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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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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혁명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꼭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조금 더 본질적인 내용만 담을 수는 없는 건가? 하기는 무겁기만 한 이야기를 누가 좋아하겠어? 소재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야. 어리석게도 나는 한때 이렇게 생각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사랑 덕분에 혁명을 부르짖고 사랑 때문에 혁명을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거기에 각별히 주목하는 데서 생겨난 어떤 전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나도 어느 순간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양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는 나이를 먹었다는 숱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수많은 고전이 사랑 속에서 혁명을 불태우고 혁명 속에서 사랑을 꽃피우는 이유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위로를 얻는 까닭이 어렴풋이 손안에 들어왔다. 어쩌면 사랑과 혁명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일러주는 신호가 조금씩 내게 감지된 셈이다.

 

 

△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中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혁명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부수는 행위, 외부의 관계망 속으로 과감히 뛰어드는 태도, 다른 세계로의 접촉과 횡단을 거쳐 울타리를 바깥으로 확장하는 일. 17세기의 스피노자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이런 욕망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많은 ‘되기’를 통해 이른바 변용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되기'란 신체가 공동체에 접속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모름지기 사랑으로써 경험된다. (여기서 사랑은 좁은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여행을 하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이듯 사랑을 하고 나면 우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 언젠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이렇듯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를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만든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 사랑의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 그보다 다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먹고 살기 바빠서 사랑을 찾을 시간도, 혁명을 외칠 여유도 없다고?

 

여기서 머리가 아니라 신체를 언급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사유를 하나의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는 사유가 이 세계를 지배하거나 장악한다고 보는 데 거부감을 드러내며, 공동체와의 무한한 결합이 만드는 신체 변용과 이와 평행하게 획득되는 사유의 공통 관념에 입각해서 그 복잡한 속성 중 일부에 겨우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유한하다. 고로 접근한다.'이다. 머리로 생각해서 나와 세계를 분리하는 대신 신체를 변용해서 나를 세계에 이르게 하는 식이다. 우리가 실제로 사랑을 대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백날 머리 굴려 봐야 사랑은 다가오지 않는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접촉과 횡단이 답이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질병들, 즉 불안증·우울증·신경증·강박증·조울증·분열증·공포증 등은 다 이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탓이다.

 

사랑과 혁명? 왠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우리가 매일매일 부딪히는 일이다. 이 책은 그저 남들 따라 공무원이 되고자 고시원에서 취직을 준비하고 있는 한 학생에게 어느 날 갑자기 스피노자가 나타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처럼 가상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는 밤마다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하나씩 털어놓으며 남몰래 상담을 받는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핵심은 철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에티카'다. 그러니까 그걸 직접 읽기가 부담스러운 사람의 경우 스피노자의 세계에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유쾌한 구성이다. 저자는 별별 '증(症)'에 이리저리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스피노자의 생각을 토대로 담백한 위로를 전한다. 실체를 짐작할 수 없고 깊이를 잴 수 없는 커다란 슬픔 앞에서 우리는 종종 좌절한다. 그러나 미지의 세상에 줄곧 접속하는 사랑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것이다. '사랑'은 곧 '혁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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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1 루나의 예언 1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강만원 옮김 / 창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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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Beyond the Hills

 

 

아주 먼 옛날에는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눈동자 위로 하늘에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사람들은 별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고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점성술은 그리하여 탄생됐다. 세계 곳곳에서 싹을 틔웠지만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7개의 행성, 즉 해·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으로부터 세계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자연히 개인의 운명과 결부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다. 점을 보는 행위는 이토록 유서가 깊은 일이다. 그로부터 과거를 추정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점성가가 많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주장한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살기 일쑤였다. 그게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위험한 일이었다. 가령, 이 땅에 여러 종교가 뿌리를 내린 이후로는 점성가들에게 소위 이단으로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책의 후기에 언급된 것처럼 현대천문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요하네스 케플러 또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점성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짜가 공식적인 기록보다 6년가량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박해를 받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 가정은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정확히 언제인지 아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마는, 수많은 사람이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굳건히 지켰던 신념의 근원이 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일이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좀처럼 질문을 허락지 않는 바로 그 종교의 영역에 다분히 인간적인 물음을 던진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로서 특별히 문학을 통해 철학과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은 감히 그런 종류의 문학이 지닌 매력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무려 15년간 두 발로 역사의 장소를 오가며 공들여 집필한 작품답게 현재 그는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줄거리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타고 흐르는 거의 모든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재구성되었다. 이것이 가장 먼저 놀라움을 안긴다. '다빈치 코드'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소설과 달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긴장 위에 선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이를테면 여기서 검은 복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일부 종교의 폭력과 위선은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문제다. 오히려 세상이 점점 더 거짓과 타락에 물들면서 신앙의 본질을 망각한 채 믿음 그 자체에 몰두하는 일이 늘고 있는 추세다.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고로 이 작품의 배경에 해당하는 중세의 지중해 연안은 특정한 시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한 편의 소설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예컨대 유대교·카톨릭·개신교·이슬람을 가로질러 당대의 철학적 사조를 두루 통과한다. 그 모든 것에 무지몽매한 나 같은 독자도 충분히 따라갈 만한 테두리 내에서.

 

 

△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

 

 

주인공 조반니는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우연히 점성술을 배우게 되면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마녀로 불리는 루나가 보름달에 비친 토끼의 내장을 보고 조반니의 인생을 예언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은 그에게 일어나게 될 중요한 사건들을 일찍이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소제목들 또한 두 권에 걸쳐 7개의 행성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의 순서는 조반니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이성과 과학에 힘입은 점성술이 세상의 운명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신과 인간이 결코 대립적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삶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래, 우리는 삶에 열심이지. 그러나 그것에 매달릴 뿐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어.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야. 요컨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산다는 것은 예술이지." 그는 우리가 예술 같은 삶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세계의 거친 물결에 휘둘리지 않고 제 삶을 스스로 조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생존에서 진정한 인생으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 전에 본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세상에 내동댕이처진 한 소녀가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오갈 데 없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것은 비단 특정한 상황에 놓인 자의 비극이 아니다. '존재하는' 자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인생 그 자체다. 혹자는 그 영화가 예사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데 고개를 기우뚱했지만, 나는 이러한 비극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니라 신에 매달리는 태도, 삶이 아니라 죽음에 기도하는 자세는 벌거벗은 생명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운명을 움켜쥔 별들을 바라보면서도 지상의 언덕을 넘어서는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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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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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우주는 양자 시스템이며 그 속에 포함된 거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다. 만약 우주가 컴퓨터라면 양자 컴퓨터인 셈이다.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듯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자유로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원치 않는 얽힘이 계속되면 그 원인 혹은 결과가 아니라 얽힘 현상 자체가 매우 중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세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대두되는 불확정성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가 이 개념의 시초이며, 이 책 또한 그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모든 현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러한 얽힘은 양자 분야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축복인 동시에 골칫거리다. 양자물리학은 상대성이론이 수많은 결론을 이어나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상을 관찰하는 데 밑바탕이 되는 원리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물리학의 법칙이 모든 관찰자들에게 똑같이 작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전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양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겐 더 많은 구조, 더 많은 정의가 아니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태도와 방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양자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서 이 분야에 그다지 관심 없는 이들조차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의 상당 부분이 여러 물리학자가 주고받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얽힘의 시대’를 ‘얽힘의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대화는 실제에 가까운 느낌을 살리고자 약간의 각색만 더했을 뿐 과학자들의 편지, 논문, 회고록 등에 기록된 것을 최대한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서 과학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과거와 달리, 20세기의 학문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이 같은 구성이 물리학과를 졸업하긴 했으나 농장에서 일을 하며 다른 분야로 발을 넓힌 이가 외따로 엮은 결과물이라는 게 실로 놀랍다. <침묵의 봄>처럼 과학과 인문의 경계를 허문 글쓰기가 돋보인다. 대화를 읽다 보면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드는데, 그건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도 마찬가지다.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그것을 다룬 이 책 또한 무수한 어제를 통해 새로운 내일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주의 역사가 이제 걸음마 단계에 들어선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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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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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이상(異常)이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서 위험한 수준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흔히 현대인들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때의 그 정신병이 꼭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이 아니듯 이상한 생각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갈수록 평범한 사고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 같으면 정신이상으로 여긴다. 생명을 해하거나 법규를 어기는 것과 같이 잘못된 행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라면 응당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남이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이상을 덮어놓고 무서운 광기로 몰아붙이는 것은 끊임없이 환자와 병원만 늘리는 일이다.

 

프로이트 분석연구 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자 대리언 리더는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정신의학의 관심이 20세기에 들어 "의미를 탐구하지 않고 현상만 연구하는"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겉보기 증상을 기반으로 하는 진단 패러다임이 세워지면서 정신병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점점 사소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 원인은 크게 세 가지 - 편집증이라는 진단범주의 운명, 약리학이 정신보건계에 끼친 영향, 진단절차의 급격한 변화로 언급된다. 망상은 정신병의 1차 증상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프로이트의 말을 빌린다. “자아가 바깥세상과 교류할 때 처음부터 비어 있는 곳과 찢겨진 곳이 나타나는데, 망상은 이런 곳을 가리고 메우는 천 조각처럼 사용된다.” 그러니까 망상은 환자가 스스로 정신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다. 정신병자는 상징적 욕망에 확실히 이름을 붙이지 못하지만 편집증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명명한다는 점에서 망상의 유무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생각의 내용보다 주체가 그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더욱 중요하다.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 거주한다. 그 의미를 형성하는 사건들은 상징적으로 매개된다. 다르게 말하면, 한 사람을 구성하는 역사는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과 거리를 재는 행위를 거듭하면서 나아간다. 그런데 그 체계가 어떤 원인에 의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때로 정신병이 촉발될 수 있다.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도 갑자기 광기를 드러낼 수 있다. 다만 인간은 그 과정에서 망상을 구축함으로써 스스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할지 몰라도 개인의 내면 속에서 그것은 구멍을 메우는 일이고 단추를 잠그는 일이다. 모든 정신병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치료법을 찾는 이들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겠지만, 저자는 "평범한 삶이란 우리가 실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실재를 길들이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고 말한다. 고로 우리는 개인의 체험 안에서 의미가 구축되는 양상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내러티브를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상(異常)한 나라의 이상(理想)적 깃발을 무작정 뽑으려고만 한다면, 세상은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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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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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농심을 비롯한 9개 업체를 상대로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일부 제품을 전량 회수하라고 조치했다. 발암물질이라고 알려진 벤조피렌의 기준치가 초과된 가쓰오부시(훈제건조어육)로 분말 스프를 만든 것이 문제가 됐다. 이 소식은 그 성분이 들어간 유명 제품을 즐겨 먹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주요 시간대 뉴스에서 집중적으로 보도된 이후 그와 관련된 소식들은 각종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로 도배되었고 회사의 주가도 어김없이 하락했다. 농심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분말 스프를 평생 먹는다고 해도 인체에 거의 무해한 수준이라며 그 주장에 반박하는 답변을 바로 내놓았지만, 그것이 과학적으로 어떠하건 당분간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렇듯 먹거리에 대한 두려움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들 업체에 대한 강력한 행정처분 또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농심에서 말한 대로 이게 그다지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면 왜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일까? 혹시 그것이 누군가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심을 좀처럼 거둘 수 없는 것은 그동안 음식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사례가 더러 존재했기 때문이다. 식품업계와 의약업계는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꽤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편이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첨예한 이해관계는 알게 모르게 전쟁을 벌인다. 당연히도 그 배후에는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하비 리벤스테인은 이 책을 통해 먹거리에 대한 공포를 유발하고 이를 활용해 짭짤한 수익을 챙긴 사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 상식에 가까웠던 몇몇 건강 정보마저 자본과 과학의 비밀스러운 거짓말이 빚어낸 결과임을 밝힌다. 소고기, 달걀, 우유, 요구르트 등 우리네 식탁에 자주 오르는 제품들이 보편적인 먹거리로 자리 잡게 된 이상한 경위와 카페인, 나트륨, 비타민, 콜레스테롤과 같은 요소들이 일상에서 이토록 중요해진 엉뚱한 까닭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서술한다. 또한 가공식품과 순수식품의 경쟁에서 비롯된 각종 식습관과 공포증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의학과 과학이 음식의 역사에 침투하면서부터 우리는 먹거리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고민을 한다. 하나는 몸에 좋은 음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그저 배를 채우는 데 만족했지만 이제는 음식을 선택하는 시대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오히려 ‘풍요의 역설’을 경험한다. 텔레비전에서는 끊임없이 좋은 먹거리를 소개하는데, 거기에 충실하자면 오로지 먹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것만 같다. 어제는 토마토, 오늘은 마늘, 내일은 당근. 실제로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몇 달 보고 나면 거의 모든 먹거리가 몸에 좋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로 몸에 나쁜 음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제 텃밭에서 먹거리를 손수 재배하던 때와는 달리 요즘은 음식 재료를 얻으려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터라 안심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가공식품이 발달함에 따라 갈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분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고등어도 말썽이고, 삼겹살도 말썽이고, 만두도 말썽이다. 뭘 먹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현대인들은 늘 ‘식탁의 위협’을 안고 사는 셈이다. 이 책이 적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은밀한 거짓말을 앞으로 잘 살핀다고 한들 두 고민이 쉽게 사그라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정확한 검증 없이 우리에게 먹거리에 대한 추천과 위협을 일삼는 존재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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