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었다. 우리는 말쑥하게 차려입고 교차로의 버스 터미널로 내려갔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레미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가는 곳마다 울려 퍼졌다. "꼭 바나나 킹에 관한 얘기를 써." 그가 내게 경고했다. "늙은 대가에게 장난치지 말고 뭔가 다른 걸 써. 바나나 킹이 네 먹잇감이야. 저기 있군." 바나나 킹은 길모퉁이에서 바나나를 파는 노인이었다. 난 지루했다. 하지만 레미는 계속 내 옆구리를 찌르고 멱살까지 잡아끌었다. "바나나 킹에 관해 쓴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인간적인 흥밋거리에 대해 쓴다는 거야." 난 바나나 킹에게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고 대꾸했다. "바나나 킹의 중요성을 깨닫기 전까진 넌 이 세상의 인간적인 관심사에 대해 완전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어." 레미가 강조했다.

(118쪽)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술이야!" 리키가 소리쳤다. 그리고 우린 네거리 술집으로 갔다. 미국인들은 일요일 오후면 언제나 네거리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아이들도 함께 데리고 간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면서 재잘재잘 종알종알 떠들어 댄다. 그때까진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울기 시작하고 부모들은 술에 취한다. 그들은 갈지자걸음으로 집에 돌아간다. 미국 어디에 있는 네거리 술집에 가 봐도 가족 천지였다. 아이들은 팝콘과 과자를 먹으며 뒤에서 뛰어논다. 우리도 그랬다. 리키와 나, 폰조와 테리는 앉아서 술을 마시거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꼬마 조니는 주크박스 근처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해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해낸 일이 없다. 이제 어떡하지? "마냐나*." 리키가 말했다. "마냐나. 친구, 우린 해낼 거야. 한 잔 더 마셔, 친구. 그래 잘한다, 바로 그거야!"

*스페인어로 '내일'이라는 뜻.

(151쪽)

 

 

  우리는 허리를 굽히고 목화를 따기 시작했다. 그곳은 아름다웠따. 들판 저쪽에는 텐트들이 있고, 그 뒤로는 갈색 건곡(乾谷)과 작은 언덕이 있는 곳까지 말라비틀어진 갈색 목화밭이 쭉 이어져 있고, 그 너머에는 파르스름한 아침 공기 속으로 하얀 눈을 머리에 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보였다. 남쪽 중심가에서 접시를 닦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지만, 나는 목화 따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퍼석퍼석한 껍질에서 하얀 솜을 뜯어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톡 하고 한 번에 해냈는데 말이다. 거기다 손가락 끝에서는 피까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장갑이나 아니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157쪽)

 

 

 그날 밤 나는 해리스버그의 역 벤치에서 자야 했다. 새벽에 역장이 와서 나를 쫓아냈다.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인생을 시작하지 않는가? 그러나 곧 자신이 비참하고 불행하고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탄에 젖은 섬뜩한 유령의 얼굴을 한 채 와들와들 떨며 악몽 같은 삶을 살아가는 불신의 날들을 맞게 된다. (……) 다음에 내가 얻어 탄 차의 운전자는 적절한 단식이 건강에 좋다고 믿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라빠진 남자였다. 동쪽을 향해 달려가는 차 속에서 내가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좋아요, 좋아. 그 정도가 딱이에요. 나도 오늘로 사흘 째 단식 중이거든요. 난 아마 150세까지 살 거예요." 그는 뼈다귀만 들어 있는 가죽 부대, 축 늘어진 인형, 부서진 나뭇가지, 미치광이였다. 나는 " 이 식당에 잠깐 들러서 콩을 곁들인 돼지 갈비 요리나 좀 먹고 갑시다."라고 말하는 돈 많고 뚱뚱한 남자의 차를 타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적절한 단식이 건강에 좋다고 믿는 미치광이의 차를 만난 것이다. 160킬로미터쯤 달리고 나자 그는 마음이 다소 관대해졌는지 차 뒤에서 버터 바른 샌드위치를 꺼냈다. 샌드위치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상품 샘플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배관 설비를 팔러 다니는 외판원이었다. 나는 버터 바른 빵을 허겁지겁 삼키다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가 앨런타운에서 사업상 방문을 하는 동안 난 혼자 차에 남아서 웃고 또 웃었다. 제기랄, 사는 게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그 미친놈은 나를 나의 집 뉴욕까지 데려다 줬다.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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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마음 속에 음란마귀가 자주 달라붙어서 그런지 바나나를 보면 그것이 먼저 생각납니다.

이름 2016-09-19 16:52   좋아요 0 | URL
아.......킹.......바나나....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