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올해는 시집을 많이 읽지 않은 것 같다. 서점에서 확 땡기면 확 사기도 하고 알고 있는 시인의 새 시집이 나오면 몇 편을 읽어보는데 유난히 올해는 읽지 않은 느낌이다. 세 권 정도. 그 중에 한 권은 아직도 읽는 중.
그래도 올해 1월 읽은 시집이 참 좋았다. 이제니를 막 좋아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 시집을 읽고 좋아짐. 그 전에 나온 시집보다 몇 겹이 더 쌓인 느낌이다. 좋아서 몇 개의 시는 여러 번 여러 번 외우듯 읽었다. 그 중에 이것! <분실된 기록> 참 좋다.
분실된 기록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에서.
꿈속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펼치자마자 접히는 책
접힌 부분이 전체의 전체의 전체인 책
너는 붉었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검었던 시절이 있었다
검었던 시절 다음엔 희고 불투명한 시절이
희고 불투명한 시절 다음에는 거칠고 각진 시절이
우리는 이미 지나왓던 길을 나란히 걸었고. 열린 눈꺼풀 틈으로 오래전 보았던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나무와 하늘 속의 고양이
나무와 하늘과 고양이 속의 하늘과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잎들은 눈부시게 흔들리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지금 순간의 안쪽에 있는 것인가.
아니요. 당신은 지금 슬픔의 안쪽에 있어요.
슬픔의 안에. 슬픔의 안의 안에.
마치 거품처럼.
우리는 미끄러졌고 이전보다 조금 유연해졌다.
언젠가 내가 썼던 기억나지 않는 책
언젠가 내가 읽었던 기적과도 같은 책
지금은 그저 이 고통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도록 하자. 우주의 밖으로 나갔다고 믿는 자들이 실은 우주 속을 헤매는 미아일 뿐이듯이. 우주의 밖은 여전히 우주일 뿐이니까. 슬픔 안의 슬픔이 슬픔 안의 슬픔일 뿐이듯이.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백지와 백치의 해후
후회와 해후의 악무한
텅 비어 있는 페이지의 첫 줄을 쓰다듬는다.
슬픔에는 가장자리가 없고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펼쳐서 읽어라
펼쳐서 다시 써라
분열된 두 개의 손으로 쓰인 책. 너는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극적인 빛을 끌고 나타났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밤은 길어진다. 손은 어두워진다. 너는 다시 한 발 더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무수한 괄호들 속의 무수한 목소리들
말과 침묵 사이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
이름 없는 이름들을 다시 부르면서
다시 돌아온 검은 시절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듯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듯이
이건 작년에 가장 좋아했던 시집. 그 중에 가장 좋아했던 건<겨울>
겨울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그가 언덕에서 내려왔다. 그는 언덕 너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햇빛에 눈이 녹았다. 무언가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너에게 가 너의 살을 보았다. 너의 살을 핥았다. 조금 짰다. 조금 흐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네 옆에서 눈을 떴다. 까치 한 마리가 너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네가 우물에 돌을 던지며 웃던 날을 기억했다. 그 우물은 얼어 있었다. 너도 얼어 잇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언덕을 올라갔다. 나는 언덕 너머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나는 너에게 토끼 가죽신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이가 몇 개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나는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언덕 너머에서 한 사내가 왔다. 그는 나를 너무 닮아 있었다. 나는 그를 외면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마을이 사라졌다. 너도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