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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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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리뷰는 얼마전에 있었던 칸국제영화제에서 한 영화 감독이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유대인의 폭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즉각 퇴출된 사건과 연결을 지었다. 최근의 사회적 사건에 비춘 폭력의 문제를 통해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투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본다.

어떤 이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주변에 있는 자그마한 땅을 소유하려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 땅에 있던 사람들은 오래도록 핍박을 받으며 살았다. 그 집단으로부터 A는 간접적인 영향에 있었고 B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A와 B는 절친한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며 서로의 학문적 지식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A가 독립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회주의의 정신을 적극 인정한 반면, B는 그 혁명이 폭력으로 무장한 것이라는 데 극구 반대하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투쟁에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A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어떤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자고 주장했고 B는 폭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땅을 되찾으려던 그 집단은 B에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 A와 B는 서로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고 결국 갈라섰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나는 한 영화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인 어 베러 월드>. 거기서 주인공 안톤은 A와 B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상황에 따라서 A가 되기도 하고, B가 되기도 한다. 두 개의 상황을 나란히 전시하다가 마침내 B가 A를 끌어안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라스 폰 트리에와 수잔 비에르는 덴마크영화학교 출신으로서 덴마크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그들이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대하는 방식과 관점에 있어 대립하고 있다. 수잔 비에르는 라스 폰 트리에가 주창한 도그마 운동에 가담했다가 곧 다른 길을 걸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수잔 비에르에 대해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곧잘 싫어하는 티를 내곤 했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심오한 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자국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외국어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로서는 그 영화 속에서 A와 B가 손을 잡는 것이 일종의 가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에 폭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자면, 라스 폰 트리에는 B보다 A에 훨씬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수잔 비에르가 영화를 통해 폭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거듭 B를 이상적으로 보는 것이 마뜩잖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과거를 반성하는 척하면서 세계 평화를 논한다는 식의 비판. 그런 상황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작년에 논란을 일으켰던 <안티크라이스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파괴의 끝을 보여주는 <멜랑콜리아>를 들고 칸영화제를 다시 찾았다. 내용상 별 관계가 없는 어떤 기자의 한 질문에 수잔 비에르를 의식하면서 이야기를 펼치다가 그만 유대인의 폭력을 옹호하는 식의 발언을 했다. 그때 주연배우 커스틴 던스트는 사색이 되었다. "이봐요, 여기는 다름 아닌 프랑스라고요!"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농담 한 마디 하려다가 완전히 덫에 걸리고 만 라스 폰 트리에는 결국 칸에서 퇴출됐다.  


 

좌 : 알베르 카뮈 / 우 : 장 폴 사르트르  

 

자, 이제 고백해야겠다. 즉각 그를 쫓아낸 상황에서도 칸영화제가 어떠한 고민을 안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칸은 프랑스다. 유럽의 다른 영화제였어도 논란의 크기가 줄지 않았겠지만 프랑스는 이 문제를 대하는 시선이 좀 남달랐을 것 같다.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힘이 센 나라는 프랑스이고, 독립을 요구한 집단은 알제리인이며, A는 장 폴 사르트르고, B는 알베르 카뮈다. A와 B는, 그러니까 사르트르와 카뮈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학문적 사상을 공유하다가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뜻을 달리한 이후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폭력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세계 평화에 기여했으며 각각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써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잦은데 대부분 양가론을 취한다. 다만 그들을 거론하는 순서로 누구의 입장을 더 존중하는가 정도의 차이만 보일 따름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냐, 카뮈와 사르트르냐. 당시에는 사르트르가 웃었지만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구조를 전복하는 데 폭력을 휘둘렀던 이들은 결국 폭력으로 망했다. 한평생을 자신의 지적 여정의 길에서 고민했던 사르트르는 폭력 없는 정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을 죽기 전에 다소 완화한다.

칸영화제는 라스 폰 트리에를 퇴출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커스틴 던스트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이는 물론 심사위원들의 결정이겠으나 칸이 최종적으로 그녀에게 상을 수여한 것을 놓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프랑스가 결코 사르트르를 외면할 수 없었을 거라는 점을 말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천재적인 문학 능력으로 위대한 저서를 많이 남긴 사르트르가 조금 더 인정을 받는 편이다. 학계에서도 대부분 사르트르와 카뮈 순서로 그들을 언급한다는데, 이는 그들의 명성을 말해준다. 감독은 내쫓았어도 배우는 인정한 것이 내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의 면모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와 수잔 비에르가 영화라는 매체에 폭력을 투영하는 방법에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이는 것을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상적 차이에 빗대어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결코 옳은 비유가 아닐 것이다. 다만 폭력에 관한 두 개의 시선이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참 씁쓸하다. 수잔 비에르 역시 영화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잖나. 영화적 미학을 위해 폭력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라스 폰 트리에든 폭력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수잔 비에르든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각자의 매력이 되어 취향에 따라 즐기면 그만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답 없음에 울적해진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투쟁은 아직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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