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일요일 밤 <비우티풀>
그 사이의 술, 지평 막걸리와 맥주와 순하리 소주와…
금요일 밤에는 왠지 모르게 피곤해 퇴근 후 떡볶이를 먹으며 놀고 쉬었다. 밤이 됐을 때 같이 사는 친구가 술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왠일로 거절했다. 방에 불 꺼두고 담요 덮고 엎드려 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바톤 핑크>와 <애리조나 유괴사건>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이의 시간은 이십 년 정도 지나지 않았나.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 아, 맞다, 난 스릴러를 좋아했지. 보는 내내 말 그대로 숨죽였다. 흐름을 끊고 싶지도 않아서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도 참음. 이걸 이걸 큰 화면에서 봤더라면. 아쉬움이 남았다. 항상 좋은 영화를 나중에 노트북으로 보게 되면 후회하게 된다. 좋은 모니터를 당장 살 수도 없고. 요새는 영화가 나쁘지 않을 것 같으면 극장으로 달려간다. 하도 후회를 많이 해서 그런가. 보는 동안 피튀기고 총질하는 내용에 비해 톤이 일정해서 계속 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좋아서 미쳐버리는 줄.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 모든 장면이 하비에르 바르뎀의 짙은 선. 눈꺼풀과 콧망울, 턱에 진하게 잡힌 그림자들.
토요일은 술을 마셨다. 친구가 사는 동네에 놀러왔고 사실 빈번하게 와서 막 반기고 그런 건 아니고… 만나자마자 술집에 들어갔다. 진정한 술친구인가. 술(을 위해 만나는)친구는 아닌 걸로. 술(을 만나면 시너지 폭발하는)친구 사이인 걸로. 원래 집앞에 단골술집이 있어 그쪽에서만 마시는 편인데 윗동으로 괜히 올라가봤더니, 이런 새로운 술집이 생긴 거다. 밖에서 보니 분위기도 괜찮아보여 올라갔더니 진짜 괜찮아서 놀랐다. 연남동에서 이쪽으로 넘어온지 이주 됐다고 했다. 지평막걸리와 초당두부구이 시켜서 두부구이 나오기 전에 한 병을 넘겼다. 한달에 한 두번은 무조건 만나는 사이라 거의 근황을 서로 듣고 시덥잖은 얘기를 하곤 하는데 그날도 그랬고 몇 병을 더 넘기니 내 입에선 이런 말이 나왔다. 너 그 집에서 나와야겠다. 머리는 복잡할 수록 더 복잡해진다. 친구는 지금 복잡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복잡한 바깥일을 풀어내려고 한다. 너 그 집에서 나와야겠다.
그러다 집앞 단골술집으로 내려와 같이 사는 친구까지 합세 해서 막걸리를 순하리 유자 소주를 마셨다. 바깥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굉장히 어려보이는 남자 열 명 정도가 술집에 들어와서 왁자지껄하게 주문을 했다. 왁자지껄은 귀엽지 않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어 그들이 말이 다 들렸는데 도저히 참기 힘든 비하와 욕들이 (가장 화가 나는 건 낄낄대며 옆 친구를 욕하는 단어가 누군가를 비하하는 뜻이라는 점) 열 개의 입에서 모조리 쏟아져 나왔다. 친구는 참기 힘들어 집에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러하다. 저들 때문에 내 술 할당량을 못채울 수는 없는 거다. 나는 쟤들이 집에 갈 때까지 여기서 조용히 저 말을 다 들으며 술을 마시겠다. 그리하여 그리했다. 친구는 옆 테이블 커플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주었고 우린 다같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남자가 번데기탕을 못먹는 여자 앞에서 멋쩍은 얼굴로 번데기탕을 흡입하는 동안 나는 계속 달디 단 소주 먹으면서 그들이 하는 얘기를 다 들었다. 왜 이런 오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세 시 쯤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리 아래론 소주병이 굴러다녔는데 그게 좋은데이 석류였다. 이제 그들을 만나면 석류보이라고 부르리라. 에라이.
일요일 늦게 일어나 라면으로 다같이 해장을 하고 무한도전을 보고 또 무엇을 했나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만지작거리고 뭐 그랬다. 해가 슬슬 지려고 했는데 아, 영화를 보고 싶었다. 좋은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이대로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우티풀> 다운 받았다. 왠일로 같이 사는 친구도 보지 않은 영화라고 해서 셋이 다같이 거실에 모여 앉아 불 꺼두고 산딸기바게트와 바질샌드위치 커피 입에 넣으며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면서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 둘 이상이면 그건 안되는 건 가봐… 힝. 그러다가도 영화가 중반부에 접어들자 아무 말 없었다. 영화 밖으로 들리는 소리라고는 향초 나무심지 타는 소리 뿐. 조용히 영화를 보았고 밤이 되었다. 이번에도 영화를 다 본 후 아 좋다, 와 좋다 하는데 친구들도 같이 아 좋다, 와 좋다 하니 더 좋고 더 좋은 기분. 감독이 나는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 같아. <버드맨>에서도 엄청 날잖아. <버드맨>보다 나는 이게 좋아. 아, 나도 이게 더 좋아. 이런 얘기를 하면서. <버드맨> 너무 세련되게 만들었어. 그래 너무 세련됐지. 물론 좋았지만 오늘이 더 좋은 걸 어쩌나. 비우티풀, 비우티풀.
여튼 이번주 주말은 하비에르 바르뎀과 함께. 연기왕 만세만세만만세!
탄력 받아서 오늘은 같이 사는 친구와 <이민자>보기로 했다. 친구와는 영화를 같이 보기도 하지만 같은 영화를 따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민자>는 함께 보고 나와 감탄을 쏟아낼 옆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 잠을 못자 눈이 아프지만 오늘 밤은 <이민자>. 요새 사이가 좋다.
뿌잉. 오늘 어쩌다보니 이렇게 길게. 자주 쓰고 싶은데 사실 부끄러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