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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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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는 왜 죽지 않고 살아날까?

 

 

박찬욱 - 박쥐 (2009)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뱀파이어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그들은 한때 실제로 무서운 존재였고 응징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섬뜩한 뱀파이어를 두고 아름다움을 논하기 시작했다. 시대에 따라 인식의 변화는 있지만, 결국 그것이 어떤 상징으로 이해되면서 이른바 뱀파이어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진화한 셈이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피기 전에 과연 그러한 존재가 또 있었는지 짚어볼 일이다. 위대한 캐릭터라면 늘 곁에 라이벌이 있듯 뱀파이어에게는 좀비가 있다. 사실 좀비의 역사는 뱀파이어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은 동시에 부흥기를 맞았고 거의 비슷한 정도로 생산되고 있다. 그 두 캐릭터가 등장할 때 기본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은유는 이제 사람들에게 제법 친숙하다. 그래서 대중문화에서는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요즘 극장에 가면 몇 작품 걸러 좀비와 뱀파이어를 만나곤 한다.

 

 

그런데 지겹지가 않다. 요즘 난다 긴다 하는 시리즈물도 세 편만 나오면 그 이상 어떤 성과를 거두긴 힘든데, 그토록 오랜 역사 속에서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캐릭터에 계속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작품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해도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나오는 것만으로 흥행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뭔가 마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그 이야기가 대중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부분적으로 변주되는 터라 어느 정도 보증된 재미를 느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드는 키워드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점이다. 후자는 새로운 뱀파이어를 탄생케 하는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좀비와 뱀파이어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자.

 

 

동유럽에서 온 신비로운 귀족 혹은 구 유럽 앙시에레짐의 유물을 은유하는 뱀파이어와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강제로 이주를 당한 흑인노예들이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발전시킨 부두교에서 유래한 좀비는 출생부터가 다르다. 좀비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의 그늘 속 존재로서 백인들을 잠식한다. 젠더, 인종, 노동자 등 확실히 정치성이 뚜렷한 좀비와 견주었을 때 뱀파이어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특히 뱀파이어는 일반인으로 위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때 에이즈와 동성애, 공산주의와 간첩 등의 은유로 각광받았다. (참고: 2012 Cine-Vacances Seoul 김숙현) 그래서일까? 좀비는 여전히 무섭지만, 뱀파이어는 때로 아름답다. 두 캐릭터는 똑같이 죄의식에서 비롯되는 두려움로부터 탄생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듯 사뭇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Bram Stoker - Dracula (1897) 

 

 

이 책이 뱀파이어의 역사를 하나씩 설명하는 과정에서 답을 하고 있다. 미신에 대한 합리적인 재평가, 현실에서 예술로의 이입,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만남. 이를테면 젊음을 유지하고자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설정 따위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매혹하는 행위로써 이해되는 것이다. 흔히 밤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낭만주의로부터 뱀파이어는 그렇게 자유를 얻었다. 죽음을 무조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자 죽음의 세계로 손짓하는 뱀파이어도 더 이상 악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 불씨를 당긴 것은 단연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다. 인간의 상상력을 반영하는 뱀파이어 영화들의 조상이다. 그 상상력이란 달의 관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dvard Munch - white night (1901)

 

 

뱀파이어가 등장할 것 같은 밤의 정취는 줄곧 새로운 작품을 양산했다. 이 책은 그것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있다. 가볍게 읽기에도 나쁘지 않지만 워낙 많은 작품을 다루는 터라 참고서로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뱀파이어 영화를 보거나 뱀파이어 소설을 읽으면서 이따금 뒤적인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뱀파이어물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뱀파이어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것은 흥미롭다. 이 책은 뱀파이어를 잘 몰라도 그런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오랜만에 예술 서적을 말 그대로 재밌게 읽은 것 같다.

 

 

* 김연아가 2012-2013 시즌에 선보일 새 쇼트 프로그램도 'Kiss of the Vampire'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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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8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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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8 16: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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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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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소감을 말하려면 우선 형식부터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적 회고록으로서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한 사람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마치 전기 영화를 볼 때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훑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피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과거를 본인이 직접 서술하는 터라 아주 세밀한 사항까지도 군데군데 적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보통의 전기는 대중에게도 널리 읽힐 목적으로 그 사람의 행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묘사하지만, 피터 L. 버거의 모험담은 사뭇 다르다. 스스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일찍이 사회학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더라면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쪽을 택했을 텐데,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그는 계속 다양한 경험을 쌓는 데 흥미를 느꼈다. 이는 이 방면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제법 의미가 있는 점이다. 그래서 역자는 심지어 사회학이 뭔지 잘 몰라도 이 책을 읽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썼다. 맞는 말이다. 다른 학문도 아니고 사회학이라면, 더구나 저자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끝없는 호기심이 계속해서 흥분을 일으키는 경우라면, 이른바 인문적 지식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다. 이 모험담을 따라가는 데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문한 나는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상세히 언급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 정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오로지 필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 상상을 하는 것에 살짝 한계를 느꼈다. 어려운 내용일지언정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었다면 그것을 나름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겠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들만 딱딱 줄을 이어 나가듯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나로선 알맹이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지엽적 문제다. 그 대신 이런 교훈은 분명히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처음에 의도했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고 정해진 시간에 떠밀려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선택된 우연은 우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우연의 우연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깊고 먼 곳으로 세상을 향해 항해할 때 깨닫게 되는 진실이란 저자가 삶을 사는 방식과 대동소이하다. 어쩌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저마다 제 과거의 한 조각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의 재목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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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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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을 읽는 것'에 관한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은 이렇게 요약된다. 나는 이 한마디를 듣고자 긴 강을 건너왔다. 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런데 왜 책을 읽지 않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저자의 주장이 옳은 말이라 전제한다면, 우리에겐 혁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는 하되 제대로 읽지 않으면 혁명의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그래서 갈수록 "문학은 죽었다."와 같은 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이 걷고 있는 시간에 비추어 책을 '제대로' 읽는 행위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한 셈이다.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 / 비트켄슈타인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은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문학은 텍스트 이상의 것이다. 그가 위대한 문학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 일컫는 이는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등이다. 그들은 식자율이 열에 하나 겨우 표기를 인식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시대에도 문학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당시로선 읽힐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이들은 책을 덮고 하늘만 쳐다본다. 스스로 접어버린 혁명을 가능성을 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를테면 멸망의 판타지에 사로잡히는 이상한 행위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선동이 난무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이 두려운 것은 이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올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을 전후로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죽음은 언제나 미확정인 채로 끝이 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모리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죽을 줄을 모른다." 제아무리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도 그 결말을 직접 지켜볼 방도는 없다. 오랜 세월 예술이 그토록 죽음을 무수히 모사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에 안도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신에 의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188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담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간했다. 그러나 이내 출판사의 버림을 받았고 자비로 찍은 40부 가운데 겨우 7부만 지인들에게 보내졌다. 그래서 니체가 패배했는가? 그럴 리 없다. 그 책이 지금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은 혁명이다. 독서를 그저 고상한 취미쯤으로 여기거나 영화를 단지 단순한 오락거리로 취급하는 이들은 딱하다. 그러한 세태에 젖어 벌거벗은 문학을 하는 이들은 더 가련하다. 오해가 없기를. 쉽게 읽히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가볍게 읽히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다. 이 책은 툭하면 문학이 죽었다는 얘기로 시작해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이들에게 문학이 배태하고 있는 혁명의 씨앗을 새삼 일깨운다.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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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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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은 침착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지만 적어도 마음으로 그리하여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조차 쉽게 그리하여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감정에 호소하거나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리어 그리하여도 무방하다고 혹은 그리하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요모조모 객관적으로 논한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예컨대 미국 사회에서 회사의 피보험 이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된 이후로 이른바 '청소부 보험(janitors insurance)' 또는 '죽은 소작농 보험(dead peasants insurance)'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대상자 본인의 허락도 없이 직원 명의로 납부된 보험금이 곧 회사의 재정 확보 수단이 되고 있는 이상한 현실을 언급한 대목을 보라. 그것은 누가 봐도 삶과 죽음의 윤리에 맞닿아 있는 관계로 다른 문제와는 달리 그 권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비교적 커서 얼마든지 일반적인 도덕 개념으로 다룰 수 있을 텐데, 그는 섣불리 그렇게 하지 않으며 끝까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말기 환급이나 사망 채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신이 굳게 믿고 있는 것도 일단 아닌 척하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장 경제를 맹신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다수가 옳다고 간주하는 도덕적 가치를 바탕으로 돈을 쓰는 데 제아무리 신중하다고 해도 초지일관 논리적이긴 힘들다. 이는 저자 자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묻는다. 이것을 돈으로 사는 행위가 나쁜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책을 이루는 내용과 형식이 조응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은 돈으로 재화를 사거나 팔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가치를 결정해본 사람이라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소소한 물음들로 가득하다. 물론 그 배경은 대개 미국 사회다. 그러한 물음이 유의미한 담론을 끌어내는 지점은 역시나 정의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이 책을 해설하고 있는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학장 김선욱의 말을 빌리는 것이 좋겠다. 알다시피 정의란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좋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샌델은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을 중시한다. 옳음의 이념을 완성하려면 좋음의 관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좋음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한다거나 혁명적으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갈수록 시장 논리는 닥치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한다. 좋음 이전의 옳음이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이 점차 시장 규범에 잠식되고 있다. 좋은 것을 좋게 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비시장 규범을 마구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혀 돈으로 거래하지 않았던 대상들이 하나둘 시장의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제시된 목록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없어진 세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사랑도 우정도 다 돈으로 살 판이다. 그것이 역효과를 내고 있는 사례가 나오건 말건 시장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은 돈을 상상하는 법.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그것이 도덕과 정의의 관점에서 옳지 못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사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러 관점을 상세히 열거하여 직접 판단해볼 것을 권한다. 그 과정에서 좋음보다는 옳음을 중시하는 특수한 예가 주는 충격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스위스 핵폐기물 처리장에 관련된 일화가 그러하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백 번 떠드는 것보다 그게 훨씬 효과가 있다. 나는 옳음과 좋음을 모두 만족하는 경제적 활동도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구체적인 사례에서 엿보았다. 그 일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저자의 의견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스위스가 방사능 핵폐기물을 저장할 장소를 정하는 일로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다가 한때 볼펜쉬센이라는 작은 산악 마을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일부 경제학자들이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의견을 조사한 결과 과반수인 51퍼센트가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여기에 매년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추가하자 엉뚱하게도 지지율이 25퍼센트로 떨어졌다고 한다. 보상금 인상 제안도 효과가 없었다. 평균 월수입을 훌쩍 넘는 보상금을 약속해도 주민들의 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지역사회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보상금을 제안할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 유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 무엇일까?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재정적 인센티브가 오히려 시민의 의무의식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적으로 이익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받고서 시민의 문제를 의회가 오로지 금전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라면 얼씨구나 했을 텐데, 스위스 시민들은 공공선에 헌신하는 태도가 남다르다.) 그들은 보상을 하려거든 현금이 아니라 공공재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방, 공원, 도로 등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이 지역 사회를 위해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 일종의 공공정신을 국가가 참다운 방식으로 존중하길 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얘기다. 거듭 말하지만, 이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가치를 판단하는 인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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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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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시가 난해하다고 말한다. 얼핏 이해할 수 없는 낱말들이 나열된 것을 보고 추상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시가 난해한 것은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는데도 아무런 의미를 끄집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이 너무도 구체적이라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고서 슬픈 감정을 유리창에 빗댔다고 하자. 그때 그 감정을 드러내는 유리창은 우리 주변에 널린 사물일지언정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시인에게 유리창은 유리창이 아니다. 이는 누구나 유리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이 꼭 유리창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자식을 잃고 유리창을 떠올리는 행위는 일반적이라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때 유리창은 특수한 개체가 아니며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쩌면 그럴수록, 우리가 유리창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섣불리 단정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너와 나는 그렇게 다르다. 시의 가치는 그 다름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시를 추상적이라 여기고 그것을 이유로 자신이 시인이기를 마다하는 자세는 결코 옳지 않다.

 

그렇다면 시의 구체는 시의 핵심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단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시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정돈하는 '특수성 < 일반성'의 회로를 벗어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단독성 = 보편성'의 회로를 회복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좋은 시가 의지의 문제라고 할 때, 구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보다 시를 쓰는 태도와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시()가 곧 시작(詩作)인 것이다. 그로부터 저자는 언어의 숙명과 시인의 소명을 논한다. 고로 시를 사랑하는 철학자 강신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단연 김수영이다. 그가 좋은 시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김수영의 정신을 강조한 데서 익히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아예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시작보다 시를, 그러니까 과정보다 결과를 보고 시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따른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내면서. 그런 까닭에 그가 다소 거친 어조로 김춘수보다 김수영이 위대하다고 말할 때 눈살을 찌푸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해하지는 말지어다. 김수영의 시가 김춘수의 시보다 월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관한 것임을 이 책의 부제가 일찍이 밝히고 있다. 저자는 김수영이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기실 인문학 정신은 시가 아니라 시작에 가깝. 그러므로 저자의 목표를 감안할 때, 그런 비교는 제법 타당하다. 더군다나 이 책은 시평이 아니다. 시를 사랑하는 한 철학자의 순수한 고백이다.

 

저자가 이렇게 시인 김수영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유가 까?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설명되어 있는 셈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사람들이 갈수록 시를 읽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이는 제2의 김수영이 등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알다시피 오늘날 시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마다 신춘문예를 통해서 시인은 계속 탄생하고 있고, 달마다 따끈따끈시집이 서점에 새롭게 진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는 널리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점점 시()에서 시작(詩作)을 떠올리지 못한다. 시는 그저 시를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여긴다. 이를테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표현에 감탄하면서도 소설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달리 시를 읽고 시를 쓸 생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은가. 시는 단순한 낱말 놀이가 아니거늘 울림이 없는 겉멋에만 현혹되거나 울림을 내면화하지 못하는 꼴이다. 사람들이 시가 담고 있는 것을 자기 삶의 놀이터로 끌어들이지 못하는데, 시는 그런 현실에 아랑곳없이 홀로 비약을 꿈꾼다. 서정주처럼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하거나 이상처럼 형식적인 실험을 선보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김수영은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를 인문학의 자긍심으로 추앙하는 저자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시의 가치를 일깨우는 일이 될 것이.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김수영은 1921년에 태어난 '김수영'인 동시에 시를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김수영'을 가리킨다.

 

 

 


 

 

 

이 책에 언급되는 시들 가운데 두 편의 시에서 나는 특히 김수영의 얼굴을 보았다.

아래의 시를 되뇌면서, 우리 모두 제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자.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 되자. 눈밭에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거미(1954)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서시(1957) - 김수영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 왔다

나는 정지의 미(美)에 너무나 등한(等閑)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 온 일

정리(整理)는

전란(戰亂)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 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敎訓)은 명령(命令)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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