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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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제대로 된 유서를 쓰기 위해 죽지 못하고 버티는 한 여자와 제주도 산속에서 은둔하면서 살아가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이 두 명은 친구이고, 제주도에서 사고를 당한 여자를 위해서 서울에 사는 여자는 자살을 잠시 미루고, 제주도로 떠난다. 

 

가끔 '나는 자연인이다'와 '건축 탐구 집'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본다. 볼 때마다 한적한 곳에 나만의 집을 짓고,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과 함께 할 수도 있지만,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자녀에게 함께 하자는 것은 이기적이고, 아직까지 와이프와 뜻이 맞지 않는다. 물론, 내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살아보면 온갖 불편을 견디지 못해 후회할 수도 있으니 실천을 못하고 있다. 

눈이 내리면, 전기가 끊기고, 읍내 가는 버스도 끊기고, 난방도 안되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홀로 아픔을 견디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연인이다'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다. 


소설에서 나오는 대로 제주도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올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허리까지 파묻힐 정도의 눈이 내리는 제주도라니 낯선 느낌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면서 보통 사람들은 하얀 눈이 내린다. 아름답다. 예쁘다 정도의 표현이 전부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차가 막히겠네, 도로가 미끄럽겠네라는 걱정이 더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가가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 소설가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관찰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장갑 낀 손등에 방금 내려앉았다가 녹은 눈송이가 거의 완전한 정육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그 곁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삼분의 일쯤 떨어져나갔지만, 남은 부분은 네 개의 섬세한 가지들을 본래 모습대로 지니고 있었다. 부슬부슬한 그 가지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소금 알갱이같이 작고 흰 중심이 잠시 남아 있다가 물방울이 되어 맺힌다. (P.109)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P.111)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는 어떤 모습일까? 아픔은 똑같을 수 있지만, 억울함이 포함된 아픔을 아픔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그 아픔을 책을 읽는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대할 때 그 사건의 원인과 맥락, 그 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판단하고, 생각하지만, 그 역사적 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저자인 한강은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 과도한 설명을 배제한 채 오로지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사건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행동, 마음을 묘사하는데 노력한다. 역사적 이유가 어떻든 억울한 피해자로서 나머지 여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역사에 대해 조그만 관심을 가지면, 인간에 대한 혐오가 생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 한 사람의 범죄는 그 사람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한 사회, 한 민족, 한 국가가 행한 조직적 범죄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는 말에 동조해서 앞장서서 범죄를 저질렸던 사람들을 그냥 두고 봐야만 하나? 얼마 전에 끝까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잘못을 시인 안하고, 죽은 쿠데타 주범은 여생을 편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이게 공정과 정의로운 모습일까?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맹목적으로 하나의 사상, 하나의 관념, 기득권 유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무섭게 바꿀 수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조장하여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이와 그 주변에 붙어서 기생하는 자들이 있음을 안다.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구성원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역사는 또다시 반복된다.


2022.01.30 Ex. Libris HJK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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