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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7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경제의 역사를 부채의 관점에서 힘차게 써나간다. 딱 중간 지점에서 책을 반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것을 전반부(1장-6장)와 후반부(7장-11장)로 분리한다고 해도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마침 그 지점에서 전반부를 정리하고 후반부를 소개하는 대목(1)이 등장한다. 전반부에서는 부채를 관점으로 역사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우선 그 의식의 전환을 집요하게 유도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의 경제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 분석하고 있다. 비교적 긴 전반부가 후반부에 대한 설득력을 좌우하는데, 저자는 역사를 증언하듯 구체적인 자료와 진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경제의 역사를 다소 벗어날 때가 있다. 부채의 관점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데로 빠지는 것이 다소 거슬린다(물론 그것은 저자의 연구가 얼마나 깊고 넓었는지 짐작케 한다). 하나같이 흥미로운 이야기라 읽는 데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논지의 중심으로 다시 돌어오기 위해서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인상을 풍겼다. 새로운 관점을 피력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는 것처럼 핵심적인 내용은 딱딱 짚고 넘어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중에서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물건의 교환'에 따른 인간의 감정(2)과 '딸들의 시장'이라 요약할 수 있는 여성 상품화의 기원(3)이다. 부채의 약속은 타락한 약속이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을 그 물물교환의 에피소드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교환의 대상이 물건에서 여성과 노예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게 기술한 부분은 여성의 역사와 맞물려 인상적이었다.
(1) P.371
우리는 부채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는 애덤 스미스가 그린 상상 속의 사회와 부채가 아주 중요한 어떤 비전 사이에 갇힌 것 같다. 애던 스미스가 그린 사회를 보자, 그 사회에 사는 개인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관계는 소유물과의 관계이다. 개인들은 상호 편의를 위해 서로 물건을 교환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 그림엔 거의 언제나 부채는 배제된다. 그런 개인들의 집합체가 애던 스미스의 사회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채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이 부채로 집약되고 있다. (중략) 나는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런 방식을 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인간경제라는 개념을 떠올렸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경제에서는 인간 존재와 관련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경제에서는 그 어던 존재로 다른 어떠한 물건이나 사람과의 등가일 수 없다. 거기서는 돈이 인간 존재를 사거나 거래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오직 돈은 상환 불가능한 빚을 졌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2) P.189
선물교환의 변형은 무수히 많다. 가장 낯익은 것이 맞교환 형식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맥주 한을 사준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사람이 나에게 맥주를 사준다. 완벽한 등가는 평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복잡한 예를 보자. 내가 친구에게 멋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준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그 친구도 똑같이 나를 대접한다. 인류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관습의 존재는, 특히 그 호의를 진정으로 갚아야 한다는 감정은 표준적인 경제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경제이론에서는 모든 인간의 상호작용은 종국적으로 비즈니스 거래이며, 또 우리 모두는 최소의 노력이나 비용으로 가장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로 보지 않는가. 그러나 이 감정은 꽤 현실적이며,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면서도 체면을 차리려는 사람들에겐 상당한 긴장을 초래할 수 있다. (중략) 호의를 베푼 사람이 지위나 품위 면에서 자신과 대충 비슷한 사람, 예를 들어 동료였다면 그 교수가 작아지는 느낌을 받을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만일 빌 게이츠나 조지 소르스가 만찬에 초대했다면, 그는 자신이 정말로 공짜로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결론을 내리며 그 선에서 만족할 것이다. 만일 알랑거리는 부하 교수들이나 야심 넘치는 대학원생이 그와 똑같은 초대를 했다면, 그 교수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호의를 베풀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3) P.333
나는 모든 위대한 도시 문명에서 여성들의 자유가 갈수록 축소된 현상에 대한 설명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도시 문명들 안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략) 가난한 채무자들의 딸들이 매음굴이나 부자들의 부엌으로 보내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어떠한 경우든 딸들에게 더 무겁게 떨어지는 '상품화'의 압박과 여자들이 '상품화'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 보호할 아버지의 권리를 재확인하려는 노력 사이에서, 여자들의 형식적 및 실질적 자유는 점진적으로 제한되고 줄어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