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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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는 지난한 시간이 지난하지 않게 쌓이는 중. 언제나 뒤집어지는 작은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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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올해는 시집을 많이 읽지 않은 것 같다. 서점에서 확 땡기면 확 사기도 하고 알고 있는 시인의 새 시집이 나오면 몇 편을 읽어보는데 유난히 올해는 읽지 않은 느낌이다. 세 권 정도. 그 중에 한 권은 아직도 읽는 중.

 그래도 올해 1월 읽은 시집이 참 좋았다. 이제니를 막 좋아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 시집을 읽고 좋아짐. 그 전에 나온 시집보다 몇 겹이 더 쌓인 느낌이다. 좋아서 몇 개의 시는 여러 번 여러 번 외우듯 읽었다. 그 중에 이것! <분실된 기록> 참 좋다.

 

 

 

 

 

 

 

 

 

 

 

분실된 기록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에서.

 

꿈속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펼치자마자 접히는 책

접힌 부분이 전체의 전체의 전체인 책

 

너는 붉었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검었던 시절이 있었다

검었던 시절 다음엔 희고 불투명한 시절이

희고 불투명한 시절 다음에는 거칠고 각진 시절이

 

우리는 이미 지나왓던 길을 나란히 걸었고. 열린 눈꺼풀 틈으로 오래전 보았던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나무와 하늘 속의 고양이

나무와 하늘과 고양이 속의 하늘과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잎들은 눈부시게 흔들리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지금 순간의 안쪽에 있는 것인가.

 

아니요. 당신은 지금 슬픔의 안쪽에 있어요.

슬픔의 안에. 슬픔의 안의 안에.

마치 거품처럼.

 

우리는 미끄러졌고 이전보다 조금 유연해졌다.

 

언젠가 내가 썼던 기억나지 않는 책

언젠가 내가 읽었던 기적과도 같은 책

 

지금은 그저 이 고통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도록 하자. 우주의 밖으로 나갔다고 믿는 자들이 실은 우주 속을 헤매는 미아일 뿐이듯이. 우주의 밖은 여전히 우주일 뿐이니까. 슬픔 안의 슬픔이 슬픔 안의 슬픔일 뿐이듯이.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백지와 백치의 해후

후회와 해후의 악무한

 

텅 비어 있는 페이지의 첫 줄을 쓰다듬는다.

슬픔에는 가장자리가 없고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펼쳐서 읽어라

펼쳐서 다시 써라

 

분열된 두 개의 손으로 쓰인 책. 너는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극적인 빛을 끌고 나타났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밤은 길어진다. 손은 어두워진다. 너는 다시 한 발 더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무수한 괄호들 속의 무수한 목소리들

말과 침묵 사이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

 

이름 없는 이름들을 다시 부르면서

다시 돌아온 검은 시절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듯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듯이

 

 

 

 

이건 작년에 가장 좋아했던 시집. 그 중에 가장 좋아했던 건<겨울>

 

 

 

 

 

 

 

 

 

 

 

 

 

겨울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그가 언덕에서 내려왔다. 그는 언덕 너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햇빛에 눈이 녹았다. 무언가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너에게 가 너의 살을 보았다. 너의 살을 핥았다. 조금 짰다. 조금 흐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네 옆에서 눈을 떴다. 까치 한 마리가 너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네가 우물에 돌을 던지며 웃던 날을 기억했다. 그 우물은 얼어 있었다. 너도 얼어 잇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나는 언덕을 올라갔다. 나는 언덕 너머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나는 너에게 토끼 가죽신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이가 몇 개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나는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언덕 너머에서 한 사내가 왔다. 그는 나를 너무 닮아 있었다. 나는 그를 외면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마을이 사라졌다. 너도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읽었다.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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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퇴근 후 노리터플레이스로 향했다. 와우북페스티벌 낭독회 <시인은 살아있다 _ 김수영> 에 가려고 느긋이 찬바람 맞으면서 걸었다. 백자의 무대도 좋았지만 단편선의 무대가 압도적. 으아 세상에 저런 발벗고 미친 사람처럼 노래부르는 사람이 있어서 좋아. 엄청 좋았다. 머리가 펄럭펄럭 눈이 번뜩번뜩 노래 부르니 좋아. 중간에 김수영의 <성>을 짧게 낭독하기도 했다. 답다, 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이영광 시인의 말들이 좋아서 또 한참 좋다좋다 이런 생각. 다음달에 산문집이 나온다고 하니 기대해야겠다. 이날은 친구에게 술을 샀다. 밤거리 쏘다니며 동네와 애매한 거리에 있던 바에 가서 만오천 원짜리 육포와 채소 안주를 시켜먹......아......그릇이 비쌌겠지......

 토요일엔 <이 시대의 어른에게 묻는다> 황현산 평론가의 강연을 들었고 홍대 중심거리를 장악한 책들을 구경구경했다. 언제나 사고 싶은 것은 많다. 금요일 밤 종일 돌아다녔기 때문인지 홍대 인파에 질려서인지 공차 밀크티 빨면서 털레털레 집 걸어갔다. 집에서 뜬금없이 <뷰티 인사이드> 봤는데 그 영화의 제목은 아무래도 <뷰티 아웃사이드>가 되어야할 것 같았고 나는 두 시간동안 되게 예쁜 한효주와 가구를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예쁜 거 보려고 재생한 거라 많은 후회는 없었지만 뭐랄까, 한효주의 마지막 대사가 <건축학개론>이 담고 있던 남자들의 판타지와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에 괜히 시큰둥해졌다. 우에노 주리가 나온 장면이 참 따뜻하고 예뻐서, 음 좋았다. 그게.

 일요일엔 <몸의 일기>를 읽다가 신나는 걸 보자! 신나는 걸! 이런 마음으로 <끝까지 간다>를 보았다. 조진웅 대다냉. <암살>도 보았는데 영화가 이렇게 길줄 몰랐다. 제발 좀 끝났으면 좋겠는데 계속 안끝나. 엄청 안 끝나네, 이거. 중간중간 해야만 한다는 듯한 대사들이 이 영화를 아쉽게 만든 것은 아닌지. 재미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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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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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걸어야 할 계단 뿐이던 때. 발에도 계단, 주머니 안에도 계단, 단추가 떨어진 카디건에서도 계단이 느껴지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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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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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은 성경을 읽는다. 비코도 평생 수천 권의 책을 읽었지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책을 읽으려면,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필요가 있다. 많이는 아니고 어느 정도. 비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전에 어땠는지 생각해봐요. 비카를 달래기 위해 내가 말한다. 지갑은 텅 비었고, 동전 하나 구할 수 없었을 때. 온통 걸어야 할 계단 뿐이던 때. 발에도 계단, 주머니 안에도 계단, 단추가 떨어진 카디건에서도 계단이 느껴지던 때. 그 말이 절로 나왔잖아요. 기억나요? 큰 고통은 아직 안 온 거야, 라고 했던! 그렇게 말하고나면 생각은 바뀌었고, 비카 당신은 이를 악물며 이렇게 말했죠. 오라고 해! 오라고 해! 곧 닥칠 거야, 킹! 큰 고통이! 빨리 오면 빨리 올 수록 더 좋아!

 

존 버거의 책을 좋아한다. 몇 권 읽었나 세어보니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연휴에 <킹>을 읽었다. 이제 만날 사람이 별로 없는 고향 동네, 카페에 앉아 집 없는 자들의 낡은 소매같은 것을 보고 있자니 침착해지는 기분. 존 버거의 소설은 이상하게 따뜻하다. 이상한 느낌 없이 따뜻했더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무너지는 중이거나 무너졌거나 무너진 자리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그들의 동행자 킹은 개다. 대놓고 개다, 라고 써놓으니 이상하지만. 여튼 개다. 개입니다.

 <킹>은 노숙 무리의 하루 동안 이야기를 킹의 시선으로 담은 이야기다. 킹은 북돋아주고 고개 끄덕여주는 자, 함께 움직여주는 자, 지켜주는 자로서 최선을 다한다. 그들의 곁에 있음에도 그들을 생각하기. 킹은 최선을 다한다. 최선.

 

 읽는 동안 존 맥그리거의 <개들조차도>가 생각났다. 집없는 자들의 이야기라는 같은 웅덩이를 가지고 있지만 흐르는 방법은 꽤 다른 편이다. <개들조차도>를 아주 좋아하는데 <킹>을 읽고 좋았던 사람이 있다면 <개들조차도>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바로 읽지 말고 몇 권의 텀을 둔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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