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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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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리뷰는 얼마전에 있었던 칸국제영화제에서 한 영화 감독이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유대인의 폭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즉각 퇴출된 사건과 연결을 지었다. 최근의 사회적 사건에 비춘 폭력의 문제를 통해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투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본다.

어떤 이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주변에 있는 자그마한 땅을 소유하려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 땅에 있던 사람들은 오래도록 핍박을 받으며 살았다. 그 집단으로부터 A는 간접적인 영향에 있었고 B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A와 B는 절친한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며 서로의 학문적 지식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A가 독립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회주의의 정신을 적극 인정한 반면, B는 그 혁명이 폭력으로 무장한 것이라는 데 극구 반대하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투쟁에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A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어떤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자고 주장했고 B는 폭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땅을 되찾으려던 그 집단은 B에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 A와 B는 서로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고 결국 갈라섰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나는 한 영화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인 어 베러 월드>. 거기서 주인공 안톤은 A와 B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상황에 따라서 A가 되기도 하고, B가 되기도 한다. 두 개의 상황을 나란히 전시하다가 마침내 B가 A를 끌어안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라스 폰 트리에와 수잔 비에르는 덴마크영화학교 출신으로서 덴마크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그들이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대하는 방식과 관점에 있어 대립하고 있다. 수잔 비에르는 라스 폰 트리에가 주창한 도그마 운동에 가담했다가 곧 다른 길을 걸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수잔 비에르에 대해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곧잘 싫어하는 티를 내곤 했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심오한 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자국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외국어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로서는 그 영화 속에서 A와 B가 손을 잡는 것이 일종의 가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에 폭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자면, 라스 폰 트리에는 B보다 A에 훨씬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수잔 비에르가 영화를 통해 폭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거듭 B를 이상적으로 보는 것이 마뜩잖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과거를 반성하는 척하면서 세계 평화를 논한다는 식의 비판. 그런 상황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작년에 논란을 일으켰던 <안티크라이스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파괴의 끝을 보여주는 <멜랑콜리아>를 들고 칸영화제를 다시 찾았다. 내용상 별 관계가 없는 어떤 기자의 한 질문에 수잔 비에르를 의식하면서 이야기를 펼치다가 그만 유대인의 폭력을 옹호하는 식의 발언을 했다. 그때 주연배우 커스틴 던스트는 사색이 되었다. "이봐요, 여기는 다름 아닌 프랑스라고요!"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농담 한 마디 하려다가 완전히 덫에 걸리고 만 라스 폰 트리에는 결국 칸에서 퇴출됐다.  


 

좌 : 알베르 카뮈 / 우 : 장 폴 사르트르  

 

자, 이제 고백해야겠다. 즉각 그를 쫓아낸 상황에서도 칸영화제가 어떠한 고민을 안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칸은 프랑스다. 유럽의 다른 영화제였어도 논란의 크기가 줄지 않았겠지만 프랑스는 이 문제를 대하는 시선이 좀 남달랐을 것 같다.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힘이 센 나라는 프랑스이고, 독립을 요구한 집단은 알제리인이며, A는 장 폴 사르트르고, B는 알베르 카뮈다. A와 B는, 그러니까 사르트르와 카뮈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학문적 사상을 공유하다가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뜻을 달리한 이후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폭력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세계 평화에 기여했으며 각각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써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잦은데 대부분 양가론을 취한다. 다만 그들을 거론하는 순서로 누구의 입장을 더 존중하는가 정도의 차이만 보일 따름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냐, 카뮈와 사르트르냐. 당시에는 사르트르가 웃었지만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구조를 전복하는 데 폭력을 휘둘렀던 이들은 결국 폭력으로 망했다. 한평생을 자신의 지적 여정의 길에서 고민했던 사르트르는 폭력 없는 정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을 죽기 전에 다소 완화한다.

칸영화제는 라스 폰 트리에를 퇴출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커스틴 던스트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이는 물론 심사위원들의 결정이겠으나 칸이 최종적으로 그녀에게 상을 수여한 것을 놓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프랑스가 결코 사르트르를 외면할 수 없었을 거라는 점을 말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천재적인 문학 능력으로 위대한 저서를 많이 남긴 사르트르가 조금 더 인정을 받는 편이다. 학계에서도 대부분 사르트르와 카뮈 순서로 그들을 언급한다는데, 이는 그들의 명성을 말해준다. 감독은 내쫓았어도 배우는 인정한 것이 내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의 면모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와 수잔 비에르가 영화라는 매체에 폭력을 투영하는 방법에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이는 것을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상적 차이에 빗대어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결코 옳은 비유가 아닐 것이다. 다만 폭력에 관한 두 개의 시선이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참 씁쓸하다. 수잔 비에르 역시 영화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잖나. 영화적 미학을 위해 폭력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라스 폰 트리에든 폭력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수잔 비에르든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각자의 매력이 되어 취향에 따라 즐기면 그만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답 없음에 울적해진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투쟁은 아직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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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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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은 강남 좌파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사용했다. 강남 좌파란 보수 진영이 운동권 출신 486세대 진보 인사들을 꼬집어 쓰던 용어로 사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 않은 이들을 뜻한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진보 정치인 가운데 강남 좌파가 아닌 사람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좌파든 우파든 모두 강남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꼭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강남 좌파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좌우를 막론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학력이나 학벌,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필수적이므로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는 좌파가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강남 좌파 자체를 무조건 비판하는 건 좌파를 싸잡아 비판하겠다는 우파의 정치적 책략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우므로 강남 좌파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진정한 소통의 정치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노무현,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등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서 강남 좌파의 실체와 배경을 상세히 소개한다. 사적인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언론 자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정치와 관련한 저서에서 그들에 대한 평가를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특정 당이나 좌우의 입장과 관계하지 아니하면서도 각각의 인물이 안고 있는 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차후 대선을 위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여서 그것이 과거에 대한 분석에 그치지 아니한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이 지닌 문제가 결국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종국엔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 정치인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제시하는 데에 이른다. 그러나 벽 대신 다리를 세우자는 마지막 말에 방점이 찍힌 것 같지는 않다. 그것에 비해 강남 좌파의 등장과 어원을 필두로 주로 다수의 정치인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강남 좌파가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가 무엇인지 그간의 이야기를 재정립하고 집대성한 결과물에 해당한다.  

무거운 이야기도 재밌게 할 줄 아는 저자의 역량이 복잡하고 다변화하는 정치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유시민과 문재인에 대해서 유독 비판적인 자세를 심하게 드러내는 것은 전체적인 균형에 어긋나는 느낌이다. 노무현 정신을 겉으로만 계승하는 문제에 관한 지적은 좋으나 저자의 사적인 주장이 그 두 챕터에서 특히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한 학벌 좌파와 입시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다소 추상적인 것은 아쉽다. 그러나 이 책은 강남 좌파가 지닌 진짜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적합하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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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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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중문화가 정치적인 함의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 이택광은 한국사회에 문화비평이라는 행위가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 그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일상에 파묻혀 있는 불편한 정치성을 발굴해서 제 몫을 찾아주는 것이 문화비평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에 대한 전면적인 사유가 응당 필요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아마 많은 이들이 수긍할 것이다. 이 책은 그가 지금껏 발표한 비평글을 한 데 엮은 것이다. 거의 시간 순서대로 취합한 덕분에 그가 각종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현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봤는지 읽어내기가 비교적 용이한 편이다. 더구나 세 개의 장을 철학과 비평,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인물 순으로 구성한 것은 아직까지 문화비평이 낯선 독자들에게도 그 개념을 쉽게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비평이라는 것이 제 아무리 어떤 확고한 근거를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사유에서 비롯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분야보다 저자의 생각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비평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소개하는 초반의 글들은 본격적인 비평에 앞서 기본적인 사유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과도 같다.

요즘은 전문적으로 칼럼을 쓰는 사람만 비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비평의 형식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대다. 그것도 온라인 상에서 쉽고 빠르게 얼마든지 글을 쓸 수가 있다. 따라서 어쩌면 문화비평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저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비평의 기본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자신의 생각을 참된 형식에 알맞게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 비평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는 것이므로 부담스럽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기 이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면서 그리 낯설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할 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연유에서 비평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이택광은 '주이상스'라는 개념을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신세경(지붕뚫고 하이킥), 월드컵 응원녀, 작가 김수현, 마빡이, 소녀시대 등 아주 가벼운 소재에서도 집요하게 정치성을 끄집어내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지나치게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사유는 있어도 새로운 사유는 많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우리가 그간 접했던 개개의 사건이 줄지어 나오는 터라 내용을 읽는 데 따른 부담을 느끼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기준을 토대로 나 아닌 누군가가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일을 다시 내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내 생각과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내겐 무척 재밌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비평의 재사유를 통한 즐거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신문 기사나 칼럼을 통해 여러 형태의 비평을 접하고는 있지만 오랜 기간 문화비평을 한 저자의 일관된 시선으로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을 새로이 정립하는 시간을 가진 것은 비평글의 참맛을 느끼는 일이었다. 저자처럼 우리도 누구나 자신만의 비평적 잣대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홍수처럼 넘치는 각양각색의 사회 현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길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그 잣대를 잘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정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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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읽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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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극장가의 화제가 된 일종의 반전(反戰)영화를 세 편 가량 연이어 보면서 거기에 담긴 정치사회적 주제를 읽어내는 데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이 영화적으로 비슷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역사가 전체의 역사가 되는 식의 얼개를 가지고 전지구적인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는 점은 분명했다. 특히 그 작품들 ㅡ <인 어 베러 월드>, <그을린 사랑>, <사라의 열쇠> ㅡ 모두 이야기를 매듭짓는 과정에서 지금 이 땅에 발딛고 서 있는 우리가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제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다. 그 해답은 사회구성원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과 같은 문제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하게 된 20세기 중반에도 사회적으로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의 학자들 대부분은 그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탐험가로서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도 전쟁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야기하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을 등한시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서 무기력할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나 아렌트가 새롭게 조명되고 각국에서 그녀의 저서가 다시 번역되면서 이 책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아렌트 읽기'가 시작됐다. 세계 곳곳의 갈등을 다루면서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내는 영화에서도 아렌트를 읽으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의 행동 ㅡ 거대한 역사와 크나큰 집단에 맞서는 ㅡ 이 한나 아렌트와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이 아렌트적 인물에게 기대하는 모습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아렌트적 인간이란 무엇일까.

아렌트는 나치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가 저지른 무고한 생명의 학살이 지금까지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한다. 반유대주의나 민족주의의 잔재,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전체주의 체제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하나의 집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시민 개개인의 개별성을 그 아래 복속시킨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국가 역시 이런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대중민주주의에서 시민들 대다수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상품의 소비와 향락 산업 따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뿐이다. 또한 전체주의 체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가족 관계와 같은 사적인 영역의 파괴를 목격하고도 진실의 왜곡이나 은폐에 무감각하다. 아렌트는 그 이유로 무사유성을 들었다. 이는 개인의 작은 범죄 행위에도 곧잘 드러나는 특성이다. 사이코패스라고 호명되는 범죄자들도 날 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것 역시 일종의 무사유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원인과 해결책이 <인간의 조건>과 <정신의 삶>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녹아 있다.

개별 시민의 사유 행위가 보편타당한 정치 행위를 견인하게 된다는 전제 하에 사유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한 아렌트의 관점은 오늘날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사상이 뒤늦게 빛을 발한 이유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갈수록 어렵고 복잡한 지구촌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이념이 다문화주의의 맥락을 재해석하는 아렌트주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 ㅡ 세계 곳곳에서 건너온 최신작 ㅡ 이 대부분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묵을 깨부수는 위대한 진실에의 의지를 보이는 것은 아렌트가 기성의 정치학적 범주와 관행에 맞서서 새롭게 정의한 개념들이 작금의 현상을 분석하는 잣대로서 적실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문화적 실례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나는 아렌트적 코즈모폴리턴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가 도래하길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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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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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에 실린 두 개의 문장은 오늘날 전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서로 다르게 인식한 결과물처럼 느껴져 조금 이상하게 보인다. 세 개의 챕터로 나누어 지난 30년 간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는 저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더니 그 두 문장은 더욱 상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누군가는 이기겠지만 세계는 지고 있다'는 데서 소수가 승리하고 다수가 패배하는 식의 일종의 민주주의 후유증을 읽어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해결책으로 연결짓고 있는 제로섬 논리와 관련된다. 어느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실을 의미하는 제로섬 세계를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에 이익이 되는 윈윈 세계를 모색하자는 결론을 얻는 데 세계가 지고 있다는 원인을 서술한 것은 일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표지 전면에 있는 '우리가 낙관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어떤 의미일까? 그 낙관이라는 것은 저자가 지칭하고 있는 시기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08년까지 지구촌 국가들이 꿈꾼 장밋빛 미래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장밋빛 미래는 어디까지나 미국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강대국의 전망이자 목표가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그러니까 당시에도 특정 국가는 다가올 세계 경제를 낙관하지 않았고 이윽고 경제위기가 찾아올 것임을 예상하거나 추측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모른 체한다.

그러나 세계 패권을 쥐고 있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 시기가 낙관의 시대였고, 2008년 이후의 시간이 불안의 시대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불안을 야기한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저자가 이 책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지나간 시간에 놓인 역사적 사실을 정립하는 일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러한 탓에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이야기임을 인식하고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편의적 구분이 전세계 상황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이 우리의 입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환의 시대'와 '낙관의 시대'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다는 점과 세계 정치와 경제의 흐름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고 있는 점은 다소 어이없는 결말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라면 그 누구라도 기디언 래치먼이 제시하는 불안의 시대를 극복하는 방안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라고 말한 것은 그저 정치가가 아닌 언론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쯤으로 치부해도 될 것이다. 어차피 이제 세계는 더 이상 그들의 분석과 판단에 놀아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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