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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드니 디드로의 소설을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를 읽고 오노레드 발자끄를 대하니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디드로의 소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에 대해 해설서에서 ‘소설이자 소설론’이라는 이중성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내 보기엔 소설이 아닌 실제 이야기를 적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처럼 보인다. 반대로 소설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 디드로가 시험적으로 발표한 이 작품은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는 반응을 살폈을 것이다.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과 가상으로 소설을 쓰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하고 말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는
“아주 착한 남자들과 아주 못돼먹은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p38쪽)로 시작하여 이 두 가지 사례를 대비시켜 한 가지씩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사는 거의 그렇게 되어 있소 선량한고 성실한 따니에 같은 남자 있으면, 신은 그런 남자를 레메르 같은 여자에게 보내오. 착하고 정숙한 라 쇼 같은 여자가 있으면, 그런 여자는 카르데유 같은 남자의 몫이 될 것이오. 그래야 모든 것이 아주 훌륭하게 풀려나가지 않겠소.”(p38)
못된 남자는 착한 여자를 만나고 착한 남자는 못된 여자를 만나는 것이 세상에 이치라며 소설 같은 현실 속 이야기를 들은 후, 발자끄를 대하니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천재적인 소설가 발자끄는 여성편력가로도 유명하다. 발자끄는 33세에 유부녀인 폴란드 백작부인과 사귀기 시작해 18년 만인 51세에 결국 결혼했지만 5개월 만에 병으로 숨졌다. 늙은 우크라이나 지주와 결혼한 백작부인 한스카는 남편이 죽으면 발자크와 결혼하기로 맹세했고, 발자크는 그녀에게 사랑의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 편지는 발자크 사후 ‘이국 여인에게 보낸 편지’로 발표됐다.
굳이 발자끄를 못된 남자라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것이 더 소설적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 그 자체만큼 소설적인 것인 있는가 말이다.
디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도 바로 이 소설 같은 현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모든 소설이 현실적이지만은 않다.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의 <어떻게 왕부는 구원 받았는가>처럼 신비스러운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 한나라 시대 화룡점정(畵龍點睛) 실현해 낸다고 소문난 왕부라는 화공과 그의 그림에 매료되어 많은 재산가 아름다운 부인까지 잃고 제자가 된 링의 이야기다. 링은 스승을 자기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해 마치 입안에 혀처럼 살갑게 왕부를 모셨다. 어느 날 왕부와 링은 느닷없이 황제에게 불려가 죽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황제는 어려서 궁속에 갇혀 그 화공의 그림만 보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 그림과 같은 줄 알았는데 세상을 나와 보니 그림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왕부야, 요술을 부려 짐으로 하여금 짐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혐오하게 하고 짐이 소유하지 못할 것을 열망하게 한 너에게 무슨 형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할지 모색하다가, 오아부야, 너의 두 눈은 너에게 네 황국을 열어주는 마법의 문이니, 너를 빠져나올 수없는 유일한 가옥에 가두려면 네 눈을 불로 지져 못 보게 해야겠다고 결정 했노라, 또한 네 손은 너를 네 제국의 심장부로 이끄는 열 갈래 중 두 길이므로, 너의 두 손을 잘라야겠다고 결정했노라. 알아들었느냐, 늙은 왕부야?”(p293)
황제가 왕부를 죽이려하자, 링은 칼을 들고 황제에게 덤벼들었고 호위병에게 잡혀 목숨을 잃는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왕부에게 젊은 시절 그리다만 그림을 다시 그릴 기회를 준다. 왕부는 수평선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고 물결을 그리자 궁 안이 물에 잠긴다. 조각배를 그리자 링이 살아나 왕부를 태우고 그림 속으로 사라진다.
참으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그러면 <어떻게 왕부는 구원 받았는가>는 디드로가 말하는 소설이 아닌가? 디드로가 쓰고 싶어 했던, 아니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던 소설은 어쩌면 이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 일지 모르겠다. 너무나 현실적인 것은 소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소설 같은 실제 이야기를 작품으로 보이고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소설을 읽고 싶은가, 후자이다. 소설 속에서나마 현실을 떠나 가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싶다. 황제처럼 현실세계가 그림과 같지 않냐 하는 것은 투정에 불과하다. 링처럼 누더기에 구걸로 생계를 이을망정 즐거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짊어지고 다니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현실엔 없지만 허구 속에서나마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심정으로, 소설을 읽는다.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즐기고 실물이 아닌 그림을 보는 것은,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즐기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어쩌면 그 것이 현실에서 재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