을 무시하고 문신을 우대하였다. 점점 무신들의 자리는 줄어들었고, 그에 따른 국방력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양반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여러 편법을 동원했다.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은 군역이 면제되기에, 평생 과거를 준비한다는 미명하게 군역을 회피했다. 노비들도 군역이 면제되기에, 가짜 노비행세를 하는 양반들도 허다했다. 무엇보다, 전쟁 시 군인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평생 군인생활을 했던 무신이 아닌, 글자만 주구장창 읽는 문신들이었으니 말 다했다.
이후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능양군이 왕이되었으니 그가 바로 인조다. 그나마 다행인건 인조 재위기에 ‘국방력 강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권력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서인계열 인사들은 3년 전에 사망한 남한산성 수축과 수어청 건립의 공로자 이귀에게 찬사를 보냈다. 최초로 남한산성의 가치를 발견하고, 중부지방의 거점으로 삼자고 건의한 이는 강골형 무인 이서였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이귀가 이서의 건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강단있게 밀어붙였지만, 산성 축조 과정에서는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그 뒷담화의 주도자들이 산성에 피란해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p 185
반정공신이었던 이귀, 그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수 많은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에 전쟁에 대비해 물자를 비축하고, 수어청의 병사들도 엄선해 선발했다. 이귀는 죽기전까지 남한산성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남한산성에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해두었던 건, 그가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인들이 얼마나 오합지졸이었는지, 군 지휘체계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슬픈 사실은 권력을 잡고 있던 공신세력 중에는 이귀 같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김류뿐 아니라 비변사 대신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수십 년간 ‘전쟁준비’를 한 나라인가?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같은 군영 설치, 직업군인 양성, 화기와 화약 개발, 남한산성 축성, 속오군, 영장제-. 단어만 나열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문제를 알면서도 비변사 대신들이 국왕과 정치인의 눈치를 보느라 방치한 것일까? 그냥 총체적인 무능일까? 누구도 단 한마디의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p 197
이 나라의 전쟁은 4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바뀐 건 조총 뿐이다. 군복은 커녕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병사들, 불안감에 병사들만 들쑤시고 다니는 장교들, 모두가 아마추어인 장병들…. p 288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세력들 태반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징비를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당시 왕이었던 선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히려 ‘명’에 대한 사대를 강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픈 역사는 결국 40년만에 반복되고 만다.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인조는 3월 3일 후금의 사신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의식을 거행하고 후금과 조선이 형과 아우가 된다는 맹약을 한다. 유일한 성과라면 후금이 명과 단절하라는 조건을 철회한 것이다. p 079
청나라, 그러니까 후금이 조선으로 처들어온 건 두 번이었다. 첫번째가 정묘호란, 두번째가 병자호란이다. 두 호란 사이에는 약 9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은 후금에 패배했으며,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후금 입장에선 최대한 양보한 것이었고, 실제로 조선에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만약 당시 정세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았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정세를 읽지 못했다. 후금에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가격했다. 스스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조선의 왕이 내가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정묘호란 때 맺은 약속을 지켰다. 오히려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 그런데도 나를 비난하다니 어이가 없다. 그러나 좋다. 교역을 끊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건 당신들의 자유이고 선택이다. 난 아쉬울 것 없다.”
척화파는 이런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정의라면 반드시 상대에게 강요해야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은 상대방이 싫어하더라도 강제로 먹여야 한다. 그게 성리학의 정의관이고, 사대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판단하다 보니 척화파는 당시 홍타이지의 답변을 허세가 들통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세개 나가니 저들도 꼼짝 못한다고 보았다. p 105
후금의 홍타이지는 황당했을 것이다. 군사력도 얼마 안되는 나라가, 갑자기 뒤통수를 쳐대니 말이다. 하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최우선 목표는 명나라를 쳐부수는 것이였고, 조선은 후금을 칠 힘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당황한건 조선의 사대부들, 정확히는 척화론자였다. 무릇 조선의 양반들은 본인들과 논리가 다르면, 무슨일을 쓰더라도 본인들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다가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던게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정묘호란 패전 이유를, 명분론만 외치던 자신들에게선 찾지 않고 외려 주화론자들 때문에 민심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인조는 비변사에 이런 비장한 메세지를 보냈다.
“이기도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이다. 금의 병사들이 강하긴 하지만 싸울 때 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 만약 오랑캐가 침략해오면 과인이 오랑캐의 앞길에 진주하여 장사를 격려하고 평안도에 사는 군인과 백성을 위로하겠노라” p 103
인조도 뒤따라 즉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사복시(궁중의 가마와 말을 관장하는 관청) 마구간에 말은 있는데, 말 고삐를 잡아줄 하인인 말구종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조선은 체면이 중요한 양반사회였다. 말구종을 구하지 못한 인조는 정오까지도 출발하지 못했다. 보다 못핸 대신 하나가 간신히 사간원의 하인 2명을 데리고 와서 말고삐를 잡게 했다. p 175
결국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인조는 또 도망갔다. 겉으로는 본인이 앞장서 나서겠다고 하던 사람이다. 그렇게 인조는 재위기간 중 무려 세 번이나 궁을 버린 임금이 되었다(첫번째 이괄의 난/공주, 두번째 정묘호란/강화, 세번째 병자호란/남한산성). 선조도 고종도 궁을 한 번밖에 버리지 않았는데, 인조는 무려 세 번이다. 세 번을 모두 궁을 버렸다. 궁을 버렸다는 건, 백성들을 버리고 오롯이 본인의 안위만을 걱정하여 도망갔다는 말과 같다.
그나마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피난길에 웃지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다른 왕실사람들을 먼저 강화로 피난보냈다. 본인도 뒤따라 강화로 가려고 했으나, 말 고삐를 잡아줄 하인이 없어서 (^^) 피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강화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그 때, 조선에 리더는 없었다.
인조는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지는 리더였다. 일반적인 행정에 관해서는 그랬다. 하지만 조금만 수위가 높아지면, 절대로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결정도 회피했다. p 205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화의를 하든 전투를 하든 전하가 결정을 내리셔야지요. 전하가 이러시니 관료들이 별것도 아닌 일까지 전부 결재를 받는다고 찾아옵니다. 매사가 의논만 하다가 끝나고, 장수들은 매일 날씨 핑계를 대고, 국가의 중대사와 군사비밀을 하인과 심부름꾼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정곡을 찌른 비판이었지만 인조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인조의 대답은 기록이 없다. 회의가 끝나고 신하들이 모두 물러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p 269
조선 왕이 여진족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충격은 이해가 가지만 책임 있는 리더라면 항복 협상 중 산성에 있는 군인과 백성의 철수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명분 논쟁만 하다 이 문제가 쏙 빠졌다. 질서정연하게 산성으로 들어와 남문을 사수했던 수원 병사들은 성을 나서자마자 절반이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p 358
모름지기 한 나라의 임금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다. 신하들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한다. 또한 국제정세에 항시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공과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하고, 책임질 때는 책임질 줄 알아야하고, 치하를 할땐 해야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당시 조선에는 그런 리더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런 리더가 없어서 왜놈들에게 국토가 유린되었는데, 불과 40년도 안되어 같은 이유로 되놈들에게 국토가 유린되었다.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았고, 그 댓가는 백성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중시한 건 ‘명분’이었다. 그 명분으로 본인이 왕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무늬만 명분이다. 인조가 중시한 명분은 입맛에 따라 달랐다. 뿐만이 아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선, 다른 정치가들과 기싸움을 할 수 있는 노련한 정치감각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누군가를 믿어야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내쳐야한다. 하지만 인조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역시나 반정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정이란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서 왕을 갈아치우는 일인데, 본인이 왕이 된 이유가 그 신하들 덕분이었다. 허나 그 신하들이 언제 자기의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서 믿어야할 사람을 믿지 않았고,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었다. 적어도 임진왜란 당시 선조 주변엔 인재들이 있었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선조는 그 인재를 선택하는 안목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인재를 보는 눈 마저도 없었다.
그 결과가 정묘호란, 병자호란, 아들인 소현세자의 죽음, 손자인 석철/석린의 죽음, 며느리 강빈의 죽음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인조였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던, 명분론에 함몰된 척화파
조선의 리더였던 인조만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인조 주변을 둘러싼 척화파 역시 부패할대로 부패한 암세포였다.
홍타이지가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명의 망조, 천명이 명을 떠나 후금으로 왔다는 의견에 대해서 조선은 시치미로 일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편지에 대놓고 쓰지는 못했지만 척화파의 논리는 한결 같았다. 부모가 범죄자에 주정꾼이라 해도 부모는 부모다.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할뿐이다. (……) 이후 후금은 국호를 바꾸고 홍타이지는 황제가 된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결정한다. p 142
《산성일기》는 이 패전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쌓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이것이 삼전도의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의 절반은 왜곡이다. 병사들은 이 패전의 원인이 아마추어 제갈량들에게 있으며 그들 대부분이 척화파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군사작전에 정치가 개입하면 없던 사단도 벌어진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데, 근절하기가 어렵다. p 280
김상헌이 냉철한 반격을 하자, 인조의 사위로 대표적인 척화파였던 신의성까지 뛰어들어 분위기를 망친다.
“비단과 금은보화를 줄 수도 있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p 323
척화파는 정묘호란 때부터 주구장창 ‘명분’을 주장했다. 황제국은 오로지 명나라 하나 뿐이며, 조선은 명을 배신하면 안된다는 논리였다. 결국 그들은 입으로만 싸웠다. 백성들이 후금 군화에 짓밟혀도 그들은 끝까지 ‘대명의리’를 주장하며, 후금과 싸우기를 주창했다.
이쯤되면 궁금하다. 척화파라고 할지언정 그들은 분명 유학을 배운 성리학자다. 유학은 모름지기 인본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백성들의 죽음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잘난 ‘명나라를 향한 사대’를 위해서. 이쯤되면 그들이 정말 유학자가 맞는것인가? 백성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주기 위한 공맹의 말은 그렇게 소리없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은 그저 본인들 입맛에 맞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척화파에게 주화파는 추구하는 정책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양심과 정의감이 결여되고 무능력을 넘어 질서를 파괴하는 악의 축이었다. 독전어사들이 손에 손잡고 성벽에 올라 참견을 하고, 무장과 다투고, 매일같이 왕에게 달려가 제갈량 흉내를 낸 데에는 공신 그룹과 주화파에 대한 음모론적 불신이 가득했던 탓도 있었다. p 366
임진왜란 전,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던 (동인)학봉 김성일과 (서인)우송당 황윤길. 이유야 어찌되었든 동인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보고하였고, 서인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거라고 보고하였다. 결과론적으로 서인 황윤길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허위보고를 한 김성일은 본인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그는 1차 진주대첩을 진두지위하였다. 그렇게 죽을때까지 앞장서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후 40년도 채 지나지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할거라던 서인세력은 광해군 재위기에도 끝까지 권력을 잡았고, 광해가 본인들의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능양군을 끌여들어 반정에 성공하여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인조다. 반정공신이 된 서인들중 강경파들이 대거 척화론자였다. 척화론과 반대로 청과 화친을 하여, 안정을 도모하길 이야기했던 주화론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화론자들은 인조를 포함한 대다수 척화론자의 명분론에 이길수가 없었다. 결국 전쟁은 터졌고, 조선은 유린되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발발 후 척화론자들은 학봉 김성일처럼 본인들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다했을까? 슬프게도 아니었다. 그들은 병자호란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명분론’을 내세우기 바빴다. 그렇게 입싸움으로 질질 끌다가 조선은 항복했다.
병자호란, 그 후 북벌과 명에 대한 사대 그리고 정신승리
인조는 임시궁에서, 병사들은 성벽에서, 충청사단의 병사들은 차디찬 땅속에서 1637년 신년을 맞았다. 행궁에서는 늘 하던대로 망궐례를 올렸다. 명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린 것이다. 명이 구원병을 보내준다거나 하는 기대는 아예 접었지만 그래도 망궐례는 했다. p 315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기 바로 직전, 인조는 행궁에서 명나라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 때의 명나라는 이미 망해가던 나라였다. 명나라의 황제는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환관들이 쥐고있었던, 망국행 급행열차를 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인조를 비롯한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본인들이 모신 황제국 명나라를 울부짖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었다(삼배고구두례). 그렇게 조선은 후금, 아니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봐도 예견된 결과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실제로 조선은 날이 갈수록 명분론이 강해졌다. 공식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사적 문서, 묘비 등에는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계속 사용했다. 명의 연호는 1644년 숭정 17년으로 끝나는데, 조선에서는 그 다음 해를 숭정 후 원년으로 삼았다. 새로운 연호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나중에 거의 종교적 근본주의처럼 된다. 예전에 필자는 조선 후기 사대부가 바위에 쓴 낙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대명의 유민이라고 적어놓았다. p 368
그렇게 대패한 전쟁을 두고, 인조와 사대부들은 나라를 개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징비를 외치던 류성룡같은 인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신승리의 끝을 달리기 시작했다. 실력으로는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속으로 욕하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창덕궁 으슥한 곳에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대보단’을 건립했다. 청나라에 걸리면 끝장이기에, 정말로 찾기 어렵게 궁궐 저 으슥한 곳에 건립한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명나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을 설립했다. 지금의 충청도 괴산에 위치한 ‘만동묘’가 그것이다. 심지어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 세우는 비석의 첫머리를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으로 시작했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이렇다. ‘명나라의 신하 조선’,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뜻이다.
인조를 시작으로 조선의 왕들과, 조선이 망할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던 서인들은 그렇게 겉으로는 청에게 조아리면서, 속으로는 이미 망한 나라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공고히 해나갔다. 그들이 명에 대한 사대에 공을 들이던 그 오랜 시간동안, 그들에게 조선의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의 이야기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리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될 경우, 나라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과거와 달리 현대는 리더를 우리의 손으로 뽑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손으로 뽑는 리더라고 전부 올바른 리더일 수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선 방식은 ‘최선’을 뽑는 것이 아닌, ‘차악’을 뽑는 방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해야하는 우리로써는 그나마 나은 리더가 누구인지 고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잘못된 리더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아야하고, 거기서 배워야한다.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