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멈춰도 사랑은 남는다 - 삶은 결국 여행으로 향한다
채지형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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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신종 전염병 코로나19로 우리의 모든 삶이 멈춰졌다. 여행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더더욱 힘든 한해였다. 그래도 ‘새해가 되면 달라지겠지’ 라는 마음으로 버텼던 1년이었다. 하지만 2021년인 지금도 코로나19는 우리와 함께한다. 백신이 나왔다고는 하나, 나같은 일반적인 성인이 맞으려면 빨라야 하반기. 고로 올해도 우리는 코로나19와 함께해야하고, 올해도 어김없이 여행은 STOP 이다.



멈춰진 시간만큼 여행에 대한 갈증은 계속 늘어만 갔다. 결국 이 갈증을 채우는 방법은 과거 여행기를 복기하거나, 누군가가 쓴 여행에세이를 읽는 것. 오늘은 후자, #여행에세이 「여행이 멈춰도 사랑은 남는다」 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나처럼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삶이 멈춰지며, 여행에 대한 갈증을 과거의 여행기를 복기하며 해소하고 있었다. 이 책은 과거의 여행기를 복기하며, 그때의 감정과 추억을 써내려간 책이었다. 



수십 번 일본을 여행했지만 처음 여행한 사람처럼 감탄사가 나온다. 감탄의 대상은 ‘디테일’이다.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허를 찔린 느낌을 받는다. 기대하지 못한 배려와 상상하지 못한 아이디어는 스스로 돌아보게 한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맡은 일에 혼신의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p 079



지리적으론 가까울지언정, 마음의 거리는 미국보다도 먼 일본. 하지만 난 그런 일본을 연 2회 방문할 정도로, 여행지로써 일본을 좋아했다. 제일 큰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말하는 ‘디테일’. 호텔에서, 길가에서, 관광지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무언가를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고, 혹은 본인들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를땐, 질문한 내가 미안할정도로 과하게 사과를 하곤 했다. 물론 그들이 속으로도 미안해하는지, 혹은 혐한을 하는 사람인지 알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난 일본을 가는게 더 편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유명 관광지를 가면 일부 업자들은 손님을 앞에두고 대놓고 곁눈질하거나, 대놓고 불친절하고, 대놓고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이 꽤 있다. 이런 행태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더더욱 인적이 드믄 유적지를 찾아가거나, 편리함을 포기하고 상업이 발달하지 않는 국내 도시를 여행하곤 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사람 많은 곳을 다니고 싶을때도 있다. 어쩌다 한번 유명한 관광지를 가면, 꼭 못난 일부 업자들 때문에 기분좋아야 할 여행이, 기분나쁜 여행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난 대놓고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보다는 속으론 싫어할지언정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 일본인들이 차라리 훨씬 편했다. 그럼 적어도 그 동안의 내 여행은 계속 기분이 좋을 테니까. 뭐, 그리고 어차피 나역시 일본이라는 나라에 사는, 일본인에 대해서는 썩 좋게 보는 편은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여행지에서 만난 잠깐의 시간동안 겉으로라도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면 서로 좋은게 아닌가. 



가끔 뉴스에서는 재난이나, 큰 사건으로 인해 관광객이 뚝끊긴 모 지역들 이야기가 나올때가 있다. 그 중 일부 지역은 군인이나 관광객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는게 곳들이 꽤 있다. 그렇게 바가지를 씌우는 지역의 상인들이 주로 군인들이 빠져나가면 생계가 어렵다, 재난으로 인해 고객들이 안와서 생계가 어렵다, 라는 볼멘소리를 한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행동인가. 지금까지 바가지 씌우며, 배째라 식으로 영업을 해놓고 이제와서 못살겠다라니. 나참.



아니, 한 발 양보해서 워낙 핫한 관광지라 바가지 씌우는 건 어쩔수 없다 치자. 그렇다면 우리가 지불한 돈 만큼의 서비스를 받아야하는데, 그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코로나19 이전까지, 수 많은 국민들이 국내여행이 아닌, 해외여행으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강원도나 제주도 여행비면, 일본에서 놀고 먹고 사는 거 까지 완전 충분했으니까. 아니, 외려 강원도, 제주도 여행비보다도 경비가 더 적게 들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코로나19가 강타한 지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인 지금, 많은 국민들이 국내여행으로 눈을 돌린 지금, 핫한 관광지에서 배째라식의 장사를 하던 업자들은 얼마나 줄어들었을까? 음. 아직까진 멀어보인다. 이대로라면 코로나19가 완전 종식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국내가 아닌 해외여행으로 눈길을 돌릴 것 같다.


아편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매파루앙 정원에 활짝 핀 꽃을 보며 미소지었을 때 왕비는 얼마나 기뻤을까. 한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정원을 돌아볼 수록 왕비의 용감한 도전이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p 110(매파루앙 정원)



그저 여행기라고만 생각했던 이 책에서, 난 뜻밖에도 행동하는 리더십이 어떤 건지를 보았다. 저자가 방문했던 태국의 매파루앙 정원 이야기다.



한때 매파루앙 정원은 태국의 대표적인 아편(마약) 생산지였다. 그러다보니 아편을 재배하던 지역주민들도 자연히 마약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태국의 왕비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아편 생산을 멈추게 하였다. 아편은 분명 마약이지만, 돈이 아주 많이 되는 재배인건 분명하기에,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리더들이었다면 아마 지역주민들 건강따위는 눈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왕비는 달랐다.



그녀는 이 곳을 수차례 방문하여, 지역주민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들을 이해시켰다. 그렇게 태국의 대표적인 아편생산지였던 이 곳은, 아편이 아닌 아름다운 꽃과 나무, 커피가 자라나는 멋진 정원으로 변모하였다. 아편만큼은 아닐지언정, 이런 꽃과 나무, 커피등의 재배로 지역주민들의 생계도 책임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이 마약에서 벗어나면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면서 지역주민들에게 관광수익까지. 이 모든게 마약에 허덕이는 국민들 구하기 위한 리더의 행동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힌다. 여행작가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바람이 스치는 순간에도 적고 찍어야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기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지만, 기록의 힘을 더욱 믿게 해준 여행지가 몇 곳있다. (중략) 옛 가톨릭센터에 둥지를 튼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을 찾았다. 기록관에 전시된 자료로 더듬어본 광주는 처참했다. p 125, 128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우리나라에는 국민을 위해 행동하는 이런 리더가 있을까. 대통령이든, 관공서든, 국회의원이든 그 누구든 말이다. 아쉽게도 아직은 그런 리더들을 못본 것 같다. 국민들 주거 지원을 위해 신도시 개발한다고 지역을 지정해놨더니, 알고보니 그 지역들의 땅을 토지공사 직원, 친인척들이 죄다 매입해서 자기들 돈벌 궁리만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기록이 중요하다’. 


저자의 마음에 완벽하게 공감한 구절이다. 더군다나 그 예시를 든 곳이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이라니. 나 역시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여행 테마를 5.18 민주화운동으로 결정하고 관련 유적지만 돌아다녔었다. 어딜가든 마음이 아팠지만, 유독 더 아팠던 곳이 바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건 다름이난 당시의 기록들이었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가보면, ‘와-’ 하는 마음 반, ‘정말, 여기가 맞아?’ 하는 마음 반이다. 아무래도 역사적인 일이 벌어지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방문하면 더더욱 그렇다. 파란 하늘과, 초록빛의 나무들 그게 끝이었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고는 해도, 그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고, 그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물은 다르다. 기록물은 역사적 사건의 매개체가 된다. 그 중에서도 사진으로 남겨진 기록물이라면 더더욱, 그 사건이 눈 앞에 되살아난다. 그렇기에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정말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해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이기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철저하게 은폐되었을 사건이기 때문이다.





와, 묘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행 금단현상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실제로 어느정도 해소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감동은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여행에세이에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이 책이, 나에게는 달랐다. 분명 이 책은 여행에세이지만, 나는 그 안에 담긴 그 나라의 사회를 보았고, 문화를 보았고, 정치를 보았다. 저자의 발길이 닿았던 그 곳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보았다. 그저 여행지에 대해 ‘설명’만 하려는 그런 책들과는 달랐다. 뭐,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아.. 여행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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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리셋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필수 무기, 셀프 트랜스포메이션
심효연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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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사회를 빠르게 변화시켰고, 또 변화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떤 분야든 예외없이 모두 코로나19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장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많은 것이 변화했다. 대면회의가 일상이었고, 가끔 회식도 했으며, 구내식당에 앉아서 수다떨며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1년간, 대면회의와 회식 그 모든 게 사라졌다. 노트북을 이용한 화상회의를 하고, 회식은 금기어가 되었으며, 구내식당에서는 칸막이에 둘러쌓여 말 없이 밥만 먹는다. 심지어 일부 프리랜서나 가능했던, 재택근무라는 근무형태도 생겼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우리 회사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는 나름대로 잘 굴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생산이 줄고, 초반에는 원료 수급에 차질도 빚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대기업(하는 짓은 중소기업)이라는 이점덕분인지 나름대로는 굴러가고 있다. 반면에 어떤 회사들은 도산 직전까지 몰려, 자연스레 그 안에 소속되었던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뉴스에서 종종 접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가 항공업이나 여행업이다. 정말 아주 갑자기, 준비조차 할 새도 없이 직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만약 이렇게 갑작스레 일자리를 잃게되는 일이 나에게 닥쳐온다면, 나는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스믈스믈 기어올라올 때, 이 책 「빅 리셋」을 만났다. 이 책은 ‘셀프 트렌스포메이션’을 통해 위기를 기회를 만들도록 안내한다. 조금은 생소한 단어인 ‘셀프 트랜스포메이션’. 쉽게 말하면, 어떤 위기가 다가와도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 대항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물론 그런 카멜레온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에서든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



위기에 강한 기업이 있는 것처럼 위기에 강한 인재가 되어야 외부 환경에 영향을 덜 받는 내구성이 생긴다. 그렇다면 위기에 강한 인재란 무엇일까?(중략) 기업이 회생 불가능한 상황까지 갈 것이라는 위험 요인이 감지되었을 때 가장 먼저 회사를 떠나는 사람은 흔히 ‘핵심인재’라고 불리는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다. p 037


“역량을 갖춘다”



직장인이라면 최소 1회 이상은 들어본 말이다. 대체 역량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감이 오면서도, 뭔가 붕 떠있는 듯한 이 느낌.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는 ‘척’ 하는 바로 그 역량 말이다. 대충 일 잘하는 사람이 역량있는 사람같기도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셀프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건 결국 상황을 감지하는 빠른 판단력과 변화 유연성을 갖춰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직관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략) 내가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경쟁자는 이미 빠른 판단 후 실행에 들어간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p 064



빠른 판단력과 문제 해결력의 원천인 직관력과 이러한 직관력을 고도화하기 위한 기본 근간이 되는 세 가지 요소인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시스템적 사고, 어떤 것을 배우거나 실행할 때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하 파악하는 능력인 메타인지, 나를 객체로 두고 제3자인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는 자기객관화​를 알아보았다. p 082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직 실패로 귀결된 게 아니다. 경험이 없는데서 오는 두려움으로 결과를 예단하고 새로움과 낯섦의 가치를 미리 피하지 마라.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한다. p 093



핵심인재는 역량있는 사람이고, 역량이 있는 사람들은 셀프 트랜스포메이션에 능하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경기가 힘들어도 언제든 이직을 할 수 있고, 오히려 회사에서 이런 인재를 모으기 위해 여러 카드를 내민다. 실제로 우리회사에는 코로나시국에도 이직에 성공하며 떠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직원들이 한창 일을 하는 실무자, 중간매니저급이라는 사실은 안비밀이다. 이런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그 조직은 한동인 삐그덕거린다. 그들이 바로 그 조직의 핵심인재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역량도 쑥쑥 올리면서, 개인이 몸담고 있는 조직도 발전하여 서로 윈윈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조직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실무그룹, 핵심인재들이 매년 다른 회사로 빼앗겨버린다.



물론 전혀 반대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자리에 안주하고, 안일한 삶을 살며, 그저 한 회사에서 정년을 다하려는, 자기 발전 없는 사람들. 이들은 회사가 존속하는 한 직장생활에 문제가 없겠지만, 아마 회사가 휘청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도태될 사람들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부분이긴 하지만, 대체로 이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고인물이고, 이런 고인물 때문에 회사가 더더욱 도태되고, 조직문화가 개선이 안된다.



조직 문화를 개선하고 싶다면 좋은 사람을 늘리는 것보다 조직의 썩은 사과를 도려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 작업이 우선되지 않는 한 조직은 아무리 좋은 사람으로 채워도 나쁜 독이 퍼지는 걸 멈추기는 힘들다. p 220



“우리 회사는 정년이 보장된 회사야” 라는 한마디에 혹해서 입사를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고려해보는게 좋다. 이런 회사들은 대게, 흔히 말하는 ‘고인물’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은 언제나 현장경영을 외치지만 실상은 현장상황을 제대로 알려 하지도 않고, 문제제기도 듣고 싶어하지 않으며, 흔히 말하는 탁상행정을 논하니 말이다(물론 모든 기업을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느낀 경험담일뿐).



결국 아무리 내가 속한 조직에 대해 불만을 내비쳐봤자, 위와 같은 이유로 대부분의 조직은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불만들이 나온 조직은 변할 생각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애초에 조직문화를 개선하고 싶은 조직장들이나, 비교적 젊은 조직들은 저런 불만들이 쌓이기 전에, 미리 여러 방안을 강구하여 문제해결을 모색한다. 하지만 그 외 조직들은 변하기 어렵다. 고로 내가 변해서 더 나은 회사로 옮기는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언제까지나 조직에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현실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현재 근무하는 조직에서의 나의 명확한 위치, 업계 내에서 내가 속한 기업의 입지와 경쟁력, 업계 내에서 나의 경쟁력이다. (중략) 평생직장 개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직장은 경력의 종착역이 아니라 환승역에 가깝다. 지금 있는 곳에서의 경쟁력은 그 안에서만 유효한 것일수도 있다. 현재 속한 조직에 맞춰 적당히 눈높이를 타협하는 건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내가 속한 산업군에서의 경쟁력으로 기준을 높여야 한다.p 040~041



코로나19 이후 당장 어떤 직무와 어떤 조직이 사라질 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안정된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의 직무를 확장하여 다른 영역과의 교집합을 만들어야 한다. 직무 확장 관점에서 볼 때 잡크래프팅 수준이 높은 사람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가능하다. p 141



“코로나19로 전 세계 경기가 위기다. 이런 때에는 이직, 취직도 어렵다.”


이런 말이 아무리 나돌아도, 역량있는 사람들에겐 남의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에겐 알음알음 이직자리를 주선해주는 연락도 알아서 물밀듯 밀려온다. 



당신이 다니고 있는 조직이 얼마나 형편없는 곳인지 걸핏하면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가? 능력이 있다면 나를 인정해 주는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면 된다. p 149



그저 경기가 나쁘다고, 회사가 별로라고 입으로 불만만 토로하는 사람들은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불만을 토로하는 동안, 옆자리 동료가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는 동안, 나는 내 역량을 키우는데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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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프랑스는 시골에 있다 - 먹고 마시는 유럽 유랑기
문정훈 지음, 장준우 사진 / 상상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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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만 되면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떠났던 내게 2020년은 최악의 해였다. 해서 2021년을 기대했는데, 올해도 왠지 작년과 매우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은 두려운 예감이.. 결국 올해도 여행은.... 책으로만 떠난다. 그 첫번째가 바로 오늘 리뷰의 주인공 『진짜 프랑스는 시골에 있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은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이 때, 여행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는 책이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책은 그렇고 그런 흔한 여행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에선 뉴욕을, 일본에선 도쿄를, 프랑스에선 파리를 가봐야한다는 그런 흔한 여행지를 추천해주는 책도 아니다. 그러니 휘양찬란한 도시 여행기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를 잠시 접어야한다. 이 책은 아주 소박한 프랑스 시골을 다니는 여행기이자, 거기에 ‘미식’을 살짝 곁드린 책이다.



내 여행스타일은 대도시보다는 소도시, 도심보다는 시골이다. 대도시, 도심의 모습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소도시나 시골의 모습은 조금은 정겨운, 내가 평소에 보는 것과는 다른 풍광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의 저자도 세계 곳곳의 시골여행을 다녀서, 자타칭 ‘세계시골전문가’라고 한다. 책을 읽기도 전에 ‘시골’을 찾아다니는 이런 저자의 이력에 호감이 생기니, 책 자체도 좋게 볼 수밖에 없나보다ㅋㅋ.



거기다 내가 가본적 없는 나라 프랑스의 시골풍경이라니. 비행기값도 내지 않고, 여행계획을 짜기위한 시간도 소모하지않고, 이렇게 쉽게 프랑스 시골을 들여다볼 수 있다니. 특히나 해외여행을 갈 수 없는 지금,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같은 책이다.





 



프랑스가 선진국인 것은 GDP가 높아서가 아니라 시골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다. 농담이 아니다. 선진국일수록 시골이 깨끗하다. 선진국의 대열에 끼지 못한 나라들은 아무리 그 수도와 대도시들이 번쩍이고 화려해도 시골에 가면 선진국이 아닌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p 025



프랑스의 시골은 우리 시골과 얼마나 다를까 궁금했다. 놀랍게도 이 책속에 나오는 프랑스 시골은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물론 문화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속에 나온 프랑스 시골은 동화속에서나 볼법한 시골의 모습이었다. 도심과 떨어진 시골이라는 건 프랑스나 우리나라나 다를게 없는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고민을 해보니 역시 답은 하나다. 과거 정권들은 낙후된 시골을 개발시킨다는 미명하에 새마을 운동을 비롯한 지역사회개발운동등을 펼쳤는데, 이게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영향인 것이다.



남길건 남기고 발전시킬건 발전시켜야하는데 그냥 이것저것 죄다 바꿔버리니 각 지역별 시골 마을마을마다 그 특색을 잃어버렸다. 만약 우리가 그때 시골개발을 각 지역별 특색에 따라 했다면, 어쩌면 우리의 시골도 동화에 나올법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연과 함께 초가집이 어우러진 모습, 기와가 어우러진 모습, 그 속에 외양간에서 소가 우는 모습. 상상만해도 얼마나 정겨운 모습인가. 유럽 어딘가에 있는 시골보다 더 멋진 풍광을 자랑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시골마을은 ... 그런 운치있는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프랑스 시골마을이 쓰레기 한점 없고, 깨끗하다고 해서 아름다운 건 아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기에, 그래서 깨끗하고 더 아름다워보이는 것이다.





 


 



이 책에는 프랑스 시골 여행기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안에는 시골에서 시작하여 도심까지 장악한 프랑스 ‘미식’의 세계가 담겨있다. 토종닭, 여러 와인들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건 단연 브레스 토종닭이었다. 



뛰어난 요리사이자 소믈리에인 블랑은, 어렸을 때 동네에서 기르던 브레스 토종닭이 정체모를 닭에 의해 대체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그때의 분노를 근간으로 조르주 블랑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프랑스 브레스 토종닭 생산자 협회의 협회장이 된 것이다. p 063



유전자 특성을 규정하는 품종부터 당연히 브레스 토종닭이어야 하고, 반드시 브레스 지역 내의 땅에서만 기를 수 있다. (중략) 사실 닭이 우유를 소화한다는 과학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예전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게 원칙이다. p 076



정체모를 닭이 밥상을 차지하면서, 브레스 토종닭이 점점 뒤로 밀리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을 모른척 하던 어느 날! 이 상황을 바꾸고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유명한 요리사 블랑. 블랑은 브레스 토종닭을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고, 실제도 불도저처럼 앞으로 착착착 밀고나갔다. 그러자 정부조차도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브레스 토종닭은 다시 제 위치를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 



블랑과 브레스 토종닭 이야기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과연 우리나라 토종닭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크기가 크고 비싼 닭, 닭백숙밖에 먹을 수 없는 닭,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분명 대한민국은 닭이 점령한 나라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정체모를 닭(또는 큰병아리)로 만든 치킨이 점령한 것을 뜻한다. 정체모를 닭들로 인해 우리나라 토종닭은 그 옛날 브레스 토종닭처럼 뒤로 밀려버린지가 한참이다. 



거세한 브레스 토종 암탉을 1.8kg까지 기르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중략) 그러니 비쌀 수밖에 없다. 육질과 육향이 다르거나 특별한 가치를 소비자에게 제시해야만 소비자들이 6만원을 지불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소비자들은 기꺼이 그 돈을 지불하고 있다. p 078



본디 토종닭이란게 기르는 기간도 길고, 크기도 크고, 손이 많이 들다보니 정체모를 일반적인 닭보다 가격이 비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닭이 비싼건 용납하지 못하니, 점점더 토종닭은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저 저렴하고 싼 것만 찾는 습성이 빚어낸 상황이랄까? 반면에 프랑스를 보면, 프랑스 국민들은 브레스 토종닭을 소비하는데 한 점 고민이 없다. 즉 브레스 토종닭을 기르는데 들어간 비용을 인정하고, 충분히 그 비용을 내고 소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브레스 토종닭이 그만큼 맛있고, 토종닭요리 방법도 다양해서 ..라는 이유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 국민들의 브레스 토종닭 소비가 꾸준하니, 생산자들은 브레스 토종닭에 더 심혈을 기울여 기르게 되고, 정부는 계속해서 브레스 토종닭을 보호하는 아름다운 선순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꼭 보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까? 블랑같은 유명한 사람이 나서지 않아서 그런걸까, 아니면 국민들의 시선이 그만큼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걸까? 이유야 나열하면 많겠지만은, 그 중에서도 제일 문제는 정부의 관리문제가 아닐까.



양계농장의 닭이 소비자에게 오기까지 여러 유통업자들이 중간에 낀다. 이 유통업자들은 대체 뭘 하는진 모르겠는데, 그들은 항상 이익이 나고 양계농장은 대게 본전도 겨우이며, 소비자들은 비싼 값의 닭을 사게 된다.  비단 양계농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통업자의 중간 마진 문제는 여러 농,수산품에서 나타난다. 




 



프랑스는 와인을 만드는 포도에 대해서도 규제와 보호가 강하다. 각 포도밭을 기르는 농장주마다 포도에 대한 신념이 있고, 다른 포도 종자와는 섞이는걸 용서치 않으며, 포도밭 관리에 심혈을 기울인다. 더 나은 와인을 위해 품종개발에도 힘을 기울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쌀만 봐도 그렇다. 어떤 품종인지, 어떤 맛인지 이런건 1도 고려하지 않고 오롯이 생산량만을 따진다. 이게 무슨 일제강점기적 생각인가? 벌써 백년이 흘렀는데도, 쌀 생산은 그때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않은 건가 싶기도 하다.



프랑스 내에서도 서루 다른 등급제를 가진 보르도와 부르고뉴, 등급제가 다르니 발전의 방향도 다르다. 우리나라의 농업은 대대손손 땅을 물려주는 성향이 강하고 면적이 넓지 않다는 측면에서 보르도보다는 부르고뉴와 닮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정책이나 국가의 등급 관리는 크게 차이가 난다. 쌀을 예로 들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누가 더 농사를 잘 지었는지, 어떤 밭에서 어떤 품종으로 어떻게 농사를 지었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쌀을 모아서 도정하는 미곡처리센터에서는 지역의 여러농부들이 생산한 쌀을 한곳에 다 모아 섞어버리고, 정산은 무게로 해버린다. p 106



이런 나라에서 양계농장이 닭의 품질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쓸 것이며,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쌀 품질개량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쓸것인가? 그들이 품질이 좋은 토종닭, 쌀을 생산할지언정 나라는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으며, 똑같이 유통업자들 배를 불리게 될 것이고, 국민들은 어김없이 값이 비싸다고 불만을 토로할텐데 말이다. 그러니 각 농장주들은 굳이 시간과 돈을 써가며 품질개량을 할 이유를 못 느끼는 것이다. 한마디로 왜 우리나라는 이베리코 돼지처럼 좋은 먹이를 주며 방목하여 키워, 품질 좋은 돼지고기를 생산하지 못하는지 백날 떠들어봤자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첫인상은 그저 미식을 곁들인 프랑스 시골여행기였다. 읽으면서는 사진속 동화같은 시골마을에 눈이 갔고, 각광받는 프랑스 토종닭과 프랑스 와인을 나도 한번 맛보고 싶다 느꼈다. 읽은 후에는 왜 우리나라는 프랑스처럼 자국의 농수산물을 발전을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지 씁쓸해졌다. 



우리나라 시골 곳곳에는 토종닭이 있고 토종 소가 있으며 토종 돼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 식탁 위에는 이름모를 닭이나 소, 돼지로 가득찼다. 언제쯤 우리 식탁위에도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 음식들이 가득찰까? 그런날이 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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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풍경들
이용한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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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이 되었다. 코로나19 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제하면, 삶의 질 혹은 삶의 방식이 정말 어마마하게 바뀌었다. 조금은 어렵고 불편했던 것들이, 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바뀌었다. 조금은 비싼 것들이 값싼 중국산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우리는 편리함과 저렴함에 둘러쌓인 삶을 살고있다.


내가 코흘리개 꼬꼬마시절, 외가와 친가, 양쪽 시골집은 정말 정겨운 옛날 집 그대로였다. 춘천에 있는 친가와 영광에 있는 외가는 전부 그 지방의 특색이 담겨있는 옛집이었다. 아궁이가 있었고, 광이 있었고,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온돌이 있었고, 마루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이든 부모를 위해, 자식들은 ‘편리’한 삶을 선물하였다.

기와가 올라가있던 옛집은 사라졌다. 마루도 없어졌고, 광도 없어졌고, 아궁이도 사라졌다. 많은 추억이 있던 내 시골집은 그렇게 사라졌다.

초가를 없애면서 서민의 주거문화, 세시풍속과 생활문화 또한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p 017

내 어린 기억속의 시골집. 흡사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기와지붕을 얹은 우리 시골집엔 대청마루가 있었다. 마루 위에 앉아서 강아지들과 놀았고, 마루를 뛰어다니다 넘어지기도 하였다. 할머니가 아궁이를 때면 그 옆에서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부채질도 했었다. 집집마다 외양간에서 ‘음메-’하는 소리가 울렸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밤중에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너무 무서워서 항상 할머니, 엄마랑 같이 가곤 했다. 가끔은 요강을 쓰기도 했다. 내가 사는 집과는 전혀 다른 시골집 모습은 어린 나에게 신기한 별천지였다. 내 기억속의 시골집은 그랬다.

시멘트로 지어진 우리집과는 너무 다른 모습. 명절이나 가족행사가 있을 때만 내려갔었던 시골집이기에, 우리집과는 다른 그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신기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보는 물건이 많으니 매번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질문을 해대기도 했다. 우리집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할 경험이 가득하기에, 항상 신기했고, 재밌었고, 추억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시골집은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내 기억속에 있는 시골집은 우리동네에서 볼법한, 시멘트로 지은 주택이 되어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가장 많이 쓰이는 시멘트는, 완전히 굳을 때까지 보통 30~50년쯤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오랜시간을 쉴 새 없이 독성물질을 내뿜고 있는 셈이다. 또 도시가 열을 머금어 더워지는 ‘열섬효과’와 빗물이 땅에 스미지 않고 낮은 지대로 쏠려 일어나는 ‘도시홍수’를 일으키는 것도 사실상은 콘크리트 건축이 가져온 피해나 다름없다. p 037

새로 지은 시골집에만 가면 난 항상 코를 훌쩍였다. 워낙에 호흡기관이 예민했던 나였기에, 그래서 그러려니 했다. 이런 현상은 몇년이나 지속되었더랬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 내가 시골집만 가면 코를 훌쩍였던 건 새로 지은 시멘트 건물이 내뿜는 안좋은 물질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연그대로의 재료로 만들었던 옛 시골집에선 편하게 잘수 있었는데, 새로 지은 시골집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시멘트로 지은 신식주택이 된 시골집. 신식주택으로 지은지도 벌써 십여년을 훌쩍 넘겼다. 신식주택에서는 옛 시골집에서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기가 어려워졌다. 대청마루, 아궁이, 맷돌 등 추억을 떠올리던 매개체가 사라졌다. 밖에 있던 화장실은 집 안으로 들어왔고, 심지어 한겨울에도 따듯하다.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바뀐 시골집. 내가 사는 집과 다를 바가 없어진 시골집에서의 추억은..... 더이상 없다.

항상 흙냄새, 나무냄새가 나던 시골집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어렸을적 옛 집에서 지냈던 경험이라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런 옛 집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들에게 이런 옛 집과 옛 생활도구는 책이나 TV, 민속박물관이나 한옥마을을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와집이 무엇이고, 너와집이 무엇이고, 초가집이 무엇인지는 책속으로 배울 뿐이다. 아궁이, 요강, 맷돌등도 ‘글자’로만 배운다. 엄연히 우리의 삶에 스며들었던 생활방식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에겐 그저 옛날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갖가지 보일러 시설과 난방기구가 화로를 대신하고 있다. 화로가 우리 곁을 떠나면서 올망졸망 모여 앉은 그 옛날 추억과 정감의 불씨도 더불어 꺼져가고 있다. 몸은 따뜻해졌을지언정 마음은 어쩐지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p 049

옛날 생활방식은 요즘에 비하면 확실히 불편한 점이 많다. 간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간도 오래걸린다. 하지만 그만큼 주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오랫동안 같이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 옛날 생활방식이 그랬다. 그때 가족들의 모습은 오순도순, 복작복작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흐른 시간만큼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간단’하고 ‘편리’한 생활방식이 사회를 뒤엎었다. 지금 가족들의 모습은 ‘삭막’하고, 심지어 한 집에서 사는게 맞는지 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단절’되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콘크리트로 올린 아파트에, 스스로 갇혀 살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고, 우리 엄마도 그러하며, 내 친구들도 그렇다.

편리함만 쫓는 사회는 우리의 생활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사용하기 불편한 옛날 것이 최신식으로 바뀌면서 생활방식이 변화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그 사라지고 생겨난 것들의 종류는 정말 다양하지만, 이 다양한 것들에도 공통점이 있다. 새로 생겨난 것들은 대게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고, 값이 저렴하며, 대체로 중국산이 많다.

이렇게 다양하고 긴요한 쓰임새 때문에 옛날에는 바가지가 깨어져도 태우지 않는 금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쓸모가 많았던 바가지도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플라스틱 바가지와 일회용 그릇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점차 바가지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단출한 초가지붕에 박넝쿨이 얹혀 있는 정겨운 모습도 덩달아 볼 수 없게 되었다. p 117

더구나 최근에는 복조리마저 중국산이 판을 치고 있다. 산청군 중산리 복조리마을에서 만난 이정구 씨에 따르면, 요즘 중국산 복조리가 대량으로 수입되는 바람에 복조리 마을에서 만드는 전통 복조리 값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복조리까지 중국산이 들어와 점령할 줄은 이들도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p 123

그러나 이 두 옷감은 지금 삼베나 모시보다도 훨씬 만나기 어려운 귀한 옷감이 되고 말았다. 기계로 마구 짜내는 면사와 비단에 밀려 베틀에 걸어 짜내던 옛날 방식이 이제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무명은 전남 나주의 ‘샛골나이’란 이름과 경북 성주의 ‘두리실’이란 이름으로 그 명맥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p 153

문제는 요즘 죽부인조차 중국산이 점령했다는 것이다. 중국산은 국내산에 비해 절반 이상 싸게 팔지만, 품질은 몇 배나 떨어진다. 최근에는 비단 죽부인뿐만 아니라 부채나 소쿠리, 대자리까지 중국산이 판을 치고 있다. p 160

많은 사람들이 편리함과 저렴함을 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불편한 옛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존재한다. 누군가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는 가업을 잇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편리한 삶이 힘겨워져서, 다들 갖가지 이유로 옛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하지만 이런 옛 생활방식은 지금에 와서는 반쪽짜리가 되었다.

옛 생활방식은 대부분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짚신, 면옷, 죽부인, 조롱바가지 그 모든 것이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가성비를 쫓는 지금, 그 자리는 수 많은 중국산이 점령했다. 우리 손으로 만들면 워낙 오래걸리니, 제품가격이 비싸서 값싼 저품질의 중국산이 그 자리를 꿰찬것이다. 그렇게 우리 삶에는 수 많은 중국산이 점령했다. 끝까지 전통방식을 고수하던 사람들마저도 이 중국산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엄연히 따져보면, 아직 남아있는 종가집들 포함해도 우리의 옛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집은 없을 지도 모른다.

개발 앞에서는 모든 옛것이 진부한 것이 되었으며, 모든 자연이 거추장스러운 장애였다. 이런 현실은 지금껏 과거와 현재, 개발과 자연의 행복한 공존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사실상 해방 이후 우리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보수와 진보도 아닌 개발이었던 것이다. 개발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원하는 것을 버튼 하나로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런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세상에 이토록 발전했는데도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건 바로 그때문이다. p 216

우리는 편하게 살기 위해 개발을 택하고, 전통을 져버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나라들이 전통을 지켜가며, 우리보다 더 사회를 발전시킨 모습을 보면, 정말 우리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내가 옛 전통방식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탄식하는 건 어쩌면 모순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흐릿해진 추억이지만, 아직까지도 옛 시골집 기억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시골집에 있었던 성주신, 철륭신, 측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하고, 마을을 지켜준 서낭신은 어디에 숨었는지 궁금해 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어린 날 탔던 비료포대 썰매가 떠오르기도 하고, 빙판길을 보면 시골에서 논에 물을 가둬 빙상을 만들어 앉은뱅이 썰매를 탔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잊혀져가는 추억이 아닌, 다시금 내 앞에 현실로 펼쳐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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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고종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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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읽은 마지막 책,


내가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예스24에는 정말 좋은 기능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알림 설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딱 세명의 작가 신간 알림을 신청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박종인 기자님(기자님책은 이제 거의 다 모아가는듯? 뿌듯뿌듯). 그런데 불과 얼마전에 박종인 기자님의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이 온것이다. 늘 책에 둘러쌓여있지만, 이상하게 읽을 책이 없는 상황에 마주했는데. 이건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라며 책 구매를 합리화...ㅋㅋㅋ)! 그러니까 이 책은 정말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이 책의 제목은 「매국노 고종」. 제목부터 쎄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제목을 보고 불편한 심기를 보일지도.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제목이 정말 딱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선왕조에서 제일 무능한 왕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이 선조와 인조를 꼽을 것이다. 정말 우열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능했던, 많은 백성들을 외적의 손에 도륙되게 만들었던 그 왕들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무능했던, 거기다 선조와 인조 못지않게 백성들을 도륙했던 또 한 명의 왕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게 바로 고종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자(순종은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말이다.

현 정부, 과거 정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국사 교과서에 실린 고종의 모습은 그야말로 ‘개혁군주’다. 개혁군주 고종의 모습은 이렇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본 몰래 군자금을 모았다. 이위종, 이상설, 이준을 헤이그 특사로 보냈다. 독립협회를 지원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런 내용들이 잘 버무려져,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종을 개혁군주로 칭하고, 망국의 왕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 고종을 미화하고 있다.

헤이그 밀사는 바로 이 일본의 야만성을 고발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간 밀사들이었다. 그런데 이위종이 한 이 연설 첫머리는 우리 민족주의적 상식과 많이 다르다. 위 인용문 가운데 ‘(중략)’으로 가려진 부분을 열어보자.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 믿었다.” p 015

(우리가 이 대목을 몰랐던 건)이 문장은 고종이 자주 독립을 염원하는 개혁군주였다는 허황된 신화를 깨뜨릴수 있는 사실, 팩트이기 때문이다. p 016

독립을 위해 헤이그특사를 보냈다던 고종이었다. 독립협회를 지원했다던 고종이었다. 우리는 그렇게만 배웠다.

자신만의 왕정을 위해, 외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협회는 정말 좋은 카드였다. 하지만 독립협회 관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제’ 안건이 나왔다.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은 자신만의 왕정을 무너뜨리는 사안이었다. 고종은 본인의 자금과 인력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자신만의 왕정을 위해서.

외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카드 헤이그 특사는 어떠한가. 우린 헤이그 특사로 간 그들이 고종 정권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지 못한 인용문을 들여다보니, 왠걸. 헤이그 특사로 간 그들은, 자신들을 특사로 보낸 고종의 정권을 비판하였다. 고종이 통치하는 조선이 어떠한 나라였는지, 당시 조선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조선을 정탐한 일본인 혼마 규스케의 「조선잡기」에도 아주 적나라하게 나와있다(읽어보면 정말 고구마 오백만개를 먹은 느낌).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반성의 역사로 가르치면 참 좋았겠지만, 반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모르는 (현정부 포함)역대 정부들로 인해, 우리는 입맛에 맞게 선별된 역사만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내용을 모른다.

어쩌면 나 역시 학교에서 배웠듯, TV에서 말하듯 고종을 계속 개혁군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통이 커지면서, 고종시대에 대해 위화감이 생겨났다. 민씨 세력이 그렇게 활개를 치며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데, 고종은 대체 무얼했을까?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던 민씨 세력은, 바로 고종의 부인인 민비의 세력이었는데, 개혁군주라는 고종은 이걸 그저 보고만 있었던걸까? 분명 그 시대에는 부패하고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민씨세력 말고도, 개화를 하고자 했던 개화세력도 있었는데 왜 고종은 굳이 민씨 세력을 옆에두고 개화세력은 모른척했을까? 도저히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불쌍한 백성들이었는데, 왜 고종은 외국 군대까지 불러들여가며 학살했을까? 등등.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 실상을 알게된 순간, 지금까지 내가 배운 것은 그저 입맛대로 선택되고, 때로는 미화된 매우 ‘단편적이고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랍지 않은가. 망국의 원인은 분명 고종에게도 있는데, 우리는 망국의 원인을 친일파 내지는 세도정치를 자행한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만 욕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배운 고종은 언제나 망한 나라의 가엾은 왕, 개혁을 하려했으나 외세에 억눌려 결국 실패한 왕이었다.

조선은 국가였나. 고종은 그 국가의 지도자였나. 실질적으로 조선 왕국 최후 지도자로서 그는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가. 앞으로 부국과 강병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고종의 행적을 알아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 고종은 매국노다. p 013

고종이 왕위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궁궐의 제일 큰 어른이었던 조대비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당시 이하응은 왕족이었으나 왕족이 아니었다. 노론 안동 김씨가 좌우하는 그 시기를 살아오며,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바보’를 연기했던 사람이다. 바보를 연기하며 그는 삼정이 문란하여,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백성들의 생활을 보았다. 죽은자에게도 세금을 물렸고, 어린아이에게도 세금을 물렸다. 이하응은 그렇게 자기 뱃속만 채우는 노론 안동김씨 세력의 가렴주구한 행태를 보아왔다. 속으로 이를 갈고도 남았음이 틀림없다.

그 이하응이 조대비와 결탁하여, 자신의 둘째아들 이재황을 조선의 26대 왕으로 만들었다. 왕이 된 이재황은 어리다는 이유로 조대비가 수렴첨정을 했으나, 조대비 뒤에는 그의 부친 이하응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하응, 즉 흥선대원군의 세상이 되었다. 속으로 이를 갈던 흥선대원군은 망국으로 쓰려져가는 조선을 건져올리는 개혁을 시작했다.

왕권을 무시하는 노론 집단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원군이 날린 직격탄이 만동묘 철폐와 서원 철폐였다. p 042

인사부터 세금까지, 국가자원이 사적으로 낭비되던 기존 사회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정치권 내부에서는 인조반정 이래 250년 만에 처음으로 노론 독재가 무너지고 다양한 인재가 인력풀로 흘러들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문신 지시를 따라야 했던 장군들이 국가 의사결정 과정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북벌을 기획한 효종 이래 처음으로 부국강병책이 정책 차원에서 입안돼 진행되기 시작했다.

백성을 영혼까지 괴롭혔던 세금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대원군 정권은 조선왕조 역대 정권 최초로 양반 계급의 세제 특혜를 회수해 일반 서민에게만 부과되던 납세 의무를 양반계급으로 확대했다. 임진왜란 후 누적된 내부 모순을 정권 스스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p 049

우선 비정상이 정상이었던 시스템을 뜯어 고쳤다. 세도정치의 주된 세력인 노론을 와해시키기 위해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했다. 만동묘는 노론의 자존심이오, 서원은 노론의 지지세력이다. 노론이 쥐고 있던 인사권을 무너뜨려, 노론독재를 막고, 남인, 북인도 등용하였으며, 국방강화를 위하여 무신의 지위도 상승시켰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백성을 힘들게했던 세금제도를 싹 정비했다. 심지어 양반에게도 세금을 걷었다.

어쩌면 이때야말로 조선이 서양의 여느 나라처럼 바뀔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바로 이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조선 왕국은 대량살상무기를 대량으로 적재한 군함이 대량으로몰려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고종정권 또한 조선을 에워싸고 벌어지는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기감에 대한 대책은 청나라 같은 개방정책이 아니라 한층 더 강화된 ‘쇄국’이었다. p 031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는 말은 청빈한 공무원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국가 지도자는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될 말이다. 국가지도자라면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자 국가 ‘가오’를 앞세울 권리는 없다. 대원군은 그랬다. 가난한 나라 최고지도자로서 대원군은 가오를 택했다. p052

흥선대원군은 실책을 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실책으로는 ‘경복궁 중건’, 그리고 ‘쇄국’이다. 경복궁 중건을 하기 위해 당백전을 마구잡이로 찍어내어, 조선의 물가는 폭등하고 화폐가치는 폭락했다. 외국 범선들이 조선을 왔을 때, 개방이 아닌 ‘쇄국’을 택하여 결과적으로 많은 피를 부르는 한 수를 두었다.

동시대 일본은 외국 범선이 왔을 때, 외국의 발전된 사회를 알았고 개방을 했다. 무작정 개방을 한게 아니라, 외국의 문화를 수용할건 수용하고 자국의 문화를 지킬건 지키는 등의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하지만 조선은 건국때부터 5백년간 이어져온 그놈의 주자성리학적 세계관에 함몰되어있었다. 주자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에서 서양문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인가? 그런 조선에서 나라를 부강하게 이끌 수 있는 상업과 과학은 천하디 천한 것이었다.

조선은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만인의 어버이가 되어야 할 왕과 사대부라는 것들은 끊임없이 명나라를 부르짖었다. 백성들이 배곯아 죽어가든, 과한 세금으로 죽어가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나라가 조선이었다.

결국 흥선대원군도 그러한 조선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회를 개혁한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왕권 강화를 위함인 것이다. 개혁을 시작함에 있어서, 민생안전보다 왕권강화가 우선이었기에. 결국 흥선대원군의 이런 실책은, 그 자신을 몰락시키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철렴과 비공식적인 친정 선언까지 7년 9개월 동안 권력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그가 바로 대원군이다. 만 8년 가까이 고종은 허수아비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대원군은 ‘함여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재야 시절 목격하고 들었던 망국 일보 직전 나라 꼬라지를 갈아 엎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경복궁 공사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이에 따른 경제난은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결정적인 무기로 작용했다. 권력욕에 불타던 아들 고종은 그 노론과 연합해 마침내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다.p 074

흥선대원군이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실책을 본 아들이었으니,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점은 버리면 될일이었다. 고종이 벽수가 아닌 이상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테니, 세계 정세에 발맞춰 조선을 바꿔가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고종은 더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는 적어도 ‘민생안정’이라는 개념이 있기라도 했지, 아들 고종에게는 그것조차 없었다. 고종의 머릿속에 있던건 오로지 자기의 명예와 안위였다.

1874년 6월 20일 고종을 친위하는 궁궐 수비대, 무위소가 공식 출범했다. p 088

무위소는 한성에 흐르는 각 개천 준설공사를 주관하고, 돈을 발행하고, 군수품 제작용 대나무와 쌀, 돈, 나무, 옷감 상납을 관리하는 비군사적 행정에까지 개입해 그 관리들을 처벌하는 권한까지 행사했다. (중략) 영의정 이유원과 우의정 박규수가 의심했던대로, ‘맡지 않은 직임이 없고 기행하지 않는 일이 없는’ 괴물을 고종은 단독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p 092

고종은 본인의 친위대 ‘무위소’를 만들었다. 그 무위소에 고종은 막강한 권한과 막강한 권력을 주었다. 분명 고종의 친위부대로 만든 조직인데, 이 조직은 각종 행정/군사/형사 모든 일에 권한을 휘둘렀다. 각 분야별로 그에 맡는 전문가 집단이 있었으나 있지않았다. 모든 일을 권력을 등에 업은 무위소가 진행하니, 힘없는 전문가 집단이 무슨 힘으로 일을 하겠는가. 무위소는 그야말로 고종 본인만을 위한, 자기의 왕권 강화를 위한, 무소불위의 조직이었다.

도성 문세를 비롯해 각종 세금을 일거에 탕감하거나 제도 자체를 없애면서 재정은 더욱 힘들어졌다. 대원군이 그 세금을 신설한 이유는 강병이었다. 특히 강화도 병력과 무기 증강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순식간에 조선은 사용처는 있는데 사용할 돈은 없는 막장 조세 행정국가로 전락했다. 그 재정을 메꾸기 위해 지방에서는 각종 잡세를 신설해 거둬들였다. p 115

나라가 파산 일보 직전에 있는데 그 고종이 한 동안 중단했던 경복궁 중건공사를 재게하겠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영의정이 말했다.

“현 재정 상태가 매우 궁핍하여 경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종의 대답은, 과연 고종다운 걸작이었다.

“경비를 의정부에서 알아서 조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을 해나가겠는가”

공사는 자기가 명령하겠으니, 그 비용은 삼정승이 알아서 조달하라는 뜻이다. p 117

고종은 조선 경제에도 많은 타격을 입혔다. 그동안 조선에서 유통되던 청전을 폐지하였다. 국고에 있던 청전은 쓰레기가 되었다. 국가 예산으로 모아둔 돈이 순식간에 한낱 쇠붙이로 전락했다. 고종은 하고 싶은게 참 많은 왕이었다. 헌데 본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국고가 텅 비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 돈은 신하들이 채워야하고, 백성들이 채우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고종이었다(현정부 포함 역대 정권에서 뭔가를 저지르고, 세금을 미친듯이 올려받는 모습이 오버랩된다면, 당신은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이다).

고종은 경제와 재정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벌인 언행에는 무능과 무식보다 더 심각한 이기심과 탐욕이 읽힌다. 오직 자기만을 위한 작은 그림에 열중해 공동체를 위한 큰 그림을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는. 불행하게도, 그 정책 방향과 무책임과 이기심은 망국의 그날까지 스케일을 업그레이드하며 증폭됐다. 고종은 무능력한 지도자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 국가를 희생시키는 사악한 지도자였다. p 120

우리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여, 조선이 피폐해졌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후에 고종이 다시 경복궁을 중건, 심지어 확장보수까지 한 사실을 배우지 않았다. 경운궁 중건도 배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평양에 360칸 궁궐을 짓는 공사를 진행한것조차 배우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실책이라 배웠고, 그래서 백성들이 고통받았다고 배웠는데, 그럼 고종이 한 행동은 뭘까? 본인이 말한 조세개혁으로 나라의 곳간은 비웠는데, 어마무시한 궁궐, 토목공사를 진행했다. 나라에 돈은 없는데, 그 막대한 공사비용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유원은 “최근 신문고를 치는 사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며 백성들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고 고종에게 우회적으로 눈치를 줬다. 그러자 고종이 말했다.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p 087

고종이 저지르는 수많은 일들을 위해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가니, 백성들이 살기 어렵다고 신문고를 치는 횟수가 잦았다. 이런 상황을 본 고종이 한 말은 가관이었다. 대궐문을 엄중히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이다. 정말 어이없게도, 백성을 지켜야 할 한 나라의 왕이 한 말이다. 왜 백성들이 신문고를 칠수밖에 없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뿐이랴? 심지어 고종은 살기 힘들다고 죽창들고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서양에서 수입한 개틀링건을 무참히 쏘아댄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부른 사람이다. 그 청나라군대를 뒤따라온 일본군도 뒷짐지고 바라본 사람이다.

조선의 백성을 지켜야할 조선의 군대가 조선의 백성인 동학군을 죽이고, 청나라 군대가 동학군을 죽이고, 일본군이 동학군이 죽이는 모습을 고종은 그저 바라보았다. 오히려 자기에게 반기를 든, 역적 동학군을 빨리 토벌하길 바라던 사람이다.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자기가 보호해야할 자국의 백성들을 토벌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로 모잘라서 외국군대까지 불러와 학살한 사람이다. 애초에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정말 만인의 어버이라는 왕이 맞았을까?

왕이 부정을 저지르면 신하된 자들은 어떻게든 바른 길로 인도해야하거늘, 고종 곁에는 고종과 함께 백성들의 피고름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바로 민비와 여흥 민씨일족이다.

나라가 거덜이 났는데, 저 황제는 무슨 생각으로 ‘대대로 충정을 돈독히 해 온’ 자기 사돈 집안에 국정을 맡길 궁리를 했다는 말인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개혁파가 득실대고 있는데, 고종은 그들을 외면하고 자기 혀와 같은 척족을 자기 옆에 앉히려고 애원을 하고 있었다. p 126

민씨 세력은 1885년 고종이 설치한 ‘내무부’시대가 되면서 급증했다. 내무부 수장인 독판은 민병석, 민응식, 민영상, 민영준, 민영소, 민두호, 민영환등이었다. 1880년대 중앙과 지방관직에 진출한 민씨는 260명 정도였다. 이들 민씨는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의정부가 아니라 국왕 고종이 중비(특채)를 통해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p 135

서양문물을 보고 배운 개화세력이 있었음에도, 고종은 민씨일족을 등용했다. 세계정세를 바로 보고, 민생을 생각하는 올바른 군주라면 개화세력이나, 제대로 정치를 하는 관리들을 옆에 뒀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직접 민씨들을 불러와 사회 곳곳에 배치했다. 주변에 인재가 없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민비의 일족인 민씨들을 끌여들어 사회 곳곳에 배치했다. 그렇게 사회 곳곳에 스며든 민씨들은 안동김씨보다 더할 정도로 백성들을 수탈하였고, 매관매직을 밥먹듯이 하였다. 이렇게 부정부패, 매관매직을 일삼던 민씨들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일본의 은사금을 받는 친일파가 되었다.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은 감시될 수 없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한다. 부패를 유지하기 위하여, 독점된 권력은 변혁을 거부하고 현상 유지를 택한다. 권력을 사유화하면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민씨 척족 정권이 그러했다. p 138

고종과 민씨 척족들의 연합. 고종의 만행만으로도 민생이 죽어갔는데, 민씨척족까지 가세하니 조선은 망국행 특급열차에 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외부 한켠에 북묘비가 서있는데, 그 비석에는 우리가 모르는 고종과 민비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이야기속에 있는 고종과 민비는 한심 그 자체였다. 고종은 민비와 함께 무당 진령군에게 빠져있었다. ‘진령군’이라는 군호도 고종이 내린 것이니, 얼마나 이 무당을 믿었는지는 두말 하면 입아프다. 궁 한복판에서 굿판을 벌이고, 금강산 1만 2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천냥, 무명 한필 씩 바치기도 했다. 백성들은 세금내느라 본인들 먹을게 없어 죽어가는데, 고종은 그 백성들에게 거둔 세금을 무당에게 몽땅 가져다주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을때까지, 고종과 민비는 무당 치마폭에 있었다.

고종과 민비가 무당에게 이토록 빠져있을때, 조선의 관리들은 뭘했을까? 당연히 “아니되옵니다” 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왔다. 하지만..

진령군을 참수하라는 안효제 상소를 ‘화를 내며’ 거부한 사람도 이 민영휘였다. 민영휘는 1889년과 1890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며 가혹한 세금으로 악명을 떨쳤다.

p 155

진령군을 탄핵하는 상소에 민씨 척족들이 맞섰다. 이쯤되면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관리들이라 할지라도, 비정상의 정상화에 짓눌려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은 그렇게 망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웠던, 외세와 맞서기 위해 자주적인 황제국을 선포했던 그 유명한 ‘광무개혁’도 보자. 우리는 스스로 자주독립을 지켜나가고, 최초의 헌법을 반포한 이 광무개혁을 빛나는 역사로 배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도 독립협회나, 헤이그 특사만큼이나 반전이 숨어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그날, 우리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반포되었다. 총 9개 항복으로 이루어진 이 헌법의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게도, 백성을 위한 내용이 단 한개도 없다. 요컨데 이 헌법의 내용은 대한제국은 전제정치로 이뤄지며, 모든 권한은 황제에게 있고,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라는 내용이다. 왕정이 대세였던 중세라면 모르겠지만, 이때는 이미 공화정이 대두되는 시대였고, 인권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서양에선 전기를 쓰고, 지하철이 다니는 그런 시대였다. 하지만 고종이 다스리는 조선은...? 곧죽어도 왕정이었다.

고종은 정말 개혁군주이고, 불쌍하디 불쌍한 망국의 왕이 맞는걸까?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만으로도 고종은 조선의 왕이 아니었고, 개혁군주도 아니었으며, 불쌍하디 불쌍한 망국의 왕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명예, 부를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이다.

완벽한 정책은 없다. 완벽한 개인도 없다. 완벽한 권력도 없다. 정책 오류를 즉각 시인하고 대안을 준비하면, 그 권력은 장구하다. 진화하는 것이다. 권력의 진화와 함께 권력을 떠받치는 공동체 또한 진화한다. 완벽하지 않는 정책, 하물며 엉터리 정책을 끝까지 폐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면 공동체는 붕괴되고, 그 권력에 반기를 든다. p 102

고종의 행태를 보면 현 정권을 포함하여 역대 정권에서 자행한 대책없는 수많은 정책들이 보인다. 대책없는 그 정책들은 언제나 국민들을 수렁에 빠뜨렸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그렇다. 아주 소오름 돋게도 이 부동산 정책에 속앓이했던게 바로 나다. 몇년을 전세살다가 청약된 아파트로 이사가려 했더니, 바뀐 대출정책으로 전세자금대출조차도 1주택으로 보기 때문에, 주담대가 일정액 이상으로는 힘들다는 은행의 이야기. 전세라는게 내 집이 아니라, 남의 집에 얹혀사는건데 그 전세대출이 1주택이라니. 은행 상담사도 어이없어서 웃고, 듣는 나도 어이없어서 웃고. 결국엔 다른 여러 은행 상담을 받아, 겨우 주담대를 받아 이사를 갈 수 있었다. 난 다행히 운좋게 풀린 케이스. 결과적으로 현 정권이 만들어낸 부동산 정책은 집값에 최소 50%은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마음 편하게 이사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아니 근데, 나는 서민인데? 부동산정책은 서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나. 하 어이없ㅋㅋ). 뭐 여기까지는 지금을 사는 서민의 흔한 TMI(난 무엇을 위해 투표를 했나....).

뭐, 여튼! 한 정권에서 정책 헛발질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은 언제나 국민의 몫이었다. 무수히 많은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변치않은 사실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 책의 주인공인 고종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 현정권 포함 역대 정권들은 고종을 개혁군주로 미화하고 포장한단 말인가. 그래서 역대정권들이 이런 고종을 본받아서 계속 정책 헛발질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국민들을 도탄에 빠트리는 것일까. 하. 어차피 어떤 정권이든 국민을 도탄에 빠트리게 한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큰 정부가 아닌 작은 정부가 나은건 아닐까 싶고. 대체 정부라는게 왜 있는건가 싶고. 올 한해는 유독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

래!

서!

우리는 반성의 역사를 배워야하는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류성룡이 「징비록」을 왜 썼는지 모르는 걸까? 수많은 매체에서 「징비록」에 대해 그렇게 다뤘는데도 이런 사회라니. 참으로 슬플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하게 반성의 역사를 알려주는 박종인 기자님의 글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적어도 나에겐 기자님이 쓰시는 글은 현대판 징비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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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20-12-30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종비판론자중하나입니다 명성황후와더불어 망국적상황을 포장하고자 과대평가되었다봅니다 그들에겐 무려 40년이상의시간있었습니다 망국으로부터요 최고권력자이자 최종결정권자로 면책이 어렵다봅니다 나라가아닌 황실만을 생각한면도 꽤크구요

피로 2020-12-31 11:40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른 매국노들은 계속 기억되고, 계속 배우는데 말이죠. 유독 고종만 동정론에 휩싸인다는게 참 어이가 없을 따름이에요..

거꾸로 2020-12-31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책이 왜 이제서야 나오는가 !

피로 2021-01-06 07:42   좋아요 0 | URL
이제 이런 책들이 많이 발매되길 기대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