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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 Dooman Riv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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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만강 어귀에 사는 창호라는 아이가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주인공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야기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의 죽음은 지속적으로 암시되고 있지만, 그 선택과 판단이 뒤늦게 그것도 별안간 이루어지는 터라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의미가 영화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 수긍된다고 하더라도 인물의 세계에서 충분히 납득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순교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 따져 묻는 어느 평자의 사려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들은 대체로 창호의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것을 어떤 확신의 단계 앞에 오는 머뭇거림이라 한다면, 그 머뭇거림은 분명 윤리의 문제에서 시작된다. 나의 윤리와 영화의 윤리가 버성길 때 우리는 잠시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그래서 창호의 죽음에 대한 윤리적인 확신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누구라도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판단의 시간을 거닐던 나는 인물의 자취를 되밟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행할 수 있나. 창호는 죽음을 택했다. 죽음이 불가피한 것은 모든 예술이 품고 있는 저 질문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창호의 죽음은 갈데없는 선택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콧방귀를 뀔 수도 있다. 강 건너편에 살고 있는 친구 하나 잃은 아이의 상심이라기엔 언뜻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창호의 충동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른들은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있어도 결코 쓰다듬을 수는 없다. 모든 개별자의 내면에 목숨의 욕망을 앞지르는 죽음의 충동이 꿈틀거린다지만 그것을 억압하는 현실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오로지 창호뿐이다. 요컨대, 충동이 수렴되는 구심점에 창호가 서 있다. 두만강의 슬픈 운명에 내몰린 사람들 ─ 원치 않는 임신으로 실의에 빠진 누나 순희, 돈을 벌러 한국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창호의 엄마, 두만강을 다시 건너는 게 한평생 소원이라는 마을 할머니, 위험을 감수하고 탈북자들을 돕다가 결국 쇠고랑을 차는 동네 아저씨, 내일이 없는 듯 술만 퍼마시는 이웃 어른들 등의 고통이 그의 어깨를 조용히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창호의 몰락은 슬프다. 투신의 행위가 슬픈 것이 아니라 투신의 결단이 슬프다. 창호는 지붕의 벼랑으로 한 치의 주저 없이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면서 얼어붙은 눈동자들이 기어이 아찔한 하향 곡선을 그리게 만든다. 적어도 그 적막의 찰나에는 창호의 몰락에 대한 어떤 맹문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영화가 사건의 심리적인 동기만 심어 놓은 것도 그 기묘한 감정이 어떤 설득을 이룰 것이라 믿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시하는 그 모든 행위로부터 영화적인 기운이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 속에서 그 기운은 마침내 평소에 말을 하지 못했던 순희가 창호의 이름을 힘껏 외치는 것으로 발산된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놓인 듯한 순희가 마지막에 내지르는 그 억색한 고함은 창호(아이)의 윤리가 영화(어른)의 윤리로 스며드는 모종의 신호일지 모른다. 이는 윤리가 발생하는 순간의 어떤 증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거울이되 현실 자체를 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현실과의 긴장을 담고 있다.

 

몰락의 마지막 얼굴은 순희의 그림이 할머니의 소원에 포개어지는 것으로 종적을 감춘다. 우리는 영화가 문을 닫기 직전에 다리를 건너는 할머니를 보면서도 상상적 공간으로 이끈 창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란 하늘을 담은 강물에 파란 잠바를 입은 창호가 들이젖는다. 아마 봄이 오면 유빙처럼 그의 영혼도 어디론가 떠내려가겠지. 그렇다면 장률 감독은 그 땅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어떤 경계에 선 인물을 줄기차게 응시했던 그가 자신의 고향을 이야기하는 것은 짐작하건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물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도 어쩐지 신중하다. 그러나 두만강의 미래를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결국 그 땅에 살고 있는 창호의 현재를 다르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불가능성 앞에 있는 가능성을 염원하고 가능성 뒤에 있는 불가능성을 체감하는 창호의 혼란스러운 세계에 드리운 몰락에 취해 얼마간 나는 헤어나지 못했다. 아무려나 두만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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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Unbow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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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상식도 논리도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 홀로 맞서는 한 남자가 갖은 고난과 역경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비춘다. 그게 우리현실적인 이해 범주 안에서 설득력을 잃지 않는 것은 그의 직업(적 세계관)과 관련이 깊다. (실화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터라 캐릭터의 개성에 특별히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것도 아닐진대) 주인공이 수학 교수라는 사실은 그 유난스러운 언행을 이해하는 데 자못 중요하다. 평생 원리와 원칙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수학 교수로서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뒤틀린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각고한 의지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보통의 영웅적 인물보다 현실적인 데가 있다. 이는 부당한 일들에 짓밟히다 급기야 석궁을 들고 판사의 집으로 찾아간 주인공의 은밀한 범죄 행각에 대한 근원적 이해를 영화가 짧은 플래시백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김 교수분노가 누적된 바 없는데도 다수의 관객은 그간의 억울한 사정을 받아들이고 약자라 판단되는 그의 편에서 사태의 진정을 살피게 된다. 그만큼 실존 인물의 특질과 환경이 내뿜는 에너지 자체가 강렬하다.

 

안성기가 연기해서 더 단단해진 주인공의 내적 기운은 피고인이 변호사보다 날카로운 입심을 자랑하는 것 외에 별달리 쾌감을 자아낼 만한 요소가 없는 이야기 속에서 빛이 난다. 수학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수능 문제의 오류를 눈감을 수 없었던 의기가 사회적인 법칙에 위배되는 재판 과정의 허위를 감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거듭나는 것을 보라. 영화는 'P→Q(P이면 Q이다)'라는 기본적 명제가 성립하려면 저 화살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영화 속에서 화살의 존재가 재판의 경로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김 교수의 말처럼, 법(P)은 아름답다. 그런데 화살(→)이 부러졌다. 그럴지니 결과(Q)가 공명정대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그 부러진 화살의 실체는 김 교수의 범행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감독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분노의 발화점으로 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비슷한 소재를 다루면서 공분을 겨냥했던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화살은 그 촉이 다소 뭉툭하다고 할 수 있지만, 외려 그것이 암흑의 실체를 향해 더 꼿꼿하게 날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누구나 '부러진 화살'에 대해 나름대로 사고의 날개를 펼칠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프닝 장면으로부터 그 의미를 논하고 싶다. 수능 문제의 오류를 지적하는 김 교수의 설명을 흘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수학적 증명에 관한 내용이 고스란히 주인공의 인생 철학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명백백한 사실이 하나둘 고개를 드는 것과는 관계없이 애초의 뜻대로 판정을 내리고 마는 법원을 카메라가 얼마간 비출 때의 허탈감이, 두 방향벡터가 수직으로 만나기 때문에 절대로 평행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가 분필을 탁 내려놓는 순간의 정적과 기기묘묘하게 맞물린다. 왜냐하면 자신의 뜻에 확고부동한 주인공과 법원의 서로 다른 집념이 특정한 방향성을 거스르지 않는 벡터의 성향과 닮았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조언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원리와 원칙을 내세우는 데 여념 없는 주인공과 재판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말의 행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엄벌하려는 사법부가 그렇게 수직으로 엇갈린다. 내용이 옳든 옳지 않든 자신의 논리를 굽힐 줄 모르는 인간의 화살은 부러지기 쉽지만, 주인공의 결기로 짐작하건대 그 의지는 두 세계가 평행을 이룰 때까지 부서지지 않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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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코와 리타 - Chico & R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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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어느 멋진 밤 하바나의 한 클럽에서는 '베사메 무쵸'가 흐르고 있었다. 그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치코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리타가 서로 눈빛을 나눈 것은 4, 50년대 쿠바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성행했던 것과 맞물려 그야말로 운명적이었다. 그 노래의 열정적인 가삿말처럼 치코와 리타는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지만 이내 안타까운 이별을 맞이한다. 리타가 가수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네온사인이 넘실대는 뉴욕에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조금씩 멀어진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때로 휘청거린다. 밀려오는 파도보다 밀려나가는 파도가 더 세듯, 만남의 시간은 짧고 헤어짐의 시간은 길다. 그걸 알면서도 세월이 지나면 부질없게 느낄 것이 뻔한 이별의 얄팍한 기운에 우리가 그토록 자주 속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건 젊음의 시기적 증거이자 예술의 시간적 토대다.

 

예술은 주체가 성취한 감각을 미래의 청자에게 전하기 마련이다. 특히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본래의 감각이 지닌 울림을 이탈하지 않는다. 오선지는 유한하지만 오선지에 올라탄 음표는 영원한 법이다. 치코와 리타는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을 스스로 위무할 수 있는 자신만의 마취체피아노와 목소리 덕분에 생의 고독을 꿋꿋이 밀어냈다. 긴 세월 각자 외로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재회의 순간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응당 음악의 힘일 것이다. 이별과 작별을 일삼는 사내의 성정은 매혹적인 선율을 빚었고, 그 선율이 실어나르는 사랑의 감각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라디오를 타고 흐른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여러 번 쓰이는 '릴리'라는 곡은 그 선율의 아름다움을 떠나 전형적인 이야기가 갖는 지루함을 면하는 데 귀중하다.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던 그들의 사랑을 종국에 다시 잇는 것도 바로 그 음악이 아닌가.

 

 

영화는 다채로운 삽화와 훌륭한 음악의 조화를 통해 이야기의 통속성을 누른다. 다른 건 몰라도, 쿠바 출신의 전설적인 라틴 재즈 피아니스트인 베보 발데스의 음악이 귀에 착착 감긴다. 일흔이 넘어서도 새 앨범을 발표하고 그래미상까지 거머쥔 그는 치코의 모델일 뿐더러 영화 음악을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언급 없이 이 영화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그에게 바친다는 친절한 문구가 없었더라면 게으른 내가 그것을 자세히 살펴봤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야기의 속도와 감정의 분위기를 이끄는 감미로운 곡들은 영화를 보면서 음악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내게도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지금 영화 속 그 사내가 만든 멋진 음악을 떠올리고 있다. 그 음악의 울림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한 목숨이 소요했던 시간의 풍경을 체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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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소년 - The Kid with A B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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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소년은 자전거를 탄다. 그는 아버지가 사준 자전거를 목숨처럼 아낀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가 자전거를 되팔았는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속으로 그 누구의 말도 믿지 않을 만큼 아버지를 향한 소년의 충성과 사랑이 극진하다. 그래서 보호시설에 맡겨진 시릴은 자전거를 타는 일 외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데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는다. 자신을 만나는 것조차 완강히 거부하는 아버지의 그 야멸찬 행동을 성숙한 태도로 받아들이기에 그는 아직 너무나 나약하다. 시릴은 애인보다 자신을 더 위하고 있는 고마운 주말 위탁모 사만다의 손을 쉬이 잡지 않는다. 소년의 마음은 마치 길가에 마구 나뒹구는 모난 돌멩이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쪼개져 좀처럼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소년이 벌이는 일련의 행동을 보면서 아마 뜨악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를 보살피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사만다에게조차 몹쓸 짓을 한다는 데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소년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불가항력적인 현실이 아니다. 일상화된 불행에 올곧은 방식으로 대응하고 생의 조건을 주어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부모의 정을 갈구하는 마음에 한없이 무력한 개인이 혈연의식을 벗어나 새로운 연대를 형성하는 과정은 그렇게 순탄치 않다. 우연히 만난 불량한 친구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면서도 기어이 아버지의 세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릴의 끔찍한 행동은 가족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소년의 자기 파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릴이 올라탄 자전거가 나쁜 길로 접어들 때 무심한 아버지는 끝내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다.

 

시릴은 결국 사만다의 품에 안긴다. 그 따뜻한 품에는 긍정의 철학과 공감의 윤리가 있다. 시릴에게 존재의 비정상성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어머니의 세계가 그나마 존재한다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영화는 아버지의 부재에 고통을 겪는 소년을 관찰하다가 마침내 그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다. 제아무리 인물에 철저하게 일정한 거리를 두는 다르덴 형제라 한들 소년의 소리 없는 절규를 끝내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릴은 철없는 행동이 만든 묵직한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어 낸다. 결국 자전거가 지나가면서 남기는 구불구불한 자취는 시릴이 걷고 있는 인생의 행로와 다르지 않다. 그가 자전거를 타다가 엎어지고 고꾸라진다 해도 이제 마음이 한결 놓인다. 시릴의 옆에서 늘 함께 자전거를 탈 사만다가 있지 않은가. 영화를 보면서 하염없이 흘러내린 내 눈물이 부디 아깝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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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6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트리플 2016-01-06 17:50   좋아요 0 | URL
어느덧 4년 전 일이네요.
그때는 알라딘에서 영화도 다뤘죠.
반갑습니다 :)
 
내가 사는 피부 - The skin I live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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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보통의 인식으로부터 파생되는 미추()를 복수의 형식으로 해체하여 기어이 이상한 세계에 가닿으려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 그 시도는 피부라는 외피 한 꺼풀 벗겨내면 훤히 보일 거라 생각했으나 너무 복잡해서 끝내 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내면과 관련이 깊다. 이는 막장드라마 뺨치는 내용에서도 익히 짐작하다시피 성의 속성을 보려는 은밀한 욕구와도 연결된다. 영화 속에서 남성들 대개 여성들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로 등장며, 자연스레 복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복수의 주체인 주인공 로버트 역시 남성이라는 게 이색적이지만 세 명의 여자를 보호하는 피부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 인물이 의학적인 호기심이 넘치는 남성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속박된 몸의 감옥에서 탈출할 요량으로 로버트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주조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따라서 복수를 빌미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인물의 내평을 보면서 그와 닮은 감독의 의중을 떠올리는 건 나처럼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낯선 이들에게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영화가 문을 닫을 때 마지막 프레임에 걸린 세 여자는 로버트의 세 여자(엄마-아내-딸)와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대비된다. 그래서 각각의 여자들을 엮고 있는 로버트와 비센테가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러나 피부라는 소재를 이용한 이 실험이 성공적이었다고 하기엔 그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지나치게 생략된 아쉬움이 있다. 충격적인 진실이 폭로되는 사이사이에 널린 갖은 기호와 상징의 짜임새가 그리 견고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를테면 하녀로 등장하는 엄마의 존재가 아내와 딸의 그것에 비해 아들의 복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다소 불명확한 느낌으로 남는데, 다수의 인물이 이야기를 펼치느라 적잖이 축소된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베라의 가면을 쓰고 있는 비센테(혹은 로버트)가 마릴리아를 향해 총을 겨누는 장면이 영화의 핵심적 주제를 꿰지 못하고 살짝 겉도는 것처럼 보인다.

 

 

피부가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건, 그게 한 생이 함유하고 있는 인간의 개성을 전면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성의 외피를 여성의 그것으로 바꾼다 한들 그 내면은 쉬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여성적인 존재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상을 당한 로버트의 아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 것처럼 인간에게 외양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불을 끈 이 영화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베라는 과연 남은 인생을 태초의 개성대로 영위할 수 있을까? 옷으로도 어쩌지 못하새로운 겉모습이 인생의 행로를 바꾸지 않는다고 확신하긴 어렵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베라의 새 삶이 본성(姓)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거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가 흠모했던 여자와의 새로운 가능성에 한 발짝 더 다가선 상태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감독은 어지러운 실험 끝에 여성의 세계에서 어떤 답을 구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어느 평자의 표현대로 어쩌면 그것은 신(新)여성공동체다.

 

영화는 피부를 볼 것이 아니라 피부가 덮고 있는 밑바탕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남성의 외피를 입고 있다고 해서 남성적 성질에 부합한다 여기는 미추에 대한 어떤 기준을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실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러한 내용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고 충분히 익숙한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복수의 가치를 떠나서 로버트에게 본받을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남성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그만의 사고와 행동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로버트는 남성의 껍질로 살아가면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게 곧 복수의 원류가 아니던가. 고로, 내가 사는 피부는 탄생의 흔적이나 개성의 기틀이 아니라 감각의 근원이자 사유의 기반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가치를 발휘하며 진정 사는(live)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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