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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무언가를 속속들이 살펴보려면 그것으로부터 한발 떨어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란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새롭게 만나는 일이다. 우리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면 유럽을 보는 것 못지않게 한국을 보게 된다. 무엇이 같은지 무엇이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일은 여행이 삶에 보탬이 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락과 휴식을 목적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고 할지라도 낯선 공기가 몸 안으로 스미기 시작하면 여행의 참다운 발견은 절로 눈을 뜬다. 그런데 그 풍경들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답을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먹고 마시는 일처럼 그때그때 이색적인 정보를 머릿속에 꾹꾹 눌러담기도 어렵고 특정 문화와 연결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저자처럼 특파원으로서 다른 나라에 머물며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그 나라의 문화를 꼼꼼이 살필 수 있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관계가 깊다. 정보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든 주관과 감상을 중심으로 하든 기행문은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문 서적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스위스 기행문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스위스에서 '따뜻한 경쟁'을 보고 들었다.
작년에 나도 스위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내 짧은 여행을 저자의 경험에 비하랴만 스위스가 다른 유럽 국가와 견주었을 때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구태여 땅의 경계를 인식하지 않았더라면 특별히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곳들과는 사뭇 다른 그 나라만의 독특한 풍경이 있었다. 아주 사사로운 것들조차 내 눈에 신기하게 비치는 것이 많았지만, 긴 여행길에서 귀한 정보를 살뜰히 읽거나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게으른 여행자가 으레 그렇듯 내일의 여정을 위한 휴식을 핑계로 미루거나 무시하기 일쑤여서 지금은 결국 어렴풋한 기억과 몇 장의 사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행하는 곳에 대한 공부가 꼭 출발하기 전에만 의미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더러 있다. 책을 읽다가 그림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영화를 보다가 문득 그때 그 기억이 스르르 떠오르는 순간의 환희가 그 자명한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때다. 이 책은 내가 스위스에서 물음표를 그렸던 일들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그리하여 나로선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스위스 여행을 다녀와서도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궁금증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되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체와 어투가 예리한 지적과 확고한 주장까지도 편히 받아들이게끔 하는데,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여행기로 여겨도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내가 품고 있었던 궁금증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기차를 타고 도심을 이동하거나 그 유명한 융프라우를 오를 때 책에서나 봤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유독 개인 살림집에 있는 정원과 화단에도 다채로운 꽃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산을 알록달록하게 수놓고 있었다. 목가적 전원과 잘 어울리는 터라 처음에는 그저 그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에 한껏 취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하나같이 예쁘게 꾸며 놓았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데가 있었다. 다들 집을 참 잘 가꾸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은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도시를 아름답게 설계하고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시민을 활용한 셈이다. 정원을 매만지는 일이 곧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라면 그들은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정원을 가꾸겠는가. 스위스에서 농업정책을 도맡은 정부 담당자는 국토라는 큰 화폭에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넓은 공원에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는 정원사와 같다. 좋은 정책 하나가 사람들을 두루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저자는 책에서 스위스를 여행하다 보면 푸른 초원 위에 소와 말, 양과 같은 가축들이 햇빛을 받으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내 경험으로 봐도 그것은 참말이다. 스위스에는 자연 상태로 방목하면 보조금을 주는 법률이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축을 들판에 마구 풀어 놓은 데서도 스위스만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냥 노닥거리는 게 아니라 농가의 소득 증대를 위해 열심히 근무하는 것이다. 그 보조금 규모가 우리 돈으로 무려 가구당 연평균 5000~6000만 원 정도. 이곳과 그곳의 물가가 다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상당한 액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심지어 소를 방목하는 산비탈의 경사도에 따라 보조금이 차등 지급된단다. 그러잖아도 여행길에서 그것을 보고 산비탈에서의 방목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이 정도로 꼼꼼하게 지원할 줄이야. 관광산업과 농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영리한 정책이 돋보인다. 역시 스위스로군!
매년 5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는 한 달에 최소한 26일 이상, 해가 짧은 11월 1일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는 한 달에 13일 이상 초지에 방목하면 연간 마리당 180프랑(약 22만 원)을 준다. 암퇘지 두 마리를 매일 서너 시간씩 밖에 내놓고 키우면 1년에 360프랑(약 44만 원)을 주고, 닭 200마리가 낮 동안 자유롭게 닭장 안팎을 드나들며 모이를 주워 먹을 수 있게 하면 280프랑(약 34만 원)이 지급된다. 생태 친화적인 축사 시설을 갖춰도 돈을 준다. 가축이 2개 이상의 생활 공간을 오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고 최소한 15럭스 이상의 안정적인 자연광을 쬘 수 있도록 조명 설비를 갖추면 큰 소 한마리를 기준으로 연간 90프랑(약 11만 원)을 지급한다.
농업 활동이 이뤄지는 현장 자체를 관광 상품화한 사례도 있다. 책에서는 대표적인 행사로 매년 9월 마지막 주 토요일과 10월 첫째 주 토요일 아침에 커다란 워낭과 화사한 꽃으로 장식한 소들이 목동들과 함께 알프스와 주라 산맥에서 내려오는 하산 행렬을 제시했다. 고산지대 외에는 치즈를 생산할 수 없었던 기술적 한계가 스위스의 수직적 유목을 낳은 것이다. 작은 규모의 행사도 많아서 여름에도 볼 수 있다. 내가 여행한 시기가 7월이었는데 숙소에서 그런 행사가 있다고 귀띔해준 덕분에 산지로 올라가서 맑은 공기와 햇빛, 신선한 풀을 마음껏 즐긴 소들이 내려오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하산 행렬이라 놓치기 일쑤인데 운 좋게 숙소 바깥에 있을 때였다. 화려한 꽃무늬 전통 복장을 한 목동과 소녀의 행진이 마을의 고요를 깨는 워낭 소리와 맞물려 여름날의 활기를 느꼈다. 이런 행사 역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꼭두새벽부터 소 떼를 기다리는 관광객이 있을 정도라니 관광 차원에서도 좋고 농사꾼에게 혜택을 줄 수 있어 농업 보호 측면에서도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스위스에서 내가 정말 의아했던 것은 마트들이 문을 하나같이 늦게 열고 빨리 닫는 점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해가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가까운 상점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일찌감치 문을 닫는 터라 먹을거리를 미리 사놓지 않으면 야식 따위는 즐길 수 없다. 또한 여행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먼 곳으로 떠나고자 숙소를 나설 때가 많은데 간단한 요기라도 하려고 마트로 향하면 어김없이 문이 닫혀 있거나 영업을 준비하는 중이다. 작은 가게들은 크게 규정이 없지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형 마트와 중소형 편의점의 영업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서 개점과 폐점이 철저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편을 느끼지 않을 리 만무하다. 2010년 대형 마트의 영업시간을 한 시간 연장하는 발의안을 놓고 제네바 시민들이 주민 투표를 했는데, 반대표가 찬성표보다 훨씬 많았단다. 희한한 일이다. 분명 그들도 마트가 늦은 시각까지 문을 열면 좋을 텐데 왜 반대했을까? 이럴지니 여행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낱낱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2010년 11월 28일 제네바 시민은 대형 마트의 영업시간을 한 시간 연장하자는 발의안을 놓고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반대 56.2%, 찬성 43.8%로 부결. 우파 정당이 주도한 이 발의안은 미그로와 쿱 등 대형 마트의 평일 폐점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가량 늘리고 소비자 편의를 고려해 일요일에도 개점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한 시간 더 여유롭게 장을 볼 권리보다는 노동자가 현행대로 퇴근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세상에나! 그러한 내용을 담은 발의안은 자주 나왔지만 번번이 부결되었다고. 이것이 이른바 똘레랑스 문화이다. 그들은 생산과 소비는 일관된 경제순환 과정의 두 측면일 뿐 각기 독립되어 있는 행위가 아니며, 소비자와 노동자의 관계 또한 각각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수시로 변한다고 인식한다. 한마디로 반대표를 던진 행위는 소비자와 노동자의 연대인 것이다. 만약 마트 직원이 한 시간 더 일을 해야 한다면 내가 장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연장되는 것이므로 나 역시 회사에서 일을 한 시간 더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먼 미래까지 내다본다. 스위스의 대형 마트는 작은 동네 가게와 영업시간을 적절히 조율하기도 한단다. 우리로선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제네바 지역 대형 마트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오전 8시~오후 7시, 목요일과 금요일은 오전 8시~오후 7시30분, 토요일은 오전 8시~오후 6시까지 개점하고 일요일은 쉰다. 대형 마트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문을 열고 일요일에 쉬는 대신, 동네 가게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문을 열고 월요일에 쉰다. 같이 살자는 거다. 거기에 더해 토요일과 일요일엔 여기저지 마을 광장에서 우리나라의 5일장 같은 장마당이 펼쳐진다.
대형 마트 미그로와 쿱은 행정단위인 코뮌에 한 개씩 있는 게 일반적이며, 한국의 홈플러스나 이마트처럼 각종 편의 시설을 복합적으로 갖춘 매장은 도시 외곽에 있다. 그러니까 서울처럼 대형 할인점이 도심 곳곳을 차지하고서 소상인의 목줄을 누르는 일이 없다. 또한 우리의 편의점처럼 24시간 논스톱 운영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직원과 소비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지 않는다. 스위스에서는 장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회사원이 정시에 퇴근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전혀 우스갯소리는 아닌 셈이다. 스위스의 평화로운 공기는 그저 하늘이 내린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국가와 시민 모두 따뜻한 경쟁을 통해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는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